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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 생태적 대안운동을 찾아서 희망제작소 프로젝트 우리시대 희망찾기 8
구도완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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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민간 싱크탱크 희망제작소에서 진행하는 ‘우리시대 희망찾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주로 현장의 실제 사례 분석을 통해 아래로부터 희망의 단서를 찾기 위해 노력해온 프로젝트의 여덟 번째 출판물인 이 책은 (다소 포괄적인) ‘생태적 대안운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저자는 기존 사회운동은 권리 담론을 바탕으로 국가와 시장을 비판하면서도 국가와 시장의 문제 틀 안에 있지만, 생태적 대안운동은 성찰 담론을 바탕으로 삶의 공동체를 통해 국가와 시장을 넘어서려는 시도라고 말한다(p. 333). 즉 생태적 대안운동은 과학적 이론에 근거하기보다는 그 자체로 삶의 방식이다. 이때의 ‘생태’적 원리란 과거 환경운동이 대상으로 삼던 자연이나 환경 같은 좁은 의미의 ‘생태’를 넘어서 사회적 호혜와 연대, 자율적 지배, 내적 성찰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다(p. 338). 즉 생태의 원리를 삶 속에서 실천한다는 의미이다.

 

책에서는 ‘생태적 대안운동’을 하고 있는 24명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구술자들의 활동분야는 크게 마을 공동체, 대안 경제(협동조합, 사회적기업), 농촌(농사)공동체, 대안교육, 소수자운동 등으로 나뉠 수 있다.

 

·         마을공동체: 서울 성미산마을, 부산 반송 희망세상, 부산 물만골공동체, 경남 산청 안솔기마을

·         협동조합: 서울 한살림, 서울 신나는조합, 원주 협동조합협의회, 원주 밝음신협, 인천 평화의료생협

·         사회적기업: 아낙과사람들, 노리단, 페어트레이드코리아, 키친아트, 애자일 컨설팅

·         농촌(농사)공동체: 전북 부안 시민발전소, 경기 시흥 연두농장, 경기 안산 텃밭공동체, 전북 남원 한생명, 전북 진안군 마을만들기팀

·         대안교육: 도서출판 민들레, 경남 산청 간디학교

·         소수자운동: 서울 여성의전화, 서울 이주노동자센터, 이랜드 일반노조

 

저자의 원래 의도는 구술자들의 삶을 주제별로 나누어 분석하는 것이었다고 한다(2). 그러나 그러다보니 각 구술자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통 알 수 없게 되어 버려서 구술자별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부분(1)이 더해졌다.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부록처럼 추가된 1부가 훨씬 흥미롭고 재미있다. 구술자들이 어떻게 해서 ‘생태적 대안운동’을 하게 되었고, 무엇을 이루었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  심층 인터뷰이기 때문에 남의 삶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을 뿐 아니라 새로이 등장하는 사회운동의 일면을 경험할 수 있었다. 1부에서 다루고 있는 사례들 중에서는 1) 마을이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 그것도 가장 빠르게 변한다는 대도시 서울에서 뜻맞는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만들어서공동육아를 하는 성미산 마을, 2) 철거 위기를 극복하고 마을주민이 공동으로 땅을 매입하여 생태마을로 거듭난 부산 물만골 공동체, 3) 핵폐기장 반대운동의 성과를 넘어 에너지 자립을 실현해가는 부안 시민발전소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그밖에 여러 농촌(농사) 공동체 이야기 등도 흥미롭다. 물론 다른 사례들도 모두 유의미하지만, 이 사례들은 환경 및 에너지 문제와 관련하여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 가능성이 의심을 받는 이 시대에 느리게 살고, 적게 소비하고, 적게 움직이며, 덜 가지고 사는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더 가치를 두고 싶다. 각 사례들에 대해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해 자세히 다루었으면 좋았을텐데 책에서는 인터뷰 내용을 대폭 축소하고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 점은 아쉽다.

