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든 감정은 ‘박세길 씨, 왜 당신입니까?’ 였다. 대학시절 기억 때문인지 ‘박세길’ 하면 진보적 역사연구가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물론 나는 NL을 진보라고 부르기 꺼리는 사람이지만, 크게 보아 보수에 반대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이라고 치자. 그런 박세길 씨가 왜 이런 책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초반에 들었다. 현장 가까이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나이가 들면 다들 ‘큰 이야기’를 하고픈 욕망이 생기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큰 이야기’를 하려다 보면 생각이 보수화되기가 쉬운 모양이다. 김지하, 박노해 등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 책의 박세길에게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20년 전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와 이 책의 표지는 무척 닮았지만, 내용은 딴판이다. 이 책은 사회 변화에 대해서 말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매우 보수적인 책이다.
그렇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NL 주류가 신봉하는 주체사상과 주체(이 책에서는 ‘창조자’)를 강조하는 이 책의 관점이 매우 친화력이 높겠구나 싶었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구조보다는 주체에게 있다는 주체철학(‘주체사상’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의 관점에서 이 책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히 박세길씨가 다룰 만한 주제이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좀 더 ‘종합적인 사고’를 하게 되면 혁명적 변화보다는 진화적 변화에 더 생각이 쏠리기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철학적 관점을 잃지 않으면서 시대의 변화상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게 보수처럼 보인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자신의 입장이 보수처럼 보일까 우려하기라도 한 듯, 저자는 있는 현상을 그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강변한다.
저자가 바라보고 있는 그 ‘현상’이란 바로 생산요소의 관계(자본과 노동), 경제 주체의 관계(국가와 시장)에서 현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변화이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자본을 중심에 놓고 노동을 사고하며, 사회주의 경제학은 노동을 중심에 놓고 자본을 사고한다. 케인스주의 경제학은 국가를 중심에 놓고 시장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시장의 기능을 극대화하고 국가 역할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지식사회의 도래와 함께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완전히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생산요소의 관계와 경제 주체의 관계에 어떠한 변화가 생겼는지 각각 한 챕터씩 할애하여 길게 서술한다. 이 챕터들을 논거로 삼아 마지막 챕터에서는 장차 올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요소와 경제주체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런 사회를 빨리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사회 변화의 장소는 시장도, 기업도, 그렇다고 노동도 아닌 기업이다. 그리고 기업이라는 ‘장소’에서 변화를 이끌 주체는 사람, 즉 ‘창조자’이다. 저자는 기업이야말로 과도기의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집약되어 있으며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최고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기업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상황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고 최근에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업에서(혹은 기업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사람이다.
박세길은 산업사회에서와는 다른 오늘날 지식사회에서 노동자의 상태에 대해서 길게 설명한다. 탈산업사회의 노동자는 모두 어느 정도씩 지식을 갖추고 있으므로 ‘지식노동자’이며,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창조자’이다. “창조자는 다수가 대학을 나왔을 만큼 충분히 배웠고 새로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인 창조력을 보유하고 있다. 생산수단이 그들 안에 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창조자는 현재 노동자일 수도 있고, 경영자나 자영업자일 수도 있다. 저자는 이들 ‘창조자’를 계급이라고 서슴없이 부른다. 그러나 어떻게 이들이 맑스가 말하는 대자적 계급이 될 수 있는지 별다른 설명은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조자와 신세대를 결부시켜서 언급하면서 창조자들이 과거와 같은 계급적 속성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그들의 계급적 속성은 직능조합의 역할에 묻혀 있다.
