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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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바리 부인은 책읽는 여자가 경계되던 당시 시대상이 엿보이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욕망에 관한 생각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질문에 둘러싸이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상을 현실에서 이루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기 자신의 욕망을 상세히 분석해 본다면 어떨까 등등 생각해봤습니다. 

 

  사람들은 동일 문화권에서는 비슷한 성장을 거치고 학교에서 배운 교양아래 성인이 되면 비슷한 의식주를 원하며 살아갑니다. 무리 속에서 튀는 나의 성향이나 욕망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남다른 욕망을 이해해주는 듯 한 사회지만 구체적으로 실현하려면 큰 용기가 따라야 합니다. 통계가 나와있고 사례가 많이 공개되어 있어서 무모하거나 비이성적인 선택을 가려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꿈과 이상의 실현이라는 것을 시도하다가도 마음을 접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보화 사회라는 것이 그런면에서 매우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시행착오를 줄이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결과일겁니다. 두루뭉술하게 나를 위장하고 살기에 적합한 사회입니다.


 

  의사인 남편 보바리의 경제력은 나쁘지 않습니다. 보바리부인인 주인공 엠마가 지탄받게 되는 주된 이유가 되버리는 것 같습니다. 뭐가 아쉬워서....... 쯪쯪쯪 엠마의 어린 딸이 한없이 불쌍합니다. 이기적인 여성이었을까?. 왜 파국을 막지 몼했을까?. 망상이 지나쳐서?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면 만족되지 않는 불행한 성향이 문제였을까. 책을 읽으면서 엠마를 조금씩 알 수 있었는데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발을 내딛을 수 밖에 없는 그녀의 절박함이 느껴졌습니다. 

 

  엠마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시골의 지주인 아버지와 함께 살았습니다.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그녀는 순결한 아름다움을 지닌 독서가였습니다. 낭만적 생각과 간극을 느끼지만  현실속에서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녀의 타고난 미모는 그녀를 만나는 사람들을 매료시킬만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다였습니다. 그녀에게 그 이상의 욕망을 허락 되지 안았습니다. 결혼을 통해 시골에서 소도시로 환경이 바뀌었지만 그녀가 꿈꾸는 사랑으로 충만되지 못했습니다. 비록 나이든 의사 남편의 후처였지만 안정된 수입을 사용하여 살림을 꾸리는데 어려움이 크게 없었고 이웃들은 그녀를 선망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결혼생활의 즐거움보다는 의사부인이라는 일상의 권태를 먼저 만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그녀가 속해있는 곳이 아닌 다른 도시 다른 남자와의 공간에서 안정을 느끼고 사랑을 갈구합니다. 이렇게 위험한 사생활을 눈치챈 탐욕스런 자들이 노골적으로 꼬드깁니다. 금전적 부채를 가벼이 여기는 그녀에게 타락의 매개가 되버리는 사치를 안겨줍니다. 남자들이 그녀를 만나는 것도 사랑이라고 보이지만 그녀의 추락은 모른척합니다.

 

  왜 그렇게 어리석게 보일까요. 왜 그녀는 자신만 가엽게 여기고 주변은 제대로 보지 않을까요. 주변 사람들을 기만하고 얻는 행복이나 사랑이 어떻게 하여 이성을 제압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그래서 무리한 고집을 피웁니다. 그럴때 아이가 이해는 되지만 아이를 달래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이의 요구를 들어줄 방법을 찾기도 합니다. 결국 달든지 들어주든지 그 아이가 다시 웃는 모습을 지켜 보고 안정감을 느낍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화를 내도 그렇게 맞추어 줍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여유로운 부모나 연인이나 환경을 만나지 못한 경우라며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분노를 표출하며 포기하지 않고 연인이나 가족에게 상처를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안된다는 것을 알아채고 자책하거나 어떻게 해서든 이루려고 든다면 합리적 선택을 하지는 못할것 같습니다. 이미 시작 단계에서 불가능을 인식했으니까요.

