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다상담 2 - 일, 정치, 쫄지마 편 강신주의 다상담 2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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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주의 다상담 2권입니다. 이 책의 주제는 일, 정치, 쫄지 마군요. 1권의 주제가 비교적 사적이며 나의 결단으로 변화를 만들 수 있는 폭이 비교적 큰 관계들을 다뤘다면(사랑, 몸, 고독), 두 번째 책의 주제들은 좀 더 복잡하며 나의 결단을 통한 변화보단 결단 후의 후환을 더 고민해야 하는 ‘권력관계’ 속의 ‘나’를 다룹니다. 여기서 ‘나’는 당연히 그 관계 속의 약자들을 말하는 것이겠지요(강자면 그 속에서의 고민 때문에 상담 신청을 했을 리가 없으니).

 

 2권에서도 핵심 주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권리는 주체적인 관계 맺기를 통해서 온다. 이런 얘기입니다. 다만 여기서 덧붙여지는 얘기와, 약간 다른 분위기를 통한 강조가 있는 것인데요. 덧붙여지는 얘기는 프롤로그에 나오는 ‘’NO‘라고 말하며 살자!’입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얘기인데, 주체적인 관계 맺기는 다름아닌 관계를 선택하는 과정입니다. 선택이란 게 한자로 보면 ‘選擇’인데, 둘 다 ‘가려내다’로 번역이 됩니다. 선택이란 다른 게 아니라 ‘아닌 걸 버리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관계를 맺을 때 무엇보다 나한테 맞지 않는 것들을 거부할 수 있는 근성을 길러놓아야 나다운 인생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로 내 인생에 열렬한 'YES'들을 만들어가는 과정 또한 필수적이죠. 열렬한 YES를 지키기 위해 NO를 해내건, NO를 계속하는 부정의 과정을 통해 마침내 YES를 찾아내건, 중요한 건 그 선택의 권리가 항상 나한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직이나 기업, 정부, 부모님이 아니라 말이죠. 이 책에서는 바로 거대한 조직, 강한 권력 관계 속에서 나의 주체적인 관계 맺기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고민하기 때문에 조직과 권력에 NO를 할 수 있는 근성에 초점을 맞춰서 프롤로그를 짠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른 분위기를 통한 기존 주장의 강조는 첫 번째 주제인 ‘일’에서부터 드러납니다. 뼈대는 이렇습니다. 일이란 것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모든 일이 다 일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뭐 일은 ‘자아실현의 수단’이니까요. 나는 B(Birth)와 D(Death) 사이에서 한 C(Choice)로 만들어지는 것이고, 모든 C는 다 행동이 수반되는 것이니, 나의 C를 통해서 나온 모든 행동은 다 나를 만들어가는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나를 둘러싼 관계를 바탕으로 나온 것이고, 그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도 하지요. 내가 어떤 가수의 노래를 듣고 감명을 받아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그것은 나를 만들어가는 선택을 통해 ‘일’을 한 것이 되는데, 그 노래를 통해 남들이 다시 내게 영향을 받기 시작하는 그런 순환작용이 일어나는 걸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원에 꽃을 심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방 청소를 하는 것도 모두 내가 영향 받은 관계로 인해 한 행동으로 다시 내가 영향을 미치는 행위들인 것이죠. 책 안에서 나오는 일일부작 일일불식은, 이런 식의 논리 속에서 해석하자면 너는 오늘 하루 네가 원해서 하는 관계 맺기를 하나라도 했는가? 그렇게 주인으로서 조금이라도 살았는가? 그러지 않았다면 살았어도 산 것이 아니라는 말로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직장이 없더라도, 아니 오히려 직장이 없기 때문에 진짜 내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그 사람의 방청소를 해줬다면 그건 내 일을 한 것이고 오늘 하루를 살 자격이 있는 것이지만, 직장에서 하루 종일 야근을 해 정말 내가 잘해드리고 싶은 어머니에게 전화 한 통도 못했다면 그건 무엇과 관계 맺을지의 선택을 내가 아니라 회사가 한 것이니 내 일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원하는 관계를 맺기 위해 오늘 하루 얼마나 노력했나를 돌아보고, 그 노력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내 일을 한 것이 되고 아니면 아니라는 것. 그것이 일을 정의하는 저자의 중요한 전제입니다.

 

 다만, 이 뼈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시킬까라는 부분에 있어서 저자는 1권보다는 조금 더 조심스럽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래서 내가 원하는 관계 맺기를 위해 남들이 강제로 정해주는 일을 안 하겠다고 해버리면,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조차 사라져버리기 십상인 것이 현재 한국의 노동현실이니까요. 그 엄연한 현실을 아무리 철학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전제만 고집하며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이 정말 내가 원해서 선택한 일이고 그걸로 돈벌이까지 가능하다면 환상이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남이 시키는 일은 대충 해라’ ‘회사에서 인간관계를 바라지 말고 밖에서 찾아라.’ 등입니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에너지를 아껴두는 일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프롤로그를 참고하면 원칙상으로는 우리는 남이 멋대로 시키는 일에 대해 ‘NO’라고 말하며 'YES'의 공간을 확보해두어야 하지만, 그랬다간 오히려 더 힘든 상황에 처할 수 있으니 'YES인 듯 YES 아닌 YES 같은 상황들'을 의도적으로 만들며 밍기적대라는 겁니다. 결론은 어떤 식으로든 내가 스스로 관계 맺을 자유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원칙대로는 못하더라도)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한국 사회가 이런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얼마나 사람들이 고립되어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예전이었으면 이런 상황들을 이야기하며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서로 뭉쳐서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를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조직도, 활동도 보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연대를 통한 승리의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만 희생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앞서버리는 무력한 사회가 돼버린 거죠. 저자는 그런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렇다 해서 시도조차 안 하면 안 되니 땅이라도 파 피해있으라고 조언해주는 겁니다. 각개 전투로 각자 알아서 살아남자고 말해버리는 거죠. 가장 근본적인 철학자조차 이런 조언을 해줘야 하는 사회라...우린 어디까지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그렇지만 현실적인 조언이긴 합니다. 내 일로 돈을 벌 수 없다면 돈 버는 일은 따로 하되 내 일을 할 시간-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여유를 어떻게든 마련해 놓는 쪽으로 가보라는 조언이니까요. 그리고 좋아하는 일, 좋아하지 않는 일이 무엇인지를 그런 근무태만으로 한 번 확실히 정해보고 좋아하는 일에 진짜 열정을 쏟으라는 말도 괜찮습니다. 그렇게라도 우리는 살아나가야 하는 거겠죠. 사회학적인 개념으로 ‘노동소외(노동과 향유가 분리된)’라 불리는 이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아직 그 근본적인 해결책이란 게 실현된 적이 없으니).

 

 그렇다면 이제 두 번째 주제인 정치를 살펴봅시다. 진정한 자기 삶의 주체들이 모여 만드는 정치란 과연 어떤 걸까요? 모릅니다. 저자도 모르고 저도 모릅니다.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으니까요. 당연한 겁니다.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공인데, 남들도 다 자기 삶의 주인공이면서 그게 조화를 이루는 관계, 그 관계를 이루는 구조라는 게 가능하기나 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사랑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내가 주인공으로서 한 행동이 남들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관계라는 거, 기억하시나요? 그게 수천만 명에게 동시에 서로서로 가능한 관계라는 게 과연 가능한 것이겠습니까? 적어도 그런 상태가 '국가'라는 조직을 유지하면서 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국가는 저자가 인용한 가라타니 고진에 의하면 '수탈과 재분배의 기구'이니까요. 여기서 수탈과 재분배란 강제로 다른 사람의 소유를 뺏어(세금 같은 걸로) 재분배를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모든 국가가 이를 수행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럴 때, 국가의 차별이 일어납니다. 더 뺏을 게 많은 사람을 우대하게 되는 것이죠. 삼성이 정부 재정에 더 큰 영향을 미칠만한 세금을 내기 때문에 정부가 우대해주는 일 등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적 소유를 인정하는 국가 권력이 자본과 결탁하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사적 소유를 모두 없애고 모든 걸 국가 소유로 돌려야 하는 걸까요? 저자는 이는 사적 소유보다 나쁜 퇴행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의 발전은 莫非王土를 주장하던 왕정의 소유에서 사적소유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간 것이지, 모든 걸 국가가 소유하는 식의 왕정 복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진짜 주인공들의 정치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적 소유를 공동 소유로 만들어가는 방향입니다. 아무도 '영원히' 가지지 않아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영역이 극대화된 사회가 바로 진정한 정치가 기능하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뭐 토지 공개념, 임대 주택, 공유경제 등등이 이런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궁극적으론 수탈과 재분배의 기구, 국가가 해체되고 모든 영역이 이런 공유의 영역이 되는 과정이 정치의 과정이라고, 저자는 말하는 것 같군요.

 

 그렇지만 저자는 여기서 다른 의미로 근본적입니다. 수탈과 재분배의 기구가 저자가 바라보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는 아니지만, 그 기구를 구성하는 과정들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곧 정치적인 행동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선거는 여전히 중요하고, 최대한 덜 나쁜 사람이 뽑히는 건 대단히 중요합니다. 똑같이 수탈과 재분배를 한다고 해도, 그 오십보백보의 차이에서 실제 삶의 많은 중요한 부분들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4대강을 하는 거랑 국민 연금을 늘려주는 거랑은 똑같은 수탈과 재분배의 과정이지만 체감하는 결과가 천양지차인 것과 같은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현실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그 동안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유는 수탈당할 게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적극적인 정치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진 사람들인 이유 또한 정부의 성향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그들 재산의 규모가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정치는 이처럼 소유관계에 따라 움직이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직시하면서도 조금이라도 그 소유관계를 현실정치의 힘으로 약화시키려는 쪽-공유의 영역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는 쪽-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수탈당할 게 많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가져야 하는 정치의 기준이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근본적인 태도인 것이죠. 정치에 있어 근본적인 태도란 최선이 나타날 때까지 모든 걸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라, 최선에 아주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고 하고 이에 제일 가까운 사람을 뽑되, 그 약간의 성공이 곧 자신이 원하는 완전한 성공이 아님도 확실히 인지하는, 영원한 불만족의 태도입니다. 모든 것이 공유가 되어 더 이상 수탈의 과정도 필요 없어지고, 대표가 사라져 모두가 주인으로서 행동하면서도 모두와 조화를 이루는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말이죠. 당연히 거의 불가능한 것 같지만, 진짜 민주주의는 이런 걸 말하는 거고 나머지는 이를 향해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걸 확실히 해두는 건 꼭 필요한 과정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수천만 명을 단위로 해서 그렇지,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협력의 자세를 말하는 것일 텐데, 누군가를 도와주는 행동을 강압이나 돈이 아닌 순수한 기쁨에서 우러나와 하는 경우라든지, 아니면 도와준다는 생각도 없이 그들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라 생각해서 정말 내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로 적극적인 참여에 나선다든지 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 않나요? 그걸 어떻게 기르고 넓혀나갈까 하는 이야기이지 아주 씨알도 안 먹히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 씨알이 매우 작은 것이라고 해도요.

 

 이쯤까지 가면 쫄지 마가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는 좀 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프롤로그를 떠올리면 되는 거지요. 처음 프롤로그가 NO라고 말하며 살자!였던 걸 기억하시나요? 자기를 만들어가는 관계를 알아서 잘 맺기 위해서는 멋대로 내게 침입해 들어오는 이상한 관계들을 쳐내는 걸 쫄면 안 된다는 겁니다. 단, 내게 멋대로 침입해 들어오는 관계들이란 게 굉장히 강한 권력이거나, 우리 감정을 약하게 만드는 요사한 것들인 경우가 많고, 또 우리들이 그걸 그렇게 당당하게 NO라고 했다간 한 방에 훅 갈 수 있으니 일단 뻔뻔해지기부터 하라는 충고를 해주는 것이죠. 여기서 뻔뻔해진다는 건 그런 강자들을 속여먹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기. 그리고 남들이 그런 자기를 두고 어떤 욕을 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기입니다.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는 건 일 편에 나왔던 근무태만 하라는 충고랑 비슷한 맥락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막는 것들에 대해 NO라고 강하게 말할 수 없다면, YES라는 거짓말을 하면서 NO를 살살 비겁하게 행하라는 겁니다. 단 그 짓이 비겁한 짓이며, 언젠가는 당당한 NO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는 하라는 것이지요. 저는 여기서 김중배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80년대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시평을 맡으면서 굉장히 독재에 비판적인 글들을 썼지만, 그 비판을 직접적으로 행하지 않고 비유와 풍부한 인용으로 핵심 메시지를 돌려 말해 알아먹을 사람들은 충분히 알아먹으면서도 동시에 큰 영향과 감동을 줄만한 굉장한 글들을 쓰셨지요. 그게 독재 치하에서 납작 엎드린 척 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놓지 않으려 했던 그 분이 택한 방식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정권을 인정하는 척 거짓말을 하며 뒤로 호박씨를 까는 고난이도의 뻔뻔함을 행한 거지요. 그렇지만 동시에 이 분은 자신의 그런 행동을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꾸미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난 그 때 비겁했다. 부끄러운 짓이었다.'라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시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살아남으면서도 그 살아남음 때문에 자신의 품위를 전부 팔지는 않겠노라 이를 악문 자만이 해올 수 있었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그리고 그 줄타기를 해낸 자가 획득한 당당함을 봅니다. 꼭 독재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사소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들(가정, 직장, 쓸데없는 규범 등)에 있어서 우리는 뻔뻔함으로라도 저항해야 하며, 그러면서도 자신을 지키는 영리함을 길러놓아야 함을, 그렇게라도 자신만의 인생을 만들어가야 함을 알고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이 억지로 당당하려는 태도보다 더 오래, 여유롭게 생활 전반에 걸쳐서 싸울 수 있는 태도라고, 저자는 말하는군요.

