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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 개정증보판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과학 콘서트는 기본적으로 대중교양서입니다. 여기서 대중교양서란 말은 "야, 과학이란 게 너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딴 세상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라는 말로 보통 사람이 과학을 친숙하고 필요한 것으로 느끼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책은 그래서 전통적으로 인문과학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화두들에 대담하게 도전한 과학계의 성과들을 기록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히트한 음악들에는 프랙탈 구조가 숨어있다는 사실로 예술의 영역에 새롭게 접근하며, 백화점의 동선 관리를 소개하며 마케팅에 뛰어든 과학적 접근방법을 소개합니다. 일상 속에서 새롭게 발견된 '의외로' 중요한 과학적 사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과학적 지식이 응용된 '새롭게 발견된' 일상들을 알려주는 게 이 책의 중요한 줄기 중 하나이죠. "일상 속에 우리가 가진 조그만 의문이 새로운 과학적 사실을 가져올 수도 있고, 전혀 몰랐던 과학적 음모(?)를 파헤쳐 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도 한 번 생활 속에서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과학의 세계에 관심을 가져봐, 그럼 네 생각보단 훨씬 재밌게 살 수 있을걸?" 이렇게 저자가 속삭이는 것 같군요. 아니, 사실 그렇게 대놓고 말합니다. 자신이 바라는 건 이 책을 읽고 재밌었다고 말하며 끝내는 게 아니라 관련 자료를 파헤치도록 하는 게 최종 목적이며, 그러기 위해서 각 장마다 자신이 참조한 논문들을 몽땅 달아놓을 거라고(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머리말에 밝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이렇게 '일상 속의 과학'이 이 책의 큰 줄기라면, 또 하나의 커다란 줄기는 학문 간의 융합이 갖다 준 문제해결에 관한 새로운 영감, 그리고 그 융합의 중심에 과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소개입니다. 교통 문제는 행정가들이 가진 오랜 숙제였죠. 주식 투자와 예측은 경제학자들의 오랜 골칫거리였고, 명곡과 명화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는 예술가들이 알고 싶어 하는 오랜 과제였습니다. 바로 이 문제들이 응용물리학과 네트워크 이론 등으로 꽤나 경쾌하게 설명됩니다. 입자 간 밀도와 이동의 공식이 교통문제에 대입되고, 카오스 이론의 대입으로 복잡계 경제학이 탄생되며, 잭슨 폴록의 그림은 프랙탈로 분석되어 우리에게 새로운 미학적 개념을 던져줍니다. 저자의 이와 같은 선정엔 과학이 생각보다 친숙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우리가 굳이 학문의 벽에 갇혀있을 필요가 없으며, 학문 중심보단 문제 중심으로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사고할 때 인간의 지식은 더욱 발전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물론(저자가 과학자여서 그렇게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 중심엔 과학이 존재한다는 거죠. 하지만 방법이 무엇이든 저 주제들은 무엇보다 인문적이며, 우리의 상상을 요구하는 주제입니다. 다만 그 상상을 풀어가는 구조가 과학적 논증 방법과 지식을 따르고 있는 것이죠. 저는 오히려 여기서 무언가를 배우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가져야 할 자세를 생각했습니다. '창조적으로 상상하라, 하지만 그 다음엔 치밀하게 검증하라'. 어느 학문이나 마찬가지 태도를 요구하지 않을까요? 그 기본자세만 굳게 지킨다면 어느 것의 외피를 빌려오건 본질은 같다는 걸 보여준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이야기들만을 놓고 보면 저자는 과학의 무조건적인 진보와, 복잡한 세상에 명쾌한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는(표지 부제이기도 합니다만)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이와 같은 과학이야기를 쭉 풀어놓으면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개념이 있습니다. 카오스 이론입니다. 여기에 대해선 차민철 교수님이 친절히 설명해 주셨는데, '과학의 기본 원칙은 변하지 않으나 초기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너무 많아 원인 값이 가진 약간의 차이로도 너무 큰 결과 값의 차이가 만들어져서, 단기적인 예측은 가능하나 장기적인 예측은 인간의 인식으로 불가능한, 그래서 학문적으론 비선형적 공식과 확률적 기술 말고는 할 수 없는' 여러 법칙들을 말합니다. 