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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의 역사담론 1
오항녕 지음 / 너머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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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오항녕 너머북스 371

 

책에 대하여

오항녕교수가 <광해군>을 펴냈을 때 영화 <광해>의 열풍을 예상하지는 못했겠지만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소재의 책과 영화가 나와 서로간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나보다. 이 책에 나오듯 정상적인 중고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광해군에 대해 명청 교체기에 중립외교를 펼치다가 안타깝게 왕위에서 쫒겨난 비운의 국왕 정도로 이해하는게 보통이다. 그러나 오항녕의 <광해군>은 그런 일반적인 인식에 경종을 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대포를 쏘고 있다. 이 책의 논지는 너무 분명하다. 광해군은 폭군 또는 혼군이 맞으며 쫒겨날만 해서 쫒겨난 왕이다. 고로 인조반정은 광해군의 실정을 바로잡은 정당한 행위고 백성들이 비로소 삶의 자리를 되찾은 계기다. 이러한 논지를 증명하기위해 책을 전체 7장으로 나누어 시대순이 아닌 사안별로 챕터를 설정했고 앞뒤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덧붙였다. 대중역사서이기는 하지만 문체가 대화체 비슷하고 간혹 질문과 복습, 강조와 주의도 등장해 마치 선생이 학생에게 강의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본인이 듣기싫어할지 모르지만 김용옥을 본딴 듯 하다는 생각도 든다. 오항녕교수는 한문을 제대로 공부한 조선시대전공자로 그가 학위를 받았던 실록연구를 통해 광해군의 실정을 비판하고 있다. 몇 년전 율곡의 십만양병설문제로 역사평론가 이덕일씨와 논쟁을 벌여 주목을 받았다.

 

내용에 대하여

책을 읽다보니 그토록 무능하고 백성을 외면한 광해군을 지금은 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과연 광해군은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나? 광해군에 대한 연구가 많지는 않지만 책에서 밝혔듯 최초로 긍정적 관점에서 본 것은 일본학자였다. 본격적인 국내학자들에 의한 연구에서는 긍정이냐 부정이냐를 논하지 않고 당대의 실상을 밝히는 작업이 주였다. 오항녕이 콩쥐팥쥐 프레임이라고 부르는 역사인물 평가는 일반대중이 하지 역사학자들이 내리는 것은 아니다. 광해군에 대한 대중의 긍정적 동정적 이미지는 식민사관의 광해군 찬양이후 이병도박사를 거쳐 교과서에 외교업적이 부각되면서였다. 그것은 조선왕조 내내 폭군으로 푸대접을 받아왔던 불운한 왕에 대한 동정이지 복권은 아니었다. 게다가 강대국 사이에 낀 한국의 현재적 상황이 광해군대와 비슷하다는 느낌에 위정자들도 광해군을 언급하기도 했다. 학자들에 의한 연구에서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면 그런 격하의 세월에서 그나마 연산군보단 낫다는 무의식이 외교차원의 업적으로 나타난게 아닐까. 광해군이 내치를 잘했다는 연구결과는 들어본 적이 없다.

저자는 정확한 전거와 사실관계를 통해 광해군을 비판하고 있다. 대동법이 정상적으로 시행되거나 확대실시되지 못한 점, 계속되는 역모사건과 친국, 궁궐건축에 집착하여 백성을 괴롭히고 재정을 탕진한 잘못, 준비도 원칙도 없는 기회주의 외교, 그리고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경연미실시 등이다. 개설서에 의하면 광해군대의 치적으로 대동법시행과 중립외교를 드는데 저자는 오히려 그 두가지가 다 엉터리라는 것이다. 대동법의 확대시행을 건의한 신료들에 맞서 가장 반대를 한 것은 다름아닌 광해군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기에 시범실시된 선혜지법도 나중엔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살제폐모로 대표되는 역모사건은 후일 인조반정에서 광해군의 폐위사유 1호가 되었다. 업적으로 불리는 중립외교의 실상은 사실 기회주의 외교이며 아무런 준비나 대책도 없이 떠밀려 파병한 결과 참패로 나타났다고 한다. 특히 저자는 기존의 학자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두가지 문제를 특별히 자세하게 살펴 광해군이 폐위될만한 불량군주임을 밝힌다. 첫째가 지나친 궁궐건축사업이다. 임진왜란때 다 불타버린 궁궐을 새로 짓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지만 창덕궁이 완공되고 나서도 창경궁 인경궁 경덕궁을 계속 짓느라 재정은 텅비고 민력이 고갈되어 원성이 높아지고 급기야 군량미까지 전용했다고 한다. 또하나는 경연회피다. 경연이란 신하들이 치국에 필요한 유교경전을 왕에게 강론하는 수업시간을 말하는데 경전의 수업만이 아닌 국가의 주요대사나 왕과 신하들의 공적 사적 문제까지 함께 의논하는 자리였다. 이런 경연을 광해군대에는 불과 십수회만 열었다는 것이다. 경연은 매일 여는 것이고 원칙은 1일3강이었다.

