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코의 지름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3
나가시마 유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유코의 지름길>은 묘한 소설입니다. 처음에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가 적혀 있는 탓에 별 내용이 없는 것만 같더니 마음을 열고 적힌 그대로를 받아들이자 곧 글이 이미지가 되어 색을 입고 입체화되어 등장하거든요. 그렇다고 마음을 열고 본 순간 이후로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소설이 살아 숨쉬는 것처럼 느껴지다니 참으로 신기하죠. <유코의 지름길>은 변두리 지역에 위치한 서양 골동품 전문점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을 담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나"는 끝까지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는 청년이에요. 손님에게도 웃는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아 얼굴이 어두운 청년이라는 평가까지 매겨져서는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그저 후라코코 안을 청소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적당히 물건에 설명을 덧붙히는 것으로 하루를 보냅니다. 그는 점장의 권유로 인해 후라코코 2층의 작은 방에서 살게 되는데 <유코의 지름길>은 결국 "내"가 후라코코에서 살게되는 반 년간,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 조금을 담게 됩니다.

 

참 이 소설은 평범하지만 따뜻하고 정겹습니다.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고 보채는 사람도 없고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는 이들은 다가오는 하루하루를 제각기 삶의 속도에 맞게 살아갑니다. 등장인물들의 소개를 해보자면 이젠 벌써 마흔이라며 새로운 도전에 두려워하는 35세 미즈에씨는 "나"에게 뭔가를 나눠주길 좋아하고, "내"가 후라코코에서 일하기 전부터 계속된 단골이에요. 하지만 점장이 곧잘 말하는 매상에는 도움이 안되는 구경만 하는 손님이죠. 후라코코 옆 공터에서 크고 작은 상자들을 만들어 내는 주인집 아저씨의 손녀 아사코씨와 그의 동생 유코. 유코는 어른들은 알지 못하는 온갖 지름길을 꿰고 있습니다. 코스프레 마니아이기도 한 유코는 그것을 비밀이라고 하지만 모두 다 알고 있으니 그야말로 공공연한 비밀이네요. 그리고 기계에 능통하고 여유있게 자기의 페이스를 잃지 않는 점장과 그의 친구면서 스모의 마니아인 프랑스여인 프랑수와즈.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지 않는다던가 욕조를 치우지 못한 것을 지적하면서 "이러면 곤란하지 않은가."하는 말로써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를 확립하는 듯한 주인 아저씨. 그리고 역시 끝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는 오토바이 숍 알바생까지.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가 확실히 존재하기에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더욱 마음에 들었던 것은 번역자 이기웅님의 번역 솜씨였습니다. 일본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작업이 그리 녹록치 않았을텐데도 불구하고 그 상황에 적절한 단어를 골라내는 솜씨가 정말 여간 아니더군요. 유코가 발견해 낸 지름길을 걷는데 달빛이 교교하게 나뭇가지 사이를 스며드는 광경이 보였다니. 얼마나 시적인 표현인지 감탄을 금할 수 없겠더라구요.

 

나가시마 유는 소설을 쓰는데 줄거리를 먼저 떠올리고 그에 맞춰 내용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나는 부분을 먼저 쓴 후에 각기 쓰여진 것들 간의 개연성을 떠올린다는 것은 제가 글을 쓸 때와 비슷하게 여겨져 반가웠어요. 그러나 억지로 만들어진 것 같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이 소설의 장점입니다. 책의 겉표지에 쓰여 있는 것처럼 지름길을 찾지 못하는 어른들을 위한 책이라는 말마따나 저는 <유코의 지름길>을 읽으면서 참 행복했답니다.  처음에는 대답조차 큰 소리로 하지 않을만큼 내성적이던 주인집 아저씨의 손녀 아사코씨의 당당한 목소리는 저에게도 작은 용기를 심어 주었고 변변히 하는 일도 없는 한심한 남자라고 생각했던 "내"가 점차 주변인들에게 마음의 위안이 되어주기도 하고 기댈 수 있는 벽이 되어주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가치 없는 존재는 없을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쩐지 읽고 있는 내내 신호등 불빛에 따라 방이 파랗게도, 붉게도 물드는 "나"의 공간에 비누곽을 하나 사들고 놀러가고 싶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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