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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 삼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부시 정권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세금 감면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이 되자 실제로 이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그의 공약은 2001년Economic Growth and Tax Relief Reconciliation Act와 2003년 Jobs and Growth Tax Relief Reconciliation Act로 법제화 되었다. 원래 이 정책은 2010년에 만료될 예정이었는데, 연장 여부를 두고 논란 끝에 원안 그대로 연장하는 데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정책의 연장 여부는 지난 두 차례의 대선에서 공화당과 민주당 간에 큰 논란거리였고 만료일이 가까워지면서 매스컴에서 수없이 오르내렸다. 쉽게 Bush-era Tax Cuts라고 부른다. 연장안이 논의되던 당시 오바마는 미국 경기를 회복시킬 세수 확대를 위해 부유층에 대한 감면은 중단하고 중산층 이하에 대해서만 연장하는 쪽을 선호했으나 결국 그의 뜻을 관철할 수 없었다. 한 번 굳어진 정책을, 그것도 사람들이 선호하는 정책을 어떤 이유에서건(‘대의’를 위해라도) 철회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법안의 이름에는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긍정적인 단어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국민들은 이 법안이 ‘선’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법안을 철회하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용어를 빌자면, 공화당이 프레이밍(framing)에서 승리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법안이 Bush-era Tax Cuts라고 불리건 Tax Relief라고 불리건 선한 것이 공화당의 공로로 돌아가는 셈이니 이보다 더 좋은 명명命名은 없을 것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는 위의 짧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프레임 구성이 정치 행위에 끼치는 힘을 분석한 책이다. 저자 조지 레이코프는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인지과학자로서 언어와 상징이 인간의 사고방식을 틀지우는 방식에 대해서 논한다.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레이코프는 철처한 민주당 지지자라는 점이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민주당(혹은 좀 더 광범위하게 진보주의자들)이 정책대결 혹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근원적인 태도 변환을 주장한다. 그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핵심 개념은 프레임(frame)이다. “프레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프레임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 우리가 짜는 계획,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 행동의 좋고 나쁜 결과를 결정한다. 정치에서 프레임은 사회 정책과 그 정책을 수행하고자 수립하는 제도를 형성한다. 프레임을 바꾸는 것은 이 모두를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변화이다.” (p. 17)
프레임의 힘은 막강하다. 일단 어떤 프레임이 사람들의 인식 속에 들어오면 그것을 부정하려는 생각이나 행위조차도 프레임을 강화한다. 이 책 제목에 나왔듯이 “일주일간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과제를 수행하기란 매우 어렵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면 일단 코끼리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는 르네 마그리트(Rene Margritte)의 작품에서는 파이프의 이미지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날 뿐 아니라 제목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000에 있는 레닌”이라는 그림(제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제목을 알려주시는 분께는 책 한 권을 선물하겠다. 구글, 네이버 등에서 영어와 한글로 여러 키워드를 집어넣으며 검색했는데도 찾을 수가 없었다.)에는 레닌이 등장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레닌은 제목 그대로 000에 있다.) 그림을 보면서 ‘이 그림에는 레닌이 없다.’는 생각을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마찬가지 맥락에서 Tax relief를 반대하기 위해서 “Tax relief”라는 용어를 입에 올리면 오히려 대중으로부터 “그건 세금 감면 정책이잖아! 왜 반대를 하는 거지?” 같은 반응을 낳는다. 동성결혼(same-sex marriage)을 게이 결혼(gay marriage)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수주의 프레임을 강화시켜 준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살리기’ 사업 명칭도 보수파가 프레임을 선점한 것이다.
한국과 달리 미국의 양당은 복지정책에 관해서 일관되게 다른 입장을 보인다. 다들 알다시피 한결같이 공화당은 복지정책 축소, 민주당은 확대를 주장한다. 나는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공화당 의원이건 민주당 의원이건 다들 부유층에 속한다. 민주당이 가난한 자들을 옹호해서 얻을 이득은 없다. (물론 양당제 하에서 상대방과 차별화되어야 표를 얻기에 유리하겠지만, 근본적으로 민주당이 친서민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양당의 역사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별다른 설명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레이코프는 이 책에서 시원하게 대답해준다. 양당의 근본적인 가치관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레이코프는 ‘엄격한 아버지(strict father)의 가족’과 ‘자상한 부모(nurturant parents)의 가족’ 모델을 적용하여 공화당과 민주당의 가치관 차이를 설명한다. 아버지가 엄격한 가정에서 아버지는 규율과 복종, 자기 절제 등을 강조한다.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내면화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규율이 없으면 도덕을 못 배우고 잘못을 저지르며 가난해진다. 반면 부모가 자상한 가정에서 부모는 보호에 초점을 둔다. 부모는 자녀를 자상하게 보살피며 그 자녀들이 타인들을 보살피기를 바란다. 레이코프는 보살핌의 가치가 곧 진보주의의 가치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가족 가치관의 차이가 다른 모든 분야에 그대로 반영된다고 말한다.