 

  사람은 대개 그런 욕망에 빠져 사는 것 같습니다. 때로 누군가의 욕망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힘들어지고 본인만 만족할 만한 것일 수도 입니다. 그의, 그녀의 꿈이 그런 극악한 결과를 원한는 것은 아니었을텐데요. 그들의 사랑이나 충만한 기쁨을 누군가는 잔인한 욕망이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과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진정 아끼고 사랑했을까요. 그녀가 충만된 사랑의 기쁨을 기대했던 대상은 그 누구보다 남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옆에 있는 사람을 신뢰하고 그를 통해 깊은 사랑을 느낀다면, 같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과 공감하며 사는 엠마라면 그와 같은  선택은 없을테지요.

 

  사랑을 욕망하지 않도록 할 수 없습니다. 젊은 인간은 모두가 사랑스럽고 우아하고 매력적입니다. 그리고 세상 또한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그에 반해 개인의 일상이 '너무 밋밋해서' 위험한 사랑일지라도 욕망에 빠진다는것은 누군가에게 몹시 구역질나게 배부른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일상이 달리보면 치열한 하루하루입니다. 자신과 사랑하는 모든것을 지키기위한 최선의 선택들을 하느라 열의를 다하고 있습니다. 이 글이 씌여진 초기 산업화 시대 낭만주의의 경계는 오늘날 우리시대에도 여전합니다. 3포,4포, 5포라는 신조어처럼 무수한 젊은 인간은 사랑을 욕망하기보다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위로처럼 인문학 켐페인이 넘쳐나는 아이러니한 세상입니다. 

 

  엠마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시기에 그녀의 내면은 불안하고 불행했습니다. 반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욕망을 충족하였을때는 그 대가로 자기 주변사람들의 몰락을 초래합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엠마와 같은 선택을 되풀이하고 있는 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의 토대를 무너뜨릴때 나도 함께 무너질 것을 모르듯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상처내듯이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다양성, 공존이 모색되는 시대입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엠마와 다른 선택이 가능합니다. 수만은 객체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는것을 자주 깨우칠 필요가 있습니다. 나와 다른 욕망을 지닌 그가 그녀가 모든것을 걸고 무리한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것을 알려줄 수 있을겁니다.

 

  보바리 부인을 읽는 다는것은 내가 원하는것이 진정 무엇인지 그동안 노력해온 것들이 적절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방법중에 책을 다양하게 읽는 것은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오늘날 세상에는 책이 넘쳐납니다. 편독하기가 어려울만치요. 그뿐이겟습니까. 온라인 매체가 뿜어대는 타인들의 생각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습니다. 내가 나만을 문제를 고민하는 순간마저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니 이제 접속을 끊고 나의 욕망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들 생활의 친밀감이 더해질수록 내면의 간격이 벌어지면서 그녀를 남편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샤를르가 하는 말은 거리의 보도(步道)처럼 밋밋해서 거기에는 누구나 가질법한 뻔한 생각들이 평상복 차림으로 줄지어 지나갈 뿐 감동도, 웃음도, 몽상도 자아내지 못했다... 이 사내는 무엇 하나 가르쳐줄 것도 없고, 무엇 하나 아는 것도 없고, 무엇 하나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는 그녀가 행복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너무나 흔들림 없는 이 평온과 이 태연한 둔감, 그녀 자신이 그에게 안겨주고 있는 행복 그 자체에 대하여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 p.65

엠마 쪽으로 말하면, 자기가 그를 사랑하는지 어떤지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연애란 요란한 번개와 천둥과 더불어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에서 인간이 사는 땅 위로 떨어져 인생을 뒤집어엎고 인간의 의지를 나뭇잎인 양 뿌리째 뽑아버리며 마음을 송두리째 심연 속으로 몰고가는 태풍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녀는 집 안의 테라스에서 물받이 홈통이 막히면 빗물이 호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태연히 안심하고 있다가 문득 벽에 금이 간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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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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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박완서의 소설에 공감하지 못했다. 감히 선생님의 소설을 두고 투덜대듯 내가 깊이 빠져들지 못하는것이다. 그것이 선생님과 많은 애독자들을 상대로 죄송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읽기 전에 한달 가량 카프카의 작품들 속에서 허우적 대고 있었다. 또 이런 저런 정치, 사회적 문제에 비판적인 의견을 듣고 나 역시 그 사건들에 비통해 했었다.

