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찾는가 -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대안 노벨상 수상자들 이야기
게세코 폰 뤼프케 & 페터 에를렌바인 엮음, 김시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월가 금융위기 때 폰지 사기라는 용어가 다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폰지 사기란 신규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배당금을 지급하는 수법이다. 겉으로는 호시절을 누리고 있는 듯 보였던 월가는 사실 밑빠진 독에 물붓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폰지 사기를 통해 드러났다. 이와 같이 뒷 세대의 희생을 바탕으로 현 세대의 이득, 안전, 존립을 보장하는 방식을 모두 폰지 사기라고 지칭할 수 있는데, 한국의 경우 국민연금 지급 방식이 폰지사기나 다름없다며 납세자연맹을 중심으로 연금탈퇴 운동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지금우리 모두가 더 크고, 더 재앙적인 폰지 사기의 공모자들이라는 사실은 크게 주목 받지 못하고 있다. 환경문제 말이다. 우리는 우리 후손들의 몫으로 남겨진 자연을 멋대로 끌어다가 제것으로 쓰고 있다. 기껏해야 100년을 사는 인간이 자신이 사는 동안 생각 없이 자연을 착취하는 것은 이기심을 넘어 죄악이다. 

환경문제와 관련된 우려섞인 보고서들이 쏟아져나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각하게 고민하려 하지 않는다. 설사 문제를 인식한다 하더라도 문제 해결을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부모와 조부모 세대가 끌어다 쓴 자연은 지금 폭설, 폭우, 혹한 등의 형태로 생채기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끌어다 쓰고 있는 자연은 어떻까? 50년 뒤 자연이 보여줄 생채기가 지금보다 더욱 심할 것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20-30년 전만 해도 고기를 먹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웬만하면 고기다. 고기 없는 식사를 하면 먹은 것 같지가 않다. 대량생산 기술의 발달로 그 어느 때보다 고기가 흔해지고 고깃값이 저렴해진 탓이다. 그러나 고기를 자주 먹어서 인간은 행복해졌을까? 사실 소 사육은 지구온난화의 가장 큰 원인이다.

물론 이것은 지구를 파멸로 이끄는 원인들 중 단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좀 더 편하자고 승용차를 상용화하고, 도로를 뚫고, 석유를 수출하고에어컨 틀고 긴팔 입고, 히터 틀고 반팔 입고그런데 우리의 편리를 위한 이러한 행동들로 가장 덕을 보는 건 대자본이다. 대자본이 부추기는 근시안적인 욕망에 모든 인간이 놀아난다. 돈 좀 되겠다 싶으면 무턱대고 생산하고 그럴듯한 광고를 통해 소비를 부추긴다. 이런 식으로 살다간 100년쯤 후엔 지구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100년 후라그때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이미 생을 마감했을 테니 나 몰라라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갓난아이가 있다면 그 아기는 지구와 함께 생을 마감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지 모른다. 고기 좀 안 먹으면 정말 기운을 못 쓸까? 승용차가 없으면 정말 불편할까? 에어컨 없이 좀 덥게 살면 안 되나? 대안적인 삶은 불가능한가? 이런 주장은 무척이나 금욕적으로 들린다. 그렇다. 금욕적이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해야 할 욕망은 인류역사상 없었던, 불필요한, 과잉된, 가짜 욕망들이다. 그런 욕망을 금하는 것이 금욕주의라 부른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불러도 좋다. 하지만 지구가 아프니 개발을 좀 덜하자는 제안은 마치 위장에 구멍이 나도록 술을 마셔대던 대학후배나 직장후배에게 술을 좀 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걸 금욕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부지불식간에 폰지 사기의 공범자로 살아가고 있지만, 폰지 사기와는 정반대의 사고방식도 존재한다. 바로 고대 북미 원주민 이로쿼이족( Iroquoians)의 일곱 세대 원칙이다. 이로쿼이족은 공동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것이 다음에 살 일곱 세대에 미칠 영향을 고려한다. 오늘날 기업들이 그린 마케팅 차원에서 이 원칙을 (말로만) 남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에 소개된 활동가들은 일곱 세대 원칙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모두 환경운동가로 분류될 만한 사람들은 물론 아니지만 현 세대의 무분별한 착취(자연에 대한, 인간에 대한)를 반대하고 지속가능한 대안적 방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모두 일곱 세대 원칙의 실천가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공로로 이들은 바른생활상을 수상했다.

속칭 대안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바른생활상(Right Livelihood Award)1970년대 말 스웨덴의 야코프 폰 윅스퀼이라는 우표수집상이 노벨 재단에 환경 및 인권상 제정을 건의했다가 퇴짜를 맞자 본인이 손수 재단을 세우고 제정하게 된 상이다. 대안 노벨상은 제1세계와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대안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들, 평화환경사회에 기여한 프로젝트에 수여되었다. 1980년 첫 시상식 이후 지금까지 매년4명 정도를 선정하고 시상해왔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점차 원조 노벨상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책 실린 대표적인 대안 노벨상 수상자 14인의 스토리는 2005년 괴테 연구소에서 주관한 강연회에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각 활동가별로 짧은 강연과 인터뷰, 혹은 그 중 하나가 실려 있다. 스토리의 분량이 그다지 길지 않고 강연이나 인터뷰의 형식이기 때문에 각 활동가들의 전체적인 삶을 조명하기보다는 그들이 최근에 이룬 일들과 신념이 소개된다.

