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아 만든 천국
심너울 지음 / 래빗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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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찾아 읽던 심너울 작가의 신간이 발매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읽어 봤다.

마법이 통용된 세상, 인간은 저마다의 마력 등급을 지니고 있다. 소설을 여는 주인공 허무한은 마력이 없는 부모 사이에서 특출난 힘을 가지고 태어난, 일명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

이야기는 마력의 근원인 역장 추출과 역장 이식이라는 사건을 필두로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내내 씁쓸함을 느꼈고 사회의 불균형에 대해 생각했다. 대물림되는 마력, 간혹 유전학을 벗어난 확률로 마력이 생기더라도 그 힘을 펼치는 데 필요한 조건과 배경 같은 것들, 역장을 사고 파는 시스템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 종국에는 강탈하는 세력과 범죄들까지. 이 세상 속에서도 기득권과 사각지대는 존재하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부분도 많았는데, 특히 S대 응용마법학과라든가 마법의학 전공의 같은 설정은 굉장히 참신했다. 보통 마법과 관련된 이야기의 경우 판타지스러운 배경이 강조되고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나 영웅이라는 메시지를 향해 전개되고는 하는데 갈아 만든 천국은 판타지와 현실성을 너무나도 잘 결합했다. 그러니까 단지 마법이 존재하고 마력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지 이들 모두 내가 아는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듯한, 캐릭터보다는 살아 숨쉬는 인물 같은 입체감을 느꼈다. 명문대에 합격 후 축하 플래카드를 건다든지 주거 문제로 부모님과 다툰다든지 낙성대 근처에서 자취를 한다든지와 같은 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해 웃음이 터졌고.

사회로 첫 발돋움을 한 대학생이자 작은 마을에서 도시로 올라온 청년이 겪을 법한 갈등과 위기가 어떤 것일지 모르지 않는다. 때문에 어쩌면 예측할 수 있는 전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한 건, 아마 연작 소설로 진행되는 특징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한 등장인물들이 각각의 선택을 하는 데에 있어 사랑•결핍•부모의 압박 등이 개입된다는 점도 좋았다. 삶을 좌우하는 선택들은 아주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비롯되지 않나. 그래서 더더욱 등장인물들이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으레 천국은 이상적인 장소이다. 그런 천국 앞에 갈아 만들었다는 수식이 붙는다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 또한 누군가의 인격과 권리를 약탈하고 갈아 넣어 유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되었다.

현실적인 판타지 소설. 이 아이러니한 장르가 심너울 작가한테는 가능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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