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책이다. 신기하고 다양한 자연현상들이 인용되며, 그것들이 지극히 단순한 물리법칙에 기인한다는 점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나아가 저자는 사회현상들 또한 단순한 자연현상과 다를 바가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 점은 물론 논란거리이다. 그리고 나는 저자의 주장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책은 인종분리의 원인에 관한 연구를 인용하는 것으로 머리말을 시작한다. 1971년 토마스 셸링은 인종별로 거주지역이 나뉘는 이유가 인종주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컴퓨터 모의실험을 했다. 인종을 혐오해서가 아니라 지역에서 소수인종이 되기를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사람들의 거주지역이 나뉠 수 있음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 이 연구의 결론은 “인종주의가 완전히 사라진다 해도, 물리 법칙과 비슷한 그 무엇 때문에 인종들이 분리될 것”이라는 점이다. 인종주의에 대한 우려에서 시작된 연구가, 결국 문제는 인종주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의 말대로 인종분리는 ‘물리법칙’ 비슷한 그 무엇 때문인가?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소수인종이 되기를 두려워한다는 점을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상태라고 가정할 때, 이것이 물리법칙 비슷한 그 무엇인가? 사회현상을 아주 근본적인 그 무언가로 환원했다는 점에서 이 방법론 자체는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비슷할지 모르나, 그러한 사회현상에 가로놓인 원인을 물리법칙, 혹은 물리법칙 비슷한 그 무엇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친 주장인 것 같다. 셸링의 논문에서 인종분리를 낳은 근본원인은 사람들의 ‘심리’일 뿐이다.
툰드라 지대에 속하는 노르웨이의 스피츠베르겐이라는 섬에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많은 고리 모양의 둔덕은 땅이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형성된 것이다. 저자는 인간 세계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사회의 기본 구성요소인 사람을 ‘원자’라고 한다면, 사회적 원자가 이루는 거시적인 패턴은 사람들 개개인의 성격과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람이 원자나 돌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사회과학의 기본 방향이 물리학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수많은 사람들이 좁은 복도에서 양방향으로 움직이다 보면 일관된 줄이 생겨나게 된다. “이것이 자기 조직화하는 구조이며, 스피츠베르겐의 돌무더기처럼 사람들의 의도 없이 형성된다.” (p. 30) 그러나 여기에는 정말 사람들의 의도가 없는가? 부딪히지 않으려는 명백한 의도가 있지 않은가? 그러한 의도는 심리적인 것이지 물리학적인 것이 아니다. 의도를 물상화해서 그것이 기본적인 물리법칙과 “비슷”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러한 흐름의 형성이 원형 돌무더기의 형성과 “비슷”하다는 주장은 (단순한 비유라면 모를까) 과학적이지 않다. 이러한 현상들은 인간이 사고와 의지에 따라, 혹은 본능적으로 선택을 한 데서 비롯된다. 현상의 원인을 가장 단순한 데까지 환원하자면 그것은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본능에 있지, 저자가 암묵적으로 혹은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물리적인 그 무엇에 있지 않다. 저자가 단순한 비유 이상의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이라면, 그것은 심각한 논리적 비약이다.
사실 이 책에 열거된 사례들은 저자 같은 물리학자가 아니라 사회심리학자들이나 좋아할 법한 것들이다. 여기 제시된 똑같은 사례들을 갖고 사회심리학자들은 말할 것이다. “그것 봐라. 복잡해보이는 사회현상도 결국은 인간의 보편적 본능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말한다. “그것 봐라. 복잡해보이는 사회현상도 결국은 인간의 물리적 속성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틀린 말이다.
이 책에 실린 모든 사례들이 다 그렇다. 그저 ‘사회현상이 자연현상과 비슷하다’는 식의 가벼운 에세이로 읽는다면 이 책은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이 파고들어 사회현상의 물리법칙적 근거를 논하는 데까지 들어가면 이 책의 주장은 다소 위험해진다. 괜한 유사성 때문에 독자들이 현혹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저자가 ‘네이처’ 지에서 오랫동안 편집자로 일했던 과학자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저자의 자못 진지한 어투는 부담스럽다. 물론 저자는 그럴 의도는 없었을지 몰라도…
저자는 사회과학이 인과관계가 아닌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데 그치고 있다며 비판한다. 그러면서 마치 자기가 사회과학에 해법이라도 주는 양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 사회현상, 사회과학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태도다. 근대 초기 사회과학의 주창자들은 당시 자연과학의 발전에 고무되어 사회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자신들의 학문에 그러한 이름을 붙였다. ‘사회학의 아버지’ 꽁트(August Comte)는 당시 처음 탄생한 사회학을 ‘사회물리학’이라 명명한 바 있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탄생 이후 단 한 번도 사회와 사회현상으로부터 자연과학에서 다루는 것 같은 법칙들이 도출된 적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의지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과학의 한계(?)는 오늘날 대부분이 사회과학자들이 익히 잘 알고 있으며, 일부 의욕에 찬 사회과학자들만이 여전히 사회과학을 ‘과학’으로 만들려는 무모한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여전히 사회과학에 인과관계 정립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도 물리적 단위와 다름없는데도 사회과학자들이 상관관계 분석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것은 잘못된 비판이다.
독자들은 부디 이 책을 재밋거리로 읽기를 바란다. 그렇게만 읽는다면 참 재미있는 책이다. 자연현상에 비추어 사회현상 또한 기본적 물리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기를 바란다. 저자가 인용한 사회현상들이 자연현상처럼 일정한 규칙을 따른다는 주장은 맞는 말이다. 여기까지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충분히 납득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현상이 물리법칙을 따른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