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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다상담 1 - 사랑, 몸, 고독 편 ㅣ 강신주의 다상담 1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3년 7월
평점 :
철학을 한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요? 물론 그건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한 말일 것입니다. 시간은 무엇이고 공간은 무엇인지, 그 속에서의 생과 죽음은 무엇인지 등등의 막연히 거창해 보이는 것들에 감히 질문을 던지는 수작으로 철학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그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 대상들과의 관계를 고민하는 ‘나’라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질문은 철학에서도 사람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가 없고, 그래서 철학이 다루는 질문들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질문,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수렴되지 않나 합니다. 단지 그 질문을 몇 가지의 팁으로 면피하는가, 아니면 근본적인 고민으로 끌고 가는가로 자기계발서와 철학서가 갈리는 것이겠지요. 강신주의 다상담은, 그래서 어떻게 보면 철학이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 중 우리에게 가장 뜨겁게 다가오는 부분을 뜨겁게 클로즈업해서 던져주는 책입니다. 대단히 새로운 논의나 새 영역을 개척하는 전문 철학서는 아니지만, 누군가의 구체적인 고민에 철학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실마리를 전해줄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책이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렇게 봤을 때 전문 철학서와 대중 철학서를 나누는 것도 그리 현명한 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철학은 대화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상담이란 형식이 철학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난 것도 아니니까요.
총 3권의 연작으로 이뤄진 이 책을 여는 1권의 주제는 세 가지, 사랑, 몸, 고독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적인 영역의 주제로 생각될 수 있지만, 사실 사적인 영역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공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인문학의 주된 특기 중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사실 사적이라 여겨지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가장 본질적인 공적인 영역에 속해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부부관계는 사적인 영역의 일인 것 같지만 사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이 공적인 논의의 대상인 가부장제, 성역할, 전근대적인 결혼 제도 등을 가장 작은 단위에서부터 가장 견고하게 유지시켜주는 장치가 되는 걸 떠올리시면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여기는 사랑과 고독, 그리고 나 자신의 ‘몸’에서부터 철학적 사유를 출발시킨다는 건 꽤나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규정지어왔고 통제해왔던 다양한 사회적 통념들을 재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재발견을 통해서, 우리는 마침내 새로운 관점과 행동 지침들을 세우게 되는 것이지요. 역시 철학은 가장 근본적이기에 가장 삐딱해 보이는 어떤 태도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서 ‘철학은 근본적이다.’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철학은 전제의 근거를 따져 이를 증명하거나 더 나은 새로운 전제를 성립하기 위해 싸우는 학문이고, 근본적이라는 건 어떤 면에선 ‘나의 전제에 가장 충실하다’는 표현의 다른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결국 ‘전제에서 벗어나는 어떤 것도 허용할 수 없다’라는 가장 강한 부정을 불러오는 태도를 지칭하게 되죠. 근본적이란 건 대개 얼마나 ‘내 전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부정할 수 있는가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철학이 가지는 선명성의 매력이기도, 무책임이기도 합니다. 아닌 건 아니라고 쳐버리는 태도에서 우리는 우리 삶이 부정당하는 듯한 절망을 느끼기도 하지만, 어쨌든 자기네 입장에서 아닌 걸 아니라는 데에야 뭐라고 하겠습니까. 거기에서 우리는 그걸 받아들이던가, 부정하던가 두 개의 선택지만을 받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상담이란 간판을 내걸긴 했지만 저자가 철학자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가 사람을 다독이고 고민을 들어주는 카운슬러가 아니라 자신의 전제를 관철시키는 철학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은 상담이라기엔 때로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기도, 견강부회하는 억지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 맞춤형 팁을 전해주는 성공학 강사가 아니라 현상에 대해 정확하고 분명한 논리적 설명을 부여하고자 하는 철학자가 가지는 속성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현실에 자신을 맞춰갈 것이냐,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어줄(혹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을 위해 현실과 불화할 것이냐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선택을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에 자신이 가진 철학자로서의 사명이 있다고, 저자는 은연중에 밝힙니다. 