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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 개정판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2008년 10월
평점 :
한국적이란 게 무엇일까요? 누구는 한을 얘기할지도 모르고, 누구는 흥을 얘기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대해 아무도 시원한 결론을 내려주지 못하는 걸까요? 원래 미감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라서 그렇다는 게 큰 이유일 겁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죠. 우리는 왜, 한국적인 게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걸까요?
저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이런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 분이 말하는 한국의 미라는 게 무엇인지를 떠나서, 그것을 계속해서 자문자답하는 모습에서 어떤 안간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가 볼 때 자기 것이 아닌 근대를 살아가는 한 지식인의 안간힘이었습니다. 이 글이 쓰였을 때는 6~70년대, 혹은 7~80년대입니다. 말하자면 산업화와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 사회에 근대화라는 변화가 무섭게 몰아쳤던 때였죠. 문제는 이 근대가 우리의 전통을 바탕으로 딛고 일어선 결과가 아닌,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서 이뤄나갔던 근대였다는 겁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이식된 근대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서양의 경우 자기네 사회 내부의 발전논리에 따라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그에 걸맞은 조직과 사상을 알아서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들에게 근대는 태생부터 자기네 것이었고, 그 안에서 자신들의 전통을 살려나가는 나름의 노하우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겠죠. 서구적이란 게 무엇일까?를 물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그 안에선 뭘 해도 서구적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을 테니까 말이죠. 반면 우리는 어땠나요? 일단 조선이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이 근대화의 첫 출발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지독한 전쟁, 그리고 몇 번의 독재(를 통한 이식된 근대의 완성). 이 모두가 서구의 방식을 베껴오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던 거죠.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 것이 무엇인지를 되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생산양식 자체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뭐 하나라도 우리 것이 있는지를 찾을 수밖에 없고, 근대라는 이식된 체제에 먹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토착화시켜야 할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제3세계 지식인의 슬픈 현실. 그 현실의 한복판에 저자가 있었다고 봅니다. 어떤 공부를 하건 이와 같은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었을 테고, 따라서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저자가 맞닥뜨린 건 하나의 거대한 예술적 고민이었을 테죠. 단절된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시 이어받아야 할 한국적인 미감은 어떤 것일까? 이걸 어떻게 근대에 맞게 다시 녹여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 거기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풀어놓습니다.
고담, 야취, 고졸한 멋, 자연에 들어앉아 있으면서 자연을 더욱 살리는 건축 등, 저자가 풀어놓는 한국의 멋은 대충 이런 용어들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한국미라는 게 저것밖에 없을까? 저자 자신도 저것만이 한국의 진정한 멋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닐 겁니다. 우리에게는 고려불화가 가진 도안의 세밀함과 화려함이 있었고, 청자의 귀족문화, 그리고 무엇보다 신라의 금관문화 등 장식미란 것에도 한 가닥의 솜씨를 가진 조상들이 있었으니까요. 저자도 이걸 모르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유독 현대의 건축문화, 생활문화 등과 관련지어서 강조하는 건 위에 나열한 것과 같은 멋이죠. 따라서 이건 한국미의 본질이라기보단 저자가 고른 한국미의 선택적 본질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질문은 이렇게 구체화됩니다. 왜 저자는 근대의 격변기 속에서 위와 같은 한국미를 '선택'했을까? 그 의도에는 저 미가 근대의 토착화에 어떤 시발점이 될 거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일까?
아마 살아계셨다면 물어보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자는 지금 이 세상 분이 아닙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로 다양하겠지만 저는 사실 저런 미들이 우리 근대의 '생활' 속에 정착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특히 건축에 있어서 그랬습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조화를 이루는 건축미의 형태는 분명 대단한 것이지만 절이나 정자 등 생활과 유리된 여가시설 혹은 종교적 건물들에 국한된 형태입니다. 분명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했겠지만 생활과는 동떨어진 건축물들인데, 근대를 우리식대로(한국미로서) 품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생활에 밀착한 한국미여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기술이 아니라 우리의 미의식안에 그것이 자리잡고, 구체적인 생활+예술로 통합되어 표현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 그 전망이 썩 밝지만은 않았습니다. 단절된 근대를 겪은 채로 이미 3~4세대에 이른 우리들은 한국미가 문화적 유전자로 자연스레 이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선택해서 배우고 재창조해낼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따른 한계를 역설적으로 이 책이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유홍준 씨가 한 말이죠. "전통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전통을 바꿀 줄 아는 사람이다." 전통이 가진 정신의 요체를 알면 그 껍데기인 형식은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다는 말인데, 그 정신을 물려받지 못한 우리는 예전 공예와 건축이 가진 형식을 얼마나 창조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걸까. 그걸 못해서 이상한 태극문양을 그려넣고 지하철 벽에 뜬금없이 학 그림과 거문고를 뜯는 한복 입은 여인을 그려넣으며 한국전통을 잇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마냥 낙담만 할 일은 아닙니다. 이 책은 분명 우리의 미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피력한 설득력 있는 책이며, 거기에 따른 독자적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습니다. 고전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듯이. 이런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한국적 미에 대한 수요가 다양한 곳에서 생겨난다면, 이런 데이터가 여러 분야의 창작자에게 한국적 미의 재창조를 자극하는 영감의 재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결국 한국적 미의 부흥이겠죠. 저자도 그와 같은 것을 기대하면서 이 책을 썼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한국적 미는 다층적이며, 저자가 선택한 한국적 미가 본질 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다양한 세대에겐 그 세대가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한국적 미가 있을 수 있음을 뜬금없지만 저자가 쓴 언어를 통해 보았습니다. 아까도 쓴 말이지만 고담, 야취, 전아 등등...요즘에는 쉽사리 알아들을 수 없는 한문 단어들입니다. 1910년대 생인 저자에게 이런 단어와 문장은 젠체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녹아든 한문세대의 소통 언어였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단어를 다른 미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썼지만, 저는 오히려 그 도구가 시간이 지나면서 가진 독특한 멋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요즘에 쓰이는 문장들에선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멋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명제에 입각해서 본다면 문자를 엄숙하게 대했고 달리 말하면 문자를 유일한 정보전달의 수단으로 신봉하다시피 했던 문자세대가 발견한 한국적 미와, 다양한 정보전달 수단을 가지고 있고 엄숙한 문자보단 익살을 부리는 문자에 익숙한(페이스북의 댓글들이나 진중권 씨 등) 우리 세대가 발견할 수 있는 한국적 미는 분명 다르지 않을까요? 바로 그걸 시도하는 데에 저자가 바란 한국적 미의 부흥이 달려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