저자는 승자독식 논리가 자연 생태계와 사회 생태계를 모두 파괴해 왔다면서 창조력이 자연 생태계를 복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창조력은 물질보다는 비물질(콘텐츠)적 재화 생산으로 생산 활동의 중심을 옮기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가장 창조적인 산업의 사례로 문화산업을 든다. 한류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의 대중문화가 그 창조성 덕분에 큰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노동은 제3세계 노동자들이 대체할 수 있지만 창조적인 문화산업은 대체가능성이 적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문화산업이 밥 먹여주지는 않는다. 문화산업과 관련된 극소수만이 떼돈을 벌 뿐이다. 문화산업이 창조성으로 돈을 버는 건 매우 극단적이고 제한적인 사례로 봐야 한다. 나머지 절대다수의 ‘창조자’들에게는 다른 나라 얘기나 다름 없다. 설령 ‘창조자’의 대다수가 문화산업에 뛰어들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다 해도 문화산업만으로는 경제가 지탱될 수 없다. 어느 사회에서나 여전히 물질 생산이 필요한데, 저자는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박세길은 사회 변동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이행의 법칙을 제시한다. 첫번째 이행의 법칙은 “주도적 생산요소를 지닌 자가 지배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탈산업화된 오늘날 창조자들의 창조력이 주도적 생산요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어떻게 지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 창조자들의 혁명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창조자들에게 지배 권력을 쥐어주는 자는 누구인가? 창조자들에게 주어지는 권력은 과연 지배 권력인가, 아니면 약간의 떡고물인가? 저자의 해답은 직능조합이다. 직능조합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저자는 최근에 사람을 우선하는 기업이 급성장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것이 인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이끄는가? 아니면 적어도 예표하는가? 예컨대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이 ‘사람을 우선하는 기업’이란 개인의 창의력을 존중하는 기업이고, 대기업 같은 이미 확립된 견고한 구조에서는 발휘할 수 없는 융통성을 좀 더 가지고 있는 기업이며, 정보사회에서 niche를 빠르고 파고들 수 있는 의사결정구조를 가지고 있는 기업이지만, 그러다 나중에 돈 좀 벌면 결국 대기업에게 지분을 팔아치울 기업에 불과한 것 아닌가? (예컨대 유투브와 안드로이드는 구글에 팔렸다.) 여전히 대기업이 ‘갑’ 아닌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인본주의’와 ‘아이디어가 돈 되는 세상’이라는 속된 표현은 뭐가 다른가?
저자는 자본 소유에 기초한 권력 독점에서 탈피하여 기업 구성원 모두가 권력의 중심에 서는 수평적 조직문화로 전환할 때 기업이 최고의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이상적인 수평적 조직문화가 존재할 수 있는가? 요즘 자주 쓰이는 ‘수평적 조직문화’라는 용어는 정말 수평적인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나? 이게 바로 인본주의 사회라는데, 과연 인본주의에 ‘사회’를 갖다붙일 정도로 이 사회는 이전 사회와 구별되는 사회일까? 아니면 변용된 자본주의에 불과할 것인가? 저자는 창조력이 주도적 생산요소가 되면 창조자가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어 수평적 조직문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박세길이 내세우는 두 번째 이행의 법칙은 “주도적 생산요소의 속성이 경제 주체들의 관계를 규정한다.”이다. 이에 따르면 앞으로 창조자가 주도적 생산요소가 될 것이므로 경제 주체들의 관계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저자는 창조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긍정적인 현실을 지적한다. 평생교육을 통해서 단순 노동자를 창조자로 전환하는 기업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한 노력 덕에 생산성도 크게 높아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본가가 노동자를 교육시켜서 생산성을 높이고 임금을 올려주면 ‘승자독식의 논리에서 상생의 인본주의’로 이행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상생’이란 결국 조금 양보하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 자본가가 조금 양보하기는 하는 건가? 노동자에 투자하고 투자한 만큼 뽑아내는 게 양보인가? 백보 양보해서 노동자의 창조자화(化)가 테일러주의가 처음 나왔을 당시 테일러의 ‘선한 의도’에 버금간다고 하자. 그러나 지금은 누가 테일러주의를 칭찬하는가? 그저 노동력을 더 착취하기 위한 비인간적인 시스템으로 치부할 뿐. 노동자의 창조자화는 옛날 테일러주의의 ‘발명’과 다를 게 무언가? 분배의 문제는 여전히 저자의 관심밖이다. 물론 높아진 생산성 만큼 시간당 임금은 올라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분배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여전히 가치는 노동자(창조자)의 노동(창조)에서 나오지만 모든 부는 일단 자본가(경영자)에게 돌아간다. 여기서도 또 다시 만병통치약처럼 등장하는 것은 직능조합이다.