 

 욕먹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건 사실 이전에도 주변에서 들었을지 모를 생활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모든 관계에 들어맞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특징은 다른 누구에겐 결점일 수도 있는 겁니다. 문제는 결점이라 생각하는 사람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특징을 결점이라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감추고 싶어 하고, 그렇게 한 사람의 개성이 살아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이지요. 허스키 보이스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주변의 한 사람이 자기에게 듣기 싫은 목소리를 가졌다고 말했다 해서 그걸 결점이라 생각하고 노래를 안 불러버린다면, 제니스 조플린 같은 목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올 기회마저 차단시켜 버리는 일이 아닐까요? 욕먹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건 나의 어떤 부분 때문에 떠나가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나를 지나치게 학대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 부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때, 그로 인해 다가올 다른 관계들에 더욱 최선을 다하면 될 일이며, 그것이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임을 알라고, 그러니 쫄지 말라고, 저자는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모험을 하는 것에 대해 쫄지 말라는 것하고도 연결됩니다. 추신에서 저자가 밝혔듯이, 우리는 타자를 통해서 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타자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하고 살 수 있습니다. 라캉이 <에크리>에서 주장하는 것처럼요(저자가 그렇게 인용하는 듯합니다.). 이 때, 타자를 통해서 자기를 만든다는 그 공식을 바꿀 수는 없지만, 어떤 타자를 만날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가지는 주체성인 것이지요. 그러나 그 만남 또한 과거 우리의 경험들을 통해 굳어진 성향, 사회적 관례, 조직적 억압 등을 통해 규정되어 버리고 패턴 화되기 쉽기 때문에, 어쩌면 새로운 관계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질 나의 욕망, 하고 싶어 할지도 모를 일들이 있는지도 모른 채 사라져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기존 관계가 끊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관계가 다가오는 걸 쳐내지 말라는 것이지요. 내가 착하게 웃는 모습이 좋다고 사람들이 모인 거였으면, 나는 내 기분이 별로여도 사람들이 떠날까봐 착하게 웃는 모습을 가짜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정색해버리라는 식입니다. 그렇게 정색한다고 떠나 버리는 사람들이면 보내버리고, 내가 정색하면 정색한대로 나와 어울릴 수 있는 관계를 기다리거나 찾아 나서라고 조언하는 것이지요. 그런 끊임없는 탐색의 과정-싫은 걸 확실히 싫어한다고 표현하고, 좋은 건 확고히 좋다고 표현하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의 리스트를 계속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내 주변에 나와 어울리는 진정한 관계들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어떤 도덕보다 우선하는 것이기에(실존은 본질에 우선하는 것이지요.), 그런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도 상관없고, 그 과정을 지키기 위해 때로 이기적이라고 욕을 먹을 만큼 폐를 끼치는 행동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뭐? 라고 말하며 계속 그 탐색을 계속하는 뻔뻔함(저자는 이혼하고 부모 집에 얹혀살며 연애만 한다 해도 그게 정말 자기 행복을 만들어가는 데 중요하다면 부모 눈치 절대 보지 말라는 식으로 조언해주죠.). 그게 저자가 말하는 진짜 중요한 쫄지 마! 의 주제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이 과정은 고독할 수 있고 쓸쓸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마지막에 인용한 '달나라의 장난'을 쓴 김수영처럼요. 그러나 우리는 내 마음이 끌리는 것들을 해보고 알아가려는 노력,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 무엇과 관계 맺으려는 노력을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관계들마저 나를 버릴지라도, 그리고 기존의 관계들마저 떠나갈지라도 그런 끊임 없는 시도들이 우리를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렇게 나를 만들어 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나와 진정으로 어울리는 진정한 관계가 다가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지는 것일 테니까요. 각자의 주인된 행동이 자연스레 상대방도 주인으로 만들어주는 사랑의 관계 말입니다.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해 모두의 고유한 리듬을 획일화시키려는 모든 것들에 저항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거창한 정치권력일 수도 있지만, 사실 훨씬 더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부터 저항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진정한 변화도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자가 일에 대해서, 그리고 쫄지 않는 자세에 대해서 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철저히 주체로 모두가 설 때, 우리의 정치는 마침내 가능해질 것입니다. 모두를 어떤 집단으로 묶지 않고 개별자로 남아 마침내 서로의 리듬을 존중하며 어우러지는 이상적인 정치 말입니다. 집단을 나누지 않기를 바라는 노래인 존 레논의 Imagine을 인용하며 책을 끝납니다. 그 노래를 오늘 다시 한 번 들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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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다상담 1 - 사랑, 몸, 고독 편 강신주의 다상담 1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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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을 한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요? 물론 그건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한 말일 것입니다. 시간은 무엇이고 공간은 무엇인지, 그 속에서의 생과 죽음은 무엇인지 등등의 막연히 거창해 보이는 것들에 감히 질문을 던지는 수작으로 철학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그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 대상들과의 관계를 고민하는 ‘나’라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질문은 철학에서도 사람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가 없고, 그래서 철학이 다루는 질문들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질문,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수렴되지 않나 합니다. 단지 그 질문을 몇 가지의 팁으로 면피하는가, 아니면 근본적인 고민으로 끌고 가는가로 자기계발서와 철학서가 갈리는 것이겠지요. 강신주의 다상담은, 그래서 어떻게 보면 철학이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 중 우리에게 가장 뜨겁게 다가오는 부분을 뜨겁게 클로즈업해서 던져주는 책입니다. 대단히 새로운 논의나 새 영역을 개척하는 전문 철학서는 아니지만, 누군가의 구체적인 고민에 철학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실마리를 전해줄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책이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렇게 봤을 때 전문 철학서와 대중 철학서를 나누는 것도 그리 현명한 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철학은 대화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상담이란 형식이 철학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난 것도 아니니까요.

 

 총 3권의 연작으로 이뤄진 이 책을 여는 1권의 주제는 세 가지, 사랑, 몸, 고독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적인 영역의 주제로 생각될 수 있지만, 사실 사적인 영역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공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인문학의 주된 특기 중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사실 사적이라 여겨지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가장 본질적인 공적인 영역에 속해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부부관계는 사적인 영역의 일인 것 같지만 사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이 공적인 논의의 대상인 가부장제, 성역할, 전근대적인 결혼 제도 등을 가장 작은 단위에서부터 가장 견고하게 유지시켜주는 장치가 되는 걸 떠올리시면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여기는 사랑과 고독, 그리고 나 자신의 ‘몸’에서부터 철학적 사유를 출발시킨다는 건 꽤나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규정지어왔고 통제해왔던 다양한 사회적 통념들을 재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재발견을 통해서, 우리는 마침내 새로운 관점과 행동 지침들을 세우게 되는 것이지요. 역시 철학은 가장 근본적이기에 가장 삐딱해 보이는 어떤 태도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서 ‘철학은 근본적이다.’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철학은 전제의 근거를 따져 이를 증명하거나 더 나은 새로운 전제를 성립하기 위해 싸우는 학문이고, 근본적이라는 건 어떤 면에선 ‘나의 전제에 가장 충실하다’는 표현의 다른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결국 ‘전제에서 벗어나는 어떤 것도 허용할 수 없다’라는 가장 강한 부정을 불러오는 태도를 지칭하게 되죠. 근본적이란 건 대개 얼마나 ‘내 전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부정할 수 있는가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철학이 가지는 선명성의 매력이기도, 무책임이기도 합니다. 아닌 건 아니라고 쳐버리는 태도에서 우리는 우리 삶이 부정당하는 듯한 절망을 느끼기도 하지만, 어쨌든 자기네 입장에서 아닌 걸 아니라는 데에야 뭐라고 하겠습니까. 거기에서 우리는 그걸 받아들이던가, 부정하던가 두 개의 선택지만을 받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상담이란 간판을 내걸긴 했지만 저자가 철학자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가 사람을 다독이고 고민을 들어주는 카운슬러가 아니라 자신의 전제를 관철시키는 철학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은 상담이라기엔 때로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기도, 견강부회하는 억지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 맞춤형 팁을 전해주는 성공학 강사가 아니라 현상에 대해 정확하고 분명한 논리적 설명을 부여하고자 하는 철학자가 가지는 속성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현실에 자신을 맞춰갈 것이냐,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어줄(혹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을 위해 현실과 불화할 것이냐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선택을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에 자신이 가진 철학자로서의 사명이 있다고, 저자는 은연중에 밝힙니다. 우리는 그의 그런 성질을 알고, 그저 그런 상담 책을 읽는 것보단 훨씬 단단한 각오로 이 책을 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주제를 다룰 때 저자가 깔고 가는 ‘근본’이 무엇인지를 한 번 살펴봅시다. 그것은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라는 알랭 바디우의 전제입니다. 이 말은 곧 바꿔 말하면 ‘둘의 경험이 아닌 어떤 것도 사랑이 아니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얼마나 그런 사랑을 하기가 힘이 드는지, 그런 사랑을 해내는 사람이 얼마나 적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모습과 다른 남녀관계를 택하는지, 정말 완벽하게 그런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있긴 하는지 등등의 항변은 소용이 없습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아닌 건 똥구멍이 빠져도 아니고’ ‘옳은 건 똥구멍이 빠져도 옳은 것’이니까 말이죠. 중요한 건 그래서 ‘아, 내가 사랑해본 적이 없구나.’라는 솔직한 자기 인정, 즉 직시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그러한 직시 후 자기가 자기 사정에 맞게 알아서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고, 저자는 그저 자신이 정한 전제에 맞춰 각자의 모습을 돌아보도록 강요할 뿐입니다. 그것이 무책임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자신이 현재 어떤 상태인가를 아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이니 잔인하긴 해도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저자가 설파하는 전제를 진정으로 옳은 전제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것 또한 본인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 이 전제를 좀 더 파고들어봅시다. 이 전제는 ‘사랑은 주체와 주체의 만남이다’로 바꿔 적을 수 있습니다. 즉 자신으로 만나지 않은 관계, 내가 아닌 부하직원으로, 내가 아닌 부모님 말 잘 듣는 아들이나 딸로, 내가 아닌 허세로 꾸민 무언가로 만나는 관계는 사랑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상대방이 아닌 재력가의 자식으로, 내 성공을 증명하는 트로피로, 무조건 나를 보듬어줄 엄마나 아빠로 보는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나와 남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 속의 권력이나 외압, 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상대방을 보는 시선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아 이뤄진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를 얼마나 단호히 거부하고 상대방 자체에 몰입할 수 있는가가 사랑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요건이라는 것. 그걸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미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사랑이 아닌 것을 통해 사랑을 정의하겠다며 미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지만, 제가 봤을 때 그건 사랑이 반대말이기보단 사랑을 가능케 해주는 중요한 자질에 대한 강조로 보였습니다(정확히 미움이 사랑의 대척점인지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죠. 무관심일 수도 있고. 그리고 미움을 통해서 사랑을 그려보겠다는 그 시도가 사실은 미움과 사랑이 가지는 공통점에 대한 강조처럼 보입니다.). 진정한 미움이란 상대방을 없애기 위해 살인도, 감옥도 불사하겠다는 절절한 마음이라고 한다면, 이를 좀 더 고급스런 말로 ‘그 사람이 나한테 미치는 관계의 영향력을 지워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감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서의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닐까요?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부하직원과 상사와의 관계로, 집안과 집안의 관계로, 가면과 가면의 관계로 만들지 않으려는 단호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가가 사랑을 가능케 하는 가장 중요한 감정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정의 연속을 들었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그런 것들을 다 벗어난 ‘나답고’ ‘상대방다운’ 관계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런 게 있긴 하는 걸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저자가 말하는 사랑의 묘미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관계는 서로의 본질을 ‘발견’한 뒤 이에 끌려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단 강렬한 끌림 이후에 관계를 통해서 서로의 본질을 ‘만들어가는’ 관계라는 것 말입니다. 사실 우리의 본질, 즉 ‘나답다’라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나 스스로 정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건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정해지게 됩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요리사라 생각한다고 한들, 자신의 음식을 먹어주고 자신을 요리사라고 인정해주는 남들이 있어야 마침내 내가 사회적으로 요리사가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가 사랑이 본질을 만들어주는 과정에 적용된다는 것이지요. 내가 아무리 스스로를 주체로 생각해도, 누군가 나를 주체로 생각해주지 않으면 나는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주체는 주인이라는 말인데, 하인이 없는 주인, 관계를 통해 정의되지 않은 주인이란 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것은 나는 나를 하인으로 둬서 나는 주인이라는 형용모순일 뿐입니다.) 결국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들어주는 누군가가 있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랬을 때, 주인으로서의 내 모습이 비로소 드러나게 됩니다. 주인이란 자신이 가지는 감정과 생각, 그것들에 의한 행동을 표출하는 데 있어 어떠한 물리적 심리적 제약을 받지 않는 자를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표현을 받아주고 이를 좋아해주며, 심지어 그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를 배려하고 독려하는 누군가가 있을 때 그것은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통해서 나의 주인으로서의 감정, 생각, 행동은 점점 발전해가고 섬세해져가는 것이고, 그게 바로 내가 사랑이란 관계를 통해 나의 본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걸 저자는 ‘사랑은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관계’라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나를 위한 하인의 역할을 자처한 그 사람도 사랑에 빠질 때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관계’를 바라면서 사랑을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언제까지고 자신이 하인만을 해야 한다면 그 사람은 결국 나를 떠나버리고 말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주인이 되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그 사람을 위한 하인 노릇을 자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 속에서의 관계는 무척 유동적인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하인이 돼야 하는 순간이 있고, 어떤 때는 내가 전적인 주인이 되는 순간도 있습니다. 사랑에서 날 때부터 주인과 하인으로 타고난 고정적인 역할은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서로가 가진 본질이 고정적이고 확실해서 이를 보고 관계가 시작되는 게 아니라는 처음의 말과 통합니다. 나와 상대방은 주인과 하인의 역할을 번갈아 하면서 서로의 모습들을 빚어나가는 거고, 그게 사랑인 것이죠. 그래서 결국 상대방을 위한다는 행동들은 상대방이 해줄 하인의 모습을 기대하며 행하는 ‘나를 위한 행동’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연애할 누군가를 찾으며 나를 진짜 대단한 주인으로 만들어줄 상대방을 꿈꾸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 누군가가 SNS에 적은 날카로운 말이 떠오르는군요. ‘사랑해’란 고백의 가장 솔직한 버전은 사실 ‘사랑해 줘’라는 얘기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랑이란 관계는 사적인 감정을 며느리 남편 사모님 회장님 등등의 사회적 관계와 다른 ‘순수하게 사적인’ 영역으로 지켜내기 위한 투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제가 의문이 들었던 것은 때때로 주인이고 때때로 하인인 관계가 과연 진정한 주체와 주체의 관계인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고 싶은 욕망을 참고 하인을 감수하며 언젠가 주인이 될 날을 꿈꾼다면 그 욕망은 언제나 번번이 어긋나거나 충분히 충족되지 못할 것이고, 그것은 결국 결별을 불러오지 않을까요? 결국 이상적인 관계는 내가 주인으로서 행하는 생각, 감정,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사람 또한 주인으로 만들어주는 경험들을 가능케 하는 관계일 것입니다. 상대방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그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 나한테는 내 감정에 충실한 주인으로서의 행동이지만, 눈앞에서 그 춤을 보는 당사자는 자신이 마침내 주인이 된 듯한 감격에 빠지는 그런 종류의 경험이 가능한 관계 말입니다. 아, 생각만 해도 행복하지만 참으로 이상적인 관계. 어쨌든 사랑이란 거 하기 참 힘든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두 번째로는 과연 그런 경험이 둘 만이어야 하는 건지, 셋이나 넷의 관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조직이야 한 명 한 명을 모두, 동시에 전적인 목적으로 대우할 수가 없으니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셋이나 넷까지도 그것이 불가능한 일일까 하는 것입니다. 딱히 사례가 안 떠오르는 걸 보니 불가능한 건가 싶기도 하고, 삼총사의 all for one, one for all 같은 구호가 떠오르기도 하고. 이 문제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세상에 사랑의 감정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보다 훨씬 다양하다는 짐작으로 이 ‘둘의 경험’이란 전제에 대한 막연한 의문을 품어보았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아셨겠지만, 저자는 책에서 내내 ‘주인으로서의 나’를 굉장히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 주인이란 것은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보기에, 바로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을 주인으로 설정하기 위한 작업을 또한 굉장히 강조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인상으로는 저자가 실존주의자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본질은 가변적이며, 이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정의되기에 무엇보다 주도적인 관계 맺기를 통해서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갈 권리를 뺏기면 안 된다. 이 핵심 주장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의 명제와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책은 바로 그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염두에 두어야 하는 주제들에 대해 다룬다고 볼 수 있는데, 사랑이 그 첫 번째였고, 다음으로는 몸이 그렇습니다.

