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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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에 나오는 장면이던가? 착하고 성실한 소작농이 어느날 지주의 횡포를 못 견디고 우발적으로 지주를 살해하고 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된다. 한국에서 봉건지주제에서 근대적 토지소유 관계로 이행할 때 일제시대가 끼어 있어서 그 이행은 자연스럽지 못했다. 어디 그런 문제가 토지 문제뿐이었겠는가만은, 어쨌든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이 이루어진 반면 남한에서는 일제 치하의 토지소유 관계가 존속했을 뿐 아니라 더욱 악화된 면이 있었다. 땅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인간은 그토록 땅에 집착해 왔는가?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감상에서부터 부대자루 속의 감자 비유를 통해 농민의 탈조직화(땅이라는 생산수단에서 자유롭지 못하므로)를 지적한 맑스의 언급에 이르기까지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는 분명 인간에게 무언가 원초적이고도 실질적인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기는 하다. 경작용 토지도 그러할진대 주거용 토지는 오죽하겠는가? 발 딛고 서 있을 땅조차 없다면 인간의 존재 자체도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최첨단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빈곤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중요한 화두이다. 빈곤을 설명하는 시각과 접근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인구학적 접근, 경제학적 접근, 정치경제학적 접근, 심리학적 접근 등등. 이 책에서는 그 중에서도 도시화와 관련지어 빈곤 문제를 다룬다. 아무래도 빈곤이라고 하면 남의 얘기처럼 들리다가도 도시의 빈곤화(슬럼화)라고 하면 사정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더욱이 슬럼화의 양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게 되면 놀라움을 넘어 경악할 지경에 이른다. 원제 Planet of Slums 『슬럼, 지구를 뒤덮다』로 적절하게 의역한 이 책의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지구는 슬럼으로 뒤덮여가고 있다. 저자는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도시들을 계속해서 인용한다. 시기상으로는 대략 1950년대 정도부터 통시적 비교의 소재로 등장한다.

사실 도시화는 근대의 탄생과 궤를 같이 한다. 중세 말, 근대 초에 도시는 신흥 부르주아들의 근거지였다. 그들은 봉건영지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에 거주하면서 오늘날 시민사회의 모태가 되는 살롱에 모여 시국을 논하며 혁명을 꿈꾸었다. 이들은 결국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에너지를 흡수하여 봉건귀족을 타도하고 근대 자본주의 시대를 여는 데 성공한다. (학자에 따라 봉건귀족이 부르주아로 변신한 경우가 많다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도시는 혁신, 창조적 에너지, 희망의 요새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오늘날의 도시는 이와는 반대로 (노동자와 빈민이 혁명의 주요세력이라는 주장은 잠시 접어두고) 가난, 무질서, 절망의 상징이 되어 가고 있다. 특히 제3세계 도시에서 그러하다.

특히 제3세계에서 농촌의 도시화는 정겨운 샛길과 유서 깊은 건물들이 없어지고 곧게 뻗은 도로와 차가운 잿빛 건물들이 들어서는 정도의 감상 따위가 아니다. 그곳에서 도시화는 직업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고 가족관계가 바뀌는 등 개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공동체의 생태계가 바뀌고 국가의 정치지형까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대다수 제3세계 도시의 성장은 기형적이고 사뭇 처연하기까지 하다.

대다수 개발도상국의 경우, 도시의 성장은 강력한 공산품 수출 동력이나 외국 자본의 대규모 유입으로 뒷받침 되지 못한다. 성장 없는 도시화는 테크놀로지 선진화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전지구적 정치위기—1970년대 후반 전세계적 채무위기와 뒤이은 1980년대 IMF 주도의 제3세계 경제 구조조정의 유산이다. 실질임금 하락, 물가 급등, 도시 실업 급증에도 불구하고 제3세계의 도시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다. IMF와 세계은행이 강요한 농업 자유화와 금융감독 정책 때문이었다. 경제 정체와 기간시설, 교육 설비, 공공의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농촌 인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대 도시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은 약해졌지만 시골이 사람들을 밀어내는 힘은 더욱 커졌다. (pp. 27-31)

따라서 이러한 도시화는 슬럼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한마디로 슬럼이 대세다.’ UN 연구에 따르면 2005년 슬럼 인구는 10억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선진국에서는 6%, 저개발국가에서는 78.2%의 인구가 슬럼에 살고 있다. (p. 37-39)