 

이런 왕이니 폐위되는 것이 당연할까? 그보다도 오항녕교수가 지적한 이유는 광해군은 조선이 존속가능케한 원동력인 문치주의 원칙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제도, 왕과 함께 토론하는 경연제도, 국정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언관제도. 이 셋이 조선 문치주의의 근간인데 이를 뒤흔든 것이 광해군이므로 폐위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의문 또는 비판

이 책에는 전제가 있다. “조선이 일제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인조반정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 엉터리 명제가 신봉되는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근대주의의 함정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근대주의란 역사진행과정에서 근대를 도달해야할 목표나 이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주의는 서유럽중심의 사관이고 아무런 준거도 없는 경제주의일 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맑스적 진보사관이나 자유주의 발전사관이 모두 잘못이다. 그런데 우리가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근거가 바로 근대주의이므로 잘못된 틀로 잘못된 틀을 깨려는 오류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인조반정이 없었으면 청의 침입을 받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후일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되도 않는 가정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저자의 견해에 비판을 붙이기 시작하면 한이 없을 듯 하여 또다른 논문이 하나 나와야할 것 같다. 그러나 능력이 미치지 못하니 여기서 의문스런 소재 몇가지만 들어보고자 한다.

 

▲‘근대’가 역사학이 또는 시민사회가 도달해야할 최후의 가치가 아니라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현재적 관점에서 최선의 상태가 ‘근대(현대)’이기 때문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자력인지 타력인지는 탐구해보자는 것이다. 근대를 경제주의 관점이 아닌 다양한 가치관의 집합 즉 민주나 인권, 자유 등 보편적 인간의 발견으로 보아야 한다.

 

▲조선 문치주의 트로이카라는 경연관 언관 사관의 의미부여는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 500년을 유지시킨 왕도정치라고 하기에는 좀. 조선을 유지시킨 문치주의라면 언관이 대신을 견제하고 이조전랑이 언관을 통솔하고 대신이 전랑을 부하로 삼는 삼각체제가 더 적절한 메커니즘일 것이다.

 

▲저자는 실록기사에 대해 큰 신뢰성을 보이며 승자의 기록 따위는 없다고까지 표현하는데 실록의 재편찬 자체가 기록주체에 따른 사실관계 왜곡을 의미한다. 선조수정실록이나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 경종실록 등 집권당에 따라 실록이 재편찬되는 것이 가장 큰 반증 아닌가. 그리고 실록이 그리도 믿을수 있다면 광해군이 아프다는 기사는 왜 믿을수 없다고 하는지.

 

▲경연에 대단히 큰 의미를 부여하고 옥사와 친국 때문에 경연이 열리지 않은 것을 비판했는데 조선의 문치주의가 경연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전까진 경연을 안 열었다고 폭군이며 폐위될만 하다는 논리는 지나친 비약으로 보인다. 오히려 정치사적 접근이라면 광해군은 왜 그토록 옥사에 매달렸는지 분석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한명기교수는 대동법실시와 동의보감 편찬이야말로 민중대책의 첫번째라 해서 큰의미를 두는데 오교수는 전혀 아니다. 공안개정이나 양전을 못했다고 광해군을 비난한다. 그런데 그 두가지가 그리도 중요한 일이었다면 연산군이후 중종대는 왜 못했으며 사림세력이 전면에 등장한 선조대는 그 오랜 기간동안 왜 공안을 못고쳤는지.

 

▲한명기교수는 탁월한 중립외교라 하는데 오교수는 원칙없는 기회주의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인조는 그 기회주의도 못해서 나라와 백성을 두 번이나 욕보이지 않았던가. 강홍립의 원병이 출전해서 한번 전투에 9000명이 죽었다고 하지만 병자호란시 죽거나 포로로 끌려간 수만명의 생명은 어떻게 보아야하는지. 혼군을 내쫒고 권력을 얻은 서인들은 대가로 나라를 내주었는데 이는 어찌 평가해야 하는지.

 

▲광해군의 형제살해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 국왕중에서 친척이 역모에 등장하지 않은 경우가 몇 번이나 있을까. 더구나 그런 살해행위를 비난하고 등장한 인조역시 숙부를 처형하고 나중에는 친아들과 며느리와 친손자까지 죽인 왕이다.

