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제목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해서 만물의 상품화에도 불구하고 아직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 아직 이 세상은 아름답지 아니한가?’ 따위의 감상적 내용을 기대했다면 완전한 오해다. 원제도 What Money Can’t Buy이기는 하지만 책의 내용을 좀 더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돈으로 사서는 안 되는 것들’, 거래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같은 제목이 더 어울렸을 것이다. 아마 마이클 샌델도 그런 뉘앙스의 제목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영어 ‘can’할 수 있다능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해도 된다허락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저자는 두루뭉술하게 두 가지 의미 모두를 포함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단순히 만물의 상품화 경향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분명 시장주의가 만연한 오늘날에는 사고팔지 말아야 할 것들조차 사고팔리는 경향이 있지만, 샌델은 그런 사례들을 열거하고 그래선 안 된다고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그의 주장은 시장에 도덕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저자는 도덕이 시장에서 재화의 가치를 더욱 적절하게 평가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엇이 사고팔릴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최근 새롭게 돈으로 사고파는 대상이 된 여러 아이템들을 다섯 챕터에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샌델은 만물의 상품화를 통해 시장이 비시장규범을 밀어내는현상에 주목하면서 공정성부패라는 두 가지 잣대로 그러한 현상을 비판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재화들을 생각해보자.

 

  • 일등석이나 비즈니스석 항공권을 구매한 승객은 입국심사 때 줄을 설 필요가 없는 패스트트랙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 대중을 위해 무료로 제공하는 연극에 유명배우가 출연하게 되어 표 구하기 경쟁이 치열해지자 $125를 내면 대리 줄서기를 시켜서 표를 받아올 수 있는 서비스가 각광을 받았다.
  • 새 법안 관련 공청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로비스트들은 대리 줄서기 서비스를 이용해서 좌석을 확보한다.
  • 중국에서는 전문의 진료 예약권이 공공연하게 암거래된다.
  • Project Prevention이라는 단체는 마약중독 여성이 불임시술을 받으면 $300을 준다.
  • 미국의 몇몇 학교들은 성적이 좋거나, 숙제를 잘 해오거나, 책을 읽는 학생들에게 돈을 준다.
  • 약을 잘 복용하거나, 성병 예방 백신을 맞거나, 금연을 하거나, 콜레스테롤 관리를 잘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금을 주는 경우도 있다.
  • 미국 이민 할당치를 경매에 내놓아 돈을 많이 내는 이민자를 받자는 제안도 있었다.
  • 비디오 반납일 초과시 내야 하는 벌금이 이제는 요금처럼 여겨지고 있다.
  • 어린이방에 아이를 데리러 늦게 오는 부모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기 시작하자 돈을 내고 늦게 데리러 오는 부모들의 수가 훨씬 늘었다.
  • 어차피 총량은 변함이 없을 테니 출산허가증, 온실가스 배출권, 보호동물 사냥권 등을 사고팔 수 있게 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 중국에는 대리 사과 서비스가 있다.
  • 결혼식 축사를 판매하는 사이트가 있다.
  • 경제학자들은 홀리데이 선물로는 현금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 스위스 어느 마을에서 핵 폐기장을 건립하는 대가로 돈을 준다고 하자 주민들의 찬성표는 줄어들었다.
  • 영국과 달리 혈액기증자에게 돈을 지불하는 미국은 만성적인 혈액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 미국의 몇몇 대기업들은 직원들 명의로 생명보험에 가입하여 그들이 죽으면 보험금을 타간다.
  • 생명보험 가입자의 증권을 약정된 사망보험금보다 훨씬 싸게 구입하고 남은 보험금을 내주는 대신 사망시 보험금을 가져가는 생명보험 전매시장이 붐이다.
  • 올해 죽을 것 같은 유명인사 명단에 돈을 거는 사이트도 있다.
  • 미 국방부는 테러 대상자나 대상지를 예측하여 돈을 거는 사이트를 제안한 적이 있다.
  • 야구장, 미식축구장, 학교 체육관 등의 명명권을 기업에 파는 일이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
  • 주택 외벽, 사람의 이마나 팔뚝 등에 광고를 게재해주고 보상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들 대부분의 경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정성과 부패이다. 공정성을 둘러싼 비판은 판매자가 그러한 재화를 아무리 기꺼이 시장에 내놓는다 할지라도 그러한 상황을 강요하는 보이지 않는 압박(가난 따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장 교환에 전제가 되어야 하는 거래자들 간의 합의가 대등한 입장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부패를 둘러싼 비판은 그러한 재화를 사고파는 행위가 해당 재화의 가치를 변질시키거나 손상시킨다는 문제의식이다. 위에 제시된 대부분의 사례는 공정성과 부패 모두, 혹은 적어도 둘 중 한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 마이클 샌델의 주장이다.

