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1990년대 중반 대학가에서는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갈라서지 말아라 힘을 합치자.”라는 NL 의 노래가 유행했다. 이에 대해 PD 쪽 후배들이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헷갈리지 말아라 사회주의다”라고 개사해서 부르는 것을 듣고 실소를 금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NL이나 PD NLPDR론이라는 한뿌리에서 나왔고 다만 선결조건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며 NL이 이런 식의 노래를 자꾸 유포하는 것은 대중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이런 류의 노래가 지나치게 빈번하게 들릴 때마다 정말로 NL이 통일을 최종목표로 삼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만약 지젝 선생이 한국의 NL이 했던(혹은 지금도 하고 있는) 운동 방식을 알았더라면 이 책에서 중요한 소재로 다루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지젝은 2011년 중동(아랍의 봄), 유럽(영국, 스페인, 프랑스 등에서의 저항운동), 미국(월스트리트 점령 운동) 등지에서 벌어진 자연발생적 저항운동을 소재로 삼아 운동의 방향성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책의 원제는 The year of dreaming dangerously <위험한 꿈을 꾼 한 해>쯤 되겠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지젝은 그 꿈이 충분히 위험하지 않았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운동의 방향성 상실 때문이다. 방향 잃은 저항을 경고하는 메시지는 <점럼하라>의 한 꼭지로도 실렸고 이 책의 서문에 다시 실린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훗날 "그때가 좋았는데."라고 술이나 마시며 그날을 안주거리로 삼을 게 아니라 지금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진정으로 원해야 한다.

 

아랍의 봄은 이슬라모파시즘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역사에서 이슬람 국가의 세속적 좌파의 소멸과 정확히 상응해왔다. 아프가니스탄이 40년 전만 해도 강력한 공산주의 국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뚜렷한 대안 없이 독재자만 축출하면 만사 해결될 줄 알았던 아랍에서 해방적 잠재력의 수혜자는 군부와 이슬람주의자다.

같은 맥락에서, 21세기를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고 부르기 좋아하는 보수주의 논객들의 주장에 부응이라도 하듯 영국 폭동 가담자들은 아무런 요구도 내걸지 않았다. 그들의 저항은 현실적 대안도, 일관된 유토피아적 기획도 없이 무의미한 분출에 그치고 말았다. 스페인 인디그나도스의 선언문도 비정치를 넘어 탈정치적이다.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에 빠진 운동은 점점 추진력을 잃어 갔다. 경제위기의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월스트리를 메인스트리트로 대체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메인스트리트가 월스트리트에 종속되는 시스템이 문제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은 방향을 못찾고 딜레마에 빠져 있었고참가자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저항이 오히려 시스템을 강화한다. 환경오염 기업, 부패한 은행가, 아동 노동착취를 규탄하는 일은 넘쳐난다. 그래서 언론의 압력을 가하고, 감사와 규제를 강화하며, 경찰 수사를 강화하면 된다는 주장은 넘쳐난다. 이런 식의 해결책은 근본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부르주아 법치국가의 민주주의 제도를 강화한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저항을 멈추는 순간이 오히려 시스템을 위협한다. 중요한 것은 사법부의 독립, 언론의 자유, 자유선거, 인권이 아니다. 핵심은 시장에서 가족에 이르는 사회적 관계들의 그물망에 있고, 이 영역을 진정으로 개선하려면 정치가 아니라 비정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혁이 필요하다.

 

지젝은 오늘날 벌어지는 운동은 미래에서 보내온 징후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흔히 역사주의적 관점이 그러하듯이 그 징후는 맥락과 기원을 바탕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미래의 관점을 적용하여 현재에는 숨겨진 유토피아적 미래의 파편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징후는 중립적, 객관적이지 않다. 오직 참여적 입장에서만 발견된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신은 진심으로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분명히 나타난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진리는 참여적인 계급적 입장에서만 인식될 수 있다.

 

구소련 몰락 후 인권, 페미니즘 등으로 선회했던 좌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들이 기다려온 경기 침체와 사회적 해체가 도래했고, 전 세계적으로 시위와 반란이 속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에 대한 좌파의 일관된 대응과 섬처럼 흩어져 있는 혼란스런 저항을 적극적인 사회변화의 시도록 바꾸기 위한 기획은 명백히 부재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틀린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와 20세기 좌파의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들은 몽상적이었다기보다는 너무 미래적이었다.

우리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시스템의 관성에 저항해 작은 싸움을 벌이기를 중단하고, 다가올 더 큰 전투를 위한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 혁명 없는 반란 정신은 무기력하다.

 

지젝은 방향을 제시한다.

멈춰라, 생각하라. 답은 공산주의다.

 

위험한 공산주의자지젝의 면모는 이 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지젝은 이 책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공산주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거리낌없이 해댄다. 그것도 단순무식하고 교조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해박한 지식과 충분한 철학적 사유에 근거하여 때로는 논리정연하게 때로는 신랄하게 주장을 전개한다. 이렇게 똑부러지게 분석하고 비판하고 공산주의를 옹호하면 현체제를 고수하는 자들에게는 지젝이 위험해 보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지젝이 거리낌없이 내세우는 대안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해 충분히 길게 비판하고 그 대안은 공산주의라고 너무 간단하게 말하고 만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도 고개만 갸우뚱하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해 이 책은 공산주의에 대한 해설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젝의 의도는 20세기 좌파의 몰락이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는 강력한 변혁의 무기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공산주의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등은 정 궁금하면 다른 책에서 찾아보고, 지젝에게서는 그의 의도에 맞는 독해를 해나가면 되겠다.

 

 

다음은 오타 및 오류들. 다음 쇄에서 수정되면 좋겠다.

 

9쪽 밑에서 다섯 번째 줄. 세상는 세상은

102쪽 밑에서 일곱 번째 줄. 점점 더 커 지는 동시에 점점 더 커지는 동시에

182쪽 중간. 실제추구하는 실제 추구하는

189쪽 중간. 오마 이사야 베츠 오마르 이사야 베츠 (191쪽에서는 오마르라고 썼다.)

212쪽 각주. 꿈구지만 꿈꾸지만

215쪽 위에서 세 번째 줄. 빈민주주의자가 반민주주의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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