 

박완서의 글을 막상 읽기 시작하니 중도에 멈출 수 없었다. 글의 그 세련된 흐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몹시 유려한 문장을 줄줄 읽으며 어쩜 이다지도 훌륭할까 싶었다. 그 바람에 나는 행간을 놓친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에 공감타령은 그래서 빚어진것이다. 박완서는 글 전체에 의도된 맥락을 그 화려한 문체아래 감추고 있었다. 항상 이야기의 끝에서야 본색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빨갱이 바이러스'는 작가의 푸념들로 가득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몰랐다. 박완서는 그저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읽었다. 그러다가 나머지 다른 단편들을 모두 접하고 나니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그의 이야기에는 모두 의도가 담겨 있었다. 아름다움 그 이면을 소홀히 여겨 행간을 읽지 못했다. 글에서 힘이 느껴지고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게 되었다. 첫 단편 하나 읽고 매우 솜씨좋은 장인이 빚어낸 이야기같다고 생각했기에 조금 충격이었다. 이 책의 단편을 모두 읽고 난 후의 나는 분명히 열광하고 말았다. 박완서의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중간에 그 황홀한 문장들만 보고 지나치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어떤 작가, 어떤 작품을 읽더라도 중도에 멈추면 안되겠다고 반성했다.

 

아직 그분의 작품을 많이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문제의식을 서사로 풀고 있는것은 분명한 것 같다. 내가 만나본 지금까지 소설과는 같은듯 다른 부분이 그것이다. 모든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소시민들의 소소한 일상으로 덮어두고 마지막에서야 기막힌 반전 처럼 터뜨린다. '기나긴 하루'에 실린 모든 단편에서 그랬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반전은 '카메라의 워커'에서 만났다. 한 작품을 골라 감상을 남기고 싶었는데 단연 으뜸으로 나를 매료시켰다.

 

'카메라의 워커' 에서는 전쟁, 분단, 독재의 시대를 관통해 낸 중산층이 주인공이다. 주인공 나는 훈이라는 조카를 매우 정성껏 키워왔다. 전쟁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무참히 죽어버린 훈이 오빠 부부를 대신해 살뜰히 보살펴 왔다. 그 간 훈이의 학교생활, 진로, 취업을 위해 매우 열심히 도와왔다. 그런데 소중한 조카가 자신의 뜻과 반대로 무기력해지고 사회에 강한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 만 같다. 화자는 고모인 ''지만 작품속 갈등의 중심엔 젊은 조카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주인공 나의 욕망으로 인해 빚어지고 있는 조카의 희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1930년대 태어난 세대가 지닌 욕망은 평범하게 사는것이다. 그들과 가족은 해방과 분단, 전쟁을 거치면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기검열과 분열된 정체성으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되었었다. 그 상처가 도지지 않도록 늘 전전긍긍 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전후 세대인 훈이는 다르다. 그들의 삶에서 이데올로기의 압박이나 분단과정은 없다. 또 전쟁으로 가족을 잃는 일도 이제 없을 것이다. 그저 근면 성실히 살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모두가 응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조카는 성장 중심의 개발 경제 속에서 희생된 전형적인 청년의 모습을 보이게 된 것있다. 열심히만 일하면 얼마든지 정식 사원이 되고, 안정적인 월급을 받으며 살 수 있다는 말에 성실하게 일하고 견딘다. 그러나 모진 세파에 야무지고 노련해진 고모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것은 허망한 꿈이 될 것이 뻔했다. 그동안 훈이에게 이래라 저래라 했던 것들을 떠올려보니 끔찍하다. 그래서 조카가 냄새나는 워커와 빨지않는 옷을 입고 씻지 않은채 소주병을 끼고 잠에 드는 모습이 애처롭다. 자신의 질곡과도 같은 상처가 그대로 조카의 삶을 망쳐버린것만 같다.