예컨대 ‘엄격한 아버지의 가족’ 모델에 충실한 공화당은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반대한다. 그것은 비도덕적이고 규율을 약화시키고 의존적으로 만든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해지기 위해 필요한 규율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규율이 있는 사람은 자유 시장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다. 따라서 부유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다. 가난한 자를 위한 복지는 나쁘지만, 기업보조금은 선한 사람들에게 주는 상이므로 바람직하다. ‘엄격한 아버지의 가족’ 모델을 확장하면 대통령의 권위는 아버지의 권위와 상응한다. 비단 복지뿐 아니라 다른 많은 문제들, 예컨대 교육, 동성애, 낙태, 환경, 총기 규제, 기업 규제, 외교 등의 문제에서 양당이 견지하는 세부적인 입장들이 서로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밑에는 이와 같이 다른 가족 모델이 자리하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미국인의 1/3은 ‘엄격한 아버지’ 모델, 다른 1/3은 ‘자상한 부모’ 모델, 나머지 1/3은 중간층이라고 할 때, 이 중간층에게 어떤 프레임으로 접근하느냐가 선거 당락의 키가 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지난 40여 년간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프레임 연구를 통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개념과 언어를 개발해왔지만, 진보주의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공화당은 브레인을 고용하고 이들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데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지만, 민주당은 도움이 필요한 수많은 풀뿌리 조직에 골고루 돈을 뿌린다. 공화당은 투자하고, 민주당은 돕는다. 공화당은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민주당은 쟁점별로 사고한다. 공화당은 프레임을 주도하고 민주당은 방어하느라 급급하다.
따라서 진보주의자는 어떤 이슈에 대해서 ‘진실’을 대중에게 알려주는 것만으로 승리할 수 없다. 여전히 대중은 그 ‘진실’을 자신들의 프레임으로 걸러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공화당이 거짓말쟁이라는 진실을 백날 알려줘도 가난한 사람이 계속해서 공화당에 투표하는 이유는 바로 이 프레임 때문이다. 공화당이 내세우는 프레임이 자신의 정체성과 부합하는 한 유권자들은 공화당에 투표한다. 그것이 자신의 이익에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라크 전쟁 때도 전쟁의 명분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는데도 미국인들은 한 번 빠진 프레임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했다. 프레임은 사실을 압도한다. 보수주의자들은 보수주의 사상이 대중적인 것이며 진보주의 사상이 엘리트주의적인 것이라는 프레임—사실은 그 반대가 진실임에도—을 구축해왔고, 그러한 전략에서 성공을 거둔 덕에 선거에서 승리해왔다. 진보주의자들은 나약하고, 매국노이고, 세금이나 축내는 엘리트일 뿐이라는 보수주의자들의 선전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저자는 민주당이 공화당에 끌려가지 말고 그들과 다른 프레임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테러에 대한 ‘보복’에 단순히 반대하기보다는 ‘책임’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테러의 근본원인을 완화시키는 국제 협력을 이끌어야 한다. 그러한 책임은 보살핌의 도덕(nurturant morality)에서 나온다. 위에 언급한 ‘자상한 부모의 가족’ 모델과 연관되는 이 도덕규범은 공정성, 폭력의 최소화, 보살핌의 윤리, 위험에 처한 사람들의 보호, 상호 의존 인식, 공동선을 향한 협력, 공동체 건설, 상호 존중 등을 강조한다. 마지막 장에서 레이코프는 보수주의자들과 대결하는 방법을 매뉴얼처럼 친절하게 제시한다.
이 책은 물론 미국의 특수한 상황에 기초하여 쓰여진 책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민주당을 각성시키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다. <공산당선언>에 빚대어 <민주당선언>이라고 불러도 딱히 이상하지 않을 그런 책이다. 그렇지만 인지과학의 시각에서 프레임이 인간의 판단력에 끼치는 영향력을 분석했다는 점에서 어디에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다. ‘엄격한 아버지의 가족’ 모델과 ‘자상한 부모의 가족’ 모델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정견 차이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한국에서도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유용한 틀이 될 것이다. 한가지 문제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포퓰리즘에 빠져서 자기 본색을 버리고 진보적 정책을 자주 차용함으로써 보수-진보간 구별이 종종 모호해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세훈 전 서울시장처럼 ‘강단있게’ 보수를 고집하는 전형적인 보수주의자들을 염두에 둔다면, 한국 보수주의자들의 가치관이 어디에 기초하며 그들에 맞설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이 책은 유용한 방향을 제시한다. 보수주의자들이여 철학을 가져라.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여 프레임으로 맞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