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시대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경남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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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담론을 말하길 좋아하는 제러미 리프킨이 이번에 던지는 화두는 바로 공감이다. 공감(empathy)이라는 단어는 본래 독일어 미학용어를 1909년 미국 심리학자가 empathy로 번역하면서 미국 심리학의 용어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Empathic은 감정이입을 한다는 뜻이다. 즉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황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이것은 반드시 sympathetic, 즉 동정적이 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일단 상황을 empathic하게 바라본 뒤에는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최근에 모든 인간에게 생명사랑의 감정이 있다고 주장하는 에드워드 윌슨의 <바이오필리아>를 읽었는데, 인간본성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공감의 시대>도 바이오필리아와 비슷한 부류의 책이다. 아닌 게 아니라 리프킨도 이 책에서 윌슨을 긍정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책의 띠지에는 “적자생존은 끝났다. 이제 오픈소스와 협력이 이끄는 3차 산업혁명의 시대다."라는 한겨레 서평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다. 3차 산업혁명의 기본은 인간의 공감능력(증대)에 있다. 기본적으로 나는 이런 류의 책은 별로 안 좋아한다. 인간이 착하냐, 악하냐 하는 증명 불가능한 논의를 다루는 것도 그다지 맘에 안 들고, 괜히 거창하게 ‘3차 산업혁명’이네, 어쩌네 하면서 앞으로 한 50년은 지나봐야 확인할 수 있을 법한 무분별한 일반화 내지는 예언을 하는 것도 별로다. 저명한 학자가 센세이셔널한 주장을 할수록 그 책은 많이 팔리겠지만, 증명하기 힘든 주장을 담은 책은 읽기에 맥빠지고 별 감흥도 없다. 오히려 반감만 생긴다.

 

출판사의 기획, 광고, 그리고 언론사의 서평 등이 저자의 주장을 과장한 측면도 없지 않다. 일단 책의 원제는 The Empathic Civilization이다. 직역하자면 ‘공감하는 문명’이다. 우리 인간의 문명이 공감하는 문명이라는 것이다. ‘공감의 시대’라고 하면 다른 시대와 달리 현 시대가 ‘공감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뉘앙스를 풍기지만, 그것은 저자의 주장에서 본질이 아니다. 저자의 주장은 인간에게는 기본 공감 능력이 있으며 그러한 능력이 점점 커졌다는 것이다.

 

저자의 증명 방식은 통시적인 동시에 공시적이다. 사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공감(능력)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발전해왔다는 것이므로 증명의 방식은 통시적이어야 옳다. 책의 2부가 통시적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사회가 변해온 것은 맞는데, 그것이 과연 ‘공감 능력’의 변화라고 봐야 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저자는 고대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17 5,000년의 인류 역사를 통해 인간의 공감 의식이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다. 비록 공감 의식의 발전에는 부침이 있었지만 그 궤적은 분명하다고 한다.

 

공감 의식의 발전과 자아의 개발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간의 여정을 이끄는 사회구조를 점점 더 복잡하게 만드는 현상을 수반한다. (p. 18)

 

그렇지만

 

공감 의식이 커질수록 지구의 에너지와 그 밖에 자원의 소비가 급증하고 그래서 지구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p.6)

 

저자는 이것을 공감-엔트로피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게 과연 역설인가? 이것이 역설이기 위해서는 첫째로 인류의 공감 의식이 정말 커져 온 게 사실이어야 하고, 둘째 공감 의식과 지구의 건강 간에 (이론적으로) (+)의 상관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공감 의식이 커져왔는지는 차치하고 공감이라는 변수와 지구의 건강 간에 상관관계를 설정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을까? 역설로 보이는 이 관계는 원래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공시적 분석에서 십 만 년이 넘는 인류 역사에 걸친 자료를 수집하는 데에 자료의 가용성이나 일관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저자는 지난 수 십 년 동안 이루어진 발견을 보다 더 결정적인 공시적 증거 자료로 내세우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저자는 불과 100여 년 전에 비해서 오늘날 인간들 간의 공감과 공감능력이 인간관계, 법 체계, 학문 영역 등에서 비약적으로 증대되었다고 말한다. 예컨대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난 뒤 흑인들은 원수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고, 근대 사법체계는 처벌보다는 교화를 강조하며, 리눅스는 오픈 소스 협력 체제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 올라섰다. 그렇다면 무엇이 변했는가? 사람들의 능력이 증대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더 착해졌다는 것인가? 더 성찰적으로 변했다는 것인가? 아무튼… 인간이 긍정적으로 변했다기보다는, 교통통신 수단의 발달로 과거에 협소했던 생활영역이 더욱 확장됨에 따라 지구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이고 비극적인 사건들로부터 교훈을 얻어서 의식적, 제도적으로 변한 것 아닌가? 뭔가 질적으로 향상되었다거나, 인간의 능력이 증대되었거나 본성이 선해졌다기보다는 최악 상황을 피하기 위해 문명화의 이름으로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오픈 소스 운동의 경우는 독과점을 반대하는 극소수의 선도자들 덕에 다수의 참가자들이 혜택을 보는 형국이지, 공감 능력의 증대와는 무관하지 않은가?

 

저자가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는 심리학(특히, 아동발달심리학 같은)과 생물학 등의 분야에서 이루어낸 발견들이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하는 공시적 자료에도 한계는 여전한 것 같다. 기본적으로 자료의 공시성 때문에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다이내믹한 현대 사회의 수많은 변수들 때문에 그러한 증거들이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증거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의 발견들이 정확하게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 같지도 않다. 생물학적, 심리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공감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과 인간이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의지적으로 상대를 이용하고 이기며 착취하려 한다. 예컨대 리프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뇌과학과 아동발달학 분야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면서 인간이 본래 공격적이고 물질적이고 실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오래된 믿음은 도마 위에 오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히려 인간이 근본적으로 공감하는 종이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영향력을 넓혀 가는 추세이다. (p. 5)

 

그러나 공감하는 종으로서 인간이 실제로는 성장하면서 “물질적이고 실리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적자생존의 현실이 인간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

애초부터 그의 주장은 증명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말하자면 증명하기보다는 반박하기가 훨씬 쉬운 주장이었다. 반박가능성(falsification)이 크므로 리프킨은 포퍼가 말하는 ‘열린 사회의 적들’이 되지는 않겠지만,  반박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만큼 허술하기도 하다. 그가 ‘거대한’ 주장을 하고 있는 탓이다.

 

인간의 공감 능력이 증대되었다는 리프킨의 주장은 오히려 정반대로 각박하고 살벌한 현대사회의 실상에 대한 처절한 통탄처럼 보여 안타깝다. 사회에 대해 깊이 분석하고 성찰해온 사상가들은, 박노해가 그랬고, 김지하가 그랬고, 윌슨이 그랬던 것처럼, 왜 하나 같이 결국은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주제로 회귀하는 것일까? 비록 그들의 주장이 많은 이들에게 완전한 설득력을 주지는 못했지만, 오랜 성찰 끝에 그러한 주장에 도달한 그러한 사상가들이 여럿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정말로 ‘사랑’이 인류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덧붙임] 이 책에는 서문이 끝나고 1부에 들어가기에 앞서 서론이라고 부를 만한 챕터(1)가 하나 더 존재한다. 책이 다루는 주제가 다소 추상적인데다가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아우르려다 보니 책 전체 내용에 구멍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데, 그걸 메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이유에 기인하여 이 책의 내용을 더욱 정교화해서 좀 더 설득력 있는 글을 차후에 다시 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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