 

저자의 입장은 도덕주의에 기초하고 있지만 위의 각 사례에서 주장을 풀어가는 방식은 논리적이다. 위와 같은 재화들이 거래됨으로써 효용성이 증대된다는 공리주의자들의 주장과, 시장에서 그 무엇을 거래하든 재화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샌델은 정면으로 반박하고 도덕을 내세워 비판한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가 이러한 거침없는 상품화의 장기적 영향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재화를 사고파는 행위가 앞으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영국과 미국의 혈액 기증 시스템을 비교하면서 혈액 기증을 보상하는 미국 시스템을 비판한 영국 사회학자 티트무스(Richard Titmuss)의 주장은 한가지 암시를 준다. “인간 활동의 한 영역에서 이타주의 정신이 쇠퇴하면 다른 영역에 속한 태도, 동기, 관계에도 비슷한 변화가 찾아올 가능성이 있다.” (p. 172) 이 주장을 조금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품화는 인간적, 시민적 가치의 상실을 가져올 것이고 돈이 인간의 주인이 되는 인간소외로 나아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이 책의 어조는 그다지 논쟁적이지는 않다. 저자의 어조는 시종 담담하다. 삶과 죽음의 시장을 다룬 4장에서는 다소 격한 표현이 나오지만 다른 모든 챕터에서는 밋밋하다 싶을 정도로 차분하다. 그리고 한가지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저자의 글쓰기 습관(혹은 능력?)에 관한 것이다. 샌델의 다른 저서들과는 달리, 적어도 이 책은 체계성이 떨어진다. 같은 프레임에 서서 분석하고 있으니 챕터마다 비슷한 내용의 분석이 반복되는 것이야 당연하다 쳐도, 한 챕터 내에서도 글이 짜임새가 부족하고 중언부언한다. 확실하게 맺고 끊는 것이 부족하다. 분석의 수준도 기발하다 할 정도는 아니고 상식 선에서 생각해볼 만한 수준이다. 사회과학 서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소감을 밝힌 에세이로 분류할 만한 책이다. 뭔가 굉장한 것을 기대하고 책을 집어 들었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고서 얻은 수확이라면 요즘 시장에서 거래되는 희한한 재화들을 많이 알게 된 것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번역은 아주 나쁘지는 않지만 썩 좋지도 않다. 번역가가 소속된 ‘바른번역 전문 번역가에 부합하는 훌륭한 번역은 아니다. 부자연스럽거나 부정확하거나 잘못된 어휘나 표현, 영어식 어순, 직역 어투가 군데군데 보인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부자연스러운 어휘나 표현은 번역자가 관련 분야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이 부족하거나 잘못된 언어 습관을 가지고 있을 때 흔히 나타난다. 직역 어투는 올바른 한글 표현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탓이다. 한가지 예만 들자면, “점점 더 많은 수의 OO XX한다.”“XX하는 OO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라고 번역해야 한국어 어법에 맞다. 주격 조사 //의 사용도 간혹 어색하다. 87쪽에 항정신성향정신성이 맞다. ‘향정신성은 정신으로 한다는 뜻이지 정신에 저한다는 뜻이 아니다. 역자의 실수를 편집자가 못 잡아낸 게 아쉽다. 138할만한 지할만한지가 맞다. ‘는 어떤 일이 있었던 때부터 지금까지의 동안을 뜻하는 의존명사일 때에만 띄어쓴다. 이외에도 조금 다르게 번역했더라면 좋았을 법한 단어, 표현, 문장들이 종종 보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한국어판 저자 서문에 나와 있듯이 이 책이 미국, 영국, 한국에서 동시 출간되었다고 하니, 시간에 쫓기면서 이 정도로 번역과 교정을 하고, 찾아보기도 만들고, 감수를 받고, 그 많은 추천사를 받은 출판사의 역량은 칭찬할 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회적 자본 : 인간은 이기적인가?

오타 및 오역, 편집 실수, 문법 오류 등이 너무 많아서 솔직히 읽으면서 점점 짜증이 났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읽다 보니 너무 많아서 따로 기록했던 것을 정리한다. (이런 책들은 편집자의 이름을 꼭 찾아보게 된다. 될 수 있으면 이 사람이 편집한 글은 피하고 싶어서.)

 

p. 26 첫번째 줄. 사람은 생각보다 타인을 믿는다 -> 사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타인을 믿는다. 저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라는 의미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생각보다는 동사를 수식할 수 없다. ‘생각보다더욱같은 부사를 수식해야 한다. p. 59에서도 마찬가지이다.

p. 30 밑에서 다섯번 째 줄. 마크 크래노베터 -> 마크 그래노베터

p. 30 그 다음 줄. The Strength Weak Ties -> The Strength of Weak Ties

p. 37 맨 아래. 다퉜고 -> 다뤘고

p. 52 다섯번 째 줄. 않으려고해서 -> 않으려고 해서

p. 57 중간. 전체의 -> 전체

p. 75 중간. 결정 내리는 -> 결정내리는. 이 표현이 다음줄에도 또 나오는데, 한 번은 띄어 쓰고 한 번은 붙여 썼다. 어느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

p. 97 중간. 사야할지 -> 사야 할지

p. 97 레몬 시장에 대한 정의가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레몬은 하자가 있는 차를 가리키는 속어인데, 의도적으로 레몬을 거래하는 레몬 시장(market for lemons)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p. 106. 두 번째 줄. 5번 참가자의 -> 4번 참가자의

p. 109 밑에서 두 번째 줄. 무임승차가집단의 -> 무임승차가 집단의

p. 109 마지막 문장. 주술관계가 호응이 안 돼 의미가 불분명하다.

p. 111 밑에서 다섯 번째 줄. 고객이 차 안으로 오면 -> 경찰이 차로 다가오면

p. 121 밑에서 다섯 번째 줄. 민원을 접수된다 -> 민원이 접수된다

p. 187 밑에서 여덟 번째 줄. 출현하겠다고 -> 출연하겠다고

p. 192 소제목 위에서 한 줄 띄어쓰기가 안 됨.

p. 192 밑에서 다섯 번째 줄. 결론에 도출할 -> 결론을 도출할

p. 199 중간. 미디엄 사이즈 2개와 토핑 2. 토핑이 2개 들어간 미디엄 사이즈 피자 2. 아마도 two medium size pizzas with two toppings를 잘못 번역한 것 같다.