우리는 그의 그런 성질을 알고, 그저 그런 상담 책을 읽는 것보단 훨씬 단단한 각오로 이 책을 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주제를 다룰 때 저자가 깔고 가는 ‘근본’이 무엇인지를 한 번 살펴봅시다. 그것은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라는 알랭 바디우의 전제입니다. 이 말은 곧 바꿔 말하면 ‘둘의 경험이 아닌 어떤 것도 사랑이 아니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얼마나 그런 사랑을 하기가 힘이 드는지, 그런 사랑을 해내는 사람이 얼마나 적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모습과 다른 남녀관계를 택하는지, 정말 완벽하게 그런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있긴 하는지 등등의 항변은 소용이 없습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아닌 건 똥구멍이 빠져도 아니고’ ‘옳은 건 똥구멍이 빠져도 옳은 것’이니까 말이죠. 중요한 건 그래서 ‘아, 내가 사랑해본 적이 없구나.’라는 솔직한 자기 인정, 즉 직시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그러한 직시 후 자기가 자기 사정에 맞게 알아서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고, 저자는 그저 자신이 정한 전제에 맞춰 각자의 모습을 돌아보도록 강요할 뿐입니다. 그것이 무책임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자신이 현재 어떤 상태인가를 아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이니 잔인하긴 해도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저자가 설파하는 전제를 진정으로 옳은 전제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것 또한 본인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 이 전제를 좀 더 파고들어봅시다. 이 전제는 ‘사랑은 주체와 주체의 만남이다’로 바꿔 적을 수 있습니다. 즉 자신으로 만나지 않은 관계, 내가 아닌 부하직원으로, 내가 아닌 부모님 말 잘 듣는 아들이나 딸로, 내가 아닌 허세로 꾸민 무언가로 만나는 관계는 사랑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상대방이 아닌 재력가의 자식으로, 내 성공을 증명하는 트로피로, 무조건 나를 보듬어줄 엄마나 아빠로 보는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나와 남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 속의 권력이나 외압, 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상대방을 보는 시선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아 이뤄진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를 얼마나 단호히 거부하고 상대방 자체에 몰입할 수 있는가가 사랑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요건이라는 것. 그걸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미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사랑이 아닌 것을 통해 사랑을 정의하겠다며 미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지만, 제가 봤을 때 그건 사랑이 반대말이기보단 사랑을 가능케 해주는 중요한 자질에 대한 강조로 보였습니다(정확히 미움이 사랑의 대척점인지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죠. 무관심일 수도 있고. 그리고 미움을 통해서 사랑을 그려보겠다는 그 시도가 사실은 미움과 사랑이 가지는 공통점에 대한 강조처럼 보입니다.). 진정한 미움이란 상대방을 없애기 위해 살인도, 감옥도 불사하겠다는 절절한 마음이라고 한다면, 이를 좀 더 고급스런 말로 ‘그 사람이 나한테 미치는 관계의 영향력을 지워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감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서의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닐까요?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부하직원과 상사와의 관계로, 집안과 집안의 관계로, 가면과 가면의 관계로 만들지 않으려는 단호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가가 사랑을 가능케 하는 가장 중요한 감정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정의 연속을 들었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그런 것들을 다 벗어난 ‘나답고’ ‘상대방다운’ 관계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런 게 있긴 하는 걸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저자가 말하는 사랑의 묘미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관계는 서로의 본질을 ‘발견’한 뒤 이에 끌려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단 강렬한 끌림 이후에 관계를 통해서 서로의 본질을 ‘만들어가는’ 관계라는 것 말입니다. 사실 우리의 본질, 즉 ‘나답다’라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나 스스로 정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건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정해지게 됩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요리사라 생각한다고 한들, 자신의 음식을 먹어주고 자신을 요리사라고 인정해주는 남들이 있어야 마침내 내가 사회적으로 요리사가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가 사랑이 본질을 만들어주는 과정에 적용된다는 것이지요. 내가 아무리 스스로를 주체로 생각해도, 누군가 나를 주체로 생각해주지 않으면 나는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주체는 주인이라는 말인데, 하인이 없는 주인, 관계를 통해 정의되지 않은 주인이란 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것은 나는 나를 하인으로 둬서 나는 주인이라는 형용모순일 뿐입니다.) 