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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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보통의 통곡은 소리 내어 울면서 온 몸을 부들부들 떨다 못해 쓰러져서 온 몸으로 울어내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습일 것이다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흔히 생각하는 행동 태양을 떠올리고 있었다하지만 작가의 첫 소설이라는 이 책은 그런 통곡만이 통곡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리어 온다.
 

1991어느 날 여아 유괴 사건이 발생하고 수사과에는 비상이 걸린다보통 유괴 사건은 대상이 실종 된 후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승부를 봐야 하는 것이 보통인데시간이 갈수록 사건이 극명해지기는커녕 실종되었던 여자아이는 시체로 발견되고만다. 범인의 흔적을 발견할 길 없이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지는데 설상가상으로 다른 유괴 사건이 뒤이어 발생한다사건들의 공통점은 4-5세의 여자 아이그리고 사건은 모두 월요일에 벌어졌다는 것그것만 가지고 과연 동일인의 짓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 것인가. 유괴범은 뻔뻔하게 경찰을 조롱하듯 편지를 보내오고 사건은 유괴범과 경찰의 정면승부로 흘러간다. 
 

우리나라에서 경찰대학교를 나와 무난히 승진가두를 달리고 있는 듯한 수사1과장인 세이지는 전 법무대신 아버지와현 경찰청 과장 의 사위라는 든든한 빽을 두고 있어 여러 가지 소문과 함께 비난의 눈총을 받고 있다경찰들 사이에서는 세이지같은 앨리트들을 캐리어라 칭하고 순경부터 시작한 사람들을 논캐리어라 칭하며 그사이를 융화시킬 수 없는 벽이라도 존재하는 양 서로를 구분 짓고 있다그렇기에 더욱이 부하들은 세이지에 대한 반발심이 큰 모양이지만 실은 세이지는 순전히 자신의 우수한 직관력과 실력으로 출세한 타입이다하지만 냉정하고 차분하며 모든 사물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는 세이지는 자신에 대한 어떤 비난에도 흔들림 없는 견고한 자세를 취한다.

 

또 다른 화자인 마쓰모토는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는 사람이다이야기를 하는 내내 세상에 대한 불만과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부조리함에 대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어떤 것을 봐도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며 매우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딸을 잃어버린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로 그 어떤 걸 봐도 공허한 삶을 겨우 연명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기쁜 모습들에 비해 더 이상 자신은 그렇게 웃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에 빠져있다공원에 외로이 앉아 아이들이 노는 것을 하릴없이 지켜 보는 것으로 하루를 나곤 하던 그가 행복을 되찾게 되는 것은 우연한 일에서 비롯됐다여느 날과 다름 없이 길에서 멍하니 있는데 한 여대생이 다가와 당신의 행복을 빌 수 있게 해주세요.”라는 말을 했고, 이상하게도 그 순간 그녀에게서 모든 것을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그 이후로 그는 신흥종교에 빠지게 되고 스스로를 그리고 이미 죽은 딸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나간다.


이야기는 세이지의 관점과 마쓰모토의 관점이 교차되며 쓰여져 나간다꽤 두꺼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가독성이 매우 좋아 손에 잡은 지 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마지막 장을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더욱이 딸을 둔 아버지는 물론이고 누구나 읽어 나갈수록 자식을 가지고 있는 부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고통과 분노유괴범에 대한 적개심이 그대로 전해져와 흥분토록 만들었다수사가 진척되는 상황이나 목격자의 정보 없이는 유괴범에 대한 더 이상의 접근이 불가능한 점. 불가피한 매스미디어와의 공생관계신흥종교에 대한 상세한 정보 전달그리고 수사1과장이라는 위치에서의 한 사내의 고달픈 상념 등은 너무도 사실적이었기에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손으로 울어내는 한 남자의 통곡에 나도 어느새 어깨를 들썩이며 작은 통곡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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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코의 지름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3
나가시마 유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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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코의 지름길>은 묘한 소설입니다. 처음에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가 적혀 있는 탓에 별 내용이 없는 것만 같더니 마음을 열고 적힌 그대로를 받아들이자 곧 글이 이미지가 되어 색을 입고 입체화되어 등장하거든요. 그렇다고 마음을 열고 본 순간 이후로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소설이 살아 숨쉬는 것처럼 느껴지다니 참으로 신기하죠. <유코의 지름길>은 변두리 지역에 위치한 서양 골동품 전문점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을 담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나"는 끝까지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는 청년이에요. 손님에게도 웃는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아 얼굴이 어두운 청년이라는 평가까지 매겨져서는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그저 후라코코 안을 청소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적당히 물건에 설명을 덧붙히는 것으로 하루를 보냅니다. 그는 점장의 권유로 인해 후라코코 2층의 작은 방에서 살게 되는데 <유코의 지름길>은 결국 "내"가 후라코코에서 살게되는 반 년간,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 조금을 담게 됩니다.