20세기 후반 아프리카,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 도시화와 슬럼화는 탈식민화, 내전, 영토 분쟁, 종교 분쟁, 강대국의 군사전략, 토지개발, 산업화 등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 때문에 가히 폭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자신의 본래 거처를 떠난 자들은 도시 주변에 몰려 들어 토지를 무상으로 점유(스쿼팅; squatting)하면서 슬럼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슬럼에 모여 사는 스쿼터(squatter)들은 상시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상하수도 같은 기본적인 공공설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슬럼 지역은 토질이 나쁘다. 그곳은 독성폐기물 매립지이거나 만성적 지반붕괴, 산사태, 범람 지역이다. 그리고 화재와 전염병에도 취약하다. 때문에 각종 재해와 전염병으로 수많은 스쿼터들이 목숨을 잃곤 한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슬럼 지역은 폭력조직과 테러조직이 절망적인 가난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피끓는 청소년들을 포섭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이곳에서는 아이들도 무기로 장난감을 삼으며, 폭력으로부터 방어하려는 또 다른 폭력이 연일 크고 작은 유혈사태를 낳는다.

도시화가 슬럼화로 진행된 데에는 제3세계 정부의 무책임이 한몫했다.  게다가 슬럼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지주들은 재빠르게 슬럼지주로 변신하여 가난한 자에게서 이윤을 뽑아냈다. 예컨대 인도에서는 도시 공간의 약 3/4이 도시 가구 6%의 소유이다. 돈이 생산이 아닌 땅 투기에 몰리면서 슬럼화는 가속화되었다. 1990년대 무렵이면 제3세계에서 스쿼팅은 종식되고 기업형 사조직들이 변두리 도시화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에 슬럼에서는 세입자 비율이 증가하고 인구밀도가 폭등했다.

곧이어 국가가 개입한다. “국가는 진보’, ‘미화’, 나아가 사회정의라는 미명하에 개입을 시도하며, 이를 통해 땅 주인, 외국인 투자자, 엘리트 주택소유자, 중간계급 통근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경계를 재편한다.” (p. 132). 한국에서 88올림픽 때 상계동 주민들이 또 다른 올림픽을 치러야 했듯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국제행사가 있을 때마다 국가의 개입이 있었다. 토지 무상 점유자(스쿼터; squatter)와 세입자는 흔히 아무 보상 없이 쫓겨났다. 강제퇴거 과정은 한국에서도 그러했지만 제3세계, 특히 강력한 군사독재가 행해지는 국가들에서는 무척이나 폭력적이었다. 강제퇴거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이 정권을 잡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계 경제도 슬럼화에 영향을 끼친다. 1980년대 IMF와 미국의 경제 개입 및 조작 때문에 제3세계에서 빈민이 더욱 양산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도 지난 10년간의 구조조정은 오히려 제3세계의 경제를 악화시켰다. 세계화로 성공을 거둔 몇몇 제3세계 국가들에서는 양극화가 더욱 심해졌을 뿐이다.

객관적이고 절제된 언어로 이어지던 글은 7장부터 비판적으로 바뀐다. 1~6장까지는 도시사회학 연구서 같은 느낌이었다면, 7~8(특히 8)은 정치경제학 분석 같다. 저자는 7장에서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의 변동이 제3세계에서 슬럼화를 가속화시켰다고 비판하고 결론 격인 8장에서는 신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간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여러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겠지만, 도시화와 슬럼화에서부터 시작해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결론짓는 이 책의 분석도 꽤나 흥미롭다.

