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표를 손에 쥐었을 때 학업을 위해 튀빙겐으로 떠나는게 미래를 그리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유년 시절과의 작별이었다. 나의 아르카디아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그랬다. 나는 외롭고 불행한 아이였다. 부모는나의 재능과 관련된 것 이외에는 무신경했고, 내가 동전을 넣으면 사람처럼 움직이는 로봇을 보러 티비다보놀이동산에가고 싶은지 물어볼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오염된 진흙 속에서 빛나는 꽃을 찾아냄새를 맡을 줄 알았다. 그리고 마분지로된모자 상자를 바퀴 다섯개짜리 큰 트럭이라고 상상하며 기뻐할 줄 알았다. 슈투트가르트행 표를사며 나는 이러한 순수의 시절이 끝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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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 거기에 기쁨은 없으며 즐거움조차 누릴 수 없다. 복종이 있을 따름이다. 학업을 마칠 때까지, 사막의입구에 다다를 때까지 중요한 건 오직 복종이다. 그다음에 우리는 아무것도 읽지 않는다. 신문조차도 우리는 집에 책이 한 권도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작가들에게는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사람들이다. 모래속에 묻힌 집들이랄지, 마귀든 책이든 세상 무엇도 침투할 수 없는 삶들이다. 그들에게도 간혹 사전은 한 권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약삭빠른 영업사원이 팔고 간 백과사전도 있다. 하지만 읽기 위한 책은 아니다. 아이들을 위해, 미래를 위해, 궂은날을 위해 예비해 둔, 가구나 다름없는 책. 참나무로도 소나무로도 만들어지지 않은 좀 이상한 가구다. 손도 대지 않을, 월부로 구입한 스무 권짜리 작은 종이 가구. - P14

이렇게 독서의 길로 뛰어드는 그들은 언제까지나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그 길이 끝이 없음을 알고 기뻐한다. 기쁨과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그들은 출발점에, 첫경험에 집착한다.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경험이다. 그들은 언제나 그 지점에 머무르며 삶이 다해가는 순간까지 책을 읽는다. 고독을 발견했던, 그러니까 언어들의고독과 영혼들의 고독을 발견했던 첫 경험의 언저리에 머문다. 그들은 황홀감에 취해 세상에서 물러나 이고독을 향해 간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고독의 골은 깊어진다. 더 많이 읽을수록 아는 건 점점 더 적어진다. 이 사람들이 작가와 서점 출판사, 인쇄소를 먹여 살린다. - P15

돈이 있는 사람들의 흰 손이 있고, 몽상하는 사람들의 섬세한 손이 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에는 손이라고는 아예 없는 사람들, 황금도 잉크도 박탈당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글을 쓰는 것이다. 오직 그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요컨대 타자를 지향하는 글이 아니라면 흥미로운 글일 수 없다. 글쓰기는 분열된세상과 끝장을 보기 위한 것이며, 계급체제에 등을 돌림으로써 건드릴 수 없는 것들을 건드리기 위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결코 읽지 않을 한 권의 책을 바로 그들에게 바치기 위해서이다. - P17

실패한 자살이 모두 그렇듯 당신의 자살도 성공을 거둔 것이다. 당신이 잃은 건 생명보다 더한것이었다. 말, 투명한 말의 맛, 참된 말에 대한 사랑, 그모두를 잃은 것이다. 말 앞에서 당신은 먹을 것을 앞에둔 아픈 아이 같았었다. 그런데 릴케가 당신에게 먹을것을 다시 준다. 한 편의 시, 이어지는 또 한 편의 시, 한편의 이미지, 또 한 편의 이미지. 헐벗은 말과 함께 온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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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어?"
어린 시절 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 말 자체가 너무 거슬렸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닐수가 있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싶었다. 숫자 0처럼, 자연수도 아니고, 완전수도 아니며, 이성적이지도 실질적이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하지만 완전수 전체에 더해진 중립적인 요소? 안타깝게도 이조차 아닌 것 같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될 때 필요한 존재가 되는 일에서 해방될 것이다. 만일 지금내가 필요한 존재라도 된다면 말이다. - P164

나는 아직도 그장면들을 마치 호퍼의 그림처럼 떠올릴 수 있다. 유년 시절그 집에 관한 모든 기억은 호퍼의 그림처럼 불가사의하고 질척한 외로움으로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어질러진 침대, 앙상한 의자 위에 널브러진 책들 사이에서 창밖을 내다보거나 말끔히 정리된 책상 옆에 앉아 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들과 마찬가지 모습을 한 내가 그 가운데에 있었다. 집에서는 모든 것이 속삭임으로 해결되었고, 가장 분명하게 들리는소음은 내가 바이올린으로 연음을 연습할 때를 제외하고는 어머니가 외출을 위해 굽 높은 구두를 신을 때였다. 그리고 호퍼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에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면 나는 글을 쓴다. 나는 그림을 볼 수 있지만 그릴 수는 없기때문이다. 나는 항상 호퍼처럼 광경을 본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창문 혹은 문을 통해서 말이다. 또한 몰랐던 것을 결국에는알게 된다. 알 수 없는 것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럼 그것이진실이 된다. 당신은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리라고 믿어. - P219

다들 내 능력이놀랍다고 말했다. 저런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일들중 하나였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확실히 나는 언어를 쉽게 배우는 편이었다. 프랑스어는 식은 죽 먹기였고, 이탈리아어는 비록 억양이 틀리기는 해도 읽을 수 있고 제2의 모국어와 다름없이 구사했다. 카탈루냐어와 카스티야어는 물론 『갈리아 전기』수준의 라틴어도 막힘이 없었다. 러시아어나 아람어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내 방에 들어와 꿈도 꾸지말라고 말했다. 이미 아는 언어만으로도 충분해. 인생에서 다른 것들도 해야지 언제까지 앵무새처럼 언어만 배울 거니.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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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의사고 신부고 뭐고, 너는 더이상 왈가왈부할 필요없이 위대한 인문학자가 될 거야."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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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사람들을 무척 좋아했는데(얼마나좋아했는지 모른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들 머릿속에 들어있는 문장들이 간절히 듣고 싶었으니까.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내가 그들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문장의 형태에 반응할 때면 내 문장들도 풍요로워지고 자유로워진다. 생각은 풍부한 표현으로 넘치고, 감정들은명확해지고, 다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진다. 내게 곧바로 반응해주는 누군가의 지성이 있는 곳에서 내 지성이 작동하는 소리만큼 나를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 P169

자기한테 시간이 없다고요. 하지만 사실은 이런 거죠. 그 사람이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자기가 그저 가끔씩만 관계를 맺는 학생들, 동료 교수들, 학과장들 같은 사람들이랑 항상 얘기를 나누는 듯한 기분에서 매일매일 회복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게교수들 대부분이 시간이 없는 이유예요. 오직 교수들만 그 사실을 모르죠. 그걸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불행한 거고요.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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