 

참 이 소설은 평범하지만 따뜻하고 정겹습니다.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고 보채는 사람도 없고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는 이들은 다가오는 하루하루를 제각기 삶의 속도에 맞게 살아갑니다. 등장인물들의 소개를 해보자면 이젠 벌써 마흔이라며 새로운 도전에 두려워하는 35세 미즈에씨는 "나"에게 뭔가를 나눠주길 좋아하고, "내"가 후라코코에서 일하기 전부터 계속된 단골이에요. 하지만 점장이 곧잘 말하는 매상에는 도움이 안되는 구경만 하는 손님이죠. 후라코코 옆 공터에서 크고 작은 상자들을 만들어 내는 주인집 아저씨의 손녀 아사코씨와 그의 동생 유코. 유코는 어른들은 알지 못하는 온갖 지름길을 꿰고 있습니다. 코스프레 마니아이기도 한 유코는 그것을 비밀이라고 하지만 모두 다 알고 있으니 그야말로 공공연한 비밀이네요. 그리고 기계에 능통하고 여유있게 자기의 페이스를 잃지 않는 점장과 그의 친구면서 스모의 마니아인 프랑스여인 프랑수와즈.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지 않는다던가 욕조를 치우지 못한 것을 지적하면서 "이러면 곤란하지 않은가."하는 말로써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를 확립하는 듯한 주인 아저씨. 그리고 역시 끝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는 오토바이 숍 알바생까지.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가 확실히 존재하기에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더욱 마음에 들었던 것은 번역자 이기웅님의 번역 솜씨였습니다. 일본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작업이 그리 녹록치 않았을텐데도 불구하고 그 상황에 적절한 단어를 골라내는 솜씨가 정말 여간 아니더군요. 유코가 발견해 낸 지름길을 걷는데 달빛이 교교하게 나뭇가지 사이를 스며드는 광경이 보였다니. 얼마나 시적인 표현인지 감탄을 금할 수 없겠더라구요.

 

나가시마 유는 소설을 쓰는데 줄거리를 먼저 떠올리고 그에 맞춰 내용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나는 부분을 먼저 쓴 후에 각기 쓰여진 것들 간의 개연성을 떠올린다는 것은 제가 글을 쓸 때와 비슷하게 여겨져 반가웠어요. 그러나 억지로 만들어진 것 같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이 소설의 장점입니다. 책의 겉표지에 쓰여 있는 것처럼 지름길을 찾지 못하는 어른들을 위한 책이라는 말마따나 저는 <유코의 지름길>을 읽으면서 참 행복했답니다.  처음에는 대답조차 큰 소리로 하지 않을만큼 내성적이던 주인집 아저씨의 손녀 아사코씨의 당당한 목소리는 저에게도 작은 용기를 심어 주었고 변변히 하는 일도 없는 한심한 남자라고 생각했던 "내"가 점차 주변인들에게 마음의 위안이 되어주기도 하고 기댈 수 있는 벽이 되어주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가치 없는 존재는 없을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쩐지 읽고 있는 내내 신호등 불빛에 따라 방이 파랗게도, 붉게도 물드는 "나"의 공간에 비누곽을 하나 사들고 놀러가고 싶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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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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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통의 의뢰전화를 받고 말썽을 부리는 자가용 블루버드와 함께 고급스러운 저택을 찾은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탐정인 주인공의 이름은 사와자키고, <내가 죽인 소녀>는 사와자키 소설 시리즈의 두 번째권이라네요. 시리즈물의 특성상 첫번째 소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안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의 잔여물이 녹아 있는 소설입니다. 그래서 이어질 소설도, 전작인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게 만듭니다. 하라 료는 첫번째 소설로 그 가능성과 촘촘히 만든 이야기 구성에 극찬을 받은 작가이기에 더욱 기대됐어요. 다 읽고 난 후의 소감은 잠시 후에 말씀 드려야 겠네요.