p. 212 중간. 사회복지가 -> 사회복지사

p. 237 밑에서 여덟 번째 줄. 있어요 -> 있다

p. 284 밑에서 다섯 번째 줄. 저서『공유지의 비극을 넘어에서 -> 저서공유지의 비극을 넘어에서. 전각을 반각으로 바꾸면서 꺾음쇠 앞에 띄어쓰기를 놓친 것 같다.

p. 287 이하 계속. 밴앤제리 -> 벤앤제리스

p. 291 밑에서 네번 째 줄. 1970 -> 17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회적 자본 - 1% vs 99% 누가 양극화를 만드는가
KBS <사회적 자본>제작팀 지음 / 문예춘추사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골랐던 책이다. 제목인 사회적 자본이 부제인 ‘1% vs 99% 누가 양극화를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궁금했다. 나는 이 책에서 저자들이 사회적 자본의 재생산/공고화를 통해1% 99% 간 양극화가 더욱 강화된다 식의 결론을 도출하리라 기대했다. 책을 펴면서 나는 퍼트남(Robert Putnam)사회적 자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먹고 살기 바쁜 노동자들보다 부유층이 네트워크나 규범 같은 사회적 자본을 더욱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양극화가 더욱 공고화된다는 식의 결론이 나올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완전히 깨졌다. 무엇보다 이 책의 부제는 사실 책 내용과 상관관계가 없다. 책 전체에 걸쳐서 양극화라는 표현이나 뉘앙스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저자들이 궁극적으로는사회적 자본과 양극화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책을 썼을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책 내용을 통해서는 그게 드러나지 않았). 아니면 단순히 책 제목을 결정하는 단계에서 ‘1% 99%’라는 섹시한제목을 달고 싶은 유혹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건 간에 부제를 그렇게 달았으면 어떤 식으로든 관련 내용을 포함시켰어야 옳다.

 

책의 전반적인 구조는 여러 심리실험 에피소드들을 근간으로 하여 거기서 나온 결론의 일반화를 통해 주장을 풀어나가고 거기에 다른 비실험 사례들을 덧붙이는 식이다. 1부는 신뢰, 2부는 소통, 3부는 협력을 테마로 하고 있다. 책에서 소개되는 실험은 대개 KBS 방송에서 소개되었던 것들이며 외국에서 실시된 유명한 실험들도 일부 소개된다. 이 실험들은 거개가 인간이 이기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한 것들이다. 비록 책 제목에서 받았던 기대를 충족할 수는 없었지만 여기 소개된 의외의 실험 결과들을 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개인적으로는 심리실험을 일반화하는 데 (매우) 부정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실험 결과들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고 싶지는 않다. 따라서 이 책에서 소개됐던 실험 결과들을 제외한 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들을 꼽자면, 행복감뿐 아니라 신뢰에도 영향을 주는 신뢰 호르몬’ (혹은 윤리 분자’) 옥시토신(pp. 76-85),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캐나다 공감 수업의 내용과 효과(pp. 161-169), 상황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해석하여 소통을 가로막는 확증편향(pp. 170-183)에 관한 것 등이다. 특히 사람들이 가진 확증편향은 내가 얼마 전에 리뷰를 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리뷰 보기: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여 철학을 가져라.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여 프레임으로 맞서라.)에서 말하는 프레임의 효과와도 맥락이 닿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책 제목에서 주는 기대감을 접는다면 가볍게 읽기에 부담없는 책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들과 개선해야 할 점들이 있다. 우선, 책의 서두에서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에 대한 정의를 좀 더 확실하게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비록 32-33쪽에서 사회적 자본의 정의에 관한 섹션을 특별히 삽입하기는 했지만, 설명이 부족해서 여전히 그 정의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1] 이 책에서 다루는 신뢰, 소통, 협력이 왜 사회적 자본에서 중요한지 여전히 설명이 미흡하다. 저자들이 사회학 쪽 백그라운드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나, 한편으로는 사회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사회적 자본을 큰제목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 최근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1% 99%’를 부제로 달았으니 제목만큼은 멋지게 잘 단 셈이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 이 책 내용을 좀 더 정확하게 대표해줄 만한 제목은 예컨대 인간은 이기적인가?”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저자들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썩 잘 쓴 글도 아니다. 이 분야의 전공자들이 아닌 프로듀서들이 쓴 글이라 그럴 것이다. 시사교양 TV 프로그램은 설득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며, 글이 아닌 사례나 인터뷰 등을 통해서 스스로 말하게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그런 식의 구성에 익숙한 PD나 방송작가들에게는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활자화된 매체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럭저럭 무난한 글들도 있지만 어떤 글들은 뭔가 결론을 낼 것 같다가도 했던 말만 중언부언하다가 끝내버린다. 어떤 글은 문장이 다소 유치하고 비논리적이다. 심지어 무난한 글들 조차도 논리의 전개방식이나 결론이 매우 상식적으로 당위론적이고 원론적인 수준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덧붙임] 오타 및 오역, 편집 실수, 문법 오류 등이 너무 많아서 솔직히 읽으면서 점점 짜증이 났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읽다 보니 너무 많아서 따로 기록했던 것을 정리해서 따로 포스팅한다. (이런 책들은 편집자의 이름을 꼭 찾아보게 된다. 될 수 있으면 이 사람이 편집한 글은 피하고 싶어서. 트랙백 참조)



