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여행산문집
이병률 지음 / 달 / 2012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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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펼치고 맨 앞에서 이 문구를 보는 순간,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부터 뭔가 한 방 맞은 느낌.
유명한 책인데, 산문집 자체를 잘 안 봐서 이 책도 우연하게 지인의 추천으로 보게 되었다.
작가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느낌의 산문집이 참 매력 있긴 하지만, 여행 산문집도 참 매력적이다.
우리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것 이외의 것들을, 작가도 신기하고 충격적이고 때론 찡하기도 한 경험을 나도 간접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
페이지도 없고 어느 곳을 여행해서 쓴 내용인지도 잘 안 나와있지만,
너무 예쁜 사진들과 아름다운 글,
그리고 진짜 이런 아름다운 일이 일어날까, 아니면 그저 그런 일상을 아름답게 쓴 걸까 싶은 작가의 이야기들.
보는 내내 찌릿하기도 하고, 살짝 미소 짓게 되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어서 밑줄 그은 글들과 남겨둔 사진이 많았던 책이다.
특히 사랑에 관해서,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어도 그냥 사람과 사람의 사랑과 나눔에 관해서 쓴 부분이 많았는데, 그저 베풀고 주기 좋아하는 '당신'과의 에피소드들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그 무엇도 상상할 수 없다.
적어도 사람에 관해서는 더 그렇다. 한 사람을 두고 상상만으로 그 사람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아무리 예상을 해봐도 그 사람의 첫 장을 넘기지 않는다면 비밀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아무도 시키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게 제법 나다운 일이란 걸 그때 알았다. 행복은 문지르고 문지르면 광채가 났다."

"사랑의 그림을 보는 건 공짜지만, 사랑이라는 그림을 가지는 건 그렇지 않다. 사랑을 받았다면 모든 걸 비워야 할 때가 온다. 사랑을 할 때도 마찬가지.
그래서 우리는, 그들은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는 것일까. 그래서 그 가슴 뛰게 잎을 틔우던 싹들은 가벼운 바람에도 시들고 마는 걸까."

"빵이 너무 커서 가슴팍에 안고 먹어야 하는 그루지아의 화덕 빵이나, 빵 굽는 냄새가 맡아지면 킁킁대며 빵집을 찾아야 하는 시리아의 골목 빵집, 맛이 얼마나 좋으면 한입을 베어 물고 걷다가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가 먹을 수 없는 양의 크루아상을 사게 되는 파리의 빵 가게. 세상의 빵 냄새에 홀려 동물이 되는 것이 나는 좋다."

"끌리는 것 말고
반대의 것을 보라는 말.
시를 버리고 갔다가
시처럼 돌아오라는 말.
선배의 그 말을 듣다가
눈이 또 벌게져서 혼났던 밤."

"나는 너를 반만 신뢰하겠다.
네가 더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는 너를 절반만 떼어내겠다.
네가 더 커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버스는 타보질 못 했다. 예감보다 늦는 이별도 없다. 이별은 예감만큼 잔인하게 온다.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가는 것도 아닌 중간인 것, 그것이 이별이다."

"당신을 생각하느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느라 미열이 찾아왔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느라 조금 웃었습니다.
내가 앓고 있는 것이 당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갔던 길을 다시 가고 싶을 때가 있지.
누가 봐도 그 길은 영 아닌데
다시 가보고 싶은 길.
그 길에서 나는 나를 조금 잃었고
그 길에서 헤맸고 추웠는데,
긴 한숨 뒤, 얼마 뒤에 결국
그 길을 다시 가고 있는 거지.
아예 길이 아닌 길을 다시 가야 할 때도 있어.
지름길 같아 보이긴 하지만 가시덤불로 빽빽한 길이었고
오히려 돌고 돌아가야 하는 정반대의 길이었는데
그 길밖엔, 다른 길은 길이 아닌 길."

"나도 나 스스로를 M사이즈라고 여기는 적이 많다. 옷도, 사람도 실제로는 L이어야 하지만 때로 XL이겠지만 나는 나를 M이라는 상태로 놓아둔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란 존재가 눈에 띄지 않는 게, 그 상태가 감사하다.
평범이란 말보다 큰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평범한 것처럼 남에게 폐가 되지 않고 들썩이지 않고 점잖으며 순하고 착한 무엇이 또 있을까."

"조금 가난한 색. 그래서 그 위에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싶은 색.
조금 모자란 색. 그래서 많이 배울 수 있는 색.
나와 상관없는 일은 보이지 않고, 내가 필요로 하는 색만 보인다. 우리가 분홍색을 알아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걸 원하고 있을 때만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누구나 살고 있지만 누구나 살아 있다고 느끼기 어려운 것처럼."

"심장으로도 가 닿을 수 없는 것들이 있겠지만, 당신에게 일생 동안, 단 한순간만이라도 붙들리고 싶더라도 당신의 문이, 마음이 열리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나에게도 `빨간 날`들로만 가득 찬 날들이 있었다.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해 비행기를 탔고 나에게 말을 거느라 눈이 시뻘게지도록 걷는 날들이 많았다. 그러다 심심하면 케이크 한 상자를 사서 하루 종일 들고만 다녔다. 매일매일 기념일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원고를 쓰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형편없는 상태의 네 빈 집과 잔뜩 헝클어진 채로 돌아온 네가 서로 껴안는 것, 그게 여행이니까."

왜 말은 바람이 되고 물살이 되는가.
"우산 가져왔어요?"
그날 밤은 나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잠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말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말, 모두 다 빗물에 씻겨도 씻겨 떠내려가지 않을 당신, 그 무렵 그 말이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를 당신에게 말하지 못 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대상은 색이 없어지고 오히려 지워져 창백해진다.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사랑의 감정으로 대상은 참을 수 없이 완벽해지기 때문이다."

"살아온 분량이 어느 정도 차오르면 그걸 탈탈 털어서 누군가에게 보여야 한다. 듣건 듣지 못하건 무슨 말인지 알아듣건 알아듣지 못하건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다 털어놓을 한 사람."

"옆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어차피 마지막은 마지막이었다. 그렇더라도 그 순간이, 그 장면이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와 있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날씨처럼, 문득 기분이 달라지는 것. 갑자기 눈가가 뿌예지는 것.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는 것."

"밤하늘의 별을 세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하늘의 푸르름을 싫증 날 정도로 노려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 이마가 시큰해질 정도의 슬픔이 찾아왔다. 아름다움은 슬픔을 부른다. 유난히 눈부신 아름다움은 밤에 더 빛난다."

"그만두겠다고 하는 순간부터 멀어져도, 헤어져도, 보이지 않아도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질 않은가. "

"순간일 수도 있지만 영원일 수도 있는 것이고, 영원도 어느 한순간 토막이 나기도 하려니 그렇게 지금 당장 마음 가는 대로만 마음을 다하면 되는 것 아닌가."

"나이만 있고, 나이 없는 사람이 되기는 싫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나이 든다는 것은 넓이를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넓이를 어떻게 채우는 일이냐의 문제일 텐데 나이로 인해 약자가 되거나 나이로 인해 쓸쓸로 몰리기는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처럼 늘 이 정도로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ㅡ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단 한 번 여행을 떠난 것뿐인데 이토록 지금까지 끝나지 않는 여행도 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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