 

아마도 이것은 저자가 2부에 더 많은 애착을 가졌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저자가 원래 의도한 핵심 부분인 2부는 오히려 저자가 인터뷰를 임의적으로 편집하고 자기 의견을 덧대어서 조금 답답하고 지루하다. 그래서인지 딱히 어려운 개념이나 표현이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더디게 읽혔다. ‘책머리에’에서 연구방법론에 관한 설명이 다소 장황하게 소개되는데, 오히려 그 방법론에 대한 집착이 이 책의 발목을 잡은 것 같다. 사례분석에 기초한 연구방법론에는 크게 법칙정립적(nomothetic) 방법과 개별기술적(idiosyncratic) 방법이 있다. 법칙정립적 방법은 사례들로부터 보편적 법칙을 탐색하는 반면, 개별기술적 방법은 개별 사례들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물론 사례연구라고 해서 항상 이 둘 중 한가지 방법론만을 고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디에 해당할까?

 

내가 보기에 이 책의 정체성은 모호하다. 저자의 원래 의도는 법칙정립적 방법에 가까웠던 것 같다. 법칙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과학자의 강박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구술을 단순히 기술하는 것만으로는 책의 가치가 (아니, 엄밀히 말해 저자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저자는 ‘구술자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1부를 추가했는데, 여기서도 구술자들의 의견을 종합하고 이론적 살을 덧붙여서 자신의 주장을 덧붙이는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대놓고 법칙정립적 방법을 활용하는 듯한 2부에서는 주제별로 구술자들을 끌어들인다. 저자가 (구술에 바탕해서) 설정한 주제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고 거기에 맞춰서 구술을 인용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시도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오류가 여기서도 발견된다. 바로 저자가 증명한 법칙이 과연 얼마나 일반적인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법칙을 과연 정립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물음에서 비롯된다. 24명의 인터뷰를 통해서 법칙을 정립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24명은 과연 ‘생태적 대안운동’을 대표하는가? 첫 번째 질문은 연구자에 따라 논란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일단 ‘그렇다’라고 해두자. 그러나 여전히 두 번째 물음은 유효하다.

 

구술을 논거로 삼아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구술자들에게 권위도 대표성도 없다. 여기서 권위나 대표성이란 구술자들의 파워나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샘플의 대표성을 말하는 것이다. 샘플링에 대한 타당성이 증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술을 주장의 논거로 삼는 것은 매우 조잡하고 설득력 없는 글쓰기 방식이다. 아닌 게 아니라 2부와 (특히) 맺음말에서는 구술과 주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따로 논다. 구술과 주장이 연결될 때조차도 그 방식이 느슨하고 모호하다. 예컨대 본문에서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관한 질문에 대한 구술자들의 ‘답안’을 죽 정리했는데 맺음말에서는 구술자들의 활동이 사회문제에 대한 인과분석에 입각하지는 않는다거나 구술자들이 속한 활동 영역에 따라 사회문제 책임론이 다르게 나타났다는 식으로 저자가 짤막하게 정리하는 식이다. 이건 일반화도 아니고 개별기술도 아니다. 어중간하다. 현장에서 희망을 찾는 게 목적이었다면 1부와 같은 포맷만으로 책을 저술하거나 1부를 더 늘리는 게 어땠을까 싶다.

 