흔히 해석하는 '혼돈'과는 다른 개념이죠. 비유를 들자면,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있습니다. 이 부모는 자신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2~3일 내로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할 것이며, 앞으로 어떤 변화된 행동을 취하는지를 예측할 수 있으며, 그럭저럭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앞으로 10~20년 뒤 아이에게 어떤 영향으로 나타날지를 예측하려고 했을 때, 또 그걸 고려해서 말과 행동을 하려고 했을 때, 그 시도는 과연 정확하게 성공할 수 있을까요? 아마 신이 있다면 신을 빼고는 아무도 모를 겁니다. 바로 이 상태를 과학자들은 카오스라고 부릅니다(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합시다^^). 과학계에서는 이미 30년 정도 논의 중인 개념이라고 하니, 이 책이 첫 선을 보인 2001년에는 20년 정도 논의된 거였겠군요. 하지만 대중에겐 매우 신선하다고 할 수 있는 이 개념을 저자가 의식적으로 중점적인 소개를 한 데에는 자신의 전공 분야가 비선형 동역학적 관점, 네트워크 이론의 관점에서 뇌를 살펴보는 것이고, 따라서 자신에게 친숙한 이론이 응용된 여러 사례를 모으다 보니 그렇게 된 걸 수도 있겠지만, 그 자신도 과학의 효용성과 진보의 전망을 꾸준히 회의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보여주는 데에 있지 않았나 합니다. 아니 꼭 자기를 그런 존재로 만든다기보단 (저자 자신이 생각하기엔) 과학의 최전선에 선 자들의 성과와 고민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개념이 카오스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최종적으론 과학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가지며 끝나지만, 커튼콜에서 보여준 출간 후 10년 동안 과학계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소개는(복잡계 네트워크 과학이 가진 엄청난 야심과 함께 리먼브러더스 사태를 소개하는 식이죠.) 엄청나 보이는 과학에도 성장하는 과정의 성장통이 있고, 모든 성장 중인 학문은 그렇다는 느낌을 던져줍니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을 가진 건 오직 심장병 환자뿐입니다. 혈액의 분포도와 산소 농도에 따라 우리의 심장은 최소한의 원칙만 둔 채로 그 때 그 때 불규칙적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가진 문제와 상황들에 적극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하려 노력하지 않고, 기존에 지키던 학문적 방법론만 고수하는 학계는, 안정적일지 모르나 병든 곳이요, 고민하고 방황하지만 새로운 상황에 맞춰 변화해 나가려는 학계는 불안할지 모르나 자라나는 곳이라는 것. 굳이 학계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인생에 있어서도 새겨둘만한 가르침이 아닌가 합니다.
개인적인 전공과 연결 지어서는 복잡계 과학이나 카오스 이론 같은 게 현재 배우는 빅데이터에서 보이는 사례, 예를 들어 아마존의 책 추천 시스템이 인과관계 분석을 하지 않고 상관관계 분석만 했더니 성공했더라 하는 낭패스러운 사례들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습니다. 과학책을 얻으면서 전공분야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도 있구나 하는 걸 느꼈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그건 엄청난 고수가 될 수록 더 커지는 효과이겠지만 말이죠.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제가 과학 도서를 읽으면서 기대하는 건 그 쪽 분야 전공의 단편적인 지식들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건 결과적인 지식이 아니라(그건 심하게 말하면 제가 응용할 수 없는 한 부스러기입니다.) 그 지식을 도출해낸 과정이며, 그 논리구조와 구조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따라감으로써 무언가를 알아간다는 것에 이런 식의 방법도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체득 - 특히 저로서는 신선하게 느껴지는 자연과학의 연구 방법 - 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쉽고 재미있게 쓰였지만 호흡이 짧고, 결과적인 지식들만 나열해놓고 그 나머지 도출 과정은 참조 논문을 제공하는 식으로 미뤄버려서 책 한 권으로 제가 원하는 목적을 온전히 달성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찌 첫 술에 배부르겠습니까. 앞으로 길게 보고 나아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