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의 5대 장편소설을 다 읽어보자는 열의를 가졌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죄와 벌에 이어 “백치”를 읽게 되었다. 오래전 “백치”를 처음 접했을 때는 읽는데 퍽 답답할 거 같은 예감이 들어 거부감이 들었다. 제목이 백치이니 백치가 주인공일 테고 그러면 목이 메듯 답답한 장면들이 많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언제나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기에 이 책을 구매했다.백치란 사전적으로 지능이 아주 낮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백치”의 주인공인 공작은 그 정도의 중증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전적으로 백치일 시절도 있겠지만 그 시절이 소설에서 상세하게 묘사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착하고 순진하며 약간 감정절제가 힘든 수준이었다. 일상생활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공작이 백치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어서인지 초반부에는 공작이 왜 백치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으며 다른 인물이 공작에게 백치라고 하면 괜히 나까지 모욕감이 들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점점 나도 모르게 공작을 정상인의 범주로 올려두었다가 후반부에 사교계에 처음 소개하는 자리에서 감정을 절제 못 하고 이리저리 떠드는 것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닥쳐, 이 눈치 없는 백치야!’라는 생각이 들어 놀라기도 했다. 사실 후반부의 공작은 이해하기 힘든 모습을 보이며 점점 몰락해가는 것이 아니냐는 스산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소설도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상당히 암울하게 결말이 지어졌다. 지금까지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죄와 벌” 보다 훨씬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두 작품 모두 살인사건을 다루는 것에 반해 “백치”에서는 도스토옙스키식 이상적 인간, 그리스도 공작이 나온다고 해서 밝은 결말을 예상했는지도 모르겠다. 끔찍한 살인사건을 다룬 소설들은 희망찬 결말을 그리고 이상적 인간이 나오는 소설은 암담한 결말을 그리는 것에는 물론 합당한 뜻이 있을 것이고 나도 은연중에 알 거 같기도 하다. 그러나 비극을 보고 나서 느껴지는 헛헛함은 어쩔 수 없는 거 같다.이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나온다. 모든 인물이 상징하는 바가 있고 그 심리도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묘사가 더해져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모든 인물을 하나하나 다 언급하기는 힘들므로 주인공 미쉬낀 공작을 중심으로 인물에 대한 감상을 남기려 한다. 사실 로고진이나 이뽈리뜨는 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 많이 봐왔던 인간군상이라 그렇게까지 흥미롭지는 않았다. 미쉬낀 공작은 이전 소설에도 보기 드문 인물이라 더 흥미가 갔던 거 같다. 초반부에 그가 모욕을 느낄 상황이 여럿 있었는데 그는 모욕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남다른 부분이긴 하다. 그가 모욕을 느끼지 않자 오히려 모욕을 준 인물들이 더 분노를 느끼는 것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다른 인간을 본 것이다. 우리가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감정, 그중에서도 부정적인 감정을 전혀 가지지 않는 인물을 보면 분노가 일 거 같다. 나와 다르면서 이상적이니깐, 심지어 나도 공작이 전혀 모욕감을 느끼지 않자 자연스럽게 내가 대신 모욕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사람의 미세한 심리를 잘 묘사한 거 같다. 공작이 후반부로 가면서 점점 백치가 되어 간다고 느꼈다. 특히 아글리아와 나스따시야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나중에 가서는 진심으로 둘 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의아하기까지 했다. 이게 백치의 사랑인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왜 그렇게 백치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는 로고진을 위로하는 장면에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백치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자기가 사랑하던 여자를 죽인 자를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아글리아와 공작이 나오는 장면들은 이 소설이 로맨스 소설로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의 감정을 어쩔 줄 몰라 한 아글리아의 모습에 괜스레 설렘을 느끼기도 했는데 아글리아의 말로도 비극적이라 안타까웠다. 사실 아글리아와 나스따시야 모두 광기의 면모를 보였다. 그렇기에 백치 공작을 사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작은 슈나이더 교수의 치료로 정상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된 후 러시아로 와서 여러 인물과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다시금 정상 생활이 불가능한 백치가 되어서 슈나이더 교수의 치료를 받는다. 어쩌면 백치가 공작의 기본값이고 잠시 역할을 하기 위해 정상인으로 돌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점은 아마 도스토옙스키가 그리스도의 공생애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도스토옙스키는 백치 상태가 가장 영광스러운 상태라고 생각했나? 발작도 사랑한 양반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나스따시아는 공작을 거부하고 로고진에게 갔다. 용서를 거부하고 벌을 받으러 간 것이다. 용서와 벌, 나는 사실 둘 다 무섭다.
