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내가 잊고 살았던 무언가, 이를테면 오랫동안 방치해두어 먼짓더미에 뒤덮인 어떤 책의 한 페이지가 비밀스럽게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갈피에 사진 한 장이 끼워져 있는 책. - P17
그곳에서 나는 그저 온전한 나였고, 레나는 온전한 레나였으며, 우리는 온전한 우리였다. 그런 시간은이모가 시장에서 떨이로 사온 무른 산딸기나 살구로 만들어주던잼처럼 은은하고 달콤해서, 나는 너무 큰 행복은 옅은 슬픔과 닮았다는 걸 배웠다. - P40
생각하면 차례로 떠오르는 것들. 햇살 아래 부서져내리던, 구시가지 광장 한복판에서 떨어지는 분수의 물줄기. 테라스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으면 달콤함에 이끌려 날아오던 벌들. 초록으로 빛나던 여름 나무들. 오래된 건물의 벽을 달구던 열기. 고지를 모른 채상승 곡선만을 그리며 고조되던 감정의 음률. 수신호를 하기 위해한 팔을 허공으로 뻗은 채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미끄러지듯 달리거나, 스스로 어른인 줄 알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홀로 뒷짐지고 걷던 G시 곳곳의 거리들. 카를 마르크스나 프리드리히 뵐러처럼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달고 있던 - P106
나는 도시를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곳이 내 자리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 가족도 행복에 거의 가까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언니가 떠오르면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의 행복이었다. 죄책감이 가슴을 쿡쿡 찌를 때마다 속으로 언니에게 말을 걸어야 했을 만큼의 행복.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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