[1] 저자들이 사회적 자본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든 예는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트러스트 TRUST-The social virtues and the creation of prosperity』와 2009년 노벨경제학자상을 수상한 엘리너 오스트롬의 설명(그나마 이 경우엔 구체적 저서 등을 인용하지도 않았다)뿐이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사회적 자본』오역 및 오탈자, 편집 실수
    from Rhizomatous Reading 2013-05-19 12:03 
    오타 및 오역, 편집 실수, 문법 오류 등이 너무 많아서 솔직히 읽으면서 점점 짜증이 났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읽다 보니 너무 많아서 따로 기록했던 것을 정리한다. (이런 책들은 편집자의 이름을 꼭 찾아보게 된다. 될 수 있으면 이 사람이 편집한 글은 피하고 싶어서.) p. 26 첫번째 줄. 사람은 생각보다 타인을 믿는다 -> 사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타인을 믿는다. 저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라는 의미를 표현하고 싶었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 삼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부시 정권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세금 감면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이 되자 실제로 이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그의 공약은 2001Economic Growth and Tax Relief Reconciliation Act 2003Jobs and Growth Tax Relief Reconciliation Act로 법제화 되었다. 원래 이 정책은 2010년에 만료될 예정이었는데, 연장 여부를 두고 논란 끝에 원안 그대로 연장하는 데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정책의 연장 여부는 지난 두 차례의 대선에서 공화당과 민주당 간에 큰 논란거리였고 만료일이 가까워지면서 매스컴에서 수없이 오르내렸다. 쉽게 Bush-era Tax Cuts라고 부른다. 연장안이 논의되던 당시 오바마는 미국 경기를 회복시킬 세수 확대를 위해 부유층에 대한 감면은 중단하고 중산층 이하에 대해서만 연장하는 쪽을 선호했으나 결국 그의 뜻을 관철할 수 없었다. 한 번 굳어진 정책을, 그것도 사람들이 선호하는 정책을 어떤 이유에서건(‘대의를 위해라도) 철회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법안의 이름에는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긍정적인 단어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국민들은 이 법안이 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법안을 철회하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용어를 빌자면, 공화당이 프레이밍(framing)에서 승리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법안이 Bush-era Tax Cuts라고 불리건 Tax Relief라고 불리건 선한 것이 공화당의 공로로 돌아가는 셈이니 이보다 더 좋은 명명命名은 없을 것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는 위의 짧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프레임 구성이 정치 행위에 끼치는 힘을 분석한 책이다. 저자 조지 레이코프는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인지과학자로서 언어와 상징이 인간의 사고방식을 틀지우는 방식에 대해서 논한다.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레이코프는 철처한 민주당 지지자라는 점이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민주당(혹은 좀 더 광범위하게 진보주의자들)이 정책대결 혹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근원적인 태도 변환을 주장한다. 그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핵심 개념은 프레임(frame)이다. “프레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프레임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 우리가 짜는 계획,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 행동의 좋고 나쁜 결과를 결정한다. 정치에서 프레임은 사회 정책과 그 정책을 수행하고자 수립하는 제도를 형성한다. 프레임을 바꾸는 것은 이 모두를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변화이다.” (p. 17)

프레임의 힘은 막강하다. 일단 어떤 프레임이 사람들의 인식 속에 들어오면 그것을 부정하려는 생각이나 행위조차도 프레임을 강화한다. 이 책 제목에 나왔듯이 일주일간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과제를 수행하기란 매우 어렵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면 일단 코끼리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는 르네 마그리트(Rene Margritte)의 작품에서는 파이프의 이미지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날 뿐 아니라 제목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000에 있는 레닌이라는 그림(제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제목을 알려주시는 분께는 책 한 권을 선물하겠다. 구글, 네이버 등에서 영어와 한글로 여러 키워드를 집어넣으며 검색했는데도 찾을 수가 없었다.)에는 레닌이 등장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레닌은 제목 그대로 000에 있다.) 그림을 보면서 이 그림에는 레닌이 없다.’는 생각을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마찬가지 맥락에서 Tax relief를 반대하기 위해서 “Tax relief”라는 용어를 입에 올리면 오히려 대중으로부터 그건 세금 감면 정책이잖아! 왜 반대를 하는 거지?” 같은 반응을 낳는다. 동성결혼(same-sex marriage)을 게이 결혼(gay marriage)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수주의 프레임을 강화시켜 준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살리기사업 명칭도 보수파가 프레임을 선점한 것이다.

한국과 달리 미국의 양당은 복지정책에 관해서 일관되게 다른 입장을 보인다. 다들 알다시피 한결같이 공화당은 복지정책 축소, 민주당은 확대를 주장한다. 나는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공화당 의원이건 민주당 의원이건 다들 부유층에 속한다. 민주당이 가난한 자들을 옹호해서 얻을 이득은 없다. (물론 양당제 하에서 상대방과 차별화되어야 표를 얻기에 유리하겠지만, 근본적으로 민주당이 친서민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양당의 역사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별다른 설명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레이코프는 이 책에서 시원하게 대답해준다. 양당의 근본적인 가치관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레이코프는 엄격한 아버지(strict father)의 가족자상한 부모(nurturant parents)의 가족모델을 적용하여 공화당과 민주당의 가치관 차이를 설명한다. 아버지가 엄격한 가정에서 아버지는 규율과 복종, 자기 절제 등을 강조한다.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내면화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규율이 없으면 도덕을 못 배우고 잘못을 저지르며 가난해진다. 반면 부모가 자상한 가정에서 부모는 보호에 초점을 둔다. 부모는 자녀를 자상하게 보살피며 그 자녀들이 타인들을 보살피기를 바란다. 레이코프는 보살핌의 가치가 곧 진보주의의 가치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가족 가치관의 차이가 다른 모든 분야에 그대로 반영된다고 말한다.