톨스토이의 장편소설인 안나 카레니나는 개인적으로 의미가 큰 작품이다.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소설을 고르라면 이 작품을 고를 것이고 읽으면서 가장 큰 울림을 받은 소설을 고르라고 해도 역시 이 작품을 고를 것이다. 그 유명한 기차 자살과 이어지는 레빈의 확신 파트를 읽으면서 받았던 울림은 과연 그런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울림이 컸다. 이 책을 처음 읽은지도 벌써 7년 전이다. 아마 당시에도 읽고 나서 감상을 남긴 거 같은데 세월이 퍽 흘렀으니 다시 감상을 써보고 싶어서 책을 다시 들게 되었다.7년 전에 나는 “이상”이라는 작가에 퍽 심취해있었다. 이상의 시나 소설은 죄다 읽고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책들은 헌책방에서 웃돈을 주고 사기도 했었다. 그 당시 나와 가까웠던 친구들은 아직도 이상을 보면 네가 좋아했던 그 이상이라고 수식어를 붙일 정도이니 나의 이상 사랑은 대단했다. 이상은 톨스토이 작품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고 이상의 첫 소설인 “12월 12일”은 톨스토이의 소설인 안나 카레니나의 영향을 대놓고 받았다. 서론이 길었지만 7년 전 내가 안나 카레니나를 읽게 된 이유이다.안나 카레니나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가 된다. 안나와 레빈이 주인공이다. 읽으면서 아무래도 공감이 가고 더 재미나게 읽었던 파트는 레빈이었다. 안나의 불륜 행각과 그로 인한 가정파탄 등은 내가 공감하기에는 힘든 면모가 있었고 그에 반해 레빈은 젊은 남성으로 사회 구조에 대한 고민과 키티와의 사랑이 내용이 주를 이루므로 아무래도 더 재밌고, 공감해가면서 읽은 거 같다. 그래도 이 소설 제목이 “안나 카레니나” 인 것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울림이 컸던 장면은 오히려 안나 파트였던 거 같다.이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나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문장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이 불륜으로 인한 가정파탄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쉽게 오해를 하곤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불륜은 죄를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고 주제는 우리가 그 죄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이다. 이 소설의 절정인 안나의 기차 자살 장면에서 안나는 순간적으로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용서해달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그냥 이렇게만 들으면 불륜 행위를 한 것을 용서해달라는 것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소설의 심리묘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본인 죄를 본인이 심판하려고 삶을 버린, 죄에 대한 생각에 결국 먹혀서 그런 멍청한 행동을 한 것을 깨닫고 용서를 빈 것이다. 그 장면을 처음 읽었을 때는 안나는 결국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것으로 생각하여 한없이 슬퍼지기도 했다. 곧바로 이어지는 레빈의 삶에 대한 확신 파트는 마지막으로 희망을 주려고 적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 부분에서 많은 감동을 하고 희망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안나든 레빈이든 각자의 구원이 있다고 본다. 안나가 절망 속에 죽었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마지막에 와서 외친 외마디 용서, 그 안에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계속 살아가고 싶다는 욕구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일종의 구원이 아닐까?레빈은 마지막에 삶에 대한 확신을 갖고 결국 신에 대한 확신을 한다. 그 부분도 무척 감동을 자아내는 부분이기에 이 책을 처음 읽을 당시에 나는 나도 곧 레빈처럼 그런 확신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사실 그때보다 확신은 줄어들고 회의와 허무가 커진 것 같다. 아직 먼 것이라고 위안으로 삼으려 한다. 개인적으로 “안나 카레니나”의 주제를 함축한 “안나 카레니나”의 한 문장을 소개하고 마무리 지으려 한다. “원수 갚는 일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니체는 내가 많이 사랑하는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을 사랑하게 된 지도 수년이 흘러서인지 원전들을 비롯하여 니체에 관한 연구서와 영상매체들도 많이 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내 전공도 아닐뿐더러 아직 미흡한 부분도 많고 이상하게도 니체 철학은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봐도 지겹지 않고 깊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비슷한 내용을 다루는 서적도 여럿 읽었다. 