 

  왜 몸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저자에게 있어 몸이 우리가 ‘보편’이란 이름으로 함부로 묶일 수 없는 ‘개별적’인 존재이며, 그 개별적인 존재의 본질이 또한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변해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가장 생생하게 증명해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말 중 인상 깊었던 대목을 되짚어 보면, 우리에게 ‘인간의 몸’이란 말을 붙이는 게 말이 되는 일일까요? 세상에 어떤 사람이 ‘인간의 몸’을 봤다고 말할 수 있나요?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몸을 볼 수 있을 뿐이고, 그 중에서도 내 친구의 몸, 애인의 몸, 나의 몸을 봐왔을 뿐입니다. 사람의 몸은 똑같은 구석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지요. 누구는 담배 한 개비 안 피고 간접흡연만으로 폐암이 걸리지만, 누구는 50년 동안 매일 한 갑씩을 펴도 건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또 피부가 조금만 밝은 곳에 있어도 타는 사람이 있고, 벌게지기만 할 뿐 절대 타지는 않는 사람도 있지요. 그 모든 것을 한 데 묶는 ‘보편성’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겐 멀쩡한 처방이나 환경이 누군가에겐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으니까요. 이처럼 우리는 몸이 개별적이기에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개별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몸을 통해서만 세상과 관계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자에게 몸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보편적인 정의는 ‘관계하는 물질’이란 정의입니다.

 

  ‘관계하는 물질’이란 정의를 좀 더 생각해봅시다. 그 누구도 정신만으로 관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플라토닉 러브는 정신과 정신의 교류일까요? 그건 상대방의 미소를 보는 시각과, 손을 잡는 촉각과, 말을 하고 듣는 입술과 귀가 함께하는 몸과 몸의 교류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세상과 정신으로 교류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글을 쓰고, 나한테 가장 어울리는 편한 자세를 잡고, 눈을 통해 보고 입을 통해 소리 내 읽으면서 글을 교정합니다. 이 또한 내가 몸을 통해서 세상을 내 안에 담고 정리하는 과정인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그 어떤 관계도 몸을 거치지 않고 맺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몸은 앞서 살폈다시피 그 누구와도 똑같지 않은 나만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나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그 누구와도 똑같아질 수 없는 개별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에게 몸은 무엇보다 소중한 최우선 순위이고, 정신에 앞서는 것입니다. 몸이 있기에 그 몸을 통해 맺은 관계를 정리하고 경험으로 쌓아가며 정신이 발달한 것이지, 정신이 몸을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저자에게 있어 정신이 존재하는 목적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뜨거운 냄비를 잡고 손이 덴 아이가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번에는 불 위의 냄비를 잡지 않게 해 몸이 상하는 것을 막는 기능만을 정신이 수행한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정신은 보수적이고, 몸은 진보적이라는 것입니다. 몸은 언제나 무엇하고든 관계하며, 새로운 관계에 이끌립니다. 그러나 정신은 그런 몸이 새로운 관계가 가지는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몸을 억제하고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정신이 새로운 관계를 유도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 관계를 진전시키거나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해선 몸의 말을 따라야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본질을 만들어가고 싶어 하는 존재들이 유념해두어야 하는 원리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여기서, 본질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몸’을 만들어간다는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잠깐 옛날 어르신들 말씀을 떠올려보죠. “공부를 머리로 하는 줄 아냐, 엉덩이로 하는 것이여” 이 말은 중요한 함의를 품고 있습니다. 공부는 ‘해야 한다’라는 마음가짐이나 순간의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에 적합한 몸을 만들어가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공부하고 글 쓰는 신체는 분명 톱질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신체와는 명백히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몸에 달라붙은 습관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변화시킴으로서 자신의 특징을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이전의 연인이 내 정수리를 어루만져 짜릿했던 경험이 있다면 그 순간부터 나는 정수리가 성감대인 특징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개별적이지만, 그 개별성을 자신의 의지로 변화시킬 수도, 더욱 발전시키고 특별하게 만들 수도 있는 그 무한한 가능성을 자신의 몸을 세상에 마음껏 굴리면서 실현시켜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연애가 될 수도 있고, 무술이 될 수도 있고, 글이 될 수도 있지만, 항상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존재이며, 그 관계는 무조건 몸을 매개로 진행되기에, 항상 몸에 집중하고 몸을 아끼며 몸이 이끄는 일을 거부하지 말 것. 그것이 나를 나로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임을 명심할 것. 그게 저자가 강조하는 몸에 대한 대강의 요지입니다.

 

  다만, 저자가 따로 강조하거나 언급하진 않았지만 제 나름으로 느낀 점을 첨언하자면, 저자가 말하는 몸이 이끄는 바를 정신으로 억누르지 말라는 말이 내가 공부하거나 운동하다가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은 거 배 터질 때까지 실컷 먹고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몸이 이끄는 바를 따르라는 건 순간의 욕망에 충실하라는 말만으로 좁혀서 생각할 정도의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몸은 관계하는 물질이기 때문에 그 관계를 최대한 풍부하고 예민하게 느낄 수 있으려면 악기를 관리하는 것과 같은 꾸준함과 섬세함이 필요합니다. 내가 정말 맛에 미쳐서 몸을 이용해 맛이란 관계를 한껏 느끼고 싶다면 자신의 몸이 가진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술, 담배, 맵고 짠 음식 등을 철저히 거부하는 절제와 금욕이 필요하고, 연극에 미쳐서 자신의 몸을 연극과 가장 잘 관계하는 몸으로 만들고 싶다면 적어도 요가 같은 거라도 꾸준히 하는 정성이 필요한 것처럼, 몸이 원하는 걸 따라간다는 건 때로 지금 당장 몸이 원하는 걸 누를 줄 아는 강한 정신력을 동원하는 역설을 허용하는 일입니다. 이 때 정신은 진정 몸이 원하는 걸 뒷받침하는 도구로서 순기능을 하는 셈이 되는 것이죠. 정신으로 몸을 억누르지 말라는 말은 맛이나 춤, 글에 미쳤을 때 그 열정을 내 경제력에 대한 불안, 나를 떠날지도 모르는 관계들에 대한 상실감 등 오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규정하는 짓거리 때문에 버리지 말라는 말이지, 꼴리면 창녀를 사도되고 밤에 야식을 미친 듯이 먹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고독입니다. 고독, 홀로 있음. 이 말이 저자가 가장 싫어하는 말일 것임을 우리는 이미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관계를 통해 본질을 만들어가야 하는 존재들이 그 관계가 싫다고 이미 만들어놓은 관계마저 무너뜨리거나 혹은 거기에 안주해버리는 것이니까요. 새로운 관계가 우리를 완전히 죽여 놓을 수도,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래서 그게 무서워 고독이란 방어막을 쳐놓는 것이 안전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를 통해 자신을 재정의해 나가는 것이 삶의 본질이고, 이를 거부하는 삶은 제대로 된 삶이라 부를 수 없는,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닌 상태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고독 속에서 내 안에 빠져드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자가 내내 강조하는 대로 우리는 ‘타자가 매개되지 않은 자기의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뭐 독일 관념론의 결론이라고 하네요.) 관계 맺을 권리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개인적인 상처의 경험뿐만 아니라 사회도 우리가 삶의 본질에 맞게 사는 것을 방해합니다. 사회의 생산성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통해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저자는 다른 말로 ‘몰입’이라고 부릅니다(어떤 관계로 자신을 재구성할 정도면 그 관계는 몰입이란 단어로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강도를 가진다고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는 모두가 몰입하고 싶은 것에 거침없이 몰입하게 됐을 때의 불규칙성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각 조직의 구성원들이 사진을 좋아하건 여행을 좋아하건 섹스를 좋아하건 모든 조직은 자기 구성원들이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자리에서 모두가 평균치 이상의 성과를 ‘무조건’ 내는 식의 규칙성, 예측가능성을 보여줄 것을 요구합니다(그게 근대사회의 특징이기도 하죠. 관리의 용이성의 추구.). 그러나 각자가 원하는 대로 여행에 꽂혀 휙 떠나버리고, 출사를 나가버리고, 내키는 대로 모텔에서 하루를 보내기 시작하면 조직이 추구하는 예측가능성은 완전히 무너져버리기 때문에 모든 조직은 우리에게 ‘사’와 ‘공’의 구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사’와 ‘공’의 구분이 우리는 고독하게 만드는 주범임을, 그 지침에 따르는 게 내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생존전략일 수는 있어도 정말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옳은 원칙이자 도덕이 될 수 없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대안을 택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지, 그런 조직의 수작질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내면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게 저자가 고독이란 주제를 통해 강조하는 점입니다. 결국 고독과 싸운다는 건 단순히 잠깐 우울한 기분을 툭툭 털어 전환시키는 간단한 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상처와 싸워 새로운 시도를 행하는 용기를 냄과 동시에 그 시도를 방해하는 외부의 압력 또한 물리쳐야 하는, 내 안과 밖을 모두 적으로 돌리는 엄청난 과제가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더럽게 힘든 일을 시도하는 과정을 진정한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겠죠.

 

  결론적으로, 이 책에서 다루는 세 가지 주제를 종합해보면 이렇습니다. 고독은 우리 삶의 가능성의 실현을 방해하는 가장 나쁜 상태이기에, 관계를 통해 다른 대상들에 몰입하는 과정을 강한 의지로 계속 관철시켜 나가야 하고, 그 몰입의 능력을 높이기 위해선 우리가 가진 몸을 살피고 이를 항상 예민하게 열어놓아야 하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우리를 진정한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최고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것. 그 이유는 나와 똑같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그 가능성을 실현할 권리를 가진 귀중한 누군가가(현실사회에서 모두가 똑같이 귀한 대접을 받진 않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또 서로가 서로를 똑같이 귀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대우해주는 관계 속에서만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그처럼 무한히 귀한 존재라고 인정해 줄 때, 우리는 마침내 가장 신뢰도가 높은 공인을 받은 주인공으로 재탄생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러한 지극한 행복감을 느끼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관계 맺기를 시도하며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가다듬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남은 두 권을 책을 더 읽어보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만, 앞으로도 반복될 이 저자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1권에서 잡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존재만으로 개별적이고 특별하지만, 그 특별함은 관계를 통해서 유지되며 새롭게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본질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다. 그게 주체가 되는 과정이며,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타자가 매개되지 않는 자기의식’은 없기 때문에, 주체가 되는 과정은 곧 ‘주체적인 관계 맺기’의 과정이고, 어떤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돌아갈지언정 그 본질적인 과제를 결코 놓아서는 안 된다. 이게 저자의 핵심 주장인 듯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말은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 실존주의의 명제랑 통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짐작을 해봤다는 점도 말해두고 싶군요. 제 철학에 대한 이해가 짧아 뭐라 가치판단을 내리기는 뭐하지만, 어쨌든 저자의 주장이 제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셨나요? 뭐가 됐든, 저자의 선명성이 우리에게 더 복잡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를 어떤 행동으로 풀어갈지는 우리들의 몫이겠지요. 아무리 구체적이고 친절하게 다가온다고 해도 철학은 역시 철학인가 봅니다. 이 잔인해서 매력적인 책을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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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전집 2 - 산문 김수영 전집 2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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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산문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대학교 1학년 때 김규항 씨의 '너에게 수영을 권한다'라는 칼럼을 상당히 인상 깊게 읽었고, 그 평가의 진위를 가려봐야겠다는 결정을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한참을 있다 군 시절 휴가 때 책을 사고, 또 한참 뒤인 지금에야 그의 산문을 완독해보았습니다. 그를 만나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네요.