이 책에는 이름도 따라 부르기 어려운 수많은 제3세계 도시 이름들과 현지용어들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책은 술술 읽힌다. 뭔가 어렵게 증명하려 하지 않으며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현학적인 수사도 없다. 저자가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기 때문에 독자들도 감정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독자들은 그저 슬럼의 심각성에 대해 놀랄 준비를 하고서 책을 술술 읽어내려가면 된다. 그러나 몇 가지 사례를 분석한 심도 깊은 case study는 아니기 때문에 다소 산만한 느낌은 든다. 수많은 사례들(도시들)을 종으로 횡으로 넘나드는 배치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덧붙임] 1. 번역은 무난한 편이다. 어색한 직역어투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한가지만 지적하자면역자는 ‘the South’남반구라고 번역했는데, ‘the South’에는 남반구라는 뜻 외에 개발도상국이라는 뜻도 있다. 우리가 흔히 동서갈등이라고 할 때에는 이념갈등을, ‘남북갈등이라고 할 때에는 빈부갈등을 의미하듯이, ‘the South’는 가난한 지역을 가리킨다. 이 책에서 홍콩, 싱가포르, 중국을 the south라고 부른 걸로 봐서 남반구보다는 개발도상국이라고 번역해야 맞는 것 같다.

2. 번역서 부제는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라고 되어 있다. 이 부제는 원서에는 없는 것이다. 물론 시기적으로는 1970년대 후반 신자유주의 이후의 시기에 분석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은 딱히 신자유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IMF가 제3세계에 강제한 구조조정이 슬럼화에 끼친 영향을 다룬 7장을 빼면 신자유주의의 그림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붙인 부제인 듯하다. 그렇지만 비단 이런 부제가 없더라도 상징성이 뛰어난 책 표지그림이라든가 압축적인 한글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첫눈에 호기심을 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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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경남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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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담론을 말하길 좋아하는 제러미 리프킨이 이번에 던지는 화두는 바로 공감이다. 공감(empathy)이라는 단어는 본래 독일어 미학용어를 1909년 미국 심리학자가 empathy로 번역하면서 미국 심리학의 용어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Empathic은 감정이입을 한다는 뜻이다. 즉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황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이것은 반드시 sympathetic, 즉 동정적이 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일단 상황을 empathic하게 바라본 뒤에는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최근에 모든 인간에게 생명사랑의 감정이 있다고 주장하는 에드워드 윌슨의 <바이오필리아>를 읽었는데, 인간본성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공감의 시대>도 바이오필리아와 비슷한 부류의 책이다. 아닌 게 아니라 리프킨도 이 책에서 윌슨을 긍정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책의 띠지에는 “적자생존은 끝났다. 이제 오픈소스와 협력이 이끄는 3차 산업혁명의 시대다."라는 한겨레 서평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다. 3차 산업혁명의 기본은 인간의 공감능력(증대)에 있다. 기본적으로 나는 이런 류의 책은 별로 안 좋아한다. 인간이 착하냐, 악하냐 하는 증명 불가능한 논의를 다루는 것도 그다지 맘에 안 들고, 괜히 거창하게 ‘3차 산업혁명’이네, 어쩌네 하면서 앞으로 한 50년은 지나봐야 확인할 수 있을 법한 무분별한 일반화 내지는 예언을 하는 것도 별로다. 저명한 학자가 센세이셔널한 주장을 할수록 그 책은 많이 팔리겠지만, 증명하기 힘든 주장을 담은 책은 읽기에 맥빠지고 별 감흥도 없다. 오히려 반감만 생긴다.

 

출판사의 기획, 광고, 그리고 언론사의 서평 등이 저자의 주장을 과장한 측면도 없지 않다. 일단 책의 원제는 The Empathic Civilization이다. 직역하자면 ‘공감하는 문명’이다. 우리 인간의 문명이 공감하는 문명이라는 것이다. ‘공감의 시대’라고 하면 다른 시대와 달리 현 시대가 ‘공감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뉘앙스를 풍기지만, 그것은 저자의 주장에서 본질이 아니다. 저자의 주장은 인간에게는 기본 공감 능력이 있으며 그러한 능력이 점점 커졌다는 것이다.

 

저자의 증명 방식은 통시적인 동시에 공시적이다. 사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공감(능력)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발전해왔다는 것이므로 증명의 방식은 통시적이어야 옳다. 책의 2부가 통시적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사회가 변해온 것은 맞는데, 그것이 과연 ‘공감 능력’의 변화라고 봐야 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저자는 고대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17 5,000년의 인류 역사를 통해 인간의 공감 의식이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다. 비록 공감 의식의 발전에는 부침이 있었지만 그 궤적은 분명하다고 한다.

