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1
김창호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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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라는 제목은, 마치 기존에 습득한 지식에 대해 의심함으로써 우리를 회의에 빠지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들게 할 수 있다. 데카르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함으로써 철학을 출발했듯이, 서양 철학의 역사를 보면 그 학문의 방법상 상당히 회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회의가 회의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석하고 판명한 지식에 이르려는 방법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의 철학 논쟁도 역시 기존 견해들에 대한 대책없는 비판이나 새로운 입장들의 단순한 소개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1더하기 1이 3'이라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1더하기 1이 3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지 그것을 믿고 있거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안다'고 했을 때 그것이 '앎'이 되기 위한 조건은 어떻게 되는가? 이렇듯 우리가 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검토하는 데서 철학적 사유는 시작한다. 반성이 없이는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다. 이 책은 각 장의 첫머리를 의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의문의 해답을 추적해 나아가 가장 설득력 있는 해답을 찾고자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독자들은 사유의 확대와 재생산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각 장이 마무리되는 뒷부분은 이 책이 현실적으로 흥미와 효용성을 가져다 주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대립되는 견해들을 평이한 일상 대화식으로 소개한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코너와 그 자체가 마치 하나의 대입 논술 문제가 될 만한 '토론해 봅시다' 코너는 이 책이 조금이라도 추상화되기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은 철학이 현실을 어떻게 포착하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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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살철학 여든까지 - 고려원철학광장 5
리프맨 외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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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린이와 철학 교육'이라는 주제에 어울리는 10여명의 글들을 모은 것이다. 어린이를 위한 철학의 목표를 제시하는데 있어서 대개의 철학 교육 저작들은 현대 철학자들만의 글을 폭격하듯 쏟아 놓은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의 경우는 로크와 페스탈로찌 등 고전과 교육학에서도 그 근원을 찾음으로써 그 깊이와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반면에 이 책 역시 어린이 철학 교육에 관한 다른 서적들과 마찬가지로 '철학과 발달심리학의 대결'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철학교육론자인 매튜스는 특히 이 책의 제 3장에서 피아제와 콜버그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한다.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경험이 부족하고 일반적으로 세상에 대한 정보를 결여하고 있지만, 그들의 철학적 판단이 통찰력, 또는 감수성, 혹은 깊이가 결여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매튜스는 심지어 유치원 이전 연령인 6세 이하의 어린이들도 이미 철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린이들도 그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철학적 문제를 안고 씨름하고 있으며, 그들은 훌륭한 철학자라는 것을 사례를 들어 제시하고 있다. 매튜스의 이러한 연구는 철학이 어느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대중의 것임을 알려준다.

또한 이 책에서 흥미롭게 볼 수 있는 것은 도덕 교육과 철학적 탐구가 결코 별개일 수 없는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음을 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 4장에서는 논리적 무모순성의 원칙이 도덕적 행위의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로부터 우리는 현재 우리나라 도덕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돌이켜 볼 중요한 단서를 제공받게 된다. 우리는 어린이를 도덕 판단의 주체로서 받아들이고 함께 대화해 나갈 때 참다운 도덕 교육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이 어떤 특정인이나 연령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것이며, 어린이들의 사고력을 함양할 수 있는 철학 교육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가능한 한 조기에 지도되어야 함을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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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잃은 사회 배영사 교육신서 87
마빈 토케이어 / 배영사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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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부제를 '유태인이 본 일본의 교육' 정도로 함이 어떨가 한다. 저자 마빈 토케이어는 유태계 미국인으로서, 일본의 교육 현실에 대해 거침없는 질타를 가함으로서 왜곡된 일본 사회의 가치관과 교육 행태를 비판한다. 제목 <교육을 잃은 사회>는 다름 아닌 일본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그는 유태인들의 교육 방식을 비교하여 소개함으로써 교육의 본질에 합당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은 일본의 교육 현실이지만 그 내용은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이 책에서 '일본'이라는 글자를 '한국'이라는 글자로 바꾸더라도 그것이 바뀌었음을 아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듯 하다. 가혹한 수험공부, 과도한 과외비와 사교육 시장, 지식이나 정보를 학생들의 머리 속에 무작정 집어넣는 식의 학습, 공부는 합격하기 위해, 또는 취직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인식... 이 모든 것들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일본이나 우리나 학부모들이 기대하는 학교는 교육의 장이 아니라 입시 훈련의 장이다.