 

 그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글을 읽었습니다만, 그를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는 친구가 되기엔 너무 단호하고, 외면하기엔 측은하며, 사랑할까 하면 신경질을 부리며 차려놓은 술상을 엎듯 자신이 가진 부끄러움을 낱낱이 고해버립니다. 그러나 그 고약한 성미가 지겨워 책을 덮을라치면 어느 샌가 그는 남루하지만 눈빛 형형한 선비로 변해 '사랑이 없는 정치가 만드는 근대화는 그 완성이 즉 자멸(로터리의 꽃의 노이로제)'이며 그 속에서 시인은 '촌초의 배반자(시인의 정신은 미지)'가 되어 끝없는 새로움으로 기성을 탈피하여 '언어를 통해 자유를 읊고, 또 자유를 살(생활현실과 시)'아서 '불필요한 어리석은 사랑의 일(무허가 이발소)'을 행해야 한다는 무지막지하게 치열하고, 치열해서 멋진, 너무나 근본적이기에 너무나 전위적인 사랑을 설파해 버립니다. 하지만 그는 사랑할 자유를 위해 자신을 세상의 적으로 돌리는 전사 연 하다가도, 동시에 술을 먹고 아내를 패고 창녀를 사다가 욕정을 풀고 고리대금을 해 생활을 꾸리는 비겁한 찌질이로 자신을 발가벗겨 버리죠. 그래서 저는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를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는 제 스승도, 친구도, 남남도, 원수도 될 수 없는, 읽을 때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촌초의 배반자'입니다. 그는 자신을 어떤 고정된 모습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그것이 그가 규정한 시인의 정의에 가장 충실한 글을 쓰려고 했던 결과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관계를 고정시킬만한 이름들을(스승, 친구, 아랫것 등) 때만 되면 뒤집어버리는 그의 입체적인 자기 폭로 속에서 반전 있는 한 남자를 봅니다. 멋진가 하면 찌질하고, 찌질한가 하면 멋진 그의 반전 매력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모든 것을 통과하는 일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모든 글이 다 '싸움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를 '참여파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독재에 시로써 저항한 사람' 정도로 단순화시켜 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싸움은 그렇게 간단한 정리로 넘어갈 수 있는 1차원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역시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그의 싸움의 대상은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여하한 행동(p.50 요즈음 느끼는 일)' 모두를 용인하는 것이었고, 그 행동은 '자기를 죽이고 타자가 되는 사랑의 작업이며 자세(p.201 로터리의 꽃의 노이로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원래가 최고의 상상인 언어(p.378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인 시를 통해서, '단순한 전달과 노예의 언어(p.283 히프레스 문학론)'로 굴러 떨어진 언어의 주권을 회복시키는 작업이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p.220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작업이기 때문에, 이를 막는 모든 것들과 싸우는 시인은 그 적이 특정 정당이나 단체, 인물이 아닌 '우리들 대 이여, 혹은 나 대 전 세상(p.241 시의 뉴 프런티어)'이 되어 '선천적인 혁명가(p.239 시의 뉴 프런티어)'가 되는 것이지요. 타자를 상상하고 사랑을 시도하는 모든 행위가 '완벽하게' 용인되기 전까지 시인은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분명한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언론 자유를 막는 정치에 화를 내고, <이만하면> 언론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무지한 여류 문인에게 화를 내고,

 

'...창작의 자유는 백 퍼센트의 언론자유가 없이는 도저히 되지 않는다. 창작에 있어서는 1퍼센트가 결한 언론자유는 언론자유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다.p.178 창작자유의 조건'

 