 

공감 의식의 발전과 자아의 개발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간의 여정을 이끄는 사회구조를 점점 더 복잡하게 만드는 현상을 수반한다. (p. 18)

 

그렇지만

 

공감 의식이 커질수록 지구의 에너지와 그 밖에 자원의 소비가 급증하고 그래서 지구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p.6)

 

저자는 이것을 공감-엔트로피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게 과연 역설인가? 이것이 역설이기 위해서는 첫째로 인류의 공감 의식이 정말 커져 온 게 사실이어야 하고, 둘째 공감 의식과 지구의 건강 간에 (이론적으로) (+)의 상관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공감 의식이 커져왔는지는 차치하고 공감이라는 변수와 지구의 건강 간에 상관관계를 설정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을까? 역설로 보이는 이 관계는 원래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공시적 분석에서 십 만 년이 넘는 인류 역사에 걸친 자료를 수집하는 데에 자료의 가용성이나 일관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저자는 지난 수 십 년 동안 이루어진 발견을 보다 더 결정적인 공시적 증거 자료로 내세우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저자는 불과 100여 년 전에 비해서 오늘날 인간들 간의 공감과 공감능력이 인간관계, 법 체계, 학문 영역 등에서 비약적으로 증대되었다고 말한다. 예컨대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난 뒤 흑인들은 원수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고, 근대 사법체계는 처벌보다는 교화를 강조하며, 리눅스는 오픈 소스 협력 체제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 올라섰다. 그렇다면 무엇이 변했는가? 사람들의 능력이 증대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더 착해졌다는 것인가? 더 성찰적으로 변했다는 것인가? 아무튼… 인간이 긍정적으로 변했다기보다는, 교통통신 수단의 발달로 과거에 협소했던 생활영역이 더욱 확장됨에 따라 지구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이고 비극적인 사건들로부터 교훈을 얻어서 의식적, 제도적으로 변한 것 아닌가? 뭔가 질적으로 향상되었다거나, 인간의 능력이 증대되었거나 본성이 선해졌다기보다는 최악 상황을 피하기 위해 문명화의 이름으로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오픈 소스 운동의 경우는 독과점을 반대하는 극소수의 선도자들 덕에 다수의 참가자들이 혜택을 보는 형국이지, 공감 능력의 증대와는 무관하지 않은가?

 

저자가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는 심리학(특히, 아동발달심리학 같은)과 생물학 등의 분야에서 이루어낸 발견들이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하는 공시적 자료에도 한계는 여전한 것 같다. 기본적으로 자료의 공시성 때문에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다이내믹한 현대 사회의 수많은 변수들 때문에 그러한 증거들이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증거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의 발견들이 정확하게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 같지도 않다. 생물학적, 심리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공감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과 인간이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의지적으로 상대를 이용하고 이기며 착취하려 한다. 예컨대 리프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뇌과학과 아동발달학 분야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면서 인간이 본래 공격적이고 물질적이고 실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오래된 믿음은 도마 위에 오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히려 인간이 근본적으로 공감하는 종이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영향력을 넓혀 가는 추세이다. (p. 5)

 

그러나 공감하는 종으로서 인간이 실제로는 성장하면서 “물질적이고 실리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적자생존의 현실이 인간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

애초부터 그의 주장은 증명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말하자면 증명하기보다는 반박하기가 훨씬 쉬운 주장이었다. 반박가능성(falsification)이 크므로 리프킨은 포퍼가 말하는 ‘열린 사회의 적들’이 되지는 않겠지만,  반박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만큼 허술하기도 하다. 그가 ‘거대한’ 주장을 하고 있는 탓이다.

 