 

결론적으로, 광해군은 명군이나 현군이 아니다. 어떤 사서에서도 그렇게 보지 않는다. 다만 대명의리만 외치던 당시 분위기에서 원수였던 일본과 외교를 재개하고 오랑캐인 후금의 실상을 파악하여 적대관계를 피하려했던 그 의지만은 인정할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기존에 중시하지 않던 사료를 발굴하거나 의미를 부여해서 광해군이 왜 폭군으로 불렸는지 실증적인 사유를 추론해갔다. 백성들을 돌보지 않는 왕은 더 이상 왕으로서의 존재의미가 없다. 그런측면에서 인조의 쿠데타는 정당성을 가질수 있다. 그러나 광해군을 비난하려면 인조대에 이전의 실정이 바로잡혀 문자그대로 반정反正이 이루어졌어야 한다. 오항녕교수의 신작은 광해군비판에만 치중하여 정작 주인공인 백성들의 반향을 미처 살피지 못한 점이 없지나않은지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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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리더십 - KBS스페셜, 나를 행복하게 할 리더는 누구인가?
이재혁.KBS 스페셜 제작팀 지음, 서승범 정리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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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리더십

이재혁,KBS스페셜제작팀 지음 / 서승범 정리

RHK. 351

 

서점에 가보면 무수히 많은 리더십관련 책들이 있다. 리더십이란게 정의하기에 따라 여러개념이 나올수도 있거니와 어떤 때는 모든사람이 리더십을 가지면 팔로워십은 대체 누구에게 필요한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이 <행복의 리더십>은 저자의 말처럼 감성과 논리가 섞이고 추상성과 구체성이 비벼져있어 일견 명확한 개념이 잡히지 않는다.

 

2012년초 KBS에서는 “행복의 리더십”이란 제목으로 신년특집 다큐를 방송했다고 한다. 나는 못봤는데 이 책은 그 특집을 다시 책으로 엮은 것이라 한다. 그러니 이미 많은 사람으로부터 확인과 동의를 거쳤다는 얘기다. 주제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리더를 찾는다.”이다.

 

이를 위해 전세계 여러 리더를 찾아 면담과 취재를 하여 행복 리더십의 개념을 제시하고 다가올 대통령선거에서 바람직한 리더를 고를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다. 서두에서는 설문조사를 통해 이시대 우리나라사람이 원하는 리더의 조선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소통과 솔선수범, 비전과 변화주도, 포용’ 등이다. 그동안 우리 지도자들에게 이런 덕목이 얼마나 부족했으면 이처럼 평범하고 당연한 가치를 제시했는지 너무나 공감이 간다. 차기 대통령의 유형을 묻는 설문에서도 1위는 ‘국민소통형’이었다. 이제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리더의 유형은 정치권이건 경제계건 카리스마있는 탱크주의 리더였다. 흡사 군인 지휘관같은 이 리더십은 제왕적 대통령과 오너 회장님으로 대표된다. 그러나 이 책에 의하면 이제는 시대와 환경이 변했다. 이제 시민들이 원하는 리더의 조건은 다음 여섯가지 키워드로 대변할수 있다. 즉 ‘소통과 공감, 정의와 책임, 혁신과 미션’이다.

 

이러한 조건을 맞춰 여러 리더를 찾아나서는데 브라질의 룰라, 이집트의 시민리더십, 처칠의 공감, 구글 시스코등 기업, 후쿠시마와 히틀러의 불통사례, 월가의 비극, 기업의 공유가치, 이나모리 가즈오, 공자리더십, 빌리브란트와 이태석신부의 서번트리더십, 핀란드 할로넨대통령, 그라민은행 유누스총재, 슘페터의 혁신, 리콴유, 시몬페레스 등 리더와 리더십의 현장을 살핀다.

 

이렇게 내용에서 나타나듯이 이 책은 일반적인 리더십에 관한, 혹은 성공을 이끌어낸 리더에 대한 비법 탐구가 전혀 아니다. 리더십이란 용어가 없어도 이책은 변화와 혁신에 대한 책으로 알맞다. 다시말하면 변화에 더해 공감과 정의라는 가치를 포함한 일체의 창조행위를 리더십이라 이름한다. ‘닥치고 나를 따르라’거나 ‘안되면 되게하라’에 익숙해진 우리 눈에는 상당히 참신하다. 그래서 내용을 읽어보면 개인적 리더십 뿐만 아니라 시민전체가 리더인 경우도 나오고 정치와 사회조직, 기업과 기업가 정신이 등장한다. 어찌보면 화합으로 이룬 성공사례와 그 반대인 독선으로 망친 사례를 리더십으로 풀어본 책이라 할수 있다.