기성을 탈피해서 사랑의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지 않고 사랑하는 대상도 없이 사랑하는 '척'만 하는(진정 한국 현실을 바라볼 줄 아는 사상에 입각하지 않고 어설픈 서구의 시 style만 잘난 척 하며 따라하는) 후진 문단에 화를 내고, 마찬가지로 사랑할 대상과 진심만 있으면 문제가 모두 해결될 거라고 믿는 후진 참여시에 화를 내고, 화를 내다가도 애놈과 여편네가 있는 가정에 묶여 안락을 느끼는 자기에게 화를 내고, 화를 내기만 하고 하는 게 없는 자기에게 화를 내고, 화를 내고 화를 내고 화를 내다 술병이 나버린 자기에게 다시 화를 냅니다. 이렇게 전 세상에 대고(심지어 자기 자신에게까지도) 누구보다 꾸준히, 격하게 화를 낸 결과가 바로 그의 글이 된 것이죠. 그래서 그의 글은 화병이 나 소리치다 콜록거려 나온 가래 같은 질척한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는 '복사 씨와 살구 씨가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을 꿈꾼 시인이었고, 그것을 쫄지 않고 말하고 행하기 위해선 '김일성 만세'도 거리낌 없이 외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요구한 (당시로선)정치적 급진주의자, 시인이라는 자의식조차 버리고 타인에게 몰입하기 위해 모든 기정사실을 적으로 돌릴 것을 요구한 전위예술의 옹호자였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밝혔지만, 그는 너무나 근본적이었기 때문에 가장 전위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런 걸 지키며 살려 했던 이 남자가 6.25와 북진 통일론과 박정희 정권 틈바구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가난 속에서 세상 살기 얼마나 힘들었을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힘든 세상살이가 결국 그의 찌질함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가 놀라는 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찌질함마저도 싸움의 도구로 만들어 글을 써냈다는 점입니다. '판문점의 감상' 시작노트(p.461) 같은 걸 통해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 남자는 거창하고 아름다운 명분 밑에 그와 반대되게 살고 있는 하찮은 자신의 모습을 일부러 대비해 놓습니다. 판문점이란 이름 아래에 돈을 떼먹은 한 여자를 '년'이라고 부르는 자기의 모습을(p.461 판문점의 감상), 순수문학이란 이름 아래에 고리대금업을 하는 자기의 모습을(p.102 금성라디오), 지식인의 이름 아래에 날림 번역으로 돈을 받아먹는 자기의 모습을(p.88 모기와 개미) 일부러 동시에 붙여서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에 대한 체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이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재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이상의 실현은 나와 내 주변이라는, 가장 아래서부터 변화시켜야 하는 작업이었기에(가만히 생각해 보니, 역시 원수는 내 안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또 든다. 우리 집 안에 있고 내 안에 있다. 우리 집 안에 있고 내 안에 있는 적만 해도 너무나 힘에 겨웁다. p.130 삼동 유감) 이 남자는 그 폭로를 통해서 먼저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이 변화를 위해서 받아든 과제가 무엇인지를 검토하고, 이를 잊지 않기 위한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공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건 쉬운 듯하지만,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뜨거움입니다. 자신의 과오를 과오로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이를 최선을 다해 고치려는 각오가 없이는 감히 써낼 수 없는 글들이 이 남자의 산문집 안에는 십몇 년에 걸쳐 꾸준히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간은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그러나 건강한 개인도 그렇고 건강한 사회도 그렇고 적어도 자기의 죄에 대해서 몸부림은 쳐야 한다. 몸부림을 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민감하고 세차고 진지하게 몸부림을 쳐야 하는 것이 지식인이다. p.185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찌질함이 치열함을 위한 재료가 되는, 그리고 그것이 한 인간의 인생이 되는 반전의 매력-그것이 이 남자의 매력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읽은 책 중에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선 지식인을 이렇게 규정하더군요. '자신과 자신이 연대한 계급 안에서 나타나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폭로하는 자'라구요. 김수영이 죽은 게 68년이고, 사르트르가 그 책을 엮은 계기가 된 도쿄-교토 강의가 있었던 게 65년이니, 김수영이 사르트르의 주장을 접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피지배계급과의 철저한 연대'를 주장하는 그 책의 정의가 김수영한테 100% 정확히 들어맞지도 않을테구요. 그렇지만 사르트르의 주장을 '누구보다 말대꾸를 잘하고, 앞장서서 뉘우치는 자'라는 간단한 말로 바꿔 바라보면, 김수영이란 사람은 '시를 행할 수 있는 사람(p.184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이 되고자 했고, 이를 행하지 못하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역설적으로 그런 찌질한 자신을 만들어낸 60년대의 한계를 고발했습니다.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그는 '시대의 한계를 자신의 한계로' 만드는 데 있어 누구보다 치열했던 사람이었고, '눈앞에 주어진 모든 과제를 근본적으로 만드는' 데 있어 아직까지 이 남자만큼 성공한 사람을 저는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김수영은 지식인이란 정의가 있기 이전부터, 지식인을 자신의 인생으로 살아낸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마침내 이 남자를 부를 말을 찾아낸 것 같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지식인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그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고독과 절망을, 그리고 고독이나 절망조차 용납하지 않는 생활(p.31 무제) 속에서 속물도 속물 아닐 수도 없었던 이 남자의 남루함을, 저는 감히 '간지난다'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는 진정, 조선반도의 후줄근한 간지남이었습니다. 그의 글을 오래도록 곁에 두고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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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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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제목을 봅시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입니다. 왜 지지나 반성이 아닌 변명일까요. 변명이란 단어는 지지와는 다른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반박에 대한 부분적인 인정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즉 지식인은 잘못을 저질러 욕을 먹는 존재이고, 이 잘못을 완벽히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완벽히 반성하고 행동을 고칠 수는 없는 이유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 이 책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지식인은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를 구차하게 설명해야만 했을까요? 이를 위해 책이 나온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 책은 원래 65년에 일본 도쿄와 교토에서 세 차례에 걸쳐 했던 강연의 대본입니다. 65년이라는 당시의 시간을 생각해보죠. 45년에 전쟁이 끝나고 사회는 공황 상태에서 벗어나 한창 경제의 황금기를 달리고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는 미·소의 제국주의 정책을 바탕으로 냉전 상태를 유지하고, 군비 경쟁은 한창 가속화되고 있었으며, 호황기의 혜택을 입은 중산층 자녀들이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학생운동에 투신하기 시작할 때이기도 합니다(프랑스는 68세대, 일본은 전공투 세대를 들 수 있겠네요.). 물론 이들이 따르는 사상적 리더들 또한 출현하고 있을 때이죠. 이들에 대해 어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었을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배부르고 등 따시니까 이상한 데로 눈이 돌아가는구나!’ 등의 욕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즉 전쟁 이후 가치관의 파괴 속에서 새로운 믿을만한 구석, 기반시설의 파괴 속에서 생존을 위해 의지할만한 구석을 간절하게 찾아다니던 때를 지나 경제가 호황기를 맞아 다시 사회가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이 그 폐허 속에서는 뭣들 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등 따시니까 여기저기 말참견을 하고 다니는 얄미운 짓을 하냐! 라는 게 당시 학생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이 따르던 사상적 리더들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이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 가능합니다. '자기 할 일은 안 하면서 남 일에만 참견하는 귀찮은 존재', 이게 당시 사람들이 지식인에 대해 내리는 전반적인 평가였으며,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상황과 이를 만든 맥락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할 때 반드시 나오는 관용 어구에 가까운 문구들이 있습니다. ‘사회의 부정적인 면만을 보며’ ‘언제나 갈등을 조장하여’ ‘대중을 선동하려 한다.’는 등등의 이야기들이죠. 그러나 사르트르는 오히려 지식인의 지위를 이보다 더욱 낮게 책정함으로써 반문합니다. ‘과연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선동할만한 주제나 되는 사람들인가?’ 선동은 사실 주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더 자주 일어납니다. 자신들이 다룰 수 있는 수단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지요(주로 언론). 그렇지만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정치적 힘도, 경제적 힘도, 문화적 주도권(언론 등을 다뤄 의제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호소하는 대중에 의해서도 의심받고 거부당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지식인을 기본적으로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로 볼 때, 그들 대다수는 그 기술을 필요로 하는 거대 기업이나 정부 등에 ‘고용된’ 자이지 거대 기업을 소유했거나 정부의 요직에 앉은 자들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을 움직일만한 존경을 받는 자인가? 기본적으로 현장에서 일하지 않은 채로 원칙만을 강조하는, 그러나 그 말을 무시해도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사람을 대중들이 존경하기보단 무시하는 것이 더욱 손쉬운 일일 것입니다. 정치인은 전후 사회를 정책으로 복구하고, 경제인은 기업으로 경기를 부양시키는데, 당신들은 그런 사회를 오로지 부정만 하며 아무것도 안 한 채 참견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반감이 분명히 대중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 흔히 나오는 말이 있죠. ‘교수면 연구나 할 것이지...’ 등등의 이야기 말입니다. 결국 대중들조차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의 일을 통해 얻은 명성을 ‘남용하여’ 인간이라고 하는 막연하고 독단적인 개념을 내세워 사회 및 기존 권력과 쓸데없는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들로 인식하고, 이들이 일종의 전문지식을 가진 기술자의 역할만을 하기를 바라는 상황에서, 소위 지식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왜 끊임없이 등장하며, 그렇게밖에 행동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사르트르는 바로 그 지식인의 ‘어쩔 수 없음’이 지식인이 존재하는 기반 자체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임을, 그래서 우리는 지식인을 욕하기 전에 진정 지식인이란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존재인 것인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식인이란 존재, 좀 더 엄밀히 말해 이들을 포함하는 집단인 전문지식을 담당하는 기술자들(교수, 의사, 법률가 등등)이 나타나기 전까지 지식의 전수와 연구는 누가 담당하고 있었을까요? 사르트르에 의하면 서구의 경우 그 최초의 담당자는 교회의 성직자였습니다. 중세시절까지만 해도 독서란 성경과 그 관련서적을 읽는 일이었고, 문맹이 대부분인 사회에서 이는 당연히 성직자가 전담하는 일이었겠죠. 하지만 교회는 단순한 연구 집단이라기보단 경제적인 힘(영토와 재산)과 정치적 힘(신의 휴전)까지 모두 가진 ‘지배계급’이었으며, 자신들을 수호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직접 만들어내고 직접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이익을 사회에서 최우선 순위로 둘 수 있는 지배계급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성경을 인용해서 신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지금은 전문지식 기술자들이 대신하고 있는 ‘지식을 이용한 이데올로기의 개발과 전파’ 또한 직접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생산성의 발달로 인한 분업화가 일어나기 전 사회에선 지배계급이 전문 지식 기술자가 담당하는 역할을 아직 자신들 안에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사회가 생산성의 발달로 인한 균열을 겪게 됩니다. 경제 활동의 증가로 상인 계급이 신흥세력으로 부상하면서 ‘신에 대한 지식’보다 ‘이익을 위한, 인간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이 상인 계급 내부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계약이 많아지니 법률이 자세해지고, 회계와 측량이 많아지니 수학이 발전하는 등등의 과정을 통해 상인 계급, 다시 말해 부르주아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 전문지식 기술자들의 원형이 되는 사람들을 자신의 계급 안에서 생산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만의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각 분야를 발달시킴으로써 신의 이름으로 설명해내던 기존 이데올로기를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파괴하는 일을 담당하게(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죠.) 되죠. 그리고 마침내 이들 집단 사이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상인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교회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정립하는 것이라는 걸 자각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게 우리가 아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달랑베르 등의 계몽 사상가들이며, 이들의 본래 직업이 법률가, 문필가, 수학자였다는 점, 즉 자신들의 전문지식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출발해서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을 자연스레 자각했다는 점에서 이들을 현대 지식인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신의 이름에 구속받지 않기 위해 휴머니즘을 내세웠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기 위해 평등을 내세웠고, 경제활동의 제약을 받지 않기 위해 자유를 내세웠으며,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기계론적인 세계관, 즉 세상은 신과도, 도덕과도 상관없는 법칙이 지배하며 이를 연구하기 위해선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방법을 이용해 낸 결론인 자유, 평등의 이데올로기가 옳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죠. 말하자면 자신들이 전문 분야에서 이용하던 연구방법을 ‘분야 바깥’으로 가지고 가 활용함으로써(지금 지식인들이 욕을 먹는 바로 그 짓) 자신들이 발견해낸 사실들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묶어 설명하기를 시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마침내 교회는 지배계급의 자리를 부르주아들에게 내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과연 이들이 말하는 자유, 평등, 휴머니즘의 보편적 가치가 정말 그 ‘보편’이라는 말 그대로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인가?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 가치는 모든 인간을 위한 가치가 아니라 상인 계급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가치라는 것을요. 그렇지만 계몽 사상가들이 그것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이유는 ‘상인계급의 이익’이 곧 ‘모두의 이익’과 연결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분 때문에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표가 부르주아였고, 이들이 이익을 위해 견지한 합리주의 정신이 곧 인간 모두에게 이로운 정신이라는 믿음,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하게 하는 것이 곧 인간의 진보를 의미한다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기에 그들은 상인들을 위한 자유, 상인들을 위한 평등과 휴머니즘을 만드는 것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보죠. 과연 상인 계급이 지배계급이 된 이후, 계몽 사상가들이 수행했던 그 역할을 지금의 지식인들이 똑같이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의 전문지식 기술자들은 당시의 그들처럼 완벽히 부르주아 안에 속해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 말입니다. 두 가지 면에서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앞에서도 밝혔지만 지금의 전문지식 기술자들은 지배계급 안에 속해있는 집단이 아닙니다. 그들에 의해서 고용된 집단이지요.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출현하는 지식인들이 당시의 계몽 사상가들처럼 상인계급의 이익이 자신들의 이익이며, 또 그들을 수호하는 것이 ‘인간 모두를 위해서’ 이롭고 타당한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자신들이 발견해내는 새로운 지식이나 법칙이 상인계급의 이익과 결코 거스르지 않는 유기적인 결합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나타난 부르주아들(한 마디로 거대 기업이나 정치권력들)과 불화하며, 결코 그들과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하층계급과도 밀접하게 관계 맺을 수 없는 애매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요.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먼저 왜 그들이 지배계급에 편입되지 않았나를 보기 위해선 그들이 가진 기본적인 속성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실천한다는 것은 지금 있는 것을 재료로 아직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이고, 이는 나에게 없지만 있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만들기 위해 지금 내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이것들 중 버릴 것과 쓸 만한 것이 무엇인지, 쓸 만한 것들을 활용하기 위해서 어떤 수단을 사용할 것인지 등등을 검토한 후, 이를 실제로 행하는 목표설정-검토-실행의 과정을 뜻합니다. 한 인간의 경우에는 이것이 통합적으로 진행되지만, 조직적 실천의 영역으로 갔을 때 현 사회에서 이는 분업으로 바뀌게 되는데, 목표 설정은 지배계급이, 구체적 실행은 노동계급이, ‘검토’의 영역은 전문지식 기술자들이 맡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회에서 제정된 법을 입법예고하기 전에 공청회에 불려나가는 건 그 분야 전문가들과 교수들이고, 대기업에서 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시장동향을 참고하는 곳은 해당 기업의 경제 연구소인 것처럼, 실용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은 그 기능이 ‘비판적 검토’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들이 연마한 ‘전문기술’이란 것 자체가 끊임없이 회의하며, 증명하고, 그럼에도 남는 의문점을 찾아냄으로써 발전해나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각자가 독립된 개인일 때 더욱 잘 발현되며, 자신들이 원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설정하고 이를 위해 남들을 부릴 수 있는 능력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배계급이란 대개가 ‘자신의 목표를 사회적 목표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를 뜻합니다. 소위 지식 기술자라 불리는 사람이 자신들이 맡은 역할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지배계급으로 편입되지 않고 그들의 목표를 대신 검토해주는 피고용자로 남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은 지배계급이 된 후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지식 기술자들을 관리하고 길러내기 시작합니다. 즉 지식 기술자는 현 사회에서 더 이상 자연발생적으로 나오지 않고 지배계급에 의해서 양육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죠. 생각해봅시다. 전문가란 반드시 교육을 통해서 길러지게 되어있습니다. 근대 초창기에야 자기가 독학으로 과학 법칙을 발견해내기도 하고 그렇게 전문가가 되기도 했겠지만, 이제 그런 일은 꿈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럴만한 것들이 대부분 발견되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기관의 인증이 없는 사람은 사회적 신뢰의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입니다. 그랬을 때, 법률 전문가가 되고 싶으면 로스쿨을 가야하고, 의사가 되고 싶으면 메디컬 스쿨을 가야하고, 경영관리 전문가가 되고 싶으면 MBA를 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어마어마한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사회구성원의 대부분이 될 수 있을까요? 결국 최소한 중산층 이상은 되는 사람들만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아서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지배계급에서 전문가가 배출되는 출신 성분을 제약하고 있다-자신들에게 반감을 가지지 않는 정도의 계급으로-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죠. 물론 장학금 제도가 있긴 하지만, 오히려 이는 그만큼 지배계급이 전문가의 출신 성분 비율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방증에 다름 아닙니다. 사회적 갈등을 미봉할 수는 있지만 기존 전문가 그룹에 편입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딱 그 정도의 비율만을 하층계급에서 선발해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전문가라는 건 이제 지배계급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나기도, 없어지기도 합니다. 기업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빅 데이터에 대한 전문가, 여론 조사 전문가 등은 살아남고 대학에 과가 신설되거나 정원이 늘어나지만, 그렇지 못한 인문학 전문가들은 밥벌이를 못하거나 과가 폐과되는 등등의 일들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지요. 이처럼 이제 지배계급은 전문가에 대한 사회적 수요를 결정하고, 출신 성분을 조절하며, 그들에 대한 처우의 정도까지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지식 기술자가 과거 상인 계급과의 일체 상태에서 떨어져 나와 그들의 하수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 이들 지식 기술자들이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는 일을 수행하게끔 하는 작업이 또한 교육을 통해 벌어집니다. 우리는 초등교육 때부터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배우고 이것이 대한민국의 체제라고 배우지만, 사실상 ‘자신의 의견을 권력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경제적 기회와 행복추구권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배분되고 각자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그 목적이 얼마나 기만당하고 있는지를 국가보안법과 쌍용차 사태와 대기업의 독과점 등을 통해서 충분히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현 체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20몇 년의 교육과정을 통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전문가가 된 집단들은 바로 그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에 합헌 판결을 내리는 판사가 되고, 유신헌법을 초안 작성한 김기춘이 되고, 기업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조를 깨는 노무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특정 계급의 이익’이 곧 ‘사회구성원 전체의 이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수호하지만, 자신들의 계급도 아닌 이데올로기, 그리고 자신들이 직접 만들지도 않은 이데올로기를 지킨다는 점에서 계몽 사상가들과 구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것이 ‘보편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는 환상만이 같을 뿐이죠.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은, 바로 이러한 지식 기술자 집단의 돌연변이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상인, 즉 부르주아들이 지배계급이 되고 난 후 나타난 ‘그들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아닌 상황들을 알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이 늘어날수록 기업은 인건비를 아낄 수 있고, FTA에서 농민들이 희생된 대신 자동차 기업은 이익을 볼 수 있습니다. 부르주아를 위해 만든 사상이 자동적으로 모두를 위한 사상으로 발전하지는 않은 것이지요. 이 때 전문지식을 가진 기술자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여전히 그들의 이익을 지킴으로써 보편적 가치는 자동적으로 성취된다고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지금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게 함으로써 간신히 이뤄져가는 진행 중인 과정임을 직시할 것인가? 즉 보편적 가치가 이미 잘 작동하고 있다고 믿고 모두가 획일적인 방식으로 현 사회를 유지해야 한다고 믿을 것인가, 아니면 보편적 가치는 고통 받는 사람들이 각자의 상황에 맞는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특수한 방법으로 성취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할 것인가를 말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의 지식인들은 전문지식 기술자 집단 중에서, 자신들의 지식으로 수행하는 일이 결코 ‘모두를 위한 목표’를 위한 것이 아님을 자각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과거 부르주아의 후손으로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즉 자유, 평등, 휴머니즘 등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고의 가치로 받아들이며 자라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칙의 옳음을 ‘지나치게 확신’했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 이념의 반증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육을 통해 자유, 평등을 배우지만 바로 경제적 혜택을 받은 자신들‘만’을 선발한 그 교육 자체가 자유, 평등의 허울을 증명하는 것임을, 그리고 이를 통해 자라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의식에 대한 반증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그들이 겪는 첫 번째 모순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의 전문 지식을 통해서 나오는 모순입니다. 이는 자신의 연구 정신과 그에 반하는 금기(교육을 통해 길러진) 사이의 모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도 밝혔지만, 이제 우리는 혈통에 대항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와 평등에 대한 개념이 사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는 데에 활용되고 있으며, 진정한 의미로 다양한 인간을 포함하는 평등이 아니라 부르주아의 이익을 위해 ‘모든 인간은 부르주아와 같고, 같아야 한다.’는 동일성의 이데올로기로 점차 변질되었고, 그 역사적 결과로 제국주의와, 식민지와,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기업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가 희생되는 현실들을 맞닥뜨리게 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전문 지식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보편성의 정신을 견지하고 있으며, 금기 없는 자유로운 정신을 추구하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무리 법이 현실에서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법의 기본 정신은 ‘성역 없는 처벌과 모두를 위한 공익의 장려’이며, 아무리 제약회사가 이를 막고 있다 하더라도 의료의 기본 정신은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정신입니다. 또한 학자는 ‘브루노 정신’에 입각해서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부당한 외압으로 인해 수정하지 않을 권리와 의무, 지적소수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의문이 가는 점을 성역 없이 질문해야만 하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연구가 곧 자신의 사상과 일치하던 계몽 사상가들이 후세에 남겨준 정신적 유산인 것이지요. 만약에 한 전문 지식 기술자가 자신이 배운 연구 정신을 충실히 믿는다면, 그는 자연스레 지금의 이데올로기가 가지고 있는 허울에 대해서 질문하고 탐구하게 됩니다. 먼저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부터 왜 법은? 왜 의료 서비스는? 왜 노동권은? 등등의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고, 자신의 직업 정신에 입각해서 보편적 기술이 보편적으로 쓰일 방도를(예를 들면 효과적인 에이즈 약이 제약회사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아프리카에 무료로 배포될 방도라든지) 검토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배계급은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의문을 단지 검토를 위한 도구인 이들 기술자들이 가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경제적 금기(연구비 지원)와 문화적 압력(빨갱이, 매국노, 배신자 등등의 딱지), 국가와 사유제, 시장경쟁 등에 대한 절대적 옹호를 가르치는 교육 및 학문적 주류의 입장 등으로 이를 막으려듭니다. 이 때 지식 기술자는 두 번째 고민에 빠지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배운 이데올로기대로라면 바로 그 이데올로기의 현실과 실현 가능성 자체를 전문영역에서 자유롭게 연구해야 하나, 이를 막는 지배계급에 의해 통제 하의 연구를 해야 하는, 연구 정신에 충실하면 연구를 못하고, 이를 어느 정도 포기해야 연구가 가능한 그 어느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지배계급 또한 고민에 빠지긴 마찬가지입니다. 검토하는 자의 기본 정신은 회의하며 질문하고 이를 확인하는 것이기에 이런 능력 자체를 막으면 그 기능은 저하됩니다. 그러나 그 기능이 지나치게 활성화되면 이는 자신이 성취 여부를 검토하고 있는 그 목표 자체로까지(지배계급의 이익) 범위를 넓히게 되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다른 것은 다 회의하면서도 지배계급만은 회의하지 않을 수 있는 적당히 똑똑한 자들을 원하고, 이들을 길러내기 위한 적당한 자유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렇게 지식 기술자의 세 번째 모순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결코 지배계급은 지식 기술자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도, 온전히 자신들 세계에 편입시킬 수도 없는 ‘필요악’으로 경계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지배계급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직접적으로 생산을 담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배계급의 목표가 실현되는 것을 도와주기 때문에 노동계급에서도 그들은 앞잡이로 경계 받는 존재가 됩니다. 그들이 가진 기술은 모두를 위해서 봉사해야 하는 기술이나, 아무도 그가 진지하게 이런 봉사를 수행하기를 원하지는 않는 모순. 이처럼 자신이 가진 기술이 본래 수행해야 할 보편적 가치의 실현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지식 기술자는 세 겹의 모순 속에서 괴로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출신 성분이 가진 모순, 연구정신이 불러오는 모순, 대변할 집단이 없는 모순 말이지요. 그러나 이는 지식 기술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모순이 그에게 투영된 결과이며, 오히려 이런 모순 속에서 괴로워하는 과정에서 지식 기술자는 지식인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모순을 자각하고 지식 기술자가 끝내 자신이 믿는 자유, 평등의 가치와 연구정신의 가치를 자신의 존재와 조화시켜보겠다고 결심했을 때, 이는 결국 ‘자신과 상관없어 보이는 일’에 참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보편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결심은 필연적으로 ‘하층계급과의 철저한 연대’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봅시다. 보편의 가치가 진정으로 실현되는지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사회를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와 현실 사회 사이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기존 가치관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결코 지금, 여기의 사회를 벗어나서 미래의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고 믿는 순간, 그 사람은 헛짓거리를 하게 되는 것이죠. 미래의 시선으로 거리를 둘 수 없고, 자신의 계급 안에 머무른 채로 거리를 둘 수 없다면, 유일한 방법은 “그 존재 자체가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폭로하고 있는 사람들 곁에 자기 자신을 두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를 변혁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근본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백혈병에 걸려 죽어간 삼성 반도체 노동자 분들 앞에서 삼성전자가 국익에 기여한다는 이데올로기는 허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시위를 하다가 전경의 방패에 찍혀 돌아가신 농민 분에게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은 허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분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사회가 되기 위해선 기존 이데올로기가 변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어서, 그 분들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은 완벽하진 않지만 자신이 믿는 보편의 가치를 실현하는 존재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좋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그들의 요구를 옹호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직업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일이 되겠지요. 교수가 논문을 쓰지 않고 거리에 나오거나 정견을 SNS에 밝히고, 의사가 병원에 있지 않고 단식 농성을 하는 사람들의 영양 상태를 체크하는 등의 일을 한다면 누군가에게 그건 한 마디로 ‘나대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지식인은 자신들이 가진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는 역설을 감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지식인이 되어갈수록 점차 자신의 계급을 배반하며 더욱 근본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되는 것이고, 그 기형적인 행태는 사실상 이 기형적인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고 이 책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2. 지식인의 역할

 