인간의 공감 능력이 증대되었다는 리프킨의 주장은 오히려 정반대로 각박하고 살벌한 현대사회의 실상에 대한 처절한 통탄처럼 보여 안타깝다. 사회에 대해 깊이 분석하고 성찰해온 사상가들은, 박노해가 그랬고, 김지하가 그랬고, 윌슨이 그랬던 것처럼, 왜 하나 같이 결국은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주제로 회귀하는 것일까? 비록 그들의 주장이 많은 이들에게 완전한 설득력을 주지는 못했지만, 오랜 성찰 끝에 그러한 주장에 도달한 그러한 사상가들이 여럿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정말로 ‘사랑’이 인류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덧붙임] 이 책에는 서문이 끝나고 1부에 들어가기에 앞서 서론이라고 부를 만한 챕터(1)가 하나 더 존재한다. 책이 다루는 주제가 다소 추상적인데다가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아우르려다 보니 책 전체 내용에 구멍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데, 그걸 메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이유에 기인하여 이 책의 내용을 더욱 정교화해서 좀 더 설득력 있는 글을 차후에 다시 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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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률 속에 감춰진 한국사회의 진실 - 진보의 시선으로 바라본 2010 한국사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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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새사연)에서 2010년 초에 나온 연구서이다. 새사연은 자칭, 타칭 비주류 경제연구소이다. 우리가 해마다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는 경제 전망, 경제 동향은 국책연구소나 대기업연구소에서 발표되는 것들인데, 새사연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진보적인 시각)에서 보고서를 발표한다. 2010년 한국 사회의 키워드로 새사연은 경제에서 ‘불확실성’, 정치에서 ‘반환점’, 사회에서 ‘격차의 확대’, 남북관계에서 ‘전환’ 등을 꼽는다.

 

김병권 새사연 부원장이 쓴 머리말은 “시장을 해석하는 전망, 시장을 개혁하는 전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싶었던지 옛날 운동권 서적에 많이 쓰였던 방식대로 ‘해석’과 ‘개혁’의 두 단어 위에 방점까지 찍어 놓았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만 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맑스의 경구 를 떠올리는 타이틀이다. 아마 맑스를 떠올리면서 타이틀을 정했을 것이다.

머리말에서 김 부원장은 기존의 경제 전망들이 시장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며 이러한 전제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 책의 가장 큰 차별성은… 비합리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시장의 문제점을 짚고 그 개혁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것을 ‘발상의 전환’, ‘패러다임의 이동’이라고 자평한다. 이 책은 한마디로 진보적 성향에서 쓰여진 경제 전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 경제위기와 동향에 대한 새사연의 기본 입장은 다음과 같다. 1997년 한국에 외환위기가 발생했지만 2000년에 IMF 부채를 다 청산했고, 수출은 4000억 달러를 돌파했으며, 외환보유고는 급증했고, 주가도 급등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 놓인 문제는 상품 및 자본시장의 해외의존도가 더욱 커졌다는 점이고 사회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것이다. 지표경기는 회복됐지만 체감경기는 여전하다. 성장은 외형에 불과하고 시스템은 취약하다. 무엇보다 경기 회복에 국가가 강력하게 개입했다는 사실은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게다가 일시적인 회복은 금융회사와 사기업의 부실을 정부와 가계가 떠안은 결과일 뿐, 여전히 위기는 존속한다.

 

이 책은 2010년 연구원에서 작성한 보고서들을 출판을 위해서 재구성한 책이다. 원래부터 일관된 목적으로 쓰인 책이 아니기 때문에 내용의 통일성과 균형감은 조금 떨어진다. 서론과 결론의 짤막한 챕터를 빼면 본문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전환기의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에서는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세계경제와 한국 경제가 어떻게 변화되었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분석한다.

2부 “한국 국민의 삶, 어떻게 바뀔 것인가”는 1부에 비해 정책 보고서의 성격이 짙다. 주류 정책보고서에서의 강조점과 달리 여기서는 기업이 아닌 가계를 위한 정책이 제시된다.

3부 “안개 속의 한국사회와 전망”에서는 경제위기로 큰 영향을 받은 교육과 복지의 문제뿐 아니라 2010 지방선거와 남북관계까지 다룬다. 교육과 복지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좀 더 다루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시기적으로 두 분야가 현안이었기 때문인지, 유독 이 두 분야에 새사연이 정책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마지막 두 챕터는 다소 생뚱맞은 감이 없지 않다. 책 분량을 맞추기 위해서, 혹은 ‘정치적인’ 의도에서 끼워넣은 것 같다. 책의 통일성을 위해서는 앞의 교육과 복지에 준하는 주제를 다루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새사연은 2008년부터 해마다 전망 보고서를 발표해왔다. 이 책은 그 세 번째 해 되는 2010년 초에 나온 보고서를 엮은 것이다. 아무래도 모태가 전망 보고서에 있다 보니 각 논문의 깊이와 무게는 다소 떨어진다. 그 대신에 그 현실적 적실성은 더욱 유효하다. 각종 통계자료가 친절하게도 그래프로 많이 제시되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책 제목은 <성장률 속에 감춰진 한국사회의 진실>이라고 다소 산뜻하게 뽑았지만 책의 전체 내용과는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성장률’이 주된 화제도 아니고, ‘한국사회의 진실’이라고 할 만큼 뭔가 숨겨진 것을 밝히는 내용도 아니다. 책의 내용은 말하자면 “경제 위기에서 회복해가는 2010년을 맞아 서민을 위해 어떤 정책을 펴야 하는가?”이다. 그렇다면 제목은 <진보주의 시각에서 바라 본 2010 서민 경제정책 보고서> 정도가 더 정확할 것이다.