 

리더의 일반적 필요조건이 소통과 공감이라면 충분조건은 정의와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대 우리나라에 얼마나 정의열풍이 불었던가. 그 이후 조금 정의로와졌던가? 이 책에서 말하는 정의란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할 일을 구분하고, 해야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즉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고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책은 월가의 예를 든다. “세계를 뒤흔든 금융사고가 일어났는데 누군가가 분명 잘못된 판단을 했고 피해자와 피해액은 엄청난데, 잘못은 했지만 책임은 지울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면죄부와도 같은 법과 제도에 따라 성과급을 받았다.”(p.138)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가치를 말하고 이를 실천한 인물로 교세라 이나모리 가즈오회장의 예를 들었다.

 

한편 서번트리더십을 말하면서는 빌리브란트와 이태석신부를 예로 들었다. 서번트리더란 무슨 뜻인가. 구성원사이에 소통의 허브가 되어 구성원들이 각자의 입장과 능력에 맞는 최고의 결과물을 뽑아내게 한다는 것이다. “리더가 지위가 높거나 거느린 사람이 많은 이를 뜻한다면 이태석 신부는 리더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변화시켜 지금보다 더 나은 곳으로 이끄는 이를 리더라 한다면 이태석신부는 분명 위대한 리더다.”(p.184)

 

그다음 불합리한 현실을 변화시키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혁신이며 왜 혁신해야 하는지

그 사명과 이유를 말해주는 것이 미션이다. 이 여섯가지가 이 시대에 필요한 리더의 조건이다. 그러나 책은 리더를 찾는 것 외에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강조한다. 즉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 바로 당신들이 모두 팔로워인 동시에 리더라는 것이다. 개인은 누군가에게 분명히 리더이며 사회는 개인의 조합이다. 그리고 지금 사회는 1인 리더십의 시대가 아닌 집단으로 실시간 연결되는 웹3.0의 시대다. 따라서 이제는 거창하게 나라와 민족을 구할 리더가 아닌 당신 개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리더를 찾으라는 것이다. 물론 이책에서는 행복의 조건이 돈이 아닌 다양한 가치에 있음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얼핏 이책은 조직과 경영에 관한 이론해설서로 보이기도 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성공학개론으로 읽힐수도 있다. 차라리 내용에 따라 리더십을 분류하지 말고 성과의 현장에 따라 분류해서 공통의 속성을 찾아내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 더 낫지 않나 생각도 든다. 또 리더십에 광범한 해석과 적용을 가하다 보니 행동의 원칙과 정의에 대한 논술로 변질되는 듯한 모습도 약간 보인다.

서문에는 해외를 돌면서 김정운교수가 많은 수고를 했다고 나왔는데 책에서는 전혀 나와있지 않고 공동저자도 아니다. 무슨 역할을 했는지? 또 국내의 리더에 대한 분석이 전혀 없는 것도 보완할 점이 아닌가 한다. 이태석이나 반기문은 국내에서 활동하는 인물이 아니다.

 

앞으로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대통령을 뽑는 시점이 다가왔다. 누구를 뽑을 것인지 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책은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밥에 그나물이라는 냉소주의를 극복해야 현실이 변한다. 모두가 리더로서 자각할 때 소통과 정의가 빛날 수 있을 것으로 가대하면서 이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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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은둔의 땅, 무스탕을 가다
백경훈 지음, 이겸 사진 / 호미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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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여행기다  그런데 읽다보면 단순한 여행기라기 보다는 탐험의 기록이고  히말라야 자연에 대한 사진집이기도 하고  트래커의 수필이기도 하다. 보다 근접하게 표현하자면 아마도 이 책은 저자가 태고의 순수한 모습을 찾아가는 구도일지가 아닌가 싶다.

이 책속에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다울라기리 등 적지 않아 귀에 익숙한 이름들이 나온다. 처음에는 어느 신문에서 누군가 등정했다는 소식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는데 다 읽고나서 나는 어느새 무스탕의 아련한 팬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태고’라든가 ‘순수’, ‘천연’ 등등의 어휘가 이 책만큼 어울리는  다른 책을 보지 못했다고 단언하고 싶다. 마치 내가 저자와 같이 무스탕을 탐방한 느낌이 들어 그런 것이리라.

네팔과 티벳 사이에 있는 오래된 고산 왕국 무스탕, 해발 4000미터를 넘나들며  찾아간 지구상에 몇안되는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곳이다. 사진을 봤을때의 그 황량함과 시원함,  저자의 글을 읽고 사진을 보면서도 기슴에 와 닿지 않던 그 모습이 막상 책을 덮고 나니 이른 새벽 물안개 처럼 밀려온다.

나도 저자처럼 모든 것을 제쳐두고 미지의 세계로 떠날 수 있을까. 대단한 용기다.  그 원시의 공기가 주는 희열과 감동을 맛볼수만 있다면 일생에 한번쯤 떠나 볼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들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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