예컨대 엄격한 아버지의 가족모델에 충실한 공화당은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반대한다. 그것은 비도덕적이고 규율을 약화시키고 의존적으로 만든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해지기 위해 필요한 규율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규율이 있는 사람은 자유 시장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다. 따라서 부유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다. 가난한 자를 위한 복지는 나쁘지만, 기업보조금은 선한 사람들에게 주는 상이므로 바람직하다. ‘엄격한 아버지의 가족모델을 확장하면 대통령의 권위는 아버지의 권위와 상응한다. 비단 복지뿐 아니라 다른 많은 문제들, 예컨대 교육, 동성애, 낙태, 환경, 총기 규제, 기업 규제, 외교 등의 문제에서 양당이 견지하는 세부적인 입장들이 서로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밑에는 이와 같이 다른 가족 모델이 자리하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미국인의 1/3엄격한 아버지모델, 다른 1/3자상한 부모모델, 나머지 1/3은 중간층이라고 할 때, 이 중간층에게 어떤 프레임으로 접근하느냐가 선거 당락의 키가 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지난 40여 년간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프레임 연구를 통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개념과 언어를 개발해왔지만, 진보주의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공화당은 브레인을 고용하고 이들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데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지만, 민주당은 도움이 필요한 수많은 풀뿌리 조직에 골고루 돈을 뿌린다. 공화당은 투자하고, 민주당은 돕는다. 공화당은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민주당은 쟁점별로 사고한다. 공화당은 프레임을 주도하고 민주당은 방어하느라 급급하다.

따라서 진보주의자는 어떤 이슈에 대해서 진실을 대중에게 알려주는 것만으로 승리할 수 없다. 여전히 대중은 그 진실을 자신들의 프레임으로 걸러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공화당이 거짓말쟁이라는 진실을 백날 알려줘도 가난한 사람이 계속해서 공화당에 투표하는 이유는 바로 이 프레임 때문이다. 공화당이 내세우는 프레임이 자신의 정체성과 부합하는 한 유권자들은 공화당에 투표한다. 그것이 자신의 이익에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라크 전쟁 때도 전쟁의 명분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는데도 미국인들은 한 번 빠진 프레임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했다. 프레임은 사실을 압도한다. 보수주의자들은 보수주의 사상이 대중적인 것이며 진보주의 사상이 엘리트주의적인 것이라는 프레임사실은 그 반대가 진실임에도을 구축해왔고, 그러한 전략에서 성공을 거둔 덕에 선거에서 승리해왔다. 진보주의자들은 나약하고, 매국노이고, 세금이나 축내는 엘리트일 뿐이라는 보수주의자들의 선전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저자는 민주당이 공화당에 끌려가지 말고 그들과 다른 프레임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테러에 대한 보복에 단순히 반대하기보다는 책임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테러의 근본원인을 완화시키는 국제 협력을 이끌어야 한다. 그러한 책임은 보살핌의 도덕(nurturant morality)에서 나온다. 위에 언급한 자상한 부모의 가족모델과 연관되는 이 도덕규범은 공정성, 폭력의 최소화, 보살핌의 윤리, 위험에 처한 사람들의 보호, 상호 의존 인식, 공동선을 향한 협력, 공동체 건설, 상호 존중 등을 강조한다. 마지막 장에서 레이코프는 보수주의자들과 대결하는 방법을 매뉴얼처럼 친절하게 제시한다.

이 책은 물론 미국의 특수한 상황에 기초하여 쓰여진 책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민주당을 각성시키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다. <공산당선언>에 빚대어 <민주당선언>이라고 불러도 딱히 이상하지 않을 그런 책이다. 그렇지만 인지과학의 시각에서 프레임이 인간의 판단력에 끼치는 영향력을 분석했다는 점에서 어디에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다. ‘엄격한 아버지의 가족모델과 자상한 부모의 가족모델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정견 차이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한국에서도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유용한 틀이 될 것이다. 한가지 문제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포퓰리즘에 빠져서 자기 본색을 버리고 진보적 정책을 자주 차용함으로써 보수-진보간 구별이 종종 모호해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세훈 전 서울시장처럼 강단있게보수를 고집하는 전형적인 보수주의자들을 염두에 둔다면, 한국 보수주의자들의 가치관이 어디에 기초하며 그들에 맞설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이 책은 유용한 방향을 제시한다. 보수주의자들이여 철학을 가져라.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여 프레임으로 맞서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주의, 그 이후 - 승자독식 논리에서 상생의 인본주의로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든 감정은 박세길 씨, 왜 당신입니까?’ 였. 대학시절 기억 때문인지 박세길하면 진보적 역사연구가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물론 나는 NL을 진보라고 부르기 꺼리는 사람이지만, 크게 보아 보수에 반대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이라고 치자. 그런 박세길 씨가 왜 이런 책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초반에 들었다. 현장 가까이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나이가 들면 다들 큰 이야기를 하고픈 욕망이 생기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큰 이야기를 하려다 보면 생각이 보수화되기가 쉬운 모양이다. 김지하, 박노해 등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 책의 박세길에게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20년 전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와 이 책의 표지는 무척 닮았지만, 내용은 딴판이다. 이 책은 사회 변화에 대해서 말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매우 보수적인 책이다.