결국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들어주는 누군가가 있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랬을 때, 주인으로서의 내 모습이 비로소 드러나게 됩니다. 주인이란 자신이 가지는 감정과 생각, 그것들에 의한 행동을 표출하는 데 있어 어떠한 물리적 심리적 제약을 받지 않는 자를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표현을 받아주고 이를 좋아해주며, 심지어 그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를 배려하고 독려하는 누군가가 있을 때 그것은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통해서 나의 주인으로서의 감정, 생각, 행동은 점점 발전해가고 섬세해져가는 것이고, 그게 바로 내가 사랑이란 관계를 통해 나의 본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걸 저자는 ‘사랑은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관계’라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나를 위한 하인의 역할을 자처한 그 사람도 사랑에 빠질 때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관계’를 바라면서 사랑을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언제까지고 자신이 하인만을 해야 한다면 그 사람은 결국 나를 떠나버리고 말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주인이 되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그 사람을 위한 하인 노릇을 자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 속에서의 관계는 무척 유동적인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하인이 돼야 하는 순간이 있고, 어떤 때는 내가 전적인 주인이 되는 순간도 있습니다. 사랑에서 날 때부터 주인과 하인으로 타고난 고정적인 역할은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서로가 가진 본질이 고정적이고 확실해서 이를 보고 관계가 시작되는 게 아니라는 처음의 말과 통합니다. 나와 상대방은 주인과 하인의 역할을 번갈아 하면서 서로의 모습들을 빚어나가는 거고, 그게 사랑인 것이죠. 그래서 결국 상대방을 위한다는 행동들은 상대방이 해줄 하인의 모습을 기대하며 행하는 ‘나를 위한 행동’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연애할 누군가를 찾으며 나를 진짜 대단한 주인으로 만들어줄 상대방을 꿈꾸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 누군가가 SNS에 적은 날카로운 말이 떠오르는군요. ‘사랑해’란 고백의 가장 솔직한 버전은 사실 ‘사랑해 줘’라는 얘기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랑이란 관계는 사적인 감정을 며느리 남편 사모님 회장님 등등의 사회적 관계와 다른 ‘순수하게 사적인’ 영역으로 지켜내기 위한 투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제가 의문이 들었던 것은 때때로 주인이고 때때로 하인인 관계가 과연 진정한 주체와 주체의 관계인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고 싶은 욕망을 참고 하인을 감수하며 언젠가 주인이 될 날을 꿈꾼다면 그 욕망은 언제나 번번이 어긋나거나 충분히 충족되지 못할 것이고, 그것은 결국 결별을 불러오지 않을까요? 결국 이상적인 관계는 내가 주인으로서 행하는 생각, 감정,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사람 또한 주인으로 만들어주는 경험들을 가능케 하는 관계일 것입니다. 상대방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그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 나한테는 내 감정에 충실한 주인으로서의 행동이지만, 눈앞에서 그 춤을 보는 당사자는 자신이 마침내 주인이 된 듯한 감격에 빠지는 그런 종류의 경험이 가능한 관계 말입니다. 아, 생각만 해도 행복하지만 참으로 이상적인 관계. 어쨌든 사랑이란 거 하기 참 힘든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두 번째로는 과연 그런 경험이 둘 만이어야 하는 건지, 셋이나 넷의 관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조직이야 한 명 한 명을 모두, 동시에 전적인 목적으로 대우할 수가 없으니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셋이나 넷까지도 그것이 불가능한 일일까 하는 것입니다. 딱히 사례가 안 떠오르는 걸 보니 불가능한 건가 싶기도 하고, 삼총사의 all for one, one for all 같은 구호가 떠오르기도 하고. 이 문제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세상에 사랑의 감정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보다 훨씬 다양하다는 짐작으로 이 ‘둘의 경험’이란 전제에 대한 막연한 의문을 품어보았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아셨겠지만, 저자는 책에서 내내 ‘주인으로서의 나’를 굉장히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 주인이란 것은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보기에, 바로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을 주인으로 설정하기 위한 작업을 또한 굉장히 강조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인상으로는 저자가 실존주의자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본질은 가변적이며, 이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정의되기에 무엇보다 주도적인 관계 맺기를 통해서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갈 권리를 뺏기면 안 된다. 이 핵심 주장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의 명제와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책은 바로 그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염두에 두어야 하는 주제들에 대해 다룬다고 볼 수 있는데, 사랑이 그 첫 번째였고, 다음으로는 몸이 그렇습니다.
