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먼 여행 아시아 문학선 2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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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항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시작된다.”

(로힌턴 미스트리, <그토록 먼 여행>, 아시아, p.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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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었던 소설 중에 가장 정이 가는 인물을 꼽으라면 언제나 <허삼관매혈기>의 허삼관을 얘기하곤 했다. 이 소설을 읽고나서는 구스타드를 허삼관의 옆자리에 앉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얘기냐하면, <그토록 먼 여행>의 인물들이 하나 같이 살아숨쉬고 책을 덮고 나면 내 앞에서 꿈틀 댄다는 말이다. 소설을 읽고 나서 친구 하나가 생겨버린 건 아주 좋은 느낌의 일이다.

소설에서 여행에 관한 이야기는 짧게 등장하지만 어째서 제목이 ‘그토록 먼 여행’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여행은 원래 출발지가 있고 도착지가 있다. 도착지를 향해 쭉 뻗어나가는 것. 그것이 여행의 성질이다. 하지만 소설은 특별한 목적을 가진 주인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목적이 있다면 한 번 잘 살아 보겠다는 정도다.), 거대한 사건이 이곳저곳에서 터지는 것 또한 아니다. 다시 말해 여행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이 극히 드물다. 그래서 ‘그토록 먼 여행’은 종착지를 알 수 없는 여행인 셈이다. 도착지를 알 수 없기에 멀고, 불확실하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것이 구스타드에 대한 은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나아가 다른 인물들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어찌 살아갈지 모르는 우리 모두에게,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은 작은 위로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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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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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태어나면서부터 죽기에 이르기까지, 사건의 전개는 시간 순서대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인생을 돌아보면서 쓴 글이 아니라, 딸이 아버지의 임종 뒤에 그의 인생을 재구성 한 것이다. 그래서 책에는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가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아니 에르노의 경험과 주관을 통해 서술된 것이다.

때문에 내용 역시 지극히 평범하고, 아버지의 속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은 찾아볼 수 없다. 타인의 인생이 나와 어떤 상관이 있는지 -그것이 40여년 전 죽은 프랑스 남자의 연대기라면- 책을 읽으면서 잠시 흥미를 잃었다. 그렇지만 책장을 덮은 뒤 밀려오는 생각은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보기에서 나-아버지보기로의 확장이었다.

작가가 보고 기억하고 서술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그것이 내가 아버지를 보는 모습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없고, 그렇지만 그의 마음은 알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 “감정 같은 것은 호주머니에 넣고 그 위에 손수건으로 덮어 놓는 거야.(111)” 아버지가 말한 것인지 작가는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는 문장이다. 이 문장이 <남자의 자리>에 나오는 아버지, 나아가 우리의 아버지까지 동일하게 공유하는 감정임을 숨길 수 없다. 책의 원 제목인 ‘la place’(대신, 자리) 앞에 생략된 ‘누구의~’는 각자가 채워넣야할 빈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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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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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성석제, 그리고 소설이 던지는 물음

 

 

 

남루하고 찢겨지고 자신이 세운 계획에서 비껴나간 사람들이 있다. 남편에게 평생을 받치며 살아왔지만, 유산 한 푼 물려받지 못한 인생과 아빠라고 불렀던 세 명의 남자 모두가 친부가 아니었던 소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노년이 돼서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남자. 어찌보면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어느 누구를 골라도 충분할 정도의 내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박민규였다면 그들 앞에 기린 한 마리가 나타났을 것이고, 김연수였다면 과거를 돌아보며 별들과 우주, 그리고 자신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석제는? 성석제는 이들을 모아 봉래산에 얹어놓는다.