프로젝트의 제목을 ‘우리시대 희망찾기’라고 했다. 누구를 위해서 희망을 찾으려는 걸까? 활동가들을 위해서? 일반인들을 위해서? 이런 책의 포맷은 활동가들에게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진지하게 자신의 삶에서 생태적이 대안을 실천하고자 하는, 혹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볼까 하는 일반인들에게는 이런 포맷이 불편하기만 할 것같다. 그런 점이 못내 아쉽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책이다. 최근에 읽은 책 중 읽으면서 갈무리를 가장 많이 한 책인데 그걸 서평에서 다 다루면 분량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많이 언급하지 않았다. 궁금하면 책을 읽어 보길 바란다. (500원 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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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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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90년대 중반 대학가에서는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갈라서지 말아라 힘을 합치자.”라는 NL 의 노래가 유행했다. 이에 대해 PD 쪽 후배들이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헷갈리지 말아라 사회주의다”라고 개사해서 부르는 것을 듣고 실소를 금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NL이나 PD NLPDR론이라는 한뿌리에서 나왔고 다만 선결조건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며 NL이 이런 식의 노래를 자꾸 유포하는 것은 대중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이런 류의 노래가 지나치게 빈번하게 들릴 때마다 정말로 NL이 통일을 최종목표로 삼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만약 지젝 선생이 한국의 NL이 했던(혹은 지금도 하고 있는) 운동 방식을 알았더라면 이 책에서 중요한 소재로 다루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지젝은 2011년 중동(아랍의 봄), 유럽(영국, 스페인, 프랑스 등에서의 저항운동), 미국(월스트리트 점령 운동) 등지에서 벌어진 자연발생적 저항운동을 소재로 삼아 운동의 방향성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책의 원제는 The year of dreaming dangerously <위험한 꿈을 꾼 한 해>쯤 되겠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지젝은 그 꿈이 충분히 위험하지 않았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운동의 방향성 상실 때문이다. 방향 잃은 저항을 경고하는 메시지는 <점럼하라>의 한 꼭지로도 실렸고 이 책의 서문에 다시 실린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훗날 "그때가 좋았는데."라고 술이나 마시며 그날을 안주거리로 삼을 게 아니라 지금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진정으로 원해야 한다.

 

아랍의 봄은 이슬라모파시즘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역사에서 이슬람 국가의 세속적 좌파의 소멸과 정확히 상응해왔다. 아프가니스탄이 40년 전만 해도 강력한 공산주의 국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뚜렷한 대안 없이 독재자만 축출하면 만사 해결될 줄 알았던 아랍에서 해방적 잠재력의 수혜자는 군부와 이슬람주의자다.

같은 맥락에서, 21세기를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고 부르기 좋아하는 보수주의 논객들의 주장에 부응이라도 하듯 영국 폭동 가담자들은 아무런 요구도 내걸지 않았다. 그들의 저항은 현실적 대안도, 일관된 유토피아적 기획도 없이 무의미한 분출에 그치고 말았다. 스페인 인디그나도스의 선언문도 비정치를 넘어 탈정치적이다.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에 빠진 운동은 점점 추진력을 잃어 갔다. 경제위기의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월스트리를 메인스트리트로 대체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메인스트리트가 월스트리트에 종속되는 시스템이 문제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은 방향을 못찾고 딜레마에 빠져 있었고참가자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저항이 오히려 시스템을 강화한다. 환경오염 기업, 부패한 은행가, 아동 노동착취를 규탄하는 일은 넘쳐난다. 그래서 언론의 압력을 가하고, 감사와 규제를 강화하며, 경찰 수사를 강화하면 된다는 주장은 넘쳐난다. 이런 식의 해결책은 근본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부르주아 법치국가의 민주주의 제도를 강화한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저항을 멈추는 순간이 오히려 시스템을 위협한다. 중요한 것은 사법부의 독립, 언론의 자유, 자유선거, 인권이 아니다. 핵심은 시장에서 가족에 이르는 사회적 관계들의 그물망에 있고, 이 영역을 진정으로 개선하려면 정치가 아니라 비정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혁이 필요하다.

 

지젝은 오늘날 벌어지는 운동은 미래에서 보내온 징후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흔히 역사주의적 관점이 그러하듯이 그 징후는 맥락과 기원을 바탕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미래의 관점을 적용하여 현재에는 숨겨진 유토피아적 미래의 파편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징후는 중립적, 객관적이지 않다. 오직 참여적 입장에서만 발견된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신은 진심으로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분명히 나타난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진리는 참여적인 계급적 입장에서만 인식될 수 있다.

 

구소련 몰락 후 인권, 페미니즘 등으로 선회했던 좌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들이 기다려온 경기 침체와 사회적 해체가 도래했고, 전 세계적으로 시위와 반란이 속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에 대한 좌파의 일관된 대응과 섬처럼 흩어져 있는 혼란스런 저항을 적극적인 사회변화의 시도록 바꾸기 위한 기획은 명백히 부재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틀린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와 20세기 좌파의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들은 몽상적이었다기보다는 너무 미래적이었다.

