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점심
엘리자베스 바드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몇 년 전 유럽 여행에서 파리는 마지막 장소였고 그 곳에서 어학연수 중이던 친구 덕에 나는 반쯤은 여행자이지만 반쯤은 현지인같은 기분으로 일주일을 보낼 수 있었다. 사실 한 도시에 일주일을 머무른다면 웬만한 곳은 다 둘러볼 수 있는 기간이지만 여기 저기를 바쁘게 다니는 대신 그 곳에서 생활하는 기분으로 보냈었고 그것이 나에게 더 오래 여운을 남긴 듯 하다. 아직도 파리하면 내가 잠시 머물렀던 기숙사의 주방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던 샹송을 들으면서 저녁을 해 먹던 기억(준비하고 먹고 치우는데 자그만치 3시간도 더 걸린!)과 하릴없이 골목길과 주변 공원을 산책하던 게 생각이 난다. 그 후로 파리는 나에게 조금은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 곳이 됐고 기회되면 두말없이 다시 가고픈 곳이 됐다. 표지마저 너무나 프렌치스러운 <파리에서의 점심>은 그런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지 사뭇 기대가 되었다.

 

<파리에서의 점심>은 뉴욕커인 엘리자베스가 파리지엥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그 곳에 정착하며 새로운 문화와 충돌하기도 하면서 점차 그 곳에서의 삶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그러면서 상황과 기분에 맞는 다양하고 풍요로운 레시피까지 곁들인 그런 에세이이다. 사실 요리엔 별 관심이 없어서(시간 오래 걸리는 건 질색이라)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에게 레시피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진 않았지만, 요리에 대한 로망도 갖고 있는지라 나중을 위해(나만의 집과 오븐이 생긴다면 시도해 보고 싶다) 왠지 알아두면 유용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역시 요리 문외한인데다가 문화적 차이로 인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재료들이 난무해서(본격 요리책이 아니라 아쉽게도 사진도 없다) 완성된 모습을 상상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각 코스별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향연에 등장하는 음식들(실제로 음식은 이 에세이 전반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를 담당하고 있다)을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해! 라는 사람들을 위한 친절한 부록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 싶다.

 

어쨌거나 나의 주요 관심사는 문화가 다른 두 남녀의 현실적인 러브 스토리(연애 소설과 달리 이 에세이엔 특유의 오글거림이 적어서 좋았다)와 사랑 하나만을 믿고 자신이 평생 살아온 근거지를 떠나 사고방식, 생활 습관 등이 확연하게 다른 낯선 곳에서 살기로 마음 먹은 엘리자베스의 용기있는 정착기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절대로 실행에 옮길 수도 없지만(난 한번도 이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문화의 장벽에 앞서 언어의 장벽이 날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말이 아닌 영어나 불어로 수다를 떤다는 건 상상도 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가 종종 자국인을 만나 영어로 쉴 새없이 떠들면서 느꼈던 기쁨이 고스란히 전해진 걸 보면 여자들에게 수다를 뺏는다는 건 생각보다 큰 일이다.) 남의 낭만적이고 약간은 무모해 보이는 경험담(나에겐 거의 무용담처럼 들리는)을 듣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는 솔직하고 과장없이 자신이 겪었던 소소한 문화적 충격들과 미국와 프랑스라는 두 섬 사이에 한 쪽 발을 딛고 있는 이의 심정으로 균형을 맞추려고 애쓰는 여정을 들려주었고, 그녀가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게 되었을 땐(언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녀가 설명한 대로라면 프랑스에서 외국인이 능숙하게 고기를 사는 건 프랑스 사람 다 됐구나!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마치 내 일처럼 기뻤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그녀의 남편인 그웬달과 처음 점심을 먹은지로부터 8년, 그의 아파트로 이사한 지로부터 6년이 지난 후엔 자신이 지금껏 믿어왔던 것과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기보단 미국의 뭐든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와 프랑스의 물질적 성공보다는 행복을 위한 삶, 각각의 장점만을 취합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 밑바탕엔 언제나 사랑이 있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돈은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닌 것이다.

 

난 그녀가 8년 동안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갖고(어느 학교를 나오고 월 수입이 얼마가 되고 어떤 인맥을 가지고 있는지가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미국을 롤모델로 삼고 있는 탓인지 밖으로 보여지는 성공과 출세에 대한 욕망이 강한 편이라 엘리자베스가 겪고 깨달은 것들이 더 깊게 와닿은 게 아닌가 싶고, 그런 면이 <파리에서의 점심>을 단순히 유쾌하고 러블리한 에세이로만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사회적 성공만을 위해 쉼없이 달리도록 길들여진 이들에게 특히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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