이 책도 니체 입문서이므로 니체 철학을 개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익히 알던 내용이지만 정리되는 기분도 들고 유익했다. 다만 초반에 문헌적인 내용은 좀 지루했고 가독성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사놓고 절반 정도 읽고 몇 달 방치해두다가 얼마 전에 다시 읽었다.여기서 니체 철학에 대한 내 관점을 죄다 얘기하기에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으니 지금 생각나는 화두를 중심으로 몇 자 적고자 한다. 니체에게서 나는 “삶을 사랑해야만 한다”라는 철칙을 하나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 철칙을 도스토옙스키 소설을 읽으며 현실화하였다. 나는 여기서 사랑을 스피노자의 생각에 공감하여 일종의 인식으로 여겼다. 무언가 인식하고 인정한다는 것 그것이 곧 사랑이다. 그렇기에 운명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인지 그렇다면 삶의 고통을 그냥 감내하라는 거냐? 라는 질문에 인식의 뜻이 그것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명쾌히 반박하지는 못했다. 인식하는 것이 사랑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인식과 인정으로는 사랑을 다 표현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저 상대방을 인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사람을 동정하는 것으로도 그치지 않는다. 사랑하면 잘해주고 사랑스럽게 만들어주고 싶기 마련이다. 여러 서적에는 운명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나는 삶이라고 치환하는 그것, 그것을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단순히 인식하는 것에 더하여 잘해주고 사랑스럽게 사랑받을만하도록 계속 가꾸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적으로 그 사랑스러운 삶을 느껴야 한다. 생각에만 갇히면 그저 변증법일 뿐이다.여러 철학자의 내용을 머릿속에서 뒤섞다 보니 중구 난방한 면모가 있어 부끄럽다. 삶을 더 사랑하고 더 느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봐야겠다. 이 사람을 보라, 죄가 있는가, 죽여야 하는가?
헤겔의 사상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알음알음 알고 있었지만, 본격적인 그의 저서를 읽는 것은 처음인 거 같다. 내가 니체에 오염되어있기에 반감을 품는 부분이 많지 않을까 걱정도 했고 실제로 그런 부분이 몇몇 있었다.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유형 시절 형에게 이 책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는 소리를 듣고 왠지 모를 호기심이 들어 읽게 되었다.사실 철학적인 내용도 함유하고 있지만 전 세계의 역사를 헤겔과 함께 들여다보는 느낌이 많이 든다. 헤겔의 세계사 강의를 책으로 만든 것이라 하니 당연하기도 하다. 헤겔이 역사를 어떻게 통찰하는지도 나의 역사 통찰 방식과 비교해볼 수 있었다. 역사가 변증법적 단계에 따라 결국 절대정신으로 수렴해나가는 발전단계를 거친다면 카이사르나 나폴레옹이나 일개 졸병이나 나도 다 그 발전단계에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쉬이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세계사를 들여다보지만, 인도나 중국 부분은 아무래도 헤겔 당시의 동양에 대한 인식을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여러 가지 오해나 편협한 부분이 많아 보였다. 그리스나 로마, 게르만 부분은 퍽 볼만 했다. 동양 세계는 단 한 명이 자유롭고 그리스와 로마는 일부 귀족이 자유롭고 게르만은 모두가 자유롭다는 주장도 전부 동의하기 어렵지만 흥미롭다고 여겼다.사실 읽기 쉬운 책이라고 하기는 어려웠고 지루한 부분도 있었다. 전반적인 세계 역사를 알고 보았기에 내 통찰을 가다듬을 수 있었던 거 같고 세계 역사에 무지한 사람은 읽기에 힘들 거 같다. 헤겔이 결코 개인을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크게 크게 생각하는 것 같다. 시대 역사 민족, 하나하나 모두 무게감 있는 것들을 통찰하기 때문에 버겁기도 하고 웅장해지기도 한다. 철학은 결국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를 보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여기게 되었고 내면을 세계와 통합하는 그런 과정이 내게는 아직 부족했던 거 아니냐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역사가 발전한다면 내가 죽을 자리는 어딜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