 

우선 제목을 처음 읽고나서 든 생각은 제목이 참 노골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초를 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죽인 소녀라니. 거기다가 주인공은 사와자키고 결국 사와자키가 소녀를 죽였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나 소녀의 죽음을 제목에 떡하니 선포해 놓은데는 소녀의 죽음 그 이면의 것에 집중해 소설을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사와자키는 냉정하며 객관적이고 관찰력 있는 인물이에요. 꽤 대범하고 권투선수에게도 겁먹지 않고 한 방 먹일 정도로 말예요. 거기에 정의감과 진실을 파헤치는 눈까지 지니고 있으니, 그야말로 탐정이라는 직업에 아주 적합한 인물입니다. 그런 사와자키를 불러들인 고급주택의 주인은 다짜고짜 6천만엔이 든 가방을 내밀며 이제 내 딸을 무사히 돌려주길 바란다고 말을 합니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사와자키는 결국 6천만엔의 운반책으로 선택이 되는데, 그는 유괴범의 공동정범으로 의심되어 상황이 여의치 않게 돌아갑니다. 그 이유는 전작에서 나왔던 그의 파트너의 잘못에 있습니다. 파트너였던 "와타나베"씨가 1억엔을 강탈하고 잠적한 사건이 있었거든요. 사와자키라고 다를까 하는 생각에 형사들이 주시하고 있는 것이겠죠. 그렇게 형사에게, 또 유괴범에게 동시에 위협을 받으며 사와자키는 결국 단독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녀의 외삼촌에게 또 다른 의뢰를 받은 순간 이후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빠른 물살을 탄 것처럼 급진전됩니다. 까딱 정신을 놓으면 이야기의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고 다시 돌이켜 읽어야 하는 수가 생길지도 모르니 단단히 마음 먹고 읽어야 할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군데 군데 놓친 포인트를 짚어내기 위해 다시 한 번 읽으니 확실히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네요. "내가 죽인 소녀"는 다시 한 번 읽을 때에야 비로소 진면모를 드러내는 소설인 것 같습니다.

 

정말 세심하게 짠 구성이었지만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존재했습니다. 부인이 예전에 사귀었던 그야말로 스쳐지나가는 연인이었던 사람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무리수가 아니었나 싶네요. 그렇지만 그런 소소한 불만거리들을 잠식시킬만큼 이야기는 확실히 결정된 결말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고보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름대로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 같네요. 철저한 악이 없다는 점 또한 새롭습니다. 그나저나 니시고리 형사와는 어떤 악연으로 만나게 된 걸까요. 전작에 대한 호기심이 불쑥 고개를 쳐듭니다. 파트너였던 "와타나베"와의 끊기지 않은 인연도 어떤식으로 이어질지 후작에 대한 관심도 생기는군요. 사와자키가 탐정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잇는 이상 사건은 끊임없이 그의 수중 안에 있을 것이고 우리도 당분간 어렵지 않게 그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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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
마키메 마나부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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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 정말 귀엽고 재미있다. 겉표지부터 아기자기하게 귀엽다 싶더니만 속지 맨 앞 장부터 맨 뒷 장에 이르기까지 버릴 페이지가 한 장도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오는 생소한 지명들은 맨 앞 페이지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 어느 부분인지 알고 지나갔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캐릭터의 모습이 궁금할 때는 물론 상상보다 좋은 건 없지만 그래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질 때가 있잖은가. 그럴 때는 모든 캐릭터가 그려진 맨 뒷 페이지에서 확인을 하고 지나가느라 책을 모두 읽는 내내 페이지가 앞으로 넘어갔다가 뒤로 넘어가길 반복했다.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는 제목 그대로 사랑이 가득한 교토에서 벌어지는 호루모라는 경기를 통해 연결되는 각각의 에피소드가 유쾌한 소설이다. 