 

훈이의 할머니는 그저 평범하게 이 땅에 살아가는것을 카메라를 메고 공휴일 야외에 놀러 다니는 삶이라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당시 중상층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안정적인 삶을 모두가 이룰 수 없는 사회가 들어섰다. 지금은 훈이와 같은 청년이 더 많이 늘어났다. 여전히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있다. 기대를 품고 오라고 하고선 그 모두를 위해 의자를 준비하지 않는다. 그래놓고 청년들의 힘겨운 전투를 지켜보고 이래라 저래라 훈수 들고 있다.

 

이 작품을 씌여진 것은 1975년이다.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관점이 여가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볼 때 지금도 비슷한 것 같다. 오늘날에는 카메라 메고 해외여행으로 바뀐 점이 다르다. 또한 장거리 출퇴근및 공휴일 가족 나들이용 자가용이라든지, 파워블로그의 세련된 셀프인테리어를 따라해볼 독립된 신혼집이라든지 등등 평범한 서민 청년의 그림이 달라졌다.

 

'카메라 워커'를 읽고 나서 박완서 문학에 대해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평론들을 찾아 보았다. 그리고 주제넘지만 그 의견들에 비판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박완서에게 여전히 여성문학, 분단문학, 노년문학 등의 프레임을 쒸우는 글들에 섭섭했기 때문이다. 초기작품인데도 거기서 만난 문제의식은 상처치유보다 평범한 소시민의 정치 사회적 분노였다. 그의 작품을 폄하하기 위해 그의 가족사를 이용하는 것만 같다. 혹은 그가 여성이기에 그의 돋보이는 문체 뒤 통찰력에 대해서 세심히 보려고 하지 않는가 싶기도 하다. 더이상 치유, 위로, 여성에 대한 관조적 글쓰기로 폄하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거대 담론을 전면에 내세우고 대놓고 글을 쓰는것에만 익숙한 세대가 갖는 오만이다. 박완서의 글에서 솟아오르는 통찰력을 제대로 평가해주길 바란다. 박완서는 매우 아름답고 풍부한 언어로 소소한 일상을 매끈하게 다듬어 막힘없이 이야기 한다. 하지만 반드시 말미에 거대 담론을 독자 스스로 꺼내어 고뇌하게 하는 힘을 가진 대단한 작가이다.

 

9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는 무라카미 하루키로 대표되는 일본 소설들을 과감히 수용했다. 모방과 표절 논란을 일으키며 이땅의 젊은 작가들이 추앙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나 역시 무라카미 소설을 두권이나 지니는 동안 박완서의 책은 한권이 고작이다. 부끄럽다. 이념, 전쟁, 분단에서 벗어나고픈 욕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폭발적으로 늘어난 해외 여행이 대세가 되었고 우리 땅의 현실을 보지 않아도 되는 개인주의가 만연해졌다. 근면, 성실한 가치가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모멸감을 느끼고 그렇지 않은 신세계를 동경하게 된것은 아닐까. 다양성이 중요하다느니, 글로벌문화를 수용한다라고 하는 말들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한다.

 

실제 우리는 정치적인 논쟁에서 용어 선택 하나에도 신중해야 하지 않은가. 여전히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념에 대한 자기 검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분단된 남쪽에서 내가 살기에 내가 빨갱이가 아니라는것에 확신이 없으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박완서를 1990년대 작가라고 하는 기사를 읽었다. 이념과 분단 6.25라는 소재는 90년대 탈냉전 시기에 이념 억압으로부터 해방감으로 비롯되어 다루던 소재라는 것이다. 너나 할 겂 없이 서슬퍼렀던 시절에 나누지 못한 아픔을 토로하고 상처를 회복하고 위안을 얻게 하는 글이라는 것이다.

 

분단된 현실을 떠올리는 것은 참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통일에 대한 바람도 무색하리만치 효율만을 따지는 소시민들이 군집을 이루어 유행을 쫒아 다니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인문학마저 유행으로 치부된다. 성찰이 궁색한 글을 읽으라 강요한다. 돈과 명예를 구해서 죄와 허물은 묻어버릴 수 있다는 세상이다.

