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그 얘기를 해주었을 때 안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의 첫 관심이 기뻐서만은 아니었다.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순간에 그가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독한 결말은 아닐 것 같았다. - P131

잠재웠던 취향을 일깨워 사소한 습관 하나가 바뀌는 것도 작은 활기임에 틀림없다. - P146

사람은 역시 쉬어야 고개를 들 힘이 생기는 것 같다. 고개를 드니 발등에 떨어져 있는 불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곳의 주변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좌표가 읽히는 것이다. 경선은 그동안 하루하루를 지겹도록 애써서 살아내야 했던 이유가 자신의 복잡한 생각에도 원인이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 P157

여행은 장소뿐 아니라 시간의 이동인 것 같다고. 처음 와보는 장소인데 언젠가 살았던 것처럼 느껴지는 풍경과 마주치면 그 순간 시간의 회로가 교란된다고. 때로 전생까지 거슬러 상상해보게 되는 그 데자뷰의 전율이 현생에서 도망친 데서 오는 해방감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자신의 지난 생이 상영되는 극장 안에 한 발 들어선 설렘이었다고 말이다. - P203

노화란 어쩌면 자신이 혐오했던 모습으로 퇴화해가는 고통과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스쳐갔다. - P212

사람은 병과 실수와 약점을 통해서도 교감한다. 고통과 맞닥뜨리는 걸 피해버리면 화해할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만다. 갚을 길 없는 빚이 되고마는 것이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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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린 시절 상상했던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다른 시간을 살아온 걸까. 우리는 어쩌다 이런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 P97

춤춰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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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혹시 태어남과 함께 몸에 새겨진 생존의 본능이 있듯이, 필멸자로서 죽음에 연착륙하는 본능의 장치가 인간에게 내장돼 있는 건 아닐까. 어디에서 그걸 찾아야 하는 걸까.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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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어떤 식으로든 그 몸을 통해 시간이 흐르고 있다.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불화하고 때로 방치하거나 공격을 주고받기도 했지만 육십오년을 함께해온 몸에는 안나의 모든 삶이 새겨져 있다. 때로 표정과 자세 속에 깃들고 때로는 흉터와 병을 통해 외부로 드러난다. - P13

눈을 감는다는 것은 얼마나 무방비한 상태인가. 턱을 젖히느라 가슴을 앞으로 조금 내미는 것 또한 친밀한 몸짓이다.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또 자기를 온전히 내맡기는 흔연한 웃음.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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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려고 하면 할수록 시야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리는 빛 속의 무엇은 무엇일까? 무엇을 보려고 보는 것을 잃어버리기까지 하는가? 이 공포의 정체를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 P104

겨울은 그렇게 깊고 추웠으므로 이별을 하면서도 제자리를 순순히 내주지 않을 것처럼 버팅기다가 기어이 그 자리를 내주며 마지막으로 흐드러진 뜨거운 춤을 추었다. 사람들은 그 춤 속에서 지나간 시간을 보았고 또 다가올 시간도 보았다. - P110

전통은 어떤 의미에서는 독재자이다. 독재자는 ‘혼자 말하는 사람‘이다. 전통이라는 게 주어져 있는 일방통행일 때 그것은 인간을 억압한다. - P113

어쩌면 모든 문명에 속한 모든 것이 그러하듯 우리가 쓰는 시도 한정적인 삶을 살다가 갈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잊힐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시를 쓰고 읽는 시간이 더 선연해진다. 이 시간은 우리가 살아 있으므로 가능한 우리의 사건인 것이다. 모든 이 지상의 일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 P114

함께 기댈 전통을 찾지 않는 그들은 각자 자신의 싸움터를 만들어낸다. 그 싸움터에는 매우 두터운 시간대와 드넓은 공간대가 나란히 한다. 그들은 과거에도 속해 있고 미래에도 속해 있으며 어떤 시간에도 속해 있지 않고 그들은 남성이고 여성이고 변성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시인이다. - P116

나는 시인이라서 시를 통하여 ‘나‘를 들여다보고자 했다. 내 안에 든 수많은 나와 타자, 다양한 시간과 공간, 그 안에서 정의되지 못하는 ‘인간의 시간‘을 보고 싶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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