우리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시스템의 관성에 저항해 작은 싸움을 벌이기를 중단하고, 다가올 더 큰 전투를 위한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 혁명 없는 반란 정신은 무기력하다.

 

지젝은 방향을 제시한다.

멈춰라, 생각하라. 답은 공산주의다.

 

위험한 공산주의자지젝의 면모는 이 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지젝은 이 책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공산주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거리낌없이 해댄다. 그것도 단순무식하고 교조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해박한 지식과 충분한 철학적 사유에 근거하여 때로는 논리정연하게 때로는 신랄하게 주장을 전개한다. 이렇게 똑부러지게 분석하고 비판하고 공산주의를 옹호하면 현체제를 고수하는 자들에게는 지젝이 위험해 보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지젝이 거리낌없이 내세우는 대안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해 충분히 길게 비판하고 그 대안은 공산주의라고 너무 간단하게 말하고 만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도 고개만 갸우뚱하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해 이 책은 공산주의에 대한 해설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젝의 의도는 20세기 좌파의 몰락이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는 강력한 변혁의 무기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공산주의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등은 정 궁금하면 다른 책에서 찾아보고, 지젝에게서는 그의 의도에 맞는 독해를 해나가면 되겠다.

 

 

다음은 오타 및 오류들. 다음 쇄에서 수정되면 좋겠다.

 

9쪽 밑에서 다섯 번째 줄. 세상는 세상은

102쪽 밑에서 일곱 번째 줄. 점점 더 커 지는 동시에 점점 더 커지는 동시에

182쪽 중간. 실제추구하는 실제 추구하는

189쪽 중간. 오마 이사야 베츠 오마르 이사야 베츠 (191쪽에서는 오마르라고 썼다.)

212쪽 각주. 꿈구지만 꿈꾸지만

215쪽 위에서 세 번째 줄. 빈민주주의자가 반민주주의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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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찾는가 -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대안 노벨상 수상자들 이야기
게세코 폰 뤼프케 & 페터 에를렌바인 엮음, 김시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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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 금융위기 때 폰지 사기라는 용어가 다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폰지 사기란 신규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배당금을 지급하는 수법이다. 겉으로는 호시절을 누리고 있는 듯 보였던 월가는 사실 밑빠진 독에 물붓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폰지 사기를 통해 드러났다. 이와 같이 뒷 세대의 희생을 바탕으로 현 세대의 이득, 안전, 존립을 보장하는 방식을 모두 폰지 사기라고 지칭할 수 있는데, 한국의 경우 국민연금 지급 방식이 폰지사기나 다름없다며 납세자연맹을 중심으로 연금탈퇴 운동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지금우리 모두가 더 크고, 더 재앙적인 폰지 사기의 공모자들이라는 사실은 크게 주목 받지 못하고 있다. 환경문제 말이다. 우리는 우리 후손들의 몫으로 남겨진 자연을 멋대로 끌어다가 제것으로 쓰고 있다. 기껏해야 100년을 사는 인간이 자신이 사는 동안 생각 없이 자연을 착취하는 것은 이기심을 넘어 죄악이다. 

환경문제와 관련된 우려섞인 보고서들이 쏟아져나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각하게 고민하려 하지 않는다. 설사 문제를 인식한다 하더라도 문제 해결을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부모와 조부모 세대가 끌어다 쓴 자연은 지금 폭설, 폭우, 혹한 등의 형태로 생채기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끌어다 쓰고 있는 자연은 어떻까? 50년 뒤 자연이 보여줄 생채기가 지금보다 더욱 심할 것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20-30년 전만 해도 고기를 먹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웬만하면 고기다. 고기 없는 식사를 하면 먹은 것 같지가 않다. 대량생산 기술의 발달로 그 어느 때보다 고기가 흔해지고 고깃값이 저렴해진 탓이다. 그러나 고기를 자주 먹어서 인간은 행복해졌을까? 사실 소 사육은 지구온난화의 가장 큰 원인이다.