 일단 호루모라는 경기가 궁금할 것이다. 이름부터 생소한 호루모는 귀어를 사용하여 귀신을 부려 싸우는 경기다. 교토 한복판에서 대학교 동아리마다 천마리의 귀신을 데리고 나와 싸우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굉장히 피튀기는 싸움이 될 것 같지만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귀신의 생김새도 전혀 무섭지 않다. 20cm의 크기에 전체 4등신이며 얼굴 한가운데는 입이 오리 주둥이 마냥 툭 튀어 나왔고 의상으로는 넝마를 걸치고 있는데 넝마 밑에 무기를 감추고 있다. 타격을 입을 때마다 툭 튀어 나온 주둥이가 조금씩 들어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뭐 이런 동아리가 다 있나 싶지만  등장인물들이 호루모에 쏟고 있는 열정들은 나름 진지하다. 내재 된 스트레스를 호루모를 통해 건전하게 풀어 나가는 모습들이 한창 때나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에 풋풋하게 다가와 괜시리 뿌듯해진다. 이게 바로 청춘이지.
 
 제목에서 황당 무계한 느낌을 받는 바람에 호루모 경기 위주의 내용이 연이어 펼쳐지겠거니 생각했는데 경기보다는 성장하면서 받는 사랑의 아픔과 고뇌에 관한 내용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 되더라. 의아한 마음을 바탕에 깔고 책을 읽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호루모 경기 위주로 진행되는 스토리의 책이 또 있다고 한다. 내가 읽은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는 속편 격인 셈. 전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전작에 관한 호기심이 마구마구 생겨난다. 경기에 관한 내용을 살짝 맛보기만 봤는데도 손, 발이 오그라 드는 느낌인데 제대로 경기를 다룬 내용은 또 얼마나 우습고 재미있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을지 생각만해도 궁금한 마음이 불쑥 고개를 쳐든다. 경기에서 지면 큰 소리로 "호루모오오오오오오!!" 하고 외쳐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그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서 패배를 알리기 위해서라지만 그렇게 큰 소리로 절규해야 하다니.
 
 소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은 모짱이 등장하는 편이었다. 모짱은 겉모습은 두꺼비같이 생긴 남자지만 감수성이 풍부하고 시를 사랑하는 예술 감각이 탁월한 사람이다. 쉽게 찾을 수 없는 뒷골목을 찾아 다니는 뒷골목 마니아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발이 쉽게 닿지 않는 곳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이거 정말 멋지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겉모습이 반듯하게 생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랑을 쉽게 이루지 못한다. 모짱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장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적이 없었던가.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는 겉모습이라는 단편적인 정보가 그 사람 전체를 말해주는 양 치부해 버린 적은 없었는지. 책더미 위에 놓여진 레몬 하나도 그냥 보고 흘려버리지 않는 감수성을 지닌 남자, 모짱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 앞에 그가 있었더라면 반가운 말 한마디 쯤은 걸어줄 수 있을텐데.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을텐데. 에너지가 넘치는 남자 모짱은 아픔 마저도 예술로써 승화 시킨다. 역시 멋지다.
 
 나머지 이야기들도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등장해 극을 생동감 넘치게 이끌어 나간다. 읽은 후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독서가 있는가 하면 너무 많은 것이 남아 있어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를 독서가 있다.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는 단연 후자 쪽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사이에 둔 여자들의 우정이라든지 대학생들의 소개팅 등 너무도 일상적인 주제가 호루모의 난입으로 인해 판타지로 바뀌는 순간은 언제 봐도 재미있는 것 같다. 갑자기 한국에도 이런 괴상한 동아리가 있었으면 싶었다. 인사동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대학생들의 귀신 싸움같은.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승리를 위해 하얗게 불태우는 대학생들의 유쾌하고 재기발랄한 이야기들을 보며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이래야 청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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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절판


나의 생각과 걸정이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행동은 그에 앞서 이미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것을 단순히 그대로 수행하지는 않는다. 행동에는 나름대로의 원천이 있으며, 나의 생각은 나의 생각이고 나의 결정은 나의 결정이듯이 나의 행동역시 독자적인 방식으로 나의 행동인 것이다.-23쪽

그렇다. 그녀는 그것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그녀는 승리를 위해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노출되는 대가를 치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또한 내가 그녀의 형량을 몇 년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그녀가 만들어놓은 자신의 이미지를 매도하는 것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런 거래라면 그녀도 직접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것을 원치 않은 것이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이미지가 감옥에서 보낼 세월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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