문제는 이 ‘나댄다’는 평가가 지배계급만의 평가가 아닌, 그 도움을 받는 하층계급에서도 일관되게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는 것인데요. 앞서 밝혔다시피 지식 기술자는 두 계급 중 어디에도 속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밝혀내는 일은 언제나 ‘맨 밑바닥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시선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기에 같은 진영 내의 정치권력 하고도(예를 들면, 대기업 노조와 불화하는 비정규직의 편에 선다든지) 불화를 빚는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지식인은 두 가지 얘기를 동시에 들을 수 있겠죠. 권력으로부터는 ‘사람이 왜 이렇게 비현실적이야’라는 얘기, 그리고 정작 자신이 연대하고자 하는 당사자들로부터는 ‘당신이 우리들에 대해서 뭘 안다고 나대십니까. 언제 장마 때 집에 비 한 번 새본 적이라도 있어요?’라는 유의 이야기들 말이죠. 이런 상황에 좌절해서 때로 지식인은 그들을 따라 자신을 지나치게 혐오하거나, 자신이 정말 똑같이 고통 받고 혜택 받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이해하는 척을 하거나, 자기들끼리 누가 더 ‘근본적’이고 누가 덜 ‘근본적’인지를 다투는 모습을 보이거나, 이거 저거 다 포기하고 책에서 말하는 ‘사이비 지식인’의 행태를 취하기도 합니다. 근본적인 시각을 인정하는 척 하면서 현실을 들먹여 고통 받는 사람들의 양보를 주장하는 것 말이지요(예를 들어 나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고통을 인정하고 그들의 고통이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지금 야당의 힘이 약해 아직 그럴 준비가 안 되어있다. 특별법은 양보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자는 식의 이야기들. 이는 사실 70년대에 나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나 한국의 민도는 아직 그걸 수용하기엔 너무 낮다. 민도가 높아지기까지 우리는 박정희의 한국식 민주주의를 현실적 모델로 채택해야 한다는 식의 헛소리와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같은 편인 척 하면서 사실 더욱 효과적으로 지배계급의 이익을 수호하는 것이 지식인을 포기한 사이비 지식인의 역할인 것이지요.). 그러나 지식인은 이런 비난에 겁먹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혜택 받지 않고는 지식 기술자가 될 만한 교육을 받을 수도 없고, 그 혜택을 혜택이었다고 인지하는 순간부터가 지식인이 되는 과정인 현 사회에서 지식인의 계급적 한계로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입을 닥치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밖에 될 수가 없습니다. 하층계급에서 그들을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지식 기술자가 나오는 게 아직 꿈인 상태라면, 이런 지식인의 계급적 한계는 차라리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게 해주는 데에 최선의 상태일 수 있습니다. 모두에게 욕을 먹는 바로 그 자리 때문에 지식인은 자신의 진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겁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 자신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식인은 그들에게 친근함을 느끼며 같은 편이라는 ‘주관’을 가집니다. 그러나 자신의 계급적 한계와 근본적 시각 때문에 그들을 낯설게 느끼는 ‘객관’ 또한 갖게 되지요. 즉 그들의 이익을 위해 방법을 모색하는 주관과, 그들이 말하는 이익이(많은 경우 그들을 지원하는 좀 더 큰 조직체에서 주장하는) 정말 근본적으로 이뤄야 하는 과제의 차원에서 맞는 이익인가, 이들 계급이 현 사회에서 가진 특수성과 그 특수성 때문에 사회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역할이 무엇이 있을까를 모색하는 객관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식인은 언제나 같은 편인 듯 같은 편이 아니고, 욕을 먹는 것은 그들의 숙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감내하고 그들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수행하는 구체적 기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신과 자신이 연대한 계급 안에서 나타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밝히고 타파하는 일입니다. 홍세화 씨가 ‘생각의 좌표’란 책에서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라 이름 지은 적 있는 바로 그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노동자이면서 노조에 반대한다던지, 차가 없으면서 철도민영화 반대 파업에 욕을 하는 그런 의식들, 혹은 노동자 계급을 위한다면서 개인숭배를 행하는(북한) 그런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외부자의 입장에서 철저히 파악하고 고발하는 것이 지식인이 맡은 첫 번째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자신이 가진 지식 기술을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연구하는 데에 쓰고, 이를 그들에게 알려 언젠가는 그들 속에서 자신과는 다른 유기적 지식인이 나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3. 자신의 본래 원칙인 자유로운 연구 정신, 이를 통해 얻은 지식의 보편적 보급에 힘씀으로써 지배계급을 위한 목표가 아닌 모두의 이익을 위한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공론의 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4. 모든 권력에 대항하여(자신이 가입했거나 지지하는 정당, 시민단체, 노동조합 등을 포함하여) 그들이 가진 한계를 비판하고 그들의 자리에서 수행해야 할 더욱 근본적인 과제가 무엇인지를 제시하며 그들의 행동이 이 과제를 향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현대차 노조가 당면한 과제는 임금 20% 인상일 수 있고, 이를 해냈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투쟁을 접을 수도 있습니다만, 지금 노동자를 대변할 수 있는 가장 큰 조직에서 수행해야 하는 역사적 역할은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에 대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전체적 단결을 그들이 꾀해주어야 함을 외부자인 동시에 내부자인 사람의 입장에서 일깨워주고 유도하는 것이 또한 중요한 지식인의 기능입니다.

 

5. 본디 검토하는 사람이란 자신의 기능을 살려, 이러한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가진 모든 수단을 검토하고, 이미 사용하는 수단들의 적절성을 살펴야 합니다.

 

6. 지식인 집단 내에서의 논쟁과 갈등을 사상의 발전 차원에서 기꺼이 받아들이되(예를 들어 민주당을 비판적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 정당을 끝까지 지킬 것인가, 혹은 지금 같이 지지하는 어떤 정치인의 실수가 사퇴감인가 잘못을 인정하되 우리 쪽에서라도 이를 감싸줘야 할 문제인가 등등, 결국 현실과 근본적 원칙 사이의 이런 논쟁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매우 흔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서도 자신 안의 이런 모순과 긴장하며 스스로와 싸워야 하는 것이 지식인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가리는 것보다 보다 심화된 입장에서 양쪽 모두를 초월할 수 있는 제 3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할 수 있음을 자각하고 정반합의 변증법적 화해를 모색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진정한 지식인의 기능입니다. 말만 들어도 너 잘났다. 왜 그렇게 나대냐. 현장 사정도 모르고 속편하게 비현실적인 소리 한다는 등의 욕을 먹기 딱 좋은 행동들입니다. 그러나 본 책에서 얘기하듯 지식인이 올바로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는지의 여부는 얼마나 욕을 먹는가 혹은 지지를 받는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가 알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지식인의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자신의 모순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이를 끊임없이 자기비판하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위에 언급한 6가지의 기능들은 아무것도 사회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정받은 기능이 없습니다. 어느 기관에서 인증해준 것도 아니고, 실질적인 생산을 해내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누가 간절히 찾지도 않을 그런 일들이지요. 그러나 저 행동들이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근본적인 기능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이유는 지식인들이 저 일들을 함으로써 사회가 변하지 않는 한 결코 없어지지 않을 자신들의 모순을 계속해서 보여주게 되고 반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반성이 철저할수록 우리는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사실 누구나 자신의 진정한 목적과 괴리된 자신의 행동을 알고, 도구로 전락한 자신의 모습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어서 그리 된 것인지를 명확히 파악할 전문 지식과 정밀한 연구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입니다. 지식인들은 바로 이들을 대신해서 자신의 모순이 사회의 모순과 연결되어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괴로워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하는지를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대신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즉 명확히 반성하고, 정확한 지점에서 괴로워하는 게 지식인의 자세이며 기본 임무라는 것이지요.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자신들의 모순을 되돌아보는 법을 자각하도록 말입니다. 한마디로 지식인은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순을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만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보편적 가치는 절대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며, 이를 이루는 방법은 각자가 처한 상황마다 특수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예전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분쟁이 벌어졌을 때 “이스라엘도 나쁘지만, 거기에 폭력으로 맞서는 팔레스타인도 다를 거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는 평화에 대한 보편적 가치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방식으로(‘양쪽이 서로 양보하고 손잡고 화해하세요.’ 같은) 손쉽게 이뤄지지 않음을, 한 민족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정치적 맥락이란 특수성 속에서 평화란 보편적 가치는 때로 투쟁이란 특수한 방법으로 성취되기도 하는 것임을, 그래서 그 수단을 무엇을 택할 것이며 그것이 목적을 훼손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은 언제나 격렬하고 때로 집단을 분열시킬 정도로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간과한 채 모든 문제를 추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나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이 이미 보편적 가치가 실현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여겼을 때 그런 속편한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나의 특수한 상황 자체가 곧 보편적 가치의 미실현을 증명하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문제에 있어 나와, 그 문제에 처한 사람들의 특수성을 고려함과 동시에 그 속에서 택하는 수단이 보편적 가치의 실현이란 목적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지식인이 유의해야 할 첫 번째 사항입니다.   

 

 다음으로는 ‘just do it’의 원칙입니다. 앞서 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 대해 말한 사람이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책상 앞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추상적인 원칙과 추상적인 이론뿐이기 때문에, 그것이 구체적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직접 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존재 자체로 폭로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적용되어야 하는 경우라면, 지식인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 먼저 판단내리거나 그들에게 지침을 내려줄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는 게 아니라, 일단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내부자로 들어가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입니다(어차피 지식인은 절대 완벽한 내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내부자라는 착각에만 빠지지 않는다면 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 다음에야 지식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지식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그 행동들의 성격과 의미와 가능성이 무엇일까를 고민해볼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은 상태에서 내려지는 판단이나 지침은 사실상 보편적 지식을 보편적으로 이루어야 한다는(평화를 이루기 위해선 사람들이 평화로워야 한다는 식의) 동어반복에 그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편은 이미 달성된 성취가 아니라 이루어야 할 목표라는 것,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해선 항상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하고 이를 파악하기 위해 현장에서 철저히 사람들과 섞여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에서 강조하고 강조하는 지식인을 위한 두 번째 유의사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작가는 지식인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지식인의 형성과정과 지식인이 처한 모순, 그로 인해 가능한 사회적 기능과 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유의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남는 의문이 있습니다. 실용지식을 가진 전문가가 자신이 배운 교육의 보편적 가치와 자신 처지의 계급적 특수성 사이의 모순 때문에 괴로워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되는 것이 지식인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김수영 같은 사람들, 즉 실용적 지식 기술자라기 보단 비실용적 언어의 기술자라 볼 수 있는 시인과 소설가 같은 사람들을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문학을 예술의 일종으로 볼 때,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이데올로기의 폭로보단 이데올로기를 가리고 꾸미는 데에 더 잘 쓰이거나(레니 리펜슈탈), 최소한 그런 것과는 관련이 멀어 보입니다. 더구나 시나 소설을 짓는 능력을 ‘실용적’ 능력으로 볼 수 있을지, 사람들이 그걸 읽으면서 ‘실용적’ 이익을 얻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점이 드는 것이지요(또한 거기에서 얻는 효용이 의료나 법처럼 모두에게 똑같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지식인은 자신이 지지하는 계급에 섞이기를 원하나 그럼으로써 더한 고독을 경험해야 하는 존재이지만, 작가는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고독을 필요로’하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일반적인 지식인과는 달라 보이는 작가이지만, 현대 사회에서 작가는 때로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하고, 한국의 김수영처럼 진정한 지식인의 표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문학이란 장르의 본질적 성격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저 사회적 상황이 만들어낸 일시적 현상일까요?

 