 

그래서 박완서의 글은 용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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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선고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72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태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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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을 읽고 난 감상>

 

카프카를 읽으며 막연히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힘든 이유는 여러가지이고 말하자고 들면 너무 궁색해서 구질구질하다.

게다가 나의 인성에 대해서는 늘 실망스럽기에 '힘들다'는 말을 하는 내가 더욱 싫었다.

그래도 말하고 나면 속이 편안해 질 것 같아 힘든 이유 몇가지만 털어 놓고 싶다.


첫번째,

변신에서 그 '갑충' 그 텍스트 만으로도 불편하여 꾹꾹 참고 읽어야 했다.

나는 살면서 벌레를 늘 의식하고 몹시 두려워 한다.

매우 작은 벌레라도 흉물스럽게 여기기에 삽화가 없는 책만을 골라 들었다.

그러나 결국 꿈 속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그 날 아침 가위에 눌렸는데 그 커다란 ... 

아아....지금 글을 적다 떠올리니 우욱 그 이야긴 못 적겠다.

머리를 도끼로 찍어버리는 그런 고통을 맛보아야 만한다.

카프카는 결코 쉽게 읽히길 바라며 글을 쓰지 않았다.

그는 이 짧은 소설로 내 일상을 모두 전복 시켰다.

매 순간 떠오르는 그 텍스트들에 나는 말 수가 줄기도 했다.

그리고 외로움에 빠져들었다.

거기, 내 곁에서 함께 읽을 누구 없소?


두번째,

등장인물들의 행위에 너무 공감하였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유별스러울 내가 의식되니 곧 두려워졌다.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고 읽으니 등장 인물 모두가 이해가 되었다. 

가족만큼은 '특별히' 개인을 위한 무한한 수용체로 기능해야 안전하다

나는 그 생각에 대해 조금 의문을 갖고 있다.

일탈에서 돌아올 유일한 곳이 가족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가족이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자주 잊어버리기에 툴툴 거린다.

사람들은 따듯한 가족을 갖지 못할까봐 전전긍긍 한다. 

이 작품은 그런 욕망을 갖고 사는 나와 대면시킨다.

또, 가족으로부터도 소외된 자신을 마주하였다.

어디서건 효용성 유무로 존재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다시 거머쥐어야 하나?

설득되는 동안 불편했다. 


세번째,

그 끔찍한 설정을 읽고서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내어 보겠다고 노력했다.

그런데 막상 토론 중에 들은 긍정적인 이야기들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바이러스에 감염이라도 되보자. 나도 제대로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시선과 귀를 그 방향으로 집중하는 것이 도움 되었다. 평안이 찾아들었다.

잠시지만 신이 내리시는 축복이었다.

안타깝게도 질문이 솟구치면서 집중력은 무너져 버렸다. 

내 생각은 다시 비판적인 방향으로 달려가고 말았다.

'좀 더 부정적이지만 아픈 감정을 오래오래 꾸역꾸역 뱉어내면 안되겠는가'.

'여기 그런식으로 파헤쳐 떠들고 싶은 사람 또 누구 또 없소?'

곧 정신을 차리고 그 말들을 삼켰다.

거기엔 그런 사람 없다고 확신했다.

비판적 말버릇이 비난으로 전해질까 두려워 열심히 단속했다.

내가 그동안 배워온 얼치기 긍정화법으로 상황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서둘러 치료하듯 메스로 도려내고 소독하고 바늘로 상처를 꿰매버리는 내가 어리석었다.

그래봐도 나는 계속 아프다고 꿰맨입이 오물거렸다.

며칠 견디다 보면 잊혀지는 순간이 온다고 토닥거렸다.



이렇게 세가지에 걸쳐 불편했던 속마음을 적었다.

그런데 그 외 여러 감정들은 헤아리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생각하는것이 나의 취미이지 않은가.

카프카의 작품은 사유를 즐기는 최적의 놀이터였다.

그래서 토론 당일을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다. 

혼자 숨어서 읽던 책을 이젠 들고 나가 봐도 될 것 같았다. 

힘들겠지만 실존에 대한 물음을 가지며 작품을 다시 읽었다.

결핍에 대한 것들이 생각났다. 개개인의 욕망도 보였다.