그러한 교육의 왜곡은 당연히 학교 내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일본의 가정 교육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을 마치 동물처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표현한다.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도 않은 하나의 목표를 설정해 두고 오직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채찍질한다. 일본에서는 부모의 역할과 책임이 수험 공부에 의해서 모두 해소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진정으로 부모의 책임을 생각해 본다면, 가정을 수험 공부하는 학원 자습실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간 교육의 장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전후의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파괴하는 것이 민주화이며 근대적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것과 대체하여 실생활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어떤 가치체계를 마련하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외국에서 빌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은 생활문화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라야 한다. 단지 문화의 서구화를 꾀하는 것은 될 수 있어도 일본이나 우리가 서구가 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하나의 민족이 수천 년에 걸쳐 만들어낸 생활문화는 중요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전통을 소중히 하지 않는 일본인의 태도를 큰 문제라고 여기며 진정으로 염려한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유태인의 방식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간혹 패권주의적 냄새가 풍기기는 부분도 있다. 또한 효과적인 교육을 위해 남녀 출생 순서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거나, 그에는 여러 비방이 있다는 식의 비합리적인 면모도 보이는 점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저자가 일본 교육에 대해 행한 비판과 유태인의 교육 방법이 던지는 시사점을 무시하기에는 우리 교육의 황폐화가 너무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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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우리 시대의 고전 3
로버트 노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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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私的) 소유의 정당성과 정의로운 분배의 방법에 관한 논의는 현대 정치철학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이다. 또한 이러한 문제는 올바른 사회 구조를 규정하는 기본이 되며 국가 이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 중요성만큼이나 좌우 극단론에서 부터 수정, 절충의 여러 이론까지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이 책은 자유주의의 기본 입장에서 그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는 보수적 견해를 보여준다.

노직에 의하면 국가가 수행해야 할 역할은 오로지 국민의 인권을 충실하게 보호하는 일이며 그 이상의 일을 행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 최소한의 임무 이상의 일을 시도하는 국가는 올바른 국가가 아니다.

각 개인은 각자의 노동으로 생산한 것의 전부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 또한 정당하게 취득하게 된 소유물은 자신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줄 수 있다. 그 취득과 이전의 과정에 하자가 없는 한 그 분배는 정의롭다는 것이 노직의 견해이다. 따라서 국가가 해야 하는 임무는 개인의 타고난 인권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과, 인권이 침해당하는 경우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바로잡는데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노동자와 사용자가 협동하여 생산된 생산품에 의하여 분배되는 노동성과의 몫은 그 분배량이 어느 정도이든 간에 자본가와 노동자의 자유 계약에 의거한 것이므로 각자의 취득은 전혀 하자가 없는 정당한 취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직은 개인의 독립성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개인의 사회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개인의 몸과 마음이 그 개인의 소유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 몸과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지게 되는 사회와의 관계는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오늘날 생산수단의 소유 형태는 대부분 집단이고 생산활동에서 개인이 기여한 부분과 사회가 기여한 부분을 구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노직이 최소국가의 이념을 내세운 것을 개인의 인권에 관한 보호와 확대라는 열망에서 나온 것이라고 긍정하더라도, 그의 이론이 폭 넓은 지지를 받기에는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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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8-18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마르크스주의 종교이론
D.B.맥코운 / 서광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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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전 이후 서양철학의 주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하면 기독교와 과학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게 하는 이론적 틀을 마련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는 종교란 있어서는 안 되었을 현상이고 앞으로 과학의 발전에 따라 저절로 없어지고 말 현상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공산주의는 종교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철저하게 유물론을 견지하기 때문에 무신론이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종교에 관해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는 입장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결코 화해될 수 없는 상반된 세계관으로 대립되어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종교와 신학은 필연적으로 지배층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하게 된다고 보았던 것과는 달리 근래의 일부 종교인들을 보면 신학이 성서의 본래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는 신학이 되어야 하고, 그러한 신학이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종교는 아편의 역할만을 한다고 보는 마르크스의 견해는 잘못 되었으며 오히려 기독교가 변혁의 원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그러한 시각을 정립하고, 종교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서 이 책은 아주 유용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카우츠키의 견해를 순서대로 그 이론적 배경과 함께 살핌으로써 마르크스주의 종교관을 깊이 있게 이해시켜 준다.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엥겔스나 카우츠키의 종교 이해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이 책을 통해 더불어 알 수 있는 것은, 종교에 관하여 아주 신랄하게 비판한 마르크스였지만 종교를 타파하거나 말살시키기 위해 투쟁할 필요성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엥겔스 역시 종교에 대한 투쟁을 강조하는 전략을 반대했다. 그러나 레닌에 이르러 종교는 투쟁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아편'이란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마르크스의 피억압자가 요구하는 감정적인 도피처라는 의미가 레닌에 와서는 착취자에 의해 그들에게 주입되는 마약이라는 의미로 바뀌게 되어 마르크스주의를 종교와 보다 첨예하게 대립되게 했다.

사실 기독교가 사회전체의 정의 보다 그 자체의 안정과 이득을 중요시한 경우는 허다했다. 오랫동안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와의 관계는 매우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왔고 적대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해소되지 않은 채 서로의 공산사회와 내세에 대한 믿음을 유토피아적 환상이라고 비판한다.

두 세계관의 통일을 부르짖는 것은 무가치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것은 위험한 시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은 그 중심이 인간 해방에 있다. 만약 기독교 본연의 사상 역시 인간주의이라면 중요한 것은 인간해방의 사회적 실현이며 그 과정 중에 두 세계관이 어떠한 형식으로 복무하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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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5���Կ� ���� �������ݺ� �ͺ񿡼� ����Ʈ ����� �Ұ��Ǿ����ϴ�
    from �������ݺ� �ͺ� 2008-03-07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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