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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 나의 야고보 길 여행
하페 케르켈링 지음, 박민숙 옮김 / 은행나무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나와 만나는 길, 깨달음에 이르는 길
여행의 시작. 충실하게 너무나 맹목적으로 충실하게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때때로 일상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픈 충동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찾아온다. 힘들어서, 지쳐서, 아파서, 슬퍼서, 괴로워서, 외로워서, 무미건조해서, 무의미해서 등의 단어들을 줄줄이 매단채로 일상에서 잠시 물러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여행이 아닐까.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의 저자 하페 케르켈링은 잘나가는 방송인이라는 일상에서 벗어나 지칠대로 지친 육신과 정신을 치유하고, 몹시도 근본적이고 새삼스러운 질문의 답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신은 존재하는가? 삶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아니 그보다는 도대체 이 여행의 끝에는 무엇이 있기에 깔끔하게 재단되어 있는 일상을 뒤로하고 야고보 길-산티아고 길로 더 유명한-이라 불리는 600km의 멀고도 험난한 길을 걸어서 걸어서 순례해야 하는가에 관한 답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의심과 투정, 두려움으로 시작된 케르켈링의 여행은 그가 미처 짐작조차 하지 못한 소중한 만남과 깨달음 그리고 기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남. 딱히 마음에 맞는 동행자가 보이지 않거나 내 몸 하나 건사하기가 버거울 때 ‘혼자만의 시간’이라는 그럴싸한 타이틀을 걸어두고 고립된 채 여행을 할 때가 있다. 물론 이러한 고적의 시간을 통해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성찰의 시간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저자 역시 야고보 길에 들어섰을 때는 철저히 혼자였으며 외면하고 때론 모른 척 했던 자신의 어두운 내면과의 만남을 갖게 된다. 그러나 고립된 시간이 길어지면서 조금은 비뚤어진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고 ‘내가 왜 이 길에 들어섰는가’에 대한 회의와 의구심으로 가득차게 된다. 하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에비, 티나, 주둥이 아줌마, 라라, 앤, 쉴라와의 만남을 통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와 인연이 여행의 과정에서, 인간의 삶 가운데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이며 축복인지 깨달아 간다.
기적. 야고보 길을 순례하고 여행하던 순례자들에게는 때때로 기적이 일어난다. 인적도 없는 산속에서 다리가 부러졌을 때 느닷없이 나타난 간호사들-그것도 간호사 복장을 하고 있는-이 다리를 치료를 해주고, 야고보 길에서 벗어나면 안 보이던 나비가 야고보 길에만 들어서면 날아다니고, 말라버린 우물 앞에서 탈진해 있을 때 소방관들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순식간에 우물 뒤에 묻혀있던 수도관을 고쳐주는 이 기적들은 어쩌면 기적이 아니라 우연한 사건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진짜 기적은 황량하고 고독한 이 순례의 길을 걸어가면서 사람을 만나고, 인연의 실타래가 이어지고, 쉴 자리를 만나고, 깨달음을 만나고, 신을 만나고 그리고 '나를 만나게 된 것'이 궁극적인 기적의 체험이 아니었을까.
여행의 끝. 이 순례의 끝자락에서 저자는 본연의 ‘나’와 대면하게 된다. 걱정과 근심, 사념들을 떨쳐내고 오직 자신의 내뱉는 호흡만을 느끼며 한발 한발 내딛는 발걸음에만 집중하게 되었을 때, 끈임 없이 스스로를 고무시키고 달래고 이끌고 고정되어 있던 한계를 뛰어넘어 종국에는 내가 비워졌을 때, 내가 자유로워졌을 때 비로소 '나'는 나와 만나준다. 하페 케르켈링이 이 길에서 만난 것은 나 곧 케르켈링 자신이었으며, 만남이 요원했던 신과의 대면이었다. 이 책은 나에게 기적처럼 다가온다. 왜냐하면 이제 한 번쯤 온전히 내 자신과 만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그의 글을 통해서 내가 나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야겠다는 진지한 결심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혹시 이건 나에게 일어난 기적의 시작이 아닐까. 나를 만나게 되는 그 기적의 시작 말이다.
신은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끝없이 열어놓은 ‘하나의 개체’이다. 신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이 문장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하나의 개체’를 억압하는,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모든 것’. 창조자는 우리를 공중에 던진다. 그리고 결국에는 놀랍게도 우리를 다시 붙잡는다.(...) ‘너를 던지는 사람을 믿어라. 그는 너를 사랑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너를 다시 붙잡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차례차례 돌이켜보면 길 위에서 신은 나를 끊임없이 공중에 다 던졌다가 다시 붙잡아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날마다 마주쳤다. (362-3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