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도 때론 인간일 뿐이다 그리고 신은
한스 라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내 인생에 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딱 한 번 있었다. 꽤 오랫동안.
결론은 난 신을 믿지 않는다 더이상. 오히려 그런 믿음에 대해 반감도 좀 있다.

하지만 악마는?


「하필 내 영혼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뭐죠?」 내가 궁금해한다. 「훨씬 더 매력적인 영혼들이 많을 텐데.」
「간단해요. 당신이 신을 만났기 때문이죠. 신은 당신을 좋아하는 게 분명해요. 그래서 만일 당신이 지옥의 제왕에게 영혼을 판다면 신이 무척 화가 나지 않겠어요?」
「뭐요? 이유라는 게 그게 다요?」

신이나 악마같은 영적인 존재를 믿지않는 심리 치료사 야콥에게 어느날 악마가 찾아온다.
그리고 뜬금없이 신을 만난 야콥의 영혼을 두고 거래를 청한다.
야콥의 장난스러운 흥정(?) 끝에 야콥의 영혼 값은 1억 유로(약 1300억)까지 뛴다.


「때문에 나는 다시 한 번 당신에게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야콥, 1억 유로면 이번 생만큼은 부러울 것 하나 없이 즐겁게 살 수 있어요. 별 수를 다 써도 이 세상의 불행과 궁핍은 어차피 막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저세상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뭔지 누가 알겠습니까?」

죽음 이후가 그저 완전한 소멸이라면 이 제안은 너무도 달콤하다.
어짜피 없어질 인생 영혼따위 팔아버리고 돈 걱정없이 행복하게 사는거다.
그런데 영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영혼이 있는 삶과 없는 삶이 뭔지. 사람에게 영혼이 있긴 한지?라는 이상한 의문도 든다.
그저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되는걸까. 그걸로 끝? 죽어서 천당이나 지옥의 세계가 있다는 건 사실 나로서는 믿기 힘들다. 차라리 이미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지옥이고, 악마는 모두 지상으로 떨어졌다는게 더 일리가 있지 않나. 

나는 포근하면서도 짜릿하게 밀착해 오는 발러리의 따듯한 나신을 느끼며 문득, 악마의 존재를 믿으면 꽤나 큰 장점이 있겠구나 하며 생각한다. 예를 들면 나의 이 비도덕적인 행동에 대한 책임을 나 혼자만 짊어질 필요 없이 최소한 일부라도 악마에게 전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 재미있는 발상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싱긋 웃음 짓는다.

1억 유로에도 절대 영혼을 팔지 않는 야콥에게 악마는 끊임없이 야콥을 시험한다. 야콥의 주변 사람들의 영혼을 사들이기도 하고 육체적으로 상해를 입히기도 하고 정신적으로 괴롭게 만들기도 한다. 악마다운 참신하고 기발한 방법으로. 자신의 비도덕적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악마에게 전가하는 상상을 하며 웃음 짓는 야콥. 더군다나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다면 더더욱 양심의 가책 없이 살게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나약하니까. 이제 악마가 들고다니는 그 미스테리한 영혼 계약서 한장의 힘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도 같다.


「우리는 인간들을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위해 더 이상 복잡한 수단을 강구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인간들이 알아서 서로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도록 자극만 주면 되었어요. 그건 쉬운 일이었죠.」

영혼 계약서 한 장만으로 혹은 악마의 작은 유혹 하나에도 쉽게 넘어가는 사람들. 악마의 말을 빌려 그저 '종이쪼가리'일 뿐인 돈을 가지고 악마는 야콥과 야콥의 주변사람들의 삶을 쥐락펴락한다. 악마의 계략에 죽지 않아도 이미 지옥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 조금의 자극에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옥으로 만드는 사람들을 보며 악마는 흐뭇해한다.
야콥과 악마의 싸움을 지켜보며, 아니 계속 야콥만 연타 당하는 듯 하지만, 한 때도 떠올렸을 천국과 지옥,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영혼이 머무는 마음에 따라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다지만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해서 마음이 천국이 되는건 아니다. 교회나 성당 열심히 다녀도 모든 삶이 천국이 되는건 아니니까.


「아뇨. 말했듯이 난 불교도예요. 내게 인생이란 끊임없는 윤회일 뿐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에요.」 나는 마음속에서 깊은 울림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카하시 씨는 현자인 듯하다.

내 삶은 천국일까 지옥일까 계속 생각하던 차에 귀신같이 등장한 다카하시 씨의 말.
어찌보면 신과 악마도, 천국과 지옥도 사람이 만들어낸거 아닐까. 어느 종교는 지옥같은 당신들 삶에서 구원해주겠다고 안그래도 힘든 사람들 데려다 사기 치기도 하고. 그저 현실에서 자신이 할 수 없는 것들을 당신을 믿을테니 이것 좀 하게 해달라 저것 좀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고. 심지어 내 영혼 깨끗하게 해줘서 천국가게 해달라고 빌기도 한다. 애초에 천국이나 지옥같은게 없다면? 모든 사람들이 천국이나 지옥을 믿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게 될까. 애초에 믿지 않는다면 악마의 현혹에도 안 넘어가지 않을까. 아니면 죽음 이후의 삶이 없으니 더 지옥같은 세상이 되버릴까.


「사실 아주 간단한 이야기야.
내가 인간의 시야를 넓혀 주는 것만큼 악마는 인간의 시야를 좁힐 수 있어.
어떤 식으로 시야를 좁히느냐 하면 말이야, 인간의 눈에다 일종의 차안대 같은 걸 씌우지. 그래야 삶의 길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위험에 대한 불안을 없앨 수 있다고 달콤하게 속삭이면서 말이야. 하지만 실제로 불안을 야기하는 건 바로 그 차안대야.
그런데도 인간들은 대부분 그걸 깨닫지 못해.
심지어 시간이 가면서 길 양편에 마귀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믿게 돼.
그래서 그걸 보지 않으려고 자기 시야를 점점 더 좁혀 주기를 열렬히 소망해.
하지만 진실로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은 딱 하나야.
차안대를 벗어던지고 하늘과 자기 자신을 믿는 거지.」
(.....)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속 깊이 알고 있어.
영혼은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내줄 수 있는 것뿐이라는 걸.」
다카하시는 잠시 말을 쉬며 내 눈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그건 자네도 알고 있어, 야콥. 결국 중요한 건 마음먹기야. 영혼도 마음이 가는 곳에 머물려고 할 테니까.」

소설을 보며 계속 드는 의문에 신의 입을 빌려 꽤나 명쾌한 답을 주는 작가.
결론적으로 정답은 영혼은 누구에게 팔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 중요한 건 그 어떤 것에도 불안해하지 말고 하늘과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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