저자는 기업 내부적으로는 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들고 기업간 관계에서는 상생의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그것을 더 밀고나가면 승자 독식의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애플의 아이튠즈 뮤직스토어와 앱스토어가 플랫폼 역할을 하면서 일종의 상생의 생태계를 구축했다고 말한다. 애플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구글을 비롯한 노키아, MS, 삼성, 그리고 전세계 24개 통신사들이 이와 유사한 생태계를 구축했다고 한다. 저자는 생태계 전략을 구사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될 것이기 때문에 그간 자본주의를 관통했던 독점구조가 상당 부분 상생의 생태계로 대체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게 왜 상생의 생태계인가? 플랫폼 소유 기업이 수익금의 70%를 개발자 몫으로 허용하면 상생인가? 독점보다 나으면 상생인가? 단지 IT 비즈니스의 속상상 수익구조가 좀 덜 독점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플랫폼에 더 많은 중소기업을 이용하도록 만들어야 대기업에 더 큰 이득이 되기 때문에 ‘상생적 생태계’ 구축에 그렇게 열을 내는 게 아닌가? 백보 양보해서 설령 이걸 상생이라 친다 해도, 이러한 상생의 생태계 속에서 노동자(아니 그의 주장을 빌어 ‘창조자’)는 어떻게 되는가? 예컨대 수많은 앱 개발 창조자들 중에서 앱스토어가 열어 놓은 ‘상생의 생태계’에 진입해서 살아남는 자는 몇 이나 될까? 여전히 절대 다수는 먹을 거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어 가면서 앱 개발에 열중해야 하는 형편이 아닌가? 창조자 여러분, 다들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설령 앨빈 토플러의 말대로 지난 30여 년간 새로 창출된 많은 일자리들과 기술혁신이 주로 중소기업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과연 그 일자리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으며 과연 몇 개나 되는 중소기업들이 기술혁신을 통해 살아남았는가? 여전히 권력을 쥔 대기업들이 종국에는 이들 중소기업들을 쥐락펴락 하는 것 아닌가? 저자는 한국 젊은이들이 지나치게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벤처기업이나 중소기업에 취업하라고 권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젊은이로한테 얼마나 진취적이고 멋진 일인지 웅변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 2-3만 개나 되는 벤처기업들 중에서 5년이나 10년 뒤 과연 몇 개 기업, 몇 명의 직원들이 살아 남겠는가? 저자는 남 얘기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창조자’들에게 창업하라고 권한다. 창업이야말로 ‘창조자’가 ‘피고용자’(저자는 ‘노동자’라는 말은 안 쓴다)의 위치에 있는 모순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란다. 그러면서 창업에 유리한 현 상황들을 몇 가지로 추려서 열거한다. 저자의 바람대로 경제활동인구의 절대다수가 창업을 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만약 그런 일이 정말 발생한다 치면, 그런 상황이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지난 몇 십 년 간 금융자본은 실물경제보다 몇 배나 빠르게 증식되어 왔다. 저자는 최근 자본 수요가 줄어들고 있는 원인이 창조력 기반 경제로 이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건 상관관계가 모호하다. 금융자본의 성장은 자본이 투기자본화하면서 가속화된 것이고, 저자가 말하는 ‘창조력 기반 경제’는 IT 기술의 발달로 활성화되고 있는 것인데, 이 둘 사이의 인과성을 주장하는 건 무리인 것 같다. 오히려 금융자본은 ‘창조력 기반 경제’화 덕에 이제 새로운 투자처를 찾게 된 것 아닌가? 제 아무리 창조력 기반 경제라 한들 자본 없이 무얼 이루겠는가?
창조력 기반 경제가 고도화되는 미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자본이 사람 위에 군림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는 성공한 창업자들이 결국 기존의 자본가들과 똑같은 행태로 옮겨가는 경우가 있었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업 ‘구성원’(저자가 선호하는 표현대로)들 모두 ‘창조자’이므로 그들이 독립해서 창업하지 못하도록 묶어두기 위해서라도 창업자는 그들 위에 군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창업이 가능한 조건에서는 모든 구성원에게 자본과 권력을 다수의 창조자들에게 골고루 배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래서 고용-피고용 관계는 동업자 관계로 바뀐다고 한다. 창조자들도 자본을 소유하게 되므로 그들은 자본 소유자의 이익도 균형 있게 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대립과 갈등은 사라진다. 자본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라 모두가 자본가가 되고 싶다는 소원이 성취됨으로써 결국 자본주의가 종식된다는 것이다. 이게 뭔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최근 소수의 IT 관련 창업기업들이 틈새시장에서 크게 성공하면서 보여준 행태를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거 아닌가? 성공한 창업기업들이 과연 몇 %나 될 것이며, 그런 기업들이 다 고용-피고용 관계를 지양할까? 저자가 너무 오버하는 것 같다.