 

국제갈등을 해결하는 데 앞장서온 노르웨이 사회과학자 요한 갈퉁, 강단에만 머무르지 않고 빈민, 소농과 함께 거주하며 맨발의 경제학을 실천한 경제학자 만드레트 막스 네프, 세계적 농업생물공학 기업 몬산토의 전통농업 파괴와 약탈에 저항해온 인도 양자물리학자 반다나 시바, 나노 공학의 파괴적 위험성에 저항해온 캐나다 기술공학자 팻 무니, 소수문화를 보호하는 데 앞장서왔으며 <오래된 미래>로도 유명한 스웨덴 태생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나무심기 운동을 통해 여권을 신장시켜온 케냐의 왕가리 마티이, 유기농법을 통해 친생태적 면화 경작 공동체를 만든 이집트 사업가 이브라힘 아볼레시, 전세계 20여 곳에서 자연보호구역을 지정하는 데 앞장서온 독일 생태학자 미하엘 주코프, 핀란드에서 주민자치 운동을 활성화시킨 타피오 마틀라, 전기 없이 살아가는 방글라데시의 수많은 농촌 가구에 분산형 태양광 발전 시스템 보급을 도운 비영리 기업 그라민 샥티 대표 디팔 바루아, 전쟁 성폭력의 피해 치유와 예방에 앞장서온 스위스 의사 출신의 모니카 하우저, 태국의 민주화와 환경 운동을 주도한 실천하는 불교 법사 술락 시바락사, 세계화와 물질주의, 환경 파괴 반대를 실천하는 한편 시민사회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한 필리핀 사회학자 니카노르 페를라스, 레이건 정부의 전략방위 구상인 스타워즈 계획을 반대하였고 자연과 인간을 파괴하는 기계적인 과학관을 비판하는 독일 양자물리학자 한스 페터 뒤르 등이 그들이다.

 

여기 실린 스토리는 각 활동가들이 대안 노벨상을 받게 된 활동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활동은 활동가들의 전체적인 실천 운동의 어느 일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인적으로 특정 스토리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예컨대 세계적 농업생물공학 기업인 몬산토에 맞서 싸운 반다니 시바의 스토리를 읽다보면 몬산토의 파렴치한 악마성에 경악하게 된다. 몬산토는 생산성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강력한 제조체를 개발하고 그 제초제에 내성이 있는 씨앗도 개발하여 인도 농민들에게 강매했는데, 인도 정부 관료들까지 매수하여 자신들의 종자와 제초제를 사도록 했다. 그런데 이건 후진국이나 개도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며칠 전 NPR 뉴스를 듣다 보니 미국의 한 주에 사는 농부가 몬산토 종자로부터 수확한 씨앗을 다시 파종하지 않는다는 계약서가 부당하다며 집단 소송을 준비중이라고 한다. 씨앗의 사용권은 농부에게 있어야 하는 건데, 다시 파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명백한 권리 침해임에도 불구하고 몬산토는 농업 방식이나 종자에 대한 특허권을 마구잡이로 설정하여 그것을 빌미로 세계 식량 산업을 장악한다. 몬산토가 하는 일이 대개 이런 식이다.

 

나노 공학의 위험성을 비판한 팻 무니의 주장도 충격적이다. 도전정신으로 미화되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인류 전체를 끝모를 위험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경각심이 일깨운다. 나노 공학은 새로운 염기 조합을 통해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사물을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이제 조물주의 위치를 넘보게 해주었다. 긍정적으로 보면 이러한 기술(염기 조합)을 통해 커피, 엽차, 우유, 위스키 같은 음식뿐 아니라 새로운 연료 혹은 신무기, 새로운 신체조직 또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기술들이 기본적으로 돈이 있는 자들을 위해 우선적으로 쓰인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노 공학이 경제적 차이뿐 아니라 신체적 차이까지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부자는 앞으로 더욱 잘 생겨지고, 키도 커지고 무병장수하는 퍼펙트한인간이 될 수 있는 반면 가난한 자는 신체적으로 열등한 상태로 남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염기조합이 만들어낸 신물질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인간을 능가하는 어떤 존재로 변모할 위험도 내재하고 있다. 이제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할리웃 공상과학 영화는 신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 영화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혹은 그런 가능성이 없다하더라도 소수가 나노기술을 악용할 소지는 다분하다.  

 

작년 말에 <마을에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리뷰 보기: 더불어 가난한 사회: ‘이윤’을 거꾸로 하면 ‘윤리’다)을 읽고 리뷰를 쓴 적이 있는데 이 책은 그 책의 세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 버전에서는 사람들이 일상을 통해 대안을 실현한다면 이 책에 소개된 활동가들은 운동의 차원이 강하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세계 곳곳의 다양한 분야에서 일곱 세대 원칙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희망을 찾는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 보길 권하다.

폰지 사기 공모자로 살고 싶은가? 일곱 세대 원칙을 지키는 자로 살고 싶은가?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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