 이 책의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것은 ‘현대’ 문학이 문학다워지려면 가질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성격이며, 현대 작가는 그래서 ‘본질적으로’ 지식인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작가는 일반 지식 기술자와는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공통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지식 기술자들은 자신들만의 전문용어를 사용합니다. 의학용어, 법률용어, 화학기호 등, 각 분야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협의 하에 만들어낸 기술적 약어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식 전문가에 대한 정의는 ‘자기 분야 언어의 주인들’이라고 내려질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영역에서 새로운 현상이나 물체가 나타났을 때, 거기에 이름을 붙일 권리는 그들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런 기술적 약어들이 아닙니다. 일반 대중들이 쓰는 공통언어, 심지어 니미, 시부럴, 젠장 등의 비속어까지가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의 영역이 됩니다. 이런 언어들은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너무 풍부’한 동시에 ‘너무 빈약’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지식’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한자어는 ‘知識’입니다. 그 생김새를 따라 어원을 짐작해보면 활, 입, 말(言), 악기, 창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 조상들은 무예와 언변과 악기를 다루는 능력을 반드시 갖춰야 할 교양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지식이란 단어가 현대 사회에서 쓰이는 한정된 의미를 넘어 역사를 거치며 쌓여온 의식의 변화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 풍부’하지만, 동시에 지식이란 단어가 현대사회의 지식체계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함에도 그 역사를 거치며 고정된 말버릇과 단어 체계 때문에 이를 대체할 새로운 단어를 만들거나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경직성 때문에 ‘너무 빈약’합니다. 이는 기술적 약어를 사용하는 타 분야 전문가들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분야의 언어들과는 달리 작가가 사용하는 공통언어는 정확한 언어의 창조가 기존의 규칙이 가진 한계에 묶여 있고, 그 규칙으로 인해 개개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언어가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언어를 만들어 감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작가들은 대중들이 쓰는 언어의 규칙, 예를 들어 관용어, 유행어, 문법, 어휘 등등을 멋대로 고치거나 사용처를 달리하게 만들 권한이나 힘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소유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 달리 보면, 그들은 바로 그 언어의 규칙을 이용해서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표현을 만들어내는 언어의 주인이기도 합니다(문학의 사례는 아니지만, 랩의 라임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죠.). 저는 이걸 작가는 자신의 언어와 ‘썸 타는 관계에 있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작가는 언어를 직접적으로 만들거나 바꾸지는 못하지만 규칙의 한계를 창조적으로 이용하여 그 한계를 가능성으로, 즉 그 전에는 담지 못했던 정보를 새롭게 담아내도록 바꾸는 식으로 언어를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바로 그 한계이자 자율적인 성격 때문에 일부러 공통언어를 사용한다고까지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 때 우리는 작가가 공통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생겨나는 효과에 주목하게 됩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그 줄거리가 작가가 말하고 싶은 전부인 걸까요? 그런 거라면 차라리 진술서를 읽거나 구술을 듣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한한 말장난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의 전부인 걸까요? 그렇다면 차라리 친구와 농담 따먹기를 하는 게 훨씬 생산적인 일이 되겠지요. 이 책의 저자가 ‘작가는 할 말이 있지만, 아무것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지점은 소재와 그 소재를 풀어나가는 언어적 형식의 혼합 어딘가에 있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는지를 직접 말하는 순간 그것은 ‘진술’이지 ‘문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독자가 직접 읽고 느낌으로 전달받아야 하는 어떤 것이고, 이것은 그래서 말로 이루어져 있지만 역설적으로 ‘침묵의 전달(저자의 표현대로라면)’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침묵의 전달’이 ‘본질적으로 지식인이 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를 위해 우리는 문학의 성격을 그 내용과 문체로 나눠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학의 시점을 객관적 관찰의 시점과 주관적 경험의 시점으로 나눌 때, 어느 쪽이건 작품 내용은 ‘추상적’입니다. 즉 그 작품을 만들어낸 사회와 작가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읽은 작품은 절대 그 깊은 의미를 잡아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객관적 관찰의 대표인 자연주의 작가 에밀 졸라의 작품을 예로 들어보죠. 그가 작품 속에서 객관적 관찰을 시도했다고 해서 우리가 이름만 가리면 그 작품이 에밀 졸라의 것인 줄 전혀 몰라볼까요? 그 작품에는 에밀 졸라가 즐겨 사용하는 캐릭터, 장치, 줄거리 전개 등이 인장처럼 박혀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해낼 수 없다면 그는 작가가 아닌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그 인장에는 ‘자기가 묘사한 사회의 산물로서의 졸라’의 주체적이고 개인적인 시선이 무의식처럼 스며들어가 있습니다. 반면에 철저한 주관적 경험을 견지하는 일본 사소설을 읽는다고 해서 거기에서 사회상을 읽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까요? 하다못해 편의점에서 물건을 고르는 장면을 읽으면서도 우리는 일본 편의점과 한국 편의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객관적 관찰을 지향하는 작품에서 우리는 작가 개인의 시선을 발견하고, 개인적 느낌을 지향하는 작품에서 그 느낌을 받도록 개인을 조건지우는 세상을 발견합니다. 그럼으로써 그 작품들은 완벽히 객관적일 수도, 주관적일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독립적이고자 하는 작가 안에 사회구조가 내재화되어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사회구조의 일부분으로만 작가를 보기에는 그 작가만의 독특함으로 표현될 수 있는 독립적인 시선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작가의 독립성과 사회구조는 작품 속에서 서로 상호작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느낌으로 이뤄질 뿐이죠. 이것이 내용으로 전해지는 ‘침묵의 전달’이며, 이러한 상호작용을 메를로퐁티가 주장한 ‘세계 내 삽입’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적 영향력을 받으며 살아갈 때 비로소 사회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가질 수 있고, 이 시선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완벽히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우리들은 보여지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다.’). 사실 우리는 사회의 일부분으로서만 사회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나에게 자신이 어떤 사회의 일부분이며, 이것이 스스로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주체적이고 객관적인 자각이 없었다면 사회는 나를 통해 표현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의 주체성은 사회구조에 의해 제약당하지만, 동시에 그 주체성을 통해서 비로소 그 제약이 드러나고 이를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시작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모든 작가의 작품은 형식에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이런 과정을 담아낸 결과물이기 때문에 모든 작품이 본질적으로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줄거리나 관습적 장치 자체가 아닙니다. 작가들이 그런 것들의 혼합으로 전달하고 싶은 것은 주체적으로 사회를 자각하고 그 사회에 대한 자각 속에서 자신이 어떤 사회의 일부분인지를 찾아나가는 과정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 과정은 모두가 하고 있고 해내야 할 보편적인 목표이지만, 그 구체적인 과정은 각자의 성질과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란 점에서 개체적입니다. 또는 성질과 상황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이를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내재해있단 점에서 모두 보편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가능성을 발현시켜 성취해야 할 구체적 목표들은 각자 다를 수 있단 점에서 개체적인 목표를 두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모든 작품이 작가가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나를 통해 표현되는 사회’의 경지를 나름대로 성취한 결과물이란 점이고, 이를 읽음으로서 사람들은 자신과 완벽히 다른 사례의 작품에서도 ‘나를 통해 표현되는 사회’를 고민하고 자극받게 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와 기존의 관습을 폭로하고 이를 벗어나 자신의 주체성을 찾을 것을 역설하는 지식인의 역할을 가장 본질적인 영역에서부터 수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이 아닌 말이 흘러가는 그 흐름 속에서 느낌으로 전달되는 것이기에, 작가는 본질적으로 전달할 것이 있지만(각자가 나를 통해 표현되는 사회란 어떻게 가능한지를 감 잡아라) 이를 직접적인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그걸 선언처럼 말하면 감이 안 오니까 자신의 경험과 소재와 문체를 섞어서 본을 보이는) ‘침묵의 전달자’가 되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 이와 같은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낳을 수 있습니다. 왜 그 전달이 꼭 ‘언어’여야 하는가? 정확하게는, 왜 ‘공통언어’를 통해서 그와 같은 전달이 이루어지는가? 여기에 대해 저자는 우선 세계 내 존재와 공통언어가 가진 유사성을 제시합니다. 

 

 우선 공통언어는 두 가지 면에서 세계 내 존재와 흡사합니다. 말과 그것이 지칭하는 의미 사이의 관계를 따졌을 때, 말은 그 의미를 지칭하는 다른 많은 언어들의 일부분입니다. ‘달’은 ‘月’도 되고 ‘하현’이나 ‘상현’도 되고 ‘이태백이 놀던 곳’이라고 지칭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서로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에 대한 공감대만 형성되면 말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변형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 있어서 의미의 일부분인 공통언어는 사회의 일부분인 사람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동시에 그 의미에서 해방되어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란 시구에서 달은 정확히 그 달만을 가리키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의미와 정서가 달이란 이미지로 압축되어 나타나게 되지요. 즉, 말이 의미의 일부분이란 관계를 벗어나, 의미가 말의 일부분이 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전문가의 기술적 용어들에선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작가가 사용하는 공통언어만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사회의 일부분이나 동시에 주체적 시각으로 기존 사회를 재해석 할 수 있는 사람과 닮은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한 사람과 사람을 의사소통시키는 말의 기본적 기능에서도 이와 같은 유사점은 나타납니다. 이는 ‘공통언어는 나 자신과는 다른 또 하나의 나로서의 나에게 전체로서 부과된다’라는 식으로 설명되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있을 때의 나의 모습과 특정 관계 속에서의 나의 모습을 조금씩 분리시킵니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대하는 나의 언행이 혼자 있을 때 멋대로 감정에 취해 혼잣말을 하는 언행과 같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관계 속에서의 언행을 규약 하는 나름의 관습이 언어를 통해서 생겨나게 됩니다. “진지 드세요”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생신 축하드려요” 등등의 말이 자식이 부모에게 할 만한 관용어구로서 채택되는 것이지요. 이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무의식적인 사회적 협약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을 공통언어가 만들어진 가장 기본적인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식사시간에 내가 부모님에게 “진지 드세요”라는 말을 썼다고 가정한다면, 이를 두고 관계 속에서 말해져야만 하는 언어의 규약이 강제로 이 말을 하도록 시켰다고 볼 수도 있고, 그냥 내 입을 통해서 스스로의 의지로 나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둘은 관계 속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특정 상황 속에서 해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말이니까 자동적으로 나온 것인 동시에, 밥을 먼저 먹으라고 권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적당한 말을 스스로 고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 말을 하는 나를 나로 볼 수도 있고, 관계 속에서 달라지는 ‘내 안의 다른 사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혼자 있을 때의 나와 자식으로서의 나는 다른 사람이고, 달라져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렇지만 나와 마주하고 있는 내 부모님도 혼자 있을 때의 당신 모습과, 자식 앞에서 보이는 부모로서의 모습은 다른 모습이고, 달라져야 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로 다른 사람으로서, 즉 부모로써 써야 하는 말을 고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통언어는 사람들을 관계 속에서 의사소통하는 ‘주체 대 주체’로서 연결시키는 동시에, 관계의 규약을 충실히 지키는 ‘타자로서의 나’와 ‘타자로서의 타인’을 연결시키는 매개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통언어는 그 근본적 기능에서부터 ‘사회의 일부분인 나’와 ‘사회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나’를 동시에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작가의 문체라는 것은 그것이 공통언어의 이와 같은 성질을 적극적으로 개발해낸 결과물이라는 점 때문에 그 자체로 세계 내 존재인 사람의 한계와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작가 자체가 세계 내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닮은 공통언어를 ‘내가 표현하는 사회’를 가장 잘 드러낼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체는 의미에 구속된 동시에 해방된 말, 관계를 구속하는 동시에 관계를 선택하게 만드는 말이 한 개인의 손끝에서 주체적으로 조율되어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언어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소설의 캐릭터와 시의 대상들은 그 문체를 통해 묘사되었다는 자체만으로 사회의 일부분인 나와 주체로서 사회를 바라보는 나라는 세계 내 존재의 한계와 가능성을 상징하게 되며, 세계 내 존재인 작가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어구 하나하나를 통해 전달된다고 보기 보다는 그 전반적인 문장의 흐름을 통해, 문장 구조 자체에 대한 느낌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기에 이 또한 ‘침묵의 전달’인 것이지요. 덧붙이자면, 이 또한 독자에게 세계 내 존재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는 그저 유유자적 하는 나그네라는 하나의 간단한 정보입니다. 그러나 그 간단한 정보는 말들의 적절한 해방과 간결한 운율이란 긴장 사이의 조율로 ‘박목월의 문장’이 되었습니다. 이는 ‘나그네’와 이를 관찰하는 ‘자신’의 관계를 ‘자신만의 언어’로 포착하고자 했던, 관계의 일부분으로서의 내가 관계를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나로 거듭나고자 했던 시인의 승리인 것이죠. 그리고 이는 바로 그런 가능성을 닮은꼴로 품고 있는, 즉 의미의 일부분이나 의미를 선택하는 도구로 거듭날 수 있고, 관계를 고정시키나 관계를 변형시키는 도구로 거듭날 수 있는 공통언어를 사용했기에 이룰 수 있었던 성취입니다. 문체는 이처럼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그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문체가 가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작가가 생산해내는 작품 자체의 한계로 볼 수도 있는 문제인데, 그것이 작가 자신만의 세계 내 삽입을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문체라는 것은 ‘같은 역사에 의해 개별적으로 형성된 개인에게 나타나는 시대의 <맛>’입니다. 반복하여 말하지만 사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이를 주체적으로 해석해낸 사람의 결과물인 것이죠. 하지만 그것은 나의 해석의 결과물이란 점에서 근본적이지만, 동시에 나만의 해석이기 때문에 남에게 있어 가능한 세계 내 삽입에 대한 자각이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내가 경험하지 못했거나 이해하지 못한 채로 스쳐지나간 타자들을 배제한 상태로 이뤄낸 ‘나만의’ 성취이기 때문에 문체는 침묵의 전달로서의 배후, 사회적 영향력이 가지는 편견이란 배후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단지 명백한 것은 내가 해석해냈다고 생각하는 눈앞의 세계는 사실 사회적 영향력이란 배후에 의해 조건 지워진 해석이며, 문체는 그 해석을 체화해낸 것이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옳은 해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작가의 시선에서 옳고 보편적인 가치가 정말 현실 사회에서도 그런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이것은 작가의 작품 안에서도 서로 갈등을 겪고 모순을 보임으로써 폭로되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작가의 작품에 찬사만을 보내야 하겠지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작가가 그려낸 어떤 묘사나 어떤 문구에는 동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문구에는 의아함을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제나 작품은 독자에게 있어 비판적 수용의 대상이며, 항상 전적인 인정이나 거부가 아닌 부분적인 지지와 부분적인 거부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문체는 작가의 편견을 보여줌으로써 작가를 구성하는 사회적 조건을 암시하고, 이를 통해 구성되는 모순적인 문구와 캐릭터들은 그 자체로 작가의 조건을 넘어서 그것들에 대한 부분적인 부정과 부분적인 긍정을 통해 실제 현실을 검토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자는 그 모두를 살피는 과정을 통해서 작가의 진정한 의도를 완성해가는 것이겠지요. 내 눈으로 보는 사회라는 것을 성취해가는 과정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작가가 생산하는 작품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침묵의 전달’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 어째서 본질적으로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내용과 문체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사회 속의 나’, ‘내가 바라본 사회’를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폭로함으로써 모두에게 내재되어있는 주체성을 자극시키고, 이 주체성을 한계 짓는 상황 또한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깨닫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그들은 작품 속에서 사회구조를 자신의 시각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서 자연스레 나타내야 하며, 동시에 그 사회구조를 자신의 시각을 통해 재해석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도달하는 데 특별히 제한되는 형식은 없지만(오히려 특정한 형식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반대되어야 합니다. 개체의 해석을 중요시하는 것이 문학이기에.), 어쨌든 작가는 ‘내가 표현하는 사회’를 최대한 주체적이면서도 최소의 모순을 가지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자신 계급의 특수성에서 출발하여 그 특수성을 극복하고 보편적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특수한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사회 속의 나, 내 안의 사회라는 것을 확인하는 능력이란 보편적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해 언어를 통해 가장 특수하고 생생한 하나의 체험을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특수한 방법으로 보편적 가능성을 시사시키는 일이 그의 일인 이상, 작가는 작품 활동을 하는 한 누구나 본질적으로 지식인인 것이지요.