 

그렇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NL 주류가 신봉하는 주체사상과 주체(이 책에서는 창조자’)를 강조하는 이 책의 관점이 매우 친화력이 높겠구나 싶었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구조보다는 주체에게 있다는 주체철학(‘주체사상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의 관점에서 이 책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히 박세길씨가 다룰 만한 주제이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좀 더 종합적인 사고를 하게 되면 혁명적 변화보다는 진화적 변화에 더 생각이 쏠리기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철학적 관점을 잃지 않으면서 시대의 변화상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게 보수처럼 보인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자신의 입장이 보수처럼 보일까 우려하기라도 한 듯, 저자는 있는 현상을 그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강변한다.

 

저자가 바라보고 있는 그 현상이란 바로 생산요소의 관계(자본과 노동), 경제 주체의 관계(국가와 시장)에서 현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변화이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자본을 중심에 놓고 노동을 사고하며, 사회주의 경제학은 노동을 중심에 놓고 자본을 사고한다. 케인스주의 경제학은 국가를 중심에 놓고 시장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시장의 기능을 극대화하고 국가 역할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지식사회의 도래와 함께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완전히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생산요소의 관계와 경제 주체의 관계에 어떠한 변화가 생겼는지 각각 한 챕터씩 할애하여 길게 서술한다. 이 챕터들을 논거로 삼아 마지막 챕터에서는 장차 올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요소와 경제주체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런 사회를 빨리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사회 변화의 장소는 시장도, 기업도, 그렇다고 노동도 아닌 기업이다. 그리고 기업이라는 장소에서 변화를 이끌 주체는 사람, 창조자이다. 저자는 기업이야말로 과도기의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집약되어 있으며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최고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기업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상황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고 최근에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업에서(혹은 기업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사람이다.

 

박세길은 산업사회에서와는 다른 오늘날 지식사회에서 노동자의 상태에 대해서 길게 설명한다. 탈산업사회의 노동자는 모두 어느 정도씩 지식을 갖추고 있으므로 지식노동자이며,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창조자이다. “창조자는 다수가 대학을 나왔을 만큼 충분히 배웠고 새로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인 창조력을 보유하고 있다. 생산수단이 그들 안에 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창조자는 현재 노동자일 수도 있고, 경영자나 자영업자일 수도 있다. 저자는 이들 창조자를 계급이라고 서슴없이 부른다. 그러나 어떻게 이들이 맑스가 말하는 대자적 계급이 될 수 있는지 별다른 설명은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조자와 신세대를 결부시켜서 언급하면서 창조자들이 과거와 같은 계급적 속성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그들의 계급적 속성은 직능조합의 역할에 묻혀 있다.

 

저자는 승자독식 논리가 자연 생태계와 사회 생태계를 모두 파괴해 왔다면서 창조력이 자연 생태계를 복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창조력은 물질보다는 비물질(콘텐츠)적 재화 생산으로 생산 활동의 중심을 옮기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가장 창조적인 산업의 사례로 문화산업을 든다. 한류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의 대중문화가 그 창조성 덕분에 큰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노동은 제3세계 노동자들이 대체할 수 있지만 창조적인 문화산업은 대체가능성이 적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문화산업이 밥 먹여주지는 않는다. 문화산업과 관련된 극소수만이 떼돈을 벌 뿐이다. 문화산업이 창조성으로 돈을 버는 건 매우 극단적이고 제한적인 사례로 봐야 한다. 나머지 절대다수의 창조자들에게는 다른 나라 얘기나 다름 없다. 설령 창조자의 대다수가 문화산업에 뛰어들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다 해도 문화산업만으로는 경제가 지탱될 수 없다. 어느 사회에서나 여전히 물질 생산이 필요한데, 저자는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박세길은 사회 변동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이행의 법칙을 제시한다. 첫번째 이행의 법칙은 주도적 생산요소를 지닌 자가 지배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탈산업화된 오늘날 창조자들의 창조력이 주도적 생산요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어떻게 지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 창조자들의 혁명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창조자들에게 지배 권력을 쥐어주는 자는 누구인가? 창조자들에게 주어지는 권력은 과연 지배 권력인가, 아니면 약간의 떡고물인가? 저자의 해답은 직능조합이다. 직능조합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저자는 최근에 사람을 우선하는 기업이 급성장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것이 인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이끄는가? 아니면 적어도 예표하는가? 예컨대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이 사람을 우선하는 기업이란 개인의 창의력을 존중하는 기업이고, 대기업 같은 이미 확립된 견고한 구조에서는 발휘할 수 없는 융통성을 좀 더 가지고 있는 기업이며, 정보사회에서 niche를 빠르고 파고들 수 있는 의사결정구조를 가지고 있는 기업이지만, 그러다 나중에 돈 좀 벌면 결국 대기업에게 지분을 팔아치울 기업에 불과한 것 아닌가? (예컨대 유투브와 안드로이드는 구글에 팔렸다.) 여전히 대기업이 아닌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인본주의아이디어가 돈 되는 세상이라는 속된 표현은 뭐가 다른가?