 

 

그들이 마을에 모여 식구가 된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구심점은 분명히 여산이다. 여산(如山). 산과 같은 사람. 그의 이름처럼 여산은 한명씩 한명씩, 상처받은 사람들을 마을로, 자신의 품으로 데려온다. 가만 보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과거나 나오지 않는 사람은 여산 하나뿐이다. “봉래산의 잡목과 덤불”을 닮은 “봉두난발 머리”(44)를 하고 스님 앞에 나타난 여산은 자연과 산, 그 자체였다. 마치 앞으로 하나둘씩 마을로 모여들 사람들을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현현한 산의 정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여산은 처음부터 “가짜투성이, 불모성, 엉터리를 정말 마음에 쏙 들어”(44)했다. 드라마를 위해 지어놓은 세트처럼, 그곳에 모여드는 사람 역시 언제가 제몫을 다했지만 결국 황폐해져가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여산이 그들을 통해 들여다보는 건, 그들이 남루해지기 전, 각자의 몫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의 가능성이다. 그래서 소희는 채소와 밭을 가꾸고, 영필은 노래를 부르고, 벙어리 준호는 불을 다룸으로써 각자의 역할을 한다. 촬영이 끝나고 아무것도 쓸모없을 것 같았던 세트장이 그들에게 집의 기능을 해준 것처럼 말이다. 여산은 그렇게 상처들을 품는다. (여)산 동시에 강으로 변주되는데, 소설을 첫 장에서 보여주듯 “수만의 개울과 지류와 지천을 받아들이며 깊고 넓”으며 “깊거나 얕거나 간에” “평시에 소리내는 법이 거의 없”(7)는 강의 모습은 여산의 품성을 닮았다.

 

 

여산의 품성을 나는 성석제가 소설 속에 사람을 품어내는 모습과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책장을 덮고 이 소설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득 생각났다. 조폭이 나오고, 그들이 한 마을을 습격하는데 어느누구도 죽지 않는다니. 누군가를 싫어하면 상대를 타도해야할 절대악으로 보는 대부분의 방식과 곂쳐지지 않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을 습격한 조폭들을 보면 응당 느껴야 할 분노, 불쾌감 따위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정묵과 그의 식구들을 생각하면, 어쩌다 조폭 세계에 들어왔을까에 대한 호기심과 마을 사람들에게 당할 때 측은함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작가가 사람, 혹은 세계를 바라보는 따뜻함에서 나온다고 밖에 결론내지 못했다. (따뜻함의 다른 표현은 ‘해학’이다.) 책을 읽으며 피식피식 웃음이 터지는 이유도 바로 성석제가 사람을 빚어내는 방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해야겠다.

 

 

성석제의 따뜻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화합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사람들의 평화를 깨는 “불도저와 포크레인 같은 중장비”(210)들. 다시 말해 “기계 군단”(220). 이들은 강마을 사람들과 조폭 식구 간의 싸움마저 멈추게 만든다. 사람들이 다시 정착하려 하는 그 장소에 들이닥치는 폭력을 성석제는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자연과 마을과 사람들을 파괴하는 장비들을 보면서 성석제는 자신의 허리춤이 에리는 고통을 느낀다. 중장비를 묘사한 소설의 장면이 유일하게 섬뜩한 이유이다.

 

 

여산과 성석제를 빙빙 둘러왔지만 결국 소설이 나에게 던지는 물음은 가족이란 혹은 식구란 무엇이었던가에 대한 것이다. 많은 작품이 그렇듯 <위풍당당>도 물음만 던지고 떠나버렸다. 피를 섞은 가족보다 더 깊은 얘기를 하고 더 친밀한 사람들을 나는 ‘식구’라 불러야 할까. 내가 남루한 모습으로 찾은 것은 가족이었던가 식구였던가.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 다만 성석제가 제시한 여산과 마을 사람들을 통해, 상처투성이인 내가 찾아가는 곳의 방향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가족, 식구, 나... 조금 오래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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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펭귄클래식 48
조지 오웰 지음, 이기한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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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 본다는 것을 안다

-조지 오웰, <1984>

 

