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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처음에는 박완서의 소설에 공감하지 못했다. 감히 선생님의 소설을 두고 투덜대듯 내가 깊이 빠져들지 못하는것이다. 그것이 선생님과 많은 애독자들을 상대로 죄송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읽기 전에 한달 가량 카프카의 작품들 속에서 허우적 대고 있었다. 또 이런 저런 정치, 사회적 문제에 비판적인 의견을 듣고 나 역시 그 사건들에 비통해 했었다.
박완서의 글을 막상 읽기 시작하니 중도에 멈출 수 없었다. 글의 그 세련된 흐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몹시 유려한 문장을 줄줄 읽으며 어쩜 이다지도 훌륭할까 싶었다. 그 바람에 나는 행간을 놓친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에 공감타령은 그래서 빚어진것이다. 박완서는 글 전체에 의도된 맥락을 그 화려한 문체아래 감추고 있었다. 항상 이야기의 끝에서야 본색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와 '빨갱이 바이러스'는 작가의 푸념들로 가득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몰랐다. 박완서는 그저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읽었다. 그러다가 나머지 다른 단편들을 모두 접하고 나니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그의 이야기에는 모두 의도가 담겨 있었다. 아름다움 그 이면을 소홀히 여겨 행간을 읽지 못했다. 글에서 힘이 느껴지고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게 되었다. 첫 단편 하나 읽고 매우 솜씨좋은 장인이 빚어낸 이야기같다고 생각했기에 조금 충격이었다. 이 책의 단편을 모두 읽고 난 후의 나는 분명히 열광하고 말았다. 박완서의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중간에 그 황홀한 문장들만 보고 지나치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어떤 작가, 어떤 작품을 읽더라도 중도에 멈추면 안되겠다고 반성했다.
아직 그분의 작품을 많이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문제의식을 서사로 풀고 있는것은 분명한 것 같다. 내가 만나본 지금까지 소설과는 같은듯 다른 부분이 그것이다. 모든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소시민들의 소소한 일상으로 덮어두고 마지막에서야 기막힌 반전 처럼 터뜨린다. '기나긴 하루'에 실린 모든 단편에서 그랬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반전은 '카메라의 워커'에서 만났다. 한 작품을 골라 감상을 남기고 싶었는데 단연 으뜸으로 나를 매료시켰다.
'카메라의 워커' 에서는 전쟁, 분단, 독재의 시대를 관통해 낸 중산층이 주인공이다. 주인공 나는 훈이라는 조카를 매우 정성껏 키워왔다. 전쟁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무참히 죽어버린 훈이 오빠 부부를 대신해 살뜰히 보살펴 왔다. 그 간 훈이의 학교생활, 진로, 취업을 위해 매우 열심히 도와왔다. 그런데 소중한 조카가 자신의 뜻과 반대로 무기력해지고 사회에 강한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 만 같다. 화자는 고모인 '나'지만 작품속 갈등의 중심엔 젊은 조카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주인공 나의 욕망으로 인해 빚어지고 있는 조카의 희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1930년대 태어난 세대가 지닌 욕망은 평범하게 사는것이다. 그들과 가족은 해방과 분단, 전쟁을 거치면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기검열과 분열된 정체성으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되었었다. 그 상처가 도지지 않도록 늘 전전긍긍 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전후 세대인 훈이는 다르다. 그들의 삶에서 이데올로기의 압박이나 분단과정은 없다. 또 전쟁으로 가족을 잃는 일도 이제 없을 것이다. 그저 근면 성실히 살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모두가 응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조카는 성장 중심의 개발 경제 속에서 희생된 전형적인 청년의 모습을 보이게 된 것있다. 열심히만 일하면 얼마든지 정식 사원이 되고, 안정적인 월급을 받으며 살 수 있다는 말에 성실하게 일하고 견딘다. 그러나 모진 세파에 야무지고 노련해진 고모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것은 허망한 꿈이 될 것이 뻔했다. 그동안 훈이에게 이래라 저래라 했던 것들을 떠올려보니 끔찍하다. 그래서 조카가 냄새나는 워커와 빨지않는 옷을 입고 씻지 않은채 소주병을 끼고 잠에 드는 모습이 애처롭다. 자신의 질곡과도 같은 상처가 그대로 조카의 삶을 망쳐버린것만 같다.