 

저자는 자본 소유에 기초한 권력 독점에서 탈피하여 기업 구성원 모두가 권력의 중심에 서는 수평적 조직문화로 전환할 때 기업이 최고의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이상적인 수평적 조직문화가 존재할 수 있는가? 요즘 자주 쓰이는 수평적 조직문화라는 용어는 정말 수평적인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나? 이게 바로 인본주의 사회라는데, 과연 인본주의에 사회를 갖다붙일 정도로 이 사회는 이전 사회와 구별되는 사회일까? 아니면 변용된 자본주의에 불과할 것인가? 저자는 창조력이 주도적 생산요소가 되면 창조자가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어 수평적 조직문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박세길이 내세우는 두 번째 이행의 법칙은 주도적 생산요소의 속성이 경제 주체들의 관계를 규정한다.”이다. 이에 따르면 앞으로 창조자가 주도적 생산요소가 될 것이므로 경제 주체들의 관계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저자는 창조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긍정적인 현실을 지적한다. 평생교육을 통해서 단순 노동자를 창조자로 전환하는 기업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한 노력 덕에 생산성도 크게 높아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본가가 노동자를 교육시켜서 생산성을 높이고 임금을 올려주면 승자독식의 논리에서 상생의 인본주의로 이행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상생이란 결국 조금 양보하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 자본가가 조금 양보하기는 하는 건가? 노동자에 투자하고 투자한 만큼 뽑아내는 게 양보인가? 백보 양보해서 노동자의 창조자화()가 테일러주의가 처음 나왔을 당시 테일러의 선한 의도에 버금간다고 하자. 그러나 지금은 누가 테일러주의를 칭찬하는가? 그저 노동력을 더 착취하기 위한 비인간적인 시스템으로 치부할 뿐. 노동자의 창조자화는 옛날 테일러주의의 발명과 다를 게 무언가? 분배의 문제는 여전히 저자의 관심밖이다. 물론 높아진 생산성 만큼 시간당 임금은 올라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분배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여전히 가치는 노동자(창조자)의 노동(창조)에서 나오지만 모든 부는 일단 자본가(경영자)에게 돌아간다. 여기서도 또 다시 만병통치약처럼 등장하는 것은 직능조합이다.

 

저자는 기업 내부적으로는 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들고 기업간 관계에서는 상생의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그것을 더 밀고나가면 승자 독식의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애플의 아이튠즈 뮤직스토어와 앱스토어가 플랫폼 역할을 하면서 일종의 상생의 생태계를 구축했다고 말한다. 애플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구글을 비롯한 노키아, MS, 삼성, 그리고 전세계 24개 통신사들이 이와 유사한 생태계를 구축했다고 한다. 저자는 생태계 전략을 구사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될 것이기 때문에 그간 자본주의를 관통했던 독점구조가 상당 부분 상생의 생태계로 대체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게 왜 상생의 생태계인가? 플랫폼 소유 기업이 수익금의 70%를 개발자 몫으로 허용하면 상생인가? 독점보다 나으면 상생인가? 단지 IT 비즈니스의 속상상 수익구조가 좀 덜 독점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플랫폼에 더 많은 중소기업을 이용하도록 만들어야 대기업에 더 큰 이득이 되기 때문에 상생적 생태계구축에 그렇게 열을 내는 게 아닌가? 백보 양보해서 설령 이걸 상생이라 친다 해도, 이러한 상생의 생태계 속에서 노동자(아니 그의 주장을 빌어 창조자’)는 어떻게 되는가? 예컨대 수많은 앱 개발 창조자들 중에서 앱스토어가 열어 놓은 상생의 생태계에 진입해서 살아남는 자는 몇 이나 될까? 여전히 절대 다수는 먹을 거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어 가면서 앱 개발에 열중해야 하는 형편이 아닌가? 창조자 여러분, 다들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설령 앨빈 토플러의 말대로 지난 30여 년간 새로 창출된 많은 일자리들과 기술혁신이 주로 중소기업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과연 그 일자리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으며 과연 몇 개나 되는 중소기업들이 기술혁신을 통해 살아남았는가? 여전히 권력을 쥔 대기업들이 종국에는 이들 중소기업들을 쥐락펴락 하는 것 아닌가? 저자는 한국 젊은이들이 지나치게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벤처기업이나 중소기업에 취업하라고 권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젊은이로한테 얼마나 진취적이고 멋진 일인지 웅변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 2-3만 개나 되는 벤처기업들 중에서 5년이나 10년 뒤 과연 몇 개 기업, 몇 명의 직원들이 살아 남겠는가? 저자는 남 얘기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창조자들에게 창업하라고 권한다. 창업이야말로 창조자피고용자’(저자는 노동자라는 말은 안 쓴다)의 위치에 있는 모순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란다. 그러면서 창업에 유리한 현 상황들을 몇 가지로 추려서 열거한다. 저자의 바람대로 경제활동인구의 절대다수가 창업을 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만약 그런 일이 정말 발생한다 치면, 그런 상황이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지난 몇 십 년 간 금융자본은 실물경제보다 몇 배나 빠르게 증식되어 왔다. 저자는 최근 자본 수요가 줄어들고 있는 원인이 창조력 기반 경제로 이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건 상관관계가 모호하다. 금융자본의 성장은 자본이 투기자본화하면서 가속화된 것이고, 저자가 말하는 창조력 기반 경제 IT 기술의 발달로 활성화되고 있는 것인데, 이 둘 사이의 인과성을 주장하는 건 무리인 것 같다. 오히려 금융자본은 창조력 기반 경제화 덕에 이제 새로운 투자처를 찾게 된 것 아닌가? 제 아무리 창조력 기반 경제라 한들 자본 없이 무얼 이루겠는가?

 

창조력 기반 경제가 고도화되는 미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자본이 사람 위에 군림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는 성공한 창업자들이 결국 기존의 자본가들과 똑같은 행태로 옮겨가는 경우가 있었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업 구성원’(저자가 선호하는 표현대로)들 모두 창조자이므로 그들이 독립해서 창업하지 못하도록 묶어두기 위해서라도 창업자는 그들 위에 군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창업이 가능한 조건에서는 모든 구성원에게 자본과 권력을 다수의 창조자들에게 골고루 배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래서 고용-피고용 관계는 동업자 관계로 바뀐다고 한다. 창조자들도 자본을 소유하게 되므로 그들은 자본 소유자의 이익도 균형 있게 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대립과 갈등은 사라진다. 자본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라 모두가 자본가가 되고 싶다는 소원이 성취됨으로써 결국 자본주의가 종식된다는 것이다. 이게 뭔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최근 소수의 IT 관련 창업기업들이 틈새시장에서 크게 성공하면서 보여준 행태를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거 아닌가? 성공한 창업기업들이 과연 몇 %나 될 것이며, 그런 기업들이 다 고용-피고용 관계를 지양할까? 저자가 너무 오버하는 것 같다.