욕망들의 충돌로부터 도망쳐나온 자아도 보였다.

불편한 속마음은 현실을 계속 외면하고 싶기에 비롯되었다.



카프카 자료들을 다시 뒤적였다. 

살아있는 작가가 아니어서 일까?

왜, 어떻게 살았기에 이런 작품이 나왔는지,

그가 살아간 시대와 문화를 상세히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카프카의 우울한 삶를 들여다 보는 동안 미안함은 들지 않았다. 

어느새 토론일이 다가와왔다.

자료와 단상들을 정리하던 참었다.

문득 이 작품을 처음 만났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름 하나를 떠올리며 글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잊었던 친구와의 추억을 되살려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종일 문장을 이어나갔다.

글을 다시 쓰다니.......

 


 

그런 즐거움, 처음이 아니었다.

매우 독특한 맛 초콜릿을 녹여가며 먹는 기분이다.

친구와 여러가지 맛이 나는 사탕을 함께 먹으며 재잘대는 것 같았다. 

연인과 키스를 할 때에 느끼던 그런 즐거움과도 비슷하다.

홀릭되었던 시간이리라.

혀를 감싸고  입안 여기저기에 나의 신경을 끌어가면서도 긴장하고 집중하게 하는 그런 쾌감이었다.

그동안 포기했던 리뷰부터 다시 해볼까 욕심이 생겼다. 

글쓰는 지인들과의 최근 모임을 떠올릴 쯤에 글이 멈춰 섰다.

잉크가 새어 나오는 펜때문에 손이 검게 더렵혀져 있었다. 

술술 잘 써지고 종이에 흡수되는 펜의 느낌이 좋았는데...... 

맥이 풀리고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 자신을 비웃어야 했다. 실소가 나왔다.



나는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런 글로 말뚝을 꾸욱 박아 놓고 나간다.

다시 여기 이 자리로 돌아오고 싶다는 표현이다.

내가 성급하게 한 응급처치에 믿음이 안간다.

언젠가 동류의 인간 혹은 벌레를 만나겠지.

그 때 꿰맨 상처를 다시 터뜨리고 길게 이야기 나누고 싶다.



< 생각해 본 논제 >


- 이방인이 되어 '다른'이라는 형용사에 짓눌려 본 경험이 있는가? 그 경험은 현재의 나에게 어떤 영항을 미쳤는가

 

- 가족에게서 얻는 위안은 얼마나 다양한가, 그 위안은 가족외 타자와와 관계에서도 가능한 것인가, 또 가족으로 부터 기대되는 그런 위안을 받지 못하였을때 나는 어떻게 견디는가.

 

- 글을 쓴다는 등 예술적 결과물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은 타자들로 부터 느끼는 소외감을 견디는 효과가 있는가 그것은 긍정적인 효과인가

 

- 이 작품은 지금껏 알고 있던 '변신'의 내용 전개는 '역변'이라는 인터넷 용어가 떠오른다. 부정적인 변화를 뜻하는 '역변'또한 긍정적으로 설명될 수 있나.

 

- '긍정', '부정', '결핍', '소외' 에 대한  생각들을 얼마나 자주 하게 되는가. 언제 한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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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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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자화상을 탐닉하는 자 그는 고독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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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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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스러운 제목이 너무도 익숙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고전 중 하나다. 그러나 일단 펴들고 나면 어안이 벙벙해지면서도 이 실험적 작품에 매료된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감동때문인지 오래도록 침묵하게 된다. 책을 읽던 중 격하게 공감하다가 울게 될지도.......아니면 화가 나서 이렇게 말하며 짜증낸다. "고도가 대체 뭐길래?"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시골길 죽은듯한 나무 한 그루 옆에서 고도를 기다린다. 어제도 기다린 듯하나 단정할 수 없다. 고도가 오늘 온다고 했으니까 그냥 고도를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한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고도를 만나고 나면 모든게 설명될것 같다. 포조와 럭키라는 낯선 이들이 그들에게 다가온다. 주인과 노예로 보이는 이들은 몹시 불쾌한 캐릭터이다. 게다가 럭키라는 노예는 바보같기는 한데 주인이 생각하라고 명령을 내리면 매우 어렵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끝임없이 뿜어낸다.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뒤죽박죽 혼란스럽지만 일정한 패턴이 있어서 비슷한 말과 행위를 반복하는 것 같다. 늘 불현듯 스치는 그것은 고도에 대한 의문이며 그 지루한 기다림을 끝내지 못하고 시간은 흘러간다. 그런데 이들에게서 시간같은건 무의미 해 보인다. 