 

슬라예보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세계 금융위기와 자본주의>라든가, 캘리니코스의 <무너지는 환상: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세계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따위의 책이 글로벌 경제위기의 양상과 세계적 파급효과에 대해서 다루었다면, 이 책은 그 주제를 한국적 수준에서, 그리고 실질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그것도 기업 위주의 정책이 아닌 가계를 위한 정책을 제시하고 있으며, 경제개혁에서 항상 소외되는 교육과 복지의 문제를 적절하게 다루고 있다. 이 점은 높이 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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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원자 - 세상만사를 명쾌하게 해명하는 사회 물리학의 세계
마크 뷰캐넌 지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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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이다. 신기하고 다양한 자연현상들이 인용되며, 그것들이 지극히 단순한 물리법칙에 기인한다는 점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나아가 저자는 사회현상들 또한 단순한 자연현상과 다를 바가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 점은 물론 논란거리이다. 그리고 나는 저자의 주장을 전혀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책은 인종분리의 원인에 관한 연구를 인용하는 것으로 머리말을 시작한다. 1971년 토마스 셸링은 인종별로 거주지역이 나뉘는 이유가 인종주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컴퓨터 모의실험을 했다. 인종을 혐오해서가 아니라 지역에서 소수인종이 되기를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사람들의 거주지역이 나뉠 수 있음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 이 연구의 결론은 인종주의가 완전히 사라진다 해도, 물리 법칙과 비슷한 그 무엇 때문에 인종들이 분리될 것이라는 점이다. 인종주의에 대한 우려에서 시작된 연구가, 결국 문제는 인종주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의 말대로 인종분리는 물리법칙비슷한 그 무엇 때문인가?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소수인종이 되기를 두려워한다는 점을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상태라고 가정할 때, 이것이 물리법칙 비슷한 그 무엇인가? 사회현상을 아주 근본적인 그 무언가로 환원했다는 점에서 이 방법론 자체는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비슷할지 모르나, 그러한 사회현상에 가로놓인 원인을 물리법칙, 혹은 물리법칙 비슷한 그 무엇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친 주장인 것 같다. 셸링의 논문에서 인종분리를 낳은 근본원인은 사람들의 심리일 뿐이다.

툰드라 지대에 속하는 노르웨이의 스피츠베르겐이라는 섬에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많은 고리 모양의 둔덕은 땅이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형성된 것이다. 저자는 인간 세계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사회의 기본 구성요소인 사람을 원자라고 한다면, 사회적 원자가 이루는 거시적인 패턴은 사람들 개개인의 성격과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람이 원자나 돌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사회과학의 기본 방향이 물리학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수많은 사람들이 좁은 복도에서 양방향으로 움직이다 보면 일관된 줄이 생겨나게 된다. “이것이 자기 조직화하는 구조이며, 스피츠베르겐의 돌무더기처럼 사람들의 의도 없이 형성된다.” (p. 30)  그러나 여기에는 정말 사람들의 의도가 없는가? 부딪히지 않으려는 명백한 의도가 있지 않은가? 그러한 의도는 심리적인 것이지 물리학적인 것이 아니다. 의도를 물상화해서 그것이 기본적인 물리법칙과 비슷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러한 흐름의 형성이 원형 돌무더기의 형성과 비슷하다는 주장은 (단순한 비유라면 모를까) 과학적이지 않다. 이러한 현상들은 인간이 사고와 의지에 따라, 혹은 본능적으로 선택을 한 데서 비롯된다. 현상의 원인을 가장 단순한 데까지 환원하자면 그것은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본능에 있지, 저자가 암묵적으로 혹은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물리적인 그 무엇에 있지 않다. 저자가 단순한 비유 이상의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이라면, 그것은 심각한 논리적 비약이다.