 

박세길은 결론에서 국가와 시장은 사회구성원의 삶을 책임질 수 없으므로 사회구성원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해답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국가와 시장은 협력하여 사회구성원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 이상적이기도 하지. 도대체 이런 세상은 어떻게 하면 이룰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창조자들간의 직능조합을 통해 그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직능조합원들이 함께 창업에 참가하면 고용-피고용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업 상시 인력의 수는 최소화되며(그들은 동업자의 지위를 획득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제 활동 주체는 직능조합원으로서 개방적 협력 시스템에 참여하는 협력자가 된다. 이미 웹 관리, 회계, 법무, 컨설팅 등은 외부 협력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수평적 조직문화는 기업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고 한다. 이제 개인과 기업은 시장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심성도 이타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고 수평적 리더십도 고양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까?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인간본성의 선함과 심성의 변화 가능성을 무척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걸 알게 된다.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에서 직능조합은 복지를 해결하는 주요 통로이기도 하다. 저자는 직능조합이야말로 소득재분배(‘1차원 복지’)나 사회보장 의료 및 교육(‘2차원 복지’)를 넘어 사회구성원 스스로 복지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3차원 복지’) 통로라고 주장한다. 직능조합은 상생의 인본주의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완성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상생의 인본주의로 나아가는 데에 기득권세력의 저항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직능조합 안에서 보이는 압축모델을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직능조합 기반의 개방형 협력 시스템을 중심으로 벤처 생태계를 업그레이드하여 다른 기업들을 압박하는 것이다. 요컨대 낡은 것을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키워 낡은 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박세길은 이런저런 책에서 인용을 많이 했다. 어떤 내용은 처세술에서 따왔고, 어떤 내용은 신 경영학에서, 또 어떤 내용은 맑스주의에서 따왔다. 처세술과 유사한 내용이 나올 때는 예의 값싸 보이는 성공철학이 나오며, 신 경영학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사실 지난 몇 년간 개나 소나떠들던) 피터 드러커 류의 내용이 반복되며, 맑스주의는 대개 산업사회와 오늘날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인용된다. 책이 다루는 내용이 이것저것 잡다하다. 그러다보니 중언부언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몇 년간 이런저런 책들을 많이 읽어온 저자가 그간 갈무리해둔 내용들을 이 책에서 아낌없이 다 풀어놓은 듯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글이 구성이 다소 산만하며, 제시되는 사례들이 다소 뜬금없거나 주제와의 관련성이 부족하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전에 생각은 참 많이 한 것 같지만 그의 상상력은 자신이 읽은 제한된 수의 책에서만 나온 듯하다. 말하자면 제한적 참고문헌을 갖고 깊은 성찰을 했다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글을 읽어 보면 미진하고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논리적 비약이 종종 발견되고 가끔 문장의 표현력도 떨어진다.

 

저자의 관점이 우파 신경영학에 너무 많이 경도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과거 운동하던 시절의 시각을 폐기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여전히 운동의 관점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저자의 주체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여전히 크게 바뀐 건 없을 수도 있다. 여전히 사람이 중심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는 해도 신경영학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듯한 측면은 달갑지 않다. 굳이 그런 시각을 저자가 되풀이하는 것을 왜 읽고 있어야 하는 회의도 들었다(이 책을 석 달 가까이 붙잡고 있었던 이유다). 게다가 저자는 계속해서 주체(창조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주체가 어떻게 상생의 인본주의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지 못한다. 역사 변화의 매체로 직능조합을 들고는 있지만, 매우 추상적이고 공허하며 대기론적이다. 마치 좋은 게 좋은 거니 다 좋게 될 거다.’는 식의 주장이다.

 

저자는 오래 전부터 견지하고 있던 주체철학을 한 손에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최근에 그가 배운 우파 신경제학을 들고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두 입장 사이의 접점을 나름대로 찾았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주체(창조자)에 대해서 열을 내서 떠들 때는 창조자가 모든 것을 다 이룰 듯이 말하다가도 직능조합에 대해서 말할 때는 창조자는 온데 간데 없다. 뭐랄까? 그의 주체철학에서는 주체가 실종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는 주체주의자인지, 구조주의자인지, 혹은 제도주의자인지, 오락가락한다. 그렇다면 이 책이 가진 보수성은 저자가 나이가 들었기 때문만도 아니고, 그가 우파 신경제학에 경도되었기 때문만도 아니고 , 어쩌면 그가 주체철학의 입장을 충분히 견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주체의 현상태를 그대로 기술하는 게 주체철학인가? 왕년의 그였다면 주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제시하려 했을 것이다.

 

거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그에 맞춰 책도 거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이런 류의 주장은 어차피 때가 닥치기 전에는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말 저 말 갖다 붙인다 해서 증명이 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산에 틀어박혀 읽은 책들을 이 책 한 권에서 다 인용할 필요는 없다. 했던 얘기 또 하고 중언부언할 필요도 없다. 이 책은 두께에 걸맞게 좀 더 분석력을 보여주든가, 그렇지 않을 거면 좀 더 날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