박세길은 결론에서 국가와 시장은 사회구성원의 삶을 책임질 수 없으므로 사회구성원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해답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국가와 시장은 협력하여 사회구성원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 이상적이기도 하지. 도대체 이런 세상은 어떻게 하면 이룰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창조자들간의 직능조합을 통해 그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직능조합원들이 함께 창업에 참가하면 고용-피고용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업 상시 인력의 수는 최소화되며(그들은 ‘동업자’의 지위를 획득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제 활동 주체는 직능조합원으로서 개방적 협력 시스템에 참여하는 ‘협력자’가 된다. 이미 웹 관리, 회계, 법무, 컨설팅 등은 외부 ‘협력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수평적 조직문화는 기업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고 한다. 이제 개인과 기업은 시장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심성도 이타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고 수평적 리더십도 고양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까?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인간본성의 선함과 심성의 변화 가능성을 무척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걸 알게 된다.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에서 직능조합은 복지를 해결하는 주요 통로이기도 하다. 저자는 직능조합이야말로 소득재분배(‘1차원 복지’)나 사회보장 의료 및 교육(‘2차원 복지’)를 넘어 사회구성원 스스로 복지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3차원 복지’) 통로라고 주장한다. 직능조합은 상생의 인본주의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완성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상생의 인본주의로 나아가는 데에 기득권세력의 저항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직능조합 안에서 보이는 ‘압축모델’을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직능조합 기반의 개방형 협력 시스템을 중심으로 벤처 생태계를 업그레이드하여 다른 기업들을 압박하는 것이다. 요컨대 낡은 것을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키워 낡은 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박세길은 이런저런 책에서 인용을 많이 했다. 어떤 내용은 처세술에서 따왔고, 어떤 내용은 신 경영학에서, 또 어떤 내용은 맑스주의에서 따왔다. 처세술과 유사한 내용이 나올 때는 예의 값싸 보이는 성공철학이 나오며, 신 경영학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사실 지난 몇 년간 ‘개나 소나’ 떠들던) 피터 드러커 류의 내용이 반복되며, 맑스주의는 대개 산업사회와 오늘날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만) 인용된다. 책이 다루는 내용이 이것저것 잡다하다. 그러다보니 중언부언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몇 년간 이런저런 책들을 많이 읽어온 저자가 그간 갈무리해둔 내용들을 이 책에서 아낌없이 다 풀어놓은 듯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글이 구성이 다소 산만하며, 제시되는 사례들이 다소 뜬금없거나 주제와의 관련성이 부족하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전에 생각은 참 많이 한 것 같지만 그의 상상력은 자신이 읽은 제한된 수의 책에서만 나온 듯하다. 말하자면 제한적 참고문헌을 갖고 깊은 성찰을 했다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글을 읽어 보면 미진하고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논리적 비약이 종종 발견되고 가끔 문장의 표현력도 떨어진다.
저자의 관점이 우파 신경영학에 너무 많이 경도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과거 운동하던 시절의 시각을 폐기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여전히 운동의 관점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저자의 ‘주체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여전히 크게 바뀐 건 없을 수도 있다. 여전히 ‘사람’이 중심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는 해도 신경영학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듯한 측면은 달갑지 않다. 굳이 그런 시각을 저자가 되풀이하는 것을 왜 읽고 있어야 하는 회의도 들었다(이 책을 석 달 가까이 붙잡고 있었던 이유다). 게다가 저자는 계속해서 주체(창조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주체가 어떻게 상생의 인본주의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지 못한다. 역사 변화의 매체로 직능조합을 들고는 있지만, 매우 추상적이고 공허하며 대기론적이다. 마치 ‘좋은 게 좋은 거니 다 좋게 될 거다.’는 식의 주장이다.
저자는 오래 전부터 견지하고 있던 주체철학을 한 손에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최근에 그가 배운 우파 신경제학을 들고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두 입장 사이의 접점을 나름대로 찾았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주체(창조자)에 대해서 열을 내서 떠들 때는 창조자가 모든 것을 다 이룰 듯이 말하다가도 직능조합에 대해서 말할 때는 창조자는 온데 간데 없다. 뭐랄까? 그의 주체철학에서는 주체가 실종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는 주체주의자인지, 구조주의자인지, 혹은 제도주의자인지, 오락가락한다. 그렇다면 이 책이 가진 ‘보수성’은 저자가 나이가 들었기 때문만도 아니고, 그가 우파 신경제학에 경도되었기 때문만도 아니고 , 어쩌면 그가 주체철학의 입장을 충분히 견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주체의 현상태를 그대로 기술하는 게 주체철학인가? 왕년의 그였다면 주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제시하려 했을 것이다.
거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그에 맞춰 책도 거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이런 류의 주장은 어차피 때가 닥치기 전에는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말 저 말 갖다 붙인다 해서 증명이 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산에 틀어박혀 읽은 책들을 이 책 한 권에서 다 인용할 필요는 없다. 했던 얘기 또 하고 중언부언할 필요도 없다. 이 책은 두께에 걸맞게 좀 더 분석력을 보여주든가, 그렇지 않을 거면 좀 더 날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