사실 이 책에 열거된 사례들은 저자 같은 물리학자가 아니라 사회심리학자들이나 좋아할 법한 것들이다. 여기 제시된 똑같은 사례들을 갖고 사회심리학자들은 말할 것이다. “그것 봐라. 복잡해보이는 사회현상도 결국은 인간의 보편적 본능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말한다. “그것 봐라. 복잡해보이는 사회현상도 결국은 인간의 물리적 속성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틀린 말이다.

이 책에 실린 모든 사례들이 다 그렇다. 그저 사회현상이 자연현상과 비슷하다는 식의 가벼운 에세이로 읽는다면 이 책은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이 파고들어 사회현상의 물리법칙적 근거를 논하는 데까지 들어가면 이 책의 주장은 다소 위험해진다. 괜한 유사성 때문에 독자들이 현혹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저자가 네이처지에서 오랫동안 편집자로 일했던 과학자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저자의 자못 진지한 어투는 부담스럽다. 물론 저자는 그럴 의도는 없었을지 몰라도

저자는 사회과학이 인과관계가 아닌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데 그치고 있다며 비판한다. 그러면서 마치 자기가 사회과학에 해법이라도 주는 양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 사회현상, 사회과학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태도다. 근대 초기 사회과학의 주창자들은 당시 자연과학의 발전에 고무되어 사회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자신들의 학문에 그러한 이름을 붙였다. ‘사회학의 아버지꽁트(August Comte)는 당시 처음 탄생한 사회학을 사회물리학이라 명명한 바 있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탄생 이후 단 한 번도 사회와 사회현상으로부터 자연과학에서 다루는 것 같은 법칙들이 도출된 적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의지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과학의 한계(?)는 오늘날 대부분이 사회과학자들이 익히 잘 알고 있으며, 일부 의욕에 찬 사회과학자들만이 여전히 사회과학을 과학으로 만들려는 무모한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여전히 사회과학에 인과관계 정립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도 물리적 단위와 다름없는데도 사회과학자들이 상관관계 분석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것은 잘못된 비판이다.

독자들은 부디 이 책을 재밋거리로 읽기를 바란다. 그렇게만 읽는다면 참 재미있는 책이다. 자연현상에 비추어 사회현상 또한 기본적 물리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기를 바란다. 저자가 인용한 사회현상들이 자연현상처럼 일정한 규칙을 따른다는 주장은 맞는 말이다. 여기까지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충분히 납득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현상이 물리법칙을 따른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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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필리아 - 우리 유전자에는 생명 사랑의 본능이 새겨져 있다 자연과 인간 15
에드워드 윌슨 지음, 안소연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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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윌슨은 이 책을 통해 인간이 생명을 탐구하고 생명에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 정신 성장에 필수적인, 심오하고 복잡한 과정임을 증명한다. 이를 위해 그가 고안한 개념은 바이오필리아(biophilia: bio- 생명–philia 좋아함의 합성어)이다. 즉 인간에게는 생명 혹은 생명과 유사한 과정에 가치를 두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생명 사랑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존의 과학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이 주장에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 우리가 주장의 진위를 확실하게 밝힐 수 있을 만큼, 가설, 연역, 실험을 이용하는 과학적 방식으로 이 주제를 충분히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명 사랑의 경향은 일상 생활에서는 아주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p. 132).

인간이 자연과 경험하는 (때로 무의미해 보이는) 모든 접촉들이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뇌는 존재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접촉뿐만 아니라 낭비처럼 보이는 수많은 접촉들로부터 마음을 엮어 가는 경향이 있다. …연구실 우리 속에서 잘 자란 것처럼 보이는 원숭이들과 콩만 먹고도 살이 찌는 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동식물이 없는 환경에서도 겉보기에 정상적인 모습으로 자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자란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들이 결여되어 있을 것이다. …인간은 다른 생물과 함게 살아야만 하는 존재이다. (pp. 178-179)

