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순종의 반응은 앞으로 총독부가 이 도로를 부설할 때 어떤 갈등이 생길 것이라는 점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한 순종의 의사 표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순종 생전에독부는 제6호선 부설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연하게도 총독부가 제6호선 부설을 다시 개시한 것은 순종이 사망한 직후인 1920년5월이었다. - P62

유지하고 있었던 생활의 ‘안정성을 잃고 아무런 생활 개선을 수반하지않는 이동을 반복하면서 오히려 그 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비교 대상이 있다. 1850년 프랑스에서는 도시 하층 노동자의 주거 개선을 모토로 슬럼가 재개발 법안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법안은 일부 노동자들에게 당장의 주거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았다. 슬럼가재개발에 호응할 최소한의 경제적 여력도 없는 노동자들은 경찰의 눈을피해 슬럼가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19세기 중반 프랑스, 그리고 193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공간의 차이를 넘어 ‘도시계획적 빈민주거대책‘의 근본적인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 P329

적어도 1910년대 전반 시구개수 과정에서 식민지 권력은 조선인은 물론일본인의 사익과도 대립하는 목표를 추구했으며 그것을 ‘문명‘ 이라는 무단통치기‘ 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 1910년대 식민통치의 특징은흔히 가시적인 폭력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아니 오히려이름으로 정당화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가시적인 폭력성 이면에서 서구 근대 표준의 일방적 이식을 ‘문명‘ 이라는 이름으로 추구한 것이 아닐까? 이것은 그들의 독자적 내용이 아니라 자신들이 수용한 서구 근대의 이식을 통해 식민통치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구축할 수밖에 없었던 ‘후발제국주의’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에서 비롯된다. 병합 초기에 더욱 두드려졌던 이 방식은 식민지 수도 핵심부의 공간구조 재편을 위한 경성시구개수 과정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 P50

1914년 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따르면 "서대문의 존치를 바라는 선인(鮮人)의 여론도 없지 않았 지만, 이를 그대로 두고 도로를 내는 것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철거가 결정되었다. 서대문 철거가 완료된 것은 1915년 6월의 일이다.
이처럼 총독부가 남대문 남대문정거장 구간 공사에서 시작한 1910낸대 전반 시구개수에 대해 여러 어려움을 무릅쓰고 1915년 공진회 개최에 맞춰 일단락하고자 총력을 기울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눈에 무리해 보이는 공사 일정을 강행한 이유는 식민통치 5주년의 성과를 과시하는 자리인 공진회에서 총독부가 과시하려는 ‘치적‘ 중에 경성 도심부의 "정정유조한 정비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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