 

 이렇게 긴 글을 통해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봤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저한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식인이란 왜 근본적이며, 근본적이어야 하는지, 지식인의 출신 성분에 대한 비판은 타당한지 등에 대한 설명을 통해 현재 한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소모적 논쟁에 대한 나름의 시선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제 느낌을 나름대로 풀어쓴 이 서평이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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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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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해 말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조르바도 저자도 아닌 그리스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대해 어떤 것도 아는 것이 없는 저조차 친숙함을 느끼고 만들 정도로 이 책은 시종일관 그리스, 그 중에서도 크레타 섬이 가진 풍경, 풍속, 그리고 음식에 대한 육감적이고 생생한 묘사로 넘쳐납니다. 아나그노스티 영감네 집에서 먹는 돼지 불알, 크레타 여인들의 부풀어 오른 가슴, 사람들이 달려들어 목을 따버린 과부의 붉은 피와 그 피처럼 붉은 포도주, 축제의 격렬한 춤 등등, 그리스인 조르바의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크레타 섬이며, 그 중에서도 크레타 섬에 대한 단순한 감상이 아닌 내가 먹을 것, 마실 것, 몸을 움직여 성교하거나 춤추고 싶은 아주 체험적이고 본능적인 것들에 대한 묘사들이 책의 이야기와 절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이는 크레타 섬이 저자의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인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며, 이곳이 가진 풍요가 조르바와 어울려 가질 수 있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조금만 더 크레타 얘기를 해보면, 왜 저자는 크레타라는 섬을 자신이 쓸 소설의 무대로 택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섬이란 곳이 가진 특징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섬은 고립이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접촉을 통제할 수 있는 독립이기도 하며, 뭍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기도 합니다. 또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에 대해 자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달리 말하면 자신들의 본성을 드러내는 데 있어 법의 강력함보다 유지나 마을 관례라는, 더 폐쇄적이지만 더 잔인할 수도 있는 장치들의 통제를 받는 공간이기도 하지요. 뜬금없는 비교일 수도 있지만 크레타를 비슷한 시기 우리의 제주도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물산이 풍부하여 스스로도 자급자족에 큰 무리가 없던, 뭍의 지배를 싫어하던 섬. 뭍의 이념 논쟁 때문에 4.3을 겪어야 했으며 이것에 처절히 저항하던 제주도와 터키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독립투쟁을 벌여야 했던 크레타의 역사는 어딘지 닮은 데가 있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섬으로 간다는 것은 귀양이라는 고립의 의미이기도 했지만, 흑산도에 갔던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썼듯이 자신의 문제에 천착할 수 있는 수양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기도 하며, 윌리엄 골딩이 파리 대왕이라는 소설에서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듯, 법의 지배가 상대적으로 약해지는(과거에) 섬이란 곳은 문학에서 인간이 본성에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초입부에서 저자는 친구를 떠나보내고 자신의 고향 크레타에서 갈탄광을 운영할 계획을 세우고 탈 배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나오죠. 저자 실제의 경험이 반영된 소설임을 감안할 때, 카잔차키스가 자신의 고향, 섬으로 돌아가려 했다는 것은 스스로의 처음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려 했다는 것인 동시에, 이것에 있어서 다른 부당한 개입을 차단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가능한 섬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 섬이 풍요로운 크레타가 아니었다면 조르바를 만날 수 있었을까. 만났다고 한들 조르바와 그처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고립되지 않았다면 저자도 조르바도 자신들의 문제에 그렇게 깊이 빠져들지 못했을 것이며, 풍요롭지 않았다면 조르바는 자신의 기를 펼치지 못했을 것이고, 법의 강력함에서 한 발짝 떨어져 아직 문화적 관례와 사람들의 본성이 느슨하게 엮여있는 곳이 아니었다면 그 사람들과 조르바, 저자가 맺는 관계는 사뭇 달랐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따지고 보면 섬이라는 공간은 조르바가 말하는 자유란 것의 의미를 더욱 간명하고 단순하게 보여줄 수 있었던 장치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문학 속에서 표현하면 장치이겠지만, 현실 속에서 벌어졌던 이 같은 일은 운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의 처음에 언급했던 느낌을 좀 더 파고들면, 크레타의 풍요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조르바가 가지는 관련성은 무엇일까요. 사실 저는 이것을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육체가 가진 질펀한 욕망이 정신의 고귀함, 강건, 더 높다고 일컬어지는 쾌락과 분리된 것이 아니며 사실 이 모든 것들의 전제조건이라는 것, 영혼의 영원함이란 것이 육체라는 한시적인 그릇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며, 이것이 바로 크레타와 조르바가 서로 끈끈하게 엮인 키워드로 등장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조르바는 결코 배고픈 상태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돼지 불알이건 양고기건 스튜건 일단 입에 집어넣고서야 입을 떼는데, 그 때 그의 입에서는 가장 간단한 말로 철학적인 이야기들을 해내죠. 육체적인 욕망을 금기시하지 말 것, 자신이 가진 가장 원초적이고 질척한 욕망이, 추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근본임을 알 것. 조르바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간이란 참 묘한 기계지요. 속에다 빵, 포도주, 물고기, 홍당무 같은 걸 채워 주면 그게 한숨이니 웃음이니 꿈이 되어 나오거든요. 무슨 공장 같지 않소. 우리 대가리 속에 발성 영화기 같은 거라도 들어 있나 봐요.” p.366 

 

  그렇지만 여기서 유념해두어야 할 것은, 육체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행위들이 단순한 전제조건만은 아니며, 오히려 육체적인 욕망과 영혼적인 갈망은 인과관계가 아닌 일종의 합일 관계라는 것을 아는 일입니다. 조르바는 먹고자 하는 것, 섹스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거침이 없지만, 동시에 자신이 해내고자 하는 것, 즐겁고자 하며 새로워지고자 하는 욕망에 이것을 대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갈탄광에서 일할 때는 갈탄광이 되는” 사람이며,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그 순간에 모든 걸 던질 줄 아는 용기와 강인함과 몰입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단순히 동물적인 욕망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는 살고자 먹었을 것이며, (조르바 식 표현대로 한다면) 새끼를 까기 위해 섹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맛있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서 먹고, 여자가 좋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서 섹스를 하는 것이죠. 여기에 그가 가진 질펀한 품위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동물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릇을 빚는데 방해가 되므로 왼쪽 새끼손가락을 쳐버리는데 거침이 없을 만큼 동물적인 열정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합일점의 가장 극적인 부분에 춤이 있습니다. 조르바는 먹을 만큼 먹고, 자신이 어떤 기쁨에 다다랐을 때 춤을 춥니다. 이 때 첫 부분에서 그가 추는 춤은 “갑자기 자연의 법칙을 정복하고 날아가려는 듯이 공중으로 펄쩍”(p.104) 뛰는데, 이 같은 춤은 뒤에 조르바가 러시아인 친구를 만난 얘기를 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갈탄광이 완전히 망해버린 뒤 마지막 만찬을 하는 장면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여기서 춤은 무엇일까요? 신체가 가진 즐거움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수단이자, 의식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것까지 표현할 수 있는 동물적인 몸짓이며, 모든 것이 망한 후에도 망가질 수 없는 자신의 신성한 내면을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육체라는 그릇과의 가장 극적인 합일점이 아닐까요. 그렇기에 처음에 금욕적이었던 저자는 마침내 자신이 갈망하던 과부와 잠자리를 하고 끝부분에선 조르바에게 춤을 배웁니다. 그리고 조르바와 함께 춤을 추죠. 순간의 충동을 끝 간 데까지 즐길 수 있는 사람. “식료품 상인처럼 항상 여분을 남겨두려고 하는 이성”의 걱정을 뒤로하고 끝까지 가 볼 수 있는 강한 사람. 조르바는 동물적인 사람도, 이기적인 사람도, 옳은 사람이나 착한 사람도 아닌 바로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자는 그를 그렇게 닮고자 했으며 그것이 훗날 미국 사람들이 이 책에 굳이 ‘그리스인’이라고 원제와 다른 이름을 짓게 만든 이유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욕망을 발산하면서도 거침없이 당당하고 자유로웠던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신의 원형을 조르바에게서 보았기 때문이었겠지요. 옳고 그름 속에 숨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당당히 하고 그 뒤의 결과를 후회 없이 감내해 낼 수 있는 그 모습이 바로 저자가 꿈꿨던 ‘초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제 이를 모두 살펴보고 기록으로 남긴 저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저자는 금욕적인 태도와 지식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이를 달리 살펴보면 금욕적이고 지식만을 추구할 뿐 세상에 대해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을 겁내하는 인물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열등감은 저자의 친구들에 대한 언급을 통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스타브리다키라는 친구는 그리스 민족의 수호를 위해 카프카스의 전쟁터로 떠나고, 카라얀니스라는 친구는 그리스 민족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아프리카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신의 야성을 과시하려 하지만, 저자는 양 극단에 선 두 친구 사이에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방황할 뿐이죠. 사실 따지고 보면 두 친구 사이에는 차라리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을 것입니다. 각자 자신이 믿는 것을 향해서 자신을 거침없이 돌진시키는 행동력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저자는 어떤 것에도 명확한 확신을 가지지도 못하고 쉽사리 행동하지도 못하는 나약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크레타에서 자신만의 사회주의 공동체를 만들어보려고 했던 야심은 이렇게 보면 친구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열등감에서 나온 퇴행적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여기에서 조르바를 만나면서 저자는 두 친구와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조르바 또한 터키와의 독립전쟁, 불가리아와의 독립 전쟁에서 병사로 참여했을 만큼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저자를 만났을 때의 그는 그리스를 사랑하지도, 그리스를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것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이 그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하는 저자보다 더 큰 행동력을 가지고 갈탄광의 인부들의 목숨을 구하고, 죽을 위기에 처한 과부를 위해 나서기도 하며, 누군가의 정부가 되어주기도 하지요. 스스로의 내면적인 욕망에 거침없는 사람이 이것이 가진 악행의 가능성을 꺼려 숨기는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낸다는(물론 악행까지 합쳐서, 조르바는 많은 악행- 전쟁터에서의 살인, 강간 등 - 이후에 지금의 모습에 다다른 것으로 나옵니다.) 사실은 저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까요. 저자가 이후에 무엇을 하였는지는 구체적이지 않고 조르바가 권한 녹암을 보러 달려가지 않은 걸 보아 조르바처럼 살지는 않은 것 같지만 적어도 앞서 말한 춤과 섹스를 통해 무언가 변화를 겪긴 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재미있는 건 조르바 또한 저자를 두목이라고 부르며 그 책을 경멸하는 것 같다가도 오르탕스 부인이 죽은 날처럼 견딜 수 없는 의문이 드는 밤이면 저자의 책을 들먹이며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육체적인 삶 속에서 그것의 의미를 독특한 종교관으로(초자연적인 것도 완벽히 현실적인 것도 아닌 신 앞에서도 저항 할 수 있는 인간관으로) 풀어내고 있는 조르바와, 금욕을 통해 영혼의 갈망을 해소하려는 저자가 점차 그것을 위한 길에 육체를 배제할 수가 없음을 깨달아가는 저자 간에는 겹치는 부분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겁니다. 버찌를 잔뜩 먹어 배부른 뒤에야 버찌를 멀리할 수 있었다는 조르바나, 붓다의 철저한 부정을 배워 붓다조차 부정하기 위해 붓다에 대한 원고에 빠져드는 저자 간에 가진 공통점이 보여주듯이 말이죠. 이 둘은 다른 출발점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관계인 동시에, 서로에게서 배우는 관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았을 때 비로소 왜 조르바가 자신과 비슷한 많은 악행(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직접 행하기는 꺼려하는)을 행한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지 않고 자신의 품위를 찾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르바는 자신을 둘러싼 많은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놀라워하며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 이전에는 자신의 몸을 던져 행하고 얻은 경험이 놓여있지요. 다른 이들은 그것으로 '알았다'고 생각하고 말고 그저 똑같은 일만을 할 뿐이지만, 조르바는 왜 세상에 노새가 있는지를 궁금해하고, 바다의 색깔에 놀라며, 몇십번도 넘게 보았을 봄 꽃의 자태에 놀라 환장하며 뒹굴어댑니다. 저자는 생각했을 뿐 생각한 것을 행하지 않았기에 그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었다면, 조르바는 일단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행한 후에 그 행한 결과를 놓고 이것의 의미에 대해 솔직하게 놀라워하며 모르는 것을 간절히 알고 싶어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는 다른 것 같지만 어쨌든 의미를 알고자 하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만날 수 있었고, 조르바 또한 저자에게 무언가를 질문하며 가까워졌던 것이겠지요. 진정으로 알고자 한다면, 자신이 가진 가장 내밀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질문이어야 하고, 그 질문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스스로가 하고자 하는 것을 일단 해보고 보는(just do it!) 강인함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육체에 한껏 파고들면서 육체에 갇히지 않고 자신을 끊임없이 젊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조르바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을 표본으로 내세우는 듯합니다.  

 

  반대로 금기와 금욕 안에 숨은 이들의 이중성에서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수도승과 마을 사람들을 통해 구체화되는데요. 먼저 수도승들을 살펴보죠. 수도원이 가진 임야를 사기 위해 조르바와 저자는 수도원에 방문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들은 금욕이란 이름 아래서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기는커녕 더 추해지거나, 더 무력해진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공공연히 남색을 행하고 치정에 싸여 살인을 행한 수도승, 아래 사람보다 아래 소식에 더 관심이 많으며 성욕을 어쩔 줄 몰라 흙으로 여인상을 빚거나 평생에 걸쳐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글을 베껴 썼지만 조금의 지혜도 얻지 못하고 무력하게 늙어버린 주교 등등의 모습을 보며, 인간성을 억누르는 것들이 어떤 아름다운 말로 치장되어 있다고 한들 그것은 인간을 더욱 추하게 만들 뿐임을, 거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의 디테일한 모습을 통해 알려줍니다. 이것은 꼭 종교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금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을 경계하고, 특히 외지에서 온 과부에 대해 경멸어린 시선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갈망합니다. 단지 선뜻 나서서 이를 행하지 못할 뿐이죠. 그러다 그 과부가 공공의 적이 되었을 순간, 품위 있는 척 하며 있던 마을 사람들은 그 과부를 일제히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오히려 결정적인 순간 이들을 막으려고 들었던 사람은 그 과부에 대한 욕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던 조르바였지요. 또 다른 과부인 오르탕스 부인이 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을 안에서는 이 부인을 천박하다고 멸시하지만, 그가 죽는 순간에 누구보다 천박해지는 것은 마을 사람들입니다. 죽은 사람의 재산을 가져가기 위해서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곡을 해버리려는 노파들이나, 아예 창문과 문짝까지 뜯어가기 위해서 서로 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책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천박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에도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 죽음 그 자체를 슬퍼하고 여기에 가장 원초적인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오르탕스 부인이 가진 평가가 어쨌건 말건 그녀와의 관계에 최선을 다했던 조르바였죠. 여기서 묻게 됩니다. 그가 자신의 욕망을 금기에 맞추려 들지 않는 것이 그렇게 천박한 일인지, 오히려 우리가 가진 비겁함을 적절하게 포장하려고 하는 것이 금기가 아닌지 말입니다. 이는 자신의 선택에 당당해지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비겁함을 사회의 시선으로 책임을 돌리려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완벽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는 모를 수 있지만, 어떻게 산 사람이 제일 부럽고 매력적인지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조르바에 대해 누군가 쓴 평이 있더군요. “현대문학이 만들어낸 가장 원기 왕성한 보통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원기 왕성함이, 강인함이 우리에게 묻는 듯하군요. 너희들은 얼마나 나약한지, 그 나약함을 가리는 금기와 금욕을 깨고 홀로 설 수 있을지를 말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살아있다는 그 사실에만 충실했던, 나 같은 사람은 천년을 살아야 하는데...라는 유언으로 삶의 진정한 기쁨을 만끽했음을 증명했던 조르바를 품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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