우리에게 ‘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근대 이후 ‘본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I see는 ‘알겠다’라는 표현이듯이.)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 태양을 관측했을 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루이 16세가 기요틴에 목이 잘리자 시민들은 비로소 혁명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안다는 것’은 다시 권력의 문제로 귀결된다. 기독교에서 구약의 하나님이 그토록 무서운 이유는 ‘전지’하고 ‘전능’하기 때문이다. 전능하기만 하면 신을 피해 도망다니면 될텐데 전지하기까지하니 지구상에 도망칠 구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전지한 신의 이름은 과거 여러 형벌에서 자백을 받아내는 중요한 도구로 쓰인다. 이를테면 “신은 네 죄를 다 알고 있다!”라는 식의 협박은 ‘안다는 것’과 권력의 상관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 협박은 하나의 전제를 필요로 한다. 바로 (그가) ‘본다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이다. 신이 전지전능은 그것만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전지전능의 권력은 작동되는 셈이다. 이것을 하나의 구조로 보여준 것이 파놉티콘이다. 파놉티콘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를 뜻하는 ‘opticon’을 합성한 단어다. 벤담이 소수의 감시자가 모든 수용자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감시할 수 있는 형태의 감옥이다. 파놉티콘의 작동 역시 수감자들이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통제한다. 수감자는 파놉티콘의 감시자가 언제 자신을 감시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긴장상태에 놓인다.

 

조지오웰의 <1984>의 사회 역시 거대한 파놉티콘에 갇혀있다. 작품 속에서 파놉티콘의 작동은 거리와 집 그리고 도시 곳곳에 설치된 ‘텔레스크린’을 통해서다. 텔레스크린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텔레스크린을 피해 ‘프롤’들의 거리로 도망친다. 만약 텔레스크린이 형벌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면, 그것들은 감춰져야한다. ‘BIG BROTHER IS WATCHING YOU’ 따위의 문구는 오히려 불필요하다. 작품 속 공간에서 텔레스크린을 통해 획득하는 건 자신이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로써 개인들은 자기 내면에 파놉티콘을 하나씩 세우고 빅브라더의 지배는 관철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텔레스크린은 CCTV다. 이것 또한 형벌의 목적 보다 감시와 예방의 차원에서 설치된 것들이 많다. 그래서 CCTV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설치되어있음’이라는 알림판이 존재하는 것이다. 과속을 단속하는 카메라 역시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함으로 운저자의 사고를 예방한다. 바로 어제, sns를 통한 선거운동 규제는 헌법을 위반했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왔다. 정부의 sns 규제 역시 내면의 파놉티콘을 세워 자기검열을 강화하려는 일종의 ‘텔레스크린’이다. 이런 규제와 감시의 본질을 알기 때문에 <나는 꼼수다>에서는 끊임없이 ‘쫄지마!’를 외쳐되고 있는 것이다.¹

 

이와 관련하여 영국의 뉴캐슬 대학에서 재밌는 실험을 했다. 대학휴게실에 텔레스크린처럼 감시의 눈을 붙여놓고 자유롭게 시설물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결과는 역시 감시하는 눈이 붙어 있을 때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냈다. 단지 종이로 붙여놓은 눈에 실험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흥미롭다.

 













[눈사진과 꽃그림을 번갈아가면서 붙였다. 눈사진을 붙인 주가 최대 3배 더 많은 돈을 거뒀다. (출처 : kbs 특별기획 ‘사회적 자본’)]

 

 

<1984>의 세상은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이 어떻게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것이 오웰이 예견한 1984년 이후 지금까지 적용되는 건, 아직 우리가 ‘본다는 것’의 권력이 작동하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동을 깨기 위해한 하나의 방법은 모두가 ‘본다는 것’을 알고, 이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걸 ‘그들’(빅브라더)에게 다시 ‘보여준다’면 가능할지도.

 

 

 

 

1) 이와 관련하여 ‘조중동’류의 기사를 보면 흥미롭다.