사회생물학자로서 항상 땅바닥을 들여다보거나 썩은 나무를 헤치며 곤충 같은 작은 것들, 작은 세계에 집중해온 그가 오히려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큰 사상, 형이상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이크로 코스모스는 사실 매크로 코스모스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이런 답사를 계속 하다 보면 인간의 마음과 정신에 가가운 것들을 더 다루게 되리라는 결론에도 도달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사실이라면, 자연주의자의 통찰력은 모두가 공유하는 생명 사랑 본능에서 갈라져 나온 결과일 뿐이며, 이 통찰력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자세하게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훨씬 우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을 잘 안다는 사실이 생명의 참된 의미를 고양하기 때문에 인간은 고귀하다. (p. 45)

생명 사랑이 더 화급한 문제가 되는 실제적인 이유도 있다. 바로 환경문제이다. 인간이 본격적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기 시작할 때에는 윤리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인간은 윤리보다는 자연과 관련된 정보에 관심을 더 쓰게 되었는데, 이제는 다시 윤리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에드워드 윌슨은 환경을 보존하기 위한 운동들이 이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환경 보존 운동의 미래는 이러한 윤리적 논의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달려 있다. 생물학이 발달하고, 생물학의 혼성 분야이면서 최근의 생물학 발전으로 가능해진 여러 가지 기술적 진보를 다루는 생명 윤리학(bioethics)이 발달해야 환경 보존 운동도 이 분야들과 함께 발달한다. (pp. 181-182)

자연 세계를 향해 인간 세계가 확장되는 것은 인간 정신의 기본이다.

그러나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물 세계의 성실한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확장과 관리는 처음에는 서로 모순되는 목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보존 윤리의 깊이는 확장과 관리 중 하나가 자연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른 하나를 재형성하고 강화하는 데에 쓰이는 정도에 따라 가늠될 것이다. 이 역설은, 내가 인간 정신의 보호라는 뜻에서 쓴 궁극적인 생존에 더 적합한 형태로 역설의 전제를 바꿈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 (p. 210)

이러한 입장에는 학문간 통합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후에 『통섭』 (1998년 출판)으로 학문간 통합을 주장하게 되는 저자는 1984년에 출판된 이 책에서도 그와 관련된 주장을 이미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과학과 인문학 간의) 이러한 근본적인 구분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거나 최소한 어느 정도 기분 좋은 방식으로 과학과 인문학이 조화를 이루기까지는 인간과 생물 세계 사이의 관계에는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을 것이다. (p. 83)

생물학 연구로 새로운 종합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때마다 인문학의 범위와 가능성은 확장될 것이고, 과학 역시 인문학의 방향이 재설정될 때마다 인간 생물학에 새로운 차원을 더할 것이다. (p. 91)

과학이 예술가 마음의 내향적인 여정을 보고 예술과 문화의 연구 대상을 생물학적인 형식으로 만든다면, 그리고 예술가와 비평가가 과학의 방식으로 밝힌 마음과 자연 세계의 작용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면, 서로 다른 학문 분야가 격론하는 주기는 끝날 것이다. 최소한 원칙적으로 인문학에서는 어떤 것도 부정될 수 없으며 과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p. 127)

이 책은 생명 사랑이라는 거창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저자의 주장은 논쟁적이지는 않다. 가벼운 에세이 같다. 박노해가 사람만이 희망이라며 다소 거창한 주제로 옮겨갔을 때 굳이 논쟁을 원한 것은 아니었듯이, 저자가 인간의 보편적 속성으로서 생명 사랑을 논할 때 그가 원한 것 또한 과학적 논증은 아니다. 비록 그가 자연과학자이긴 하지만 말이다. 책의 각 장은 독자들에게 바이오필리아를 전도하기 위해 일관되게 나아가는 글들이 아니다. 바이오필리아는 그저 책 내용 전체를 관통하는 저자의 근본 입장일 뿐이다. 인간의 자연파괴를 비판하는 부분에서처럼 비판적 주장을 할 때조차 저자의 어투는 담담하고 차분하다. 따라서 바이오필리아가 무엇인지 논리적이고 명확한 해답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각 장에 담긴 에드워드 윌슨의 생명 사랑을 느껴보면 좋을 듯하다. 아울러 그의 실제적/지적 답사기를 통해서 사회생물학의 세계를 엿보는 재미를 만끽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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