훈이의 할머니는 그저 평범하게 이 땅에 살아가는것을 카메라를 메고 공휴일 야외에 놀러 다니는 삶이라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당시 중상층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안정적인 삶을 모두가 이룰 수 없는 사회가 들어섰다. 지금은 훈이와 같은 청년이 더 많이 늘어났다. 여전히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있다. 기대를 품고 오라고 하고선 그 모두를 위해 의자를 준비하지 않는다. 그래놓고 청년들의 힘겨운 전투를 지켜보고 이래라 저래라 훈수 들고 있다.
이 작품을 씌여진 것은 1975년이다.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관점이 여가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볼 때 지금도 비슷한 것 같다. 오늘날에는 카메라 메고 해외여행으로 바뀐 점이 다르다. 또한 장거리 출퇴근및 공휴일 가족 나들이용 자가용이라든지, 파워블로그의 세련된 셀프인테리어를 따라해볼 독립된 신혼집이라든지 등등 평범한 서민 청년의 그림이 달라졌다.
'카메라 워커'를 읽고 나서 박완서 문학에 대해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평론들을 찾아 보았다. 그리고 주제넘지만 그 의견들에 비판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박완서에게 여전히 여성문학, 분단문학, 노년문학 등의 프레임을 쒸우는 글들에 섭섭했기 때문이다. 초기작품인데도 거기서 만난 문제의식은 상처치유보다 평범한 소시민의 정치 사회적 분노였다. 그의 작품을 폄하하기 위해 그의 가족사를 이용하는 것만 같다. 혹은 그가 여성이기에 그의 돋보이는 문체 뒤 통찰력에 대해서 세심히 보려고 하지 않는가 싶기도 하다. 더이상 치유, 위로, 여성에 대한 관조적 글쓰기로 폄하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거대 담론을 전면에 내세우고 대놓고 글을 쓰는것에만 익숙한 세대가 갖는 오만이다. 박완서의 글에서 솟아오르는 통찰력을 제대로 평가해주길 바란다. 박완서는 매우 아름답고 풍부한 언어로 소소한 일상을 매끈하게 다듬어 막힘없이 이야기 한다. 하지만 반드시 말미에 거대 담론을 독자 스스로 꺼내어 고뇌하게 하는 힘을 가진 대단한 작가이다.
9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는 무라카미 하루키로 대표되는 일본 소설들을 과감히 수용했다. 모방과 표절 논란을 일으키며 이땅의 젊은 작가들이 추앙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나 역시 무라카미 소설을 두권이나 지니는 동안 박완서의 책은 한권이 고작이다. 부끄럽다. 이념, 전쟁, 분단에서 벗어나고픈 욕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폭발적으로 늘어난 해외 여행이 대세가 되었고 우리 땅의 현실을 보지 않아도 되는 개인주의가 만연해졌다. 근면, 성실한 가치가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모멸감을 느끼고 그렇지 않은 신세계를 동경하게 된것은 아닐까. 다양성이 중요하다느니, 글로벌문화를 수용한다라고 하는 말들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한다.
실제 우리는 정치적인 논쟁에서 용어 선택 하나에도 신중해야 하지 않은가. 여전히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념에 대한 자기 검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분단된 남쪽에서 내가 살기에 내가 빨갱이가 아니라는것에 확신이 없으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박완서를 1990년대 작가라고 하는 기사를 읽었다. 이념과 분단 6.25라는 소재는 90년대 탈냉전 시기에 이념 억압으로부터 해방감으로 비롯되어 다루던 소재라는 것이다. 너나 할 겂 없이 서슬퍼렀던 시절에 나누지 못한 아픔을 토로하고 상처를 회복하고 위안을 얻게 하는 글이라는 것이다.
분단된 현실을 떠올리는 것은 참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통일에 대한 바람도 무색하리만치 효율만을 따지는 소시민들이 군집을 이루어 유행을 쫒아 다니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인문학마저 유행으로 치부된다. 성찰이 궁색한 글을 읽으라 강요한다. 돈과 명예를 구해서 죄와 허물은 묻어버릴 수 있다는 세상이다.
그래서 박완서의 글은 용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