물론 이것은 지구를 파멸로 이끄는 원인들 중 단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좀 더 편하자고 승용차를 상용화하고, 도로를 뚫고, 석유를 수출하고에어컨 틀고 긴팔 입고, 히터 틀고 반팔 입고그런데 우리의 편리를 위한 이러한 행동들로 가장 덕을 보는 건 대자본이다. 대자본이 부추기는 근시안적인 욕망에 모든 인간이 놀아난다. 돈 좀 되겠다 싶으면 무턱대고 생산하고 그럴듯한 광고를 통해 소비를 부추긴다. 이런 식으로 살다간 100년쯤 후엔 지구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100년 후라그때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이미 생을 마감했을 테니 나 몰라라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갓난아이가 있다면 그 아기는 지구와 함께 생을 마감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지 모른다. 고기 좀 안 먹으면 정말 기운을 못 쓸까? 승용차가 없으면 정말 불편할까? 에어컨 없이 좀 덥게 살면 안 되나? 대안적인 삶은 불가능한가? 이런 주장은 무척이나 금욕적으로 들린다. 그렇다. 금욕적이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해야 할 욕망은 인류역사상 없었던, 불필요한, 과잉된, 가짜 욕망들이다. 그런 욕망을 금하는 것이 금욕주의라 부른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불러도 좋다. 하지만 지구가 아프니 개발을 좀 덜하자는 제안은 마치 위장에 구멍이 나도록 술을 마셔대던 대학후배나 직장후배에게 술을 좀 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걸 금욕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부지불식간에 폰지 사기의 공범자로 살아가고 있지만, 폰지 사기와는 정반대의 사고방식도 존재한다. 바로 고대 북미 원주민 이로쿼이족( Iroquoians)의 일곱 세대 원칙이다. 이로쿼이족은 공동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것이 다음에 살 일곱 세대에 미칠 영향을 고려한다. 오늘날 기업들이 그린 마케팅 차원에서 이 원칙을 (말로만) 남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에 소개된 활동가들은 일곱 세대 원칙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모두 환경운동가로 분류될 만한 사람들은 물론 아니지만 현 세대의 무분별한 착취(자연에 대한, 인간에 대한)를 반대하고 지속가능한 대안적 방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모두 일곱 세대 원칙의 실천가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공로로 이들은 바른생활상을 수상했다.

속칭 대안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바른생활상(Right Livelihood Award)1970년대 말 스웨덴의 야코프 폰 윅스퀼이라는 우표수집상이 노벨 재단에 환경 및 인권상 제정을 건의했다가 퇴짜를 맞자 본인이 손수 재단을 세우고 제정하게 된 상이다. 대안 노벨상은 제1세계와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대안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들, 평화환경사회에 기여한 프로젝트에 수여되었다. 1980년 첫 시상식 이후 지금까지 매년4명 정도를 선정하고 시상해왔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점차 원조 노벨상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책 실린 대표적인 대안 노벨상 수상자 14인의 스토리는 2005년 괴테 연구소에서 주관한 강연회에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각 활동가별로 짧은 강연과 인터뷰, 혹은 그 중 하나가 실려 있다. 스토리의 분량이 그다지 길지 않고 강연이나 인터뷰의 형식이기 때문에 각 활동가들의 전체적인 삶을 조명하기보다는 그들이 최근에 이룬 일들과 신념이 소개된다.

 