조선일보 12/30 [전문가들 "SNS 표현자유 보장 좋지만… 흑색선전 막을 장치 필요"]

매일경제 12/30 [헌법재판소, SNS 선거운동 허용 결정…"과열선거 우려"]

조선일보는 ‘전문가’의 이름을 들어 표현의 자유보다 흑색선전을 우려하는데, 진짜 흑색선전의 원조는 누구인지 되돌아봤으면 한다. 매일경제 역시 그러한데, 과열선거는 sns가 없었어도 언제나 있어왔다. 선거는 늘 과열되어야 한다. 과열되서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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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대위의 딸 펭귄클래식 29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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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과 전두환에 대한 생각

-알렉산드르 푸슈킨, <대위의 딸>

 

인간을 이해하면 역사를 이해할 수 있을까. 푸슈킨의 소설 <대위의 딸>은 러시아의 푸가초프의 난을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소설은 역사기술이 주목하지 않았던 개인의 삶을 보여준다.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표트르 안드레예비치는 국경지역에서 근무를 서게 된다. 그곳에서 자신의 상관이 대위의 딸 마리야와 사랑에 빠지는데, 그때 푸가초프의 난이 일어나 마을이 점령당한다. 그런데 푸가초프는 언젠가 표트르가 도움을 준 적 있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그와 그녀는 살아남아 도망가게 된다. 푸가초프의 난은 진압되고 표트르는 죄인에 협력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지만 가까스로 표트르와 마리야는 위기를 벗어난다.

 

단순한 전개지만 기존에 기술되었던 역사와 비교해 본다면 흥미롭다. 특히 반란군의 수장 푸가초프는 작품 속에서 호탕하고 쾌할하게 그려진다. 푸가초프는 자신이 어려울 때 돈과 옷가지를 주었던 표트르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러시아 정사(正史)에서 보면 푸가초프는 반란을 꾀한 패악한 인간이다. 그러나 표트르 개인으로 보면 푸가초프는 생명의 은인이다. 푸시킨이 던지는 문제의식은 이런 것이다. 역사에서 패악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그가 한 개인에게는 어떠했는가라는 물음 말이다. 그래서 표트르가 푸가초프의 죽음을 생각할 때 이렇게 말한다. “그 사내를 떠올릴 때면 항상, 그가 자기 생에서 악행이 정점에 달했던 순간에 내 목숨을 살려 준 일과 내 약혼녀를 추악한 시바브린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줬던 일이 동시에 떠올랐다.”(160 -펭귄클래식)

 

역사연구로 치면 미시사(微示史)에 가까운 이 소설이다. 읽으면서 미시사에 관찬 책인,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가 생각났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인데, 기독교적 세계에서 이단으로 취급받아 재판을 받고 죽기까지의 과정이 한 권의 책에 담겨 있다. <대위의 딸> 역시 개인의 삶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문득 전두환이 생각났다. 전재산이 29만 원 밖에 없는 그다. 그런데 전두환이 지금까지 살아남고 생계를 유지하는 이유는 그가 독재정권 시절에 도움을 준 몇몇의 사람들 때문이다. 그는 자기 밑에 있는 사람에게 푸가초프 같은 인물이었다. 에를 들어, 어떤 부하직원의 어머니가 아팠을 때, 그는 직접 병문안을 찾아가고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의 부하사랑은 끔찍했다. 밖으로는 거대한 독재자였으면서도 한 개인에게는 더없이 좋은 상사인 셈이다.

 

전두환을 제쳐두고라도 어떤 독재자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었을 수 있다. 그래서 박정희가 칭찬 받는 것인지도 모르고, 박근혜가 부모를 잃은 가엾은 아이로 동정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두환의 부하는 지금까지도 극진히 그를 모신다. 아마 그것은 죽음에서 자신을 구해준 표트르가 푸가초프에게 갖는 감정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역사의 이해와 개인의 이해 사이에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하는지 많은 질문을 던져준다. 인간을 이해하면 역사를 이해할 수 있을까? 뒤집어, 역사를 이해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집안에서는 평온한 가정의 가장이었을 어떤 독재자가 생각나는 밤이다.

 

푸가초프의 사진. 생각보다 온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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