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중순 어느 날 오전 열한시경, 태양은 보이지 않고 한결 뚜렷해진 언덕들이 폭우를 예고했다. 나는 담청색 양복에 암청색 와이셔츠를받쳐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장식용 손수건을 꽂고, 발목에 암청색 수를놓은 검은색 모직 양말과 검은색 단화를 신고 있었다. 이렇게 깨끗하고단정한 차림새에 면도까지 한데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으니 누가 좀 알아줬으면 싶었다. 그야말로 말쑥한 사설탐정의 모범답안 아닌가. 사백만 달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 P7
스무 살쯤 되었는데 몸매가 작고 가냘프지만 야무져 보였다. 하늘색슬랙스가 잘 어울렸다. 허공에 떠다니는 듯한 걸음걸이다. 요즘은 머리끝을 안으로 마는 페이지보이 스타일이 유행인데 그녀의 섬세한 황갈색 곱슬머리는 그보다 훨씬 짧았다. 청회색 눈은 나를 볼 때도 무표정에 가까웠다. 그녀가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입만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육식동물을 연상시키는 작고 뾰족한 이가 갓 벗긴 오렌지 속껍질처럼 새하얗고 도자기처럼 반짝거렸다. 지나치게 힘을 주어 얄팍해진 입술 사이에서 이가 빛났다. 얼굴에 핏기가 없어 그리 건강해 보이지는않았다. - P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