국제갈등을 해결하는 데 앞장서온 노르웨이 사회과학자 요한 갈퉁, 강단에만 머무르지 않고 빈민, 소농과 함께 거주하며 맨발의 경제학을 실천한 경제학자 만드레트 막스 네프, 세계적 농업생물공학 기업 몬산토의 전통농업 파괴와 약탈에 저항해온 인도 양자물리학자 반다나 시바, 나노 공학의 파괴적 위험성에 저항해온 캐나다 기술공학자 팻 무니, 소수문화를 보호하는 데 앞장서왔으며 <오래된 미래>로도 유명한 스웨덴 태생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나무심기 운동을 통해 여권을 신장시켜온 케냐의 왕가리 마티이, 유기농법을 통해 친생태적 면화 경작 공동체를 만든 이집트 사업가 이브라힘 아볼레시, 전세계 20여 곳에서 자연보호구역을 지정하는 데 앞장서온 독일 생태학자 미하엘 주코프, 핀란드에서 주민자치 운동을 활성화시킨 타피오 마틀라, 전기 없이 살아가는 방글라데시의 수많은 농촌 가구에 분산형 태양광 발전 시스템 보급을 도운 비영리 기업 그라민 샥티 대표 디팔 바루아, 전쟁 성폭력의 피해 치유와 예방에 앞장서온 스위스 의사 출신의 모니카 하우저, 태국의 민주화와 환경 운동을 주도한 실천하는 불교 법사 술락 시바락사, 세계화와 물질주의, 환경 파괴 반대를 실천하는 한편 시민사회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한 필리핀 사회학자 니카노르 페를라스, 레이건 정부의 전략방위 구상인 스타워즈 계획을 반대하였고 자연과 인간을 파괴하는 기계적인 과학관을 비판하는 독일 양자물리학자 한스 페터 뒤르 등이 그들이다.

 

여기 실린 스토리는 각 활동가들이 대안 노벨상을 받게 된 활동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활동은 활동가들의 전체적인 실천 운동의 어느 일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인적으로 특정 스토리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예컨대 세계적 농업생물공학 기업인 몬산토에 맞서 싸운 반다니 시바의 스토리를 읽다보면 몬산토의 파렴치한 악마성에 경악하게 된다. 몬산토는 생산성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강력한 제조체를 개발하고 그 제초제에 내성이 있는 씨앗도 개발하여 인도 농민들에게 강매했는데, 인도 정부 관료들까지 매수하여 자신들의 종자와 제초제를 사도록 했다. 그런데 이건 후진국이나 개도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며칠 전 NPR 뉴스를 듣다 보니 미국의 한 주에 사는 농부가 몬산토 종자로부터 수확한 씨앗을 다시 파종하지 않는다는 계약서가 부당하다며 집단 소송을 준비중이라고 한다. 씨앗의 사용권은 농부에게 있어야 하는 건데, 다시 파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명백한 권리 침해임에도 불구하고 몬산토는 농업 방식이나 종자에 대한 특허권을 마구잡이로 설정하여 그것을 빌미로 세계 식량 산업을 장악한다. 몬산토가 하는 일이 대개 이런 식이다.

 

나노 공학의 위험성을 비판한 팻 무니의 주장도 충격적이다. 도전정신으로 미화되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인류 전체를 끝모를 위험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경각심이 일깨운다. 나노 공학은 새로운 염기 조합을 통해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사물을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이제 조물주의 위치를 넘보게 해주었다. 긍정적으로 보면 이러한 기술(염기 조합)을 통해 커피, 엽차, 우유, 위스키 같은 음식뿐 아니라 새로운 연료 혹은 신무기, 새로운 신체조직 또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기술들이 기본적으로 돈이 있는 자들을 위해 우선적으로 쓰인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노 공학이 경제적 차이뿐 아니라 신체적 차이까지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부자는 앞으로 더욱 잘 생겨지고, 키도 커지고 무병장수하는 퍼펙트한인간이 될 수 있는 반면 가난한 자는 신체적으로 열등한 상태로 남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염기조합이 만들어낸 신물질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인간을 능가하는 어떤 존재로 변모할 위험도 내재하고 있다. 이제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할리웃 공상과학 영화는 신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 영화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혹은 그런 가능성이 없다하더라도 소수가 나노기술을 악용할 소지는 다분하다.  

 

작년 말에 <마을에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리뷰 보기: 더불어 가난한 사회: ‘이윤’을 거꾸로 하면 ‘윤리’다)을 읽고 리뷰를 쓴 적이 있는데 이 책은 그 책의 세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 버전에서는 사람들이 일상을 통해 대안을 실현한다면 이 책에 소개된 활동가들은 운동의 차원이 강하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세계 곳곳의 다양한 분야에서 일곱 세대 원칙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희망을 찾는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 보길 권하다.

폰지 사기 공모자로 살고 싶은가? 일곱 세대 원칙을 지키는 자로 살고 싶은가?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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