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려웠다.
채식주의자부터 몽고반점까지 읽으면서 느낀 분위기는. 어두움. 불쾌함. 무엇보다 작가가 전달하려는게 뭘까? 어렵다는 느낌.
마지막 나무불꽃을 보고나서는 그제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뭐라 평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작품이라고 느꼈다.

채식주의자

"올해로 결혼 오년차에 접어들었으나, 애초에 열렬히 사랑하지 않았으니 특별히 권태로울 것도 없었다." -p.12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p.22


영혜는 꾸미지 않고, 말수도 적고 묵묵히 아내의 본분만을 하는 소박한 여자다. 영혜의 남편은 특별한 사랑없이 그런 소박한 영혜가 아내로 제격이라는 생각에 결혼했지만 갑자기 육식을 혐오하게 되면서 변해가는 영혜를 보며 괴로워한다.

 


"나쁜 놈의 개, 나를 물어?

들깨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p.53

 

어린 시절 개가 물었다는 이유만으로 보신탕을 끓여먹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말하는 영혜가 어느 날 요리를 하다 칼에 손이 베이고, 남의 살을 먹는 육식이라는 행위를 극도로 거부하게 된다.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 내가 뭔가의 뒤편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손잡이가 없는 문 뒤에 갇힌 것 같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걸 이제야 갑자기 알게 된 걸까. 어두워. 모든 것이 캄캄하게 뭉개어져 있어." -p.37


"입 안에 침이 고여. 정육점 앞을 지날 때 나는 입을 막아. 혀뿌리부터 차올라 입술을 적시는 침 때문에. 입술 사이로 새어나와 흘러내리려는 침 때문에." -p.42


"떨면서 눈을 뜨면 내 손을 확인해. 내 손톱이 아직 부드러운지, 내 이빨이 아직 온순한지.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p.43


그 후로 영혜는 꿈속에서 계속 육식을 하려는 자신의 욕망, 해치고 피를 흘려내서 무언가를 먹는 행위를 혐오스러운 장면을 통해 보면서 온갖 고기를 멀리하게 된다. 그리고 단순히 채식에서 벗어나 나중에는 급기야 먹는 행위 자체를 거부하고, 영혜 자신의 몸의 살을 모두 걷어내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물만 먹고 사는 나무처럼 지낸다. 육식을 강요하는 가족, 남편, 지인들에게 저항하며 나무 그 자체가 되어버린 영혜. 

몽고반점


"많은 것들이 그의 안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인가. 또는 제법 도덕적인 인간인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강한 인간인가. 확고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질문들의 답을 그는 더이상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p.76


영혜의 몽고반점에 어떤 예술적인 열정과 육체적인 욕망을 동시에 느낀 '나'는 어떤 예술적인 영감에 사로잡혀 영혜를 식물로 표현하는 비디오작업을 하게된다. 가정의 파탄을 감수하고라도 불태운 예술혼과 육체적 욕망을 그 비디오작업에 드러냈지만 결국 모든 것이 파탄난 듯한 결말을 보이며 끝난다.



"이 모든 것을 고요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가 어떤 성스러운 것, 사람이라고도, 그렇다고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처럼 느껴졌다." -p.107


"마치 정상적인 여자 같았다. 아니, 실제로 정상적인 여자야. 그는 생각했다. 미친 건 내쪽이지." -p.111


"처음으로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p.146


자신의 몸이 식물로 표현된 바디페인팅을 마음에 들어하는 영혜, 그리고 형부와의 사건 이후 영혜는 점점 인간이 아닌 식물, 나무와 같은 상태로 돌아간다.


나무불꽃

"당신은 나에게 과분해. 결혼 전에 그는 말한 적이 있었다.

당신의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 그런 게 감동을 줘.

그 말은 다소 어려웠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오히려 그가 사랑 따위에 빠지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고백은 아니었을까." -p.161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p.197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p.201

 

나무 불꽃에서 영혜의 언니는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하고 잔잔하게 물 흐르듯 살아왔지만, 삶에 자기자신이 없는, 죽어있는 삶을 산다. 영혜와 남편과의 끔찍한 기억 속에서도 아들 지우와 평소처럼 잘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아이를 숲에 버리고 나서 자신이 단 한번도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그저 죽어있는 와중에 연극같은 삶을 살았음을 느낀다. 영혜가 손목을 그었을때 보았던 피, 자신의 몸에서 병이 들어 나온 선혈을 보면서 영혜의 언니는 죽음을 떠올리고, 마치 죽은 사람 같은, 세상 속에 단 한번도 존재한 적 없는 것 같은 자신의 삶을 보게 된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p.169


"잠깐만 참아.

그때 그녀는 기억했다. 그 말을 그녀가 잠결에 무수히 들었다는 것을. 잠결에, 이 순간만 넘기면 얼마간은 괜찮으리란 생각으로 견뎠다는 것을. 혼곤한 잠으로 고통을, 치욕마저 지우곤 했다는 것을. (...) 아무것도 문제될 것 없었다. 사실이었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언제까지나 살아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 말고는 어떤 다른 길도 없었다." -p.199


"그녀는 무덤처럼 지쳐 있었다." -p.198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같았다." -p.200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p.204


인내로 뭉쳐진 그녀의 인생에 일련의 사건들. 죽어가는 영혜의 모습과 남편을 다시 보게된 영혜와의 끔찍한 사건. 그럼에도 계속 지금까지와 같이 살아가야 하는 자신. 나무불꽃에서 유독 강조되는 멈추지 않는 시간은 이미 죽어있는 언니의 삶을 더욱 죽어있게 만드는 듯 하다. 언니는 계속 시간을 되돌려서 이 사건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저쯤의 미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병원에 자주 드나들게 된 뒤, 그녀에게는 가끔 정상적인 인간들로 가득 찬 평온한 거리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p.172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p.186

그게 죽음을 의미한다하더라도 그저 햇빛만 받으며 아무런 생각도 말도 하지 않는 나무가 되고자 하는 영혜,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평화로워보이지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나 자신으로 살아가지 못하다 결국 바닥까지 치닫는 영혜의 언니.
나무가 되고 싶어하는 영혜를, 그런 영혜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도 본인 역시 죽은 것과 같은 삶을 살아왔던 영혜의 언니를, 그리고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의 욕망, 예술에 대한 열정을 먼저 생각했던 영혜의 형부인 '나'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불편하고 낯선 감정들이 이 소설이 주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