   단문이 가득하고 분량은 150여 페이지 밖에 안되는 짧은 희곡이다. 혹 중간중간 다소 난해한 대사와 지문이 불편할 수는 있다. 그러나 캐릭터들이 광대처럼 우스꽝스런 대화를 주고 받는 장면이 자주 나와 지루함을 덜어준다. 초보 독서가라도 무난히 읽어 볼 수 있다.

 

  만약 짧은 대사와 중간중간 지문만으로 이해가 안된다면 다른 출판사 번역편과 비교해 읽어 보는것도 좋다. 내 경우엔 동서문화사편을 참조했다. 고전들이 다 그렇듯 내용이 시작부분에서는 모호하겠지만 뒤로 갈수록 인물들의 행동들이나 말들이 이해된다. 특히 포조라는 인물의 대사는 찬찬히 되새김질 하면서 읽어보길 바란다.

 

  공허한 말말말, 어김없이 침투하는 침묵, 지루함을 덜기위한 무의미한 행동들의 어지럽게 섞여있고 반복된다. 우리의 단순한 일상, 늘 주고받는 불통의 대화가 무대위에서 연출된다면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네명의 등장인물과 나무 한 그루, 모자와 신발, 의자와 밧줄과 채찍 등등 소품이 몇 안된다. 알듯 말듯한 의미들을 붙잡아 각각의 소품에 대입한다. 이런 부질없는 생각으로 가득하게 일부러 배치한 것 같다.

 

  고도에 대한 기다림 자체는 확실하지만 고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인물들의 기억들은 모두 흐릿하다. 매순간 유추하고 조금전 생각들을 맞추어 본다. 그러다가 불분명한 존재인 서로를 다시 의심한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성은 매우 느슨하고 멀기만 하다. 포조와 럭키가 기다란 줄로 팽팽하게 서로를 연결한 채 걸어가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무엇때문에 이런 혼돈과 지루함속에 갇힌 것일까. 블라디미르는 늘 사유하고 이성을 놓치지 않기위해 노력하며 고도만을 기다린다. 쉽게 잠이 드는 에스트라공이 꿈에 빠져들때마다 블라디미르는 고독을 느끼고 에스트라공이 깨어날때마다 기쁨을 느낀다.

 

  어떤 연출가가 고도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물었을때 베케트는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에 썻을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과정은 독자가 자기 내면에게 질문하고 자기만의 해석을 찾아 극을 연출하는 것 같다. 아니면 무대위 나무가 되어 주인공들과 함께 서있는것. 그 기막힌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속으로......................

 

 

포조               이 세상의 눈물의 양엔 변함이 없지.
                     어디선가 누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한쪽에 선 눈물을 거두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오. 

                     웃음도 마찬가지요. (웃는다)

                     그러니 우리  시대가 나쁘다고는 말하지 맙시다.
                     우리 시대라고 해서 옛날보다 더 불행할 것도 없으니까 말이오. (p51)

 


블라디미르      너도 속으로는 반갑지? 안그래?
에스트라공      뭐가 반가워?
블라디미르      날 다시 만나서 말이다.
에스트라공      그럴까?
블라디미르      그렇다고 해봐,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에스트라공      뭐라고 하라는 거야?
블라디미르      <나는 반갑다>라고 해봐.
에스트라공      난 반갑다.
블라디미르      나도.
에스트라공      나도.
블라디미르      우린 반갑다.
에스트라공      우린 반갑다. (침묵) 그래 반가우니 이제 무얼 한다?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p101)

 

블라디미르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p134)

 

 

블라디미르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성은 이미 한없이 깊은 영원한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야.       (p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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