왜 몸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저자에게 있어 몸이 우리가 ‘보편’이란 이름으로 함부로 묶일 수 없는 ‘개별적’인 존재이며, 그 개별적인 존재의 본질이 또한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변해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가장 생생하게 증명해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말 중 인상 깊었던 대목을 되짚어 보면, 우리에게 ‘인간의 몸’이란 말을 붙이는 게 말이 되는 일일까요? 세상에 어떤 사람이 ‘인간의 몸’을 봤다고 말할 수 있나요?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몸을 볼 수 있을 뿐이고, 그 중에서도 내 친구의 몸, 애인의 몸, 나의 몸을 봐왔을 뿐입니다. 사람의 몸은 똑같은 구석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지요. 누구는 담배 한 개비 안 피고 간접흡연만으로 폐암이 걸리지만, 누구는 50년 동안 매일 한 갑씩을 펴도 건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또 피부가 조금만 밝은 곳에 있어도 타는 사람이 있고, 벌게지기만 할 뿐 절대 타지는 않는 사람도 있지요. 그 모든 것을 한 데 묶는 ‘보편성’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겐 멀쩡한 처방이나 환경이 누군가에겐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으니까요. 이처럼 우리는 몸이 개별적이기에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개별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몸을 통해서만 세상과 관계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자에게 몸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보편적인 정의는 ‘관계하는 물질’이란 정의입니다.
‘관계하는 물질’이란 정의를 좀 더 생각해봅시다. 그 누구도 정신만으로 관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플라토닉 러브는 정신과 정신의 교류일까요? 그건 상대방의 미소를 보는 시각과, 손을 잡는 촉각과, 말을 하고 듣는 입술과 귀가 함께하는 몸과 몸의 교류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세상과 정신으로 교류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글을 쓰고, 나한테 가장 어울리는 편한 자세를 잡고, 눈을 통해 보고 입을 통해 소리 내 읽으면서 글을 교정합니다. 이 또한 내가 몸을 통해서 세상을 내 안에 담고 정리하는 과정인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그 어떤 관계도 몸을 거치지 않고 맺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몸은 앞서 살폈다시피 그 누구와도 똑같지 않은 나만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나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그 누구와도 똑같아질 수 없는 개별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에게 몸은 무엇보다 소중한 최우선 순위이고, 정신에 앞서는 것입니다. 몸이 있기에 그 몸을 통해 맺은 관계를 정리하고 경험으로 쌓아가며 정신이 발달한 것이지, 정신이 몸을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저자에게 있어 정신이 존재하는 목적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뜨거운 냄비를 잡고 손이 덴 아이가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번에는 불 위의 냄비를 잡지 않게 해 몸이 상하는 것을 막는 기능만을 정신이 수행한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정신은 보수적이고, 몸은 진보적이라는 것입니다. 몸은 언제나 무엇하고든 관계하며, 새로운 관계에 이끌립니다. 그러나 정신은 그런 몸이 새로운 관계가 가지는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몸을 억제하고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정신이 새로운 관계를 유도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 관계를 진전시키거나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해선 몸의 말을 따라야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본질을 만들어가고 싶어 하는 존재들이 유념해두어야 하는 원리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여기서, 본질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몸’을 만들어간다는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잠깐 옛날 어르신들 말씀을 떠올려보죠. “공부를 머리로 하는 줄 아냐, 엉덩이로 하는 것이여” 이 말은 중요한 함의를 품고 있습니다. 공부는 ‘해야 한다’라는 마음가짐이나 순간의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에 적합한 몸을 만들어가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공부하고 글 쓰는 신체는 분명 톱질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신체와는 명백히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몸에 달라붙은 습관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변화시킴으로서 자신의 특징을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이전의 연인이 내 정수리를 어루만져 짜릿했던 경험이 있다면 그 순간부터 나는 정수리가 성감대인 특징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개별적이지만, 그 개별성을 자신의 의지로 변화시킬 수도, 더욱 발전시키고 특별하게 만들 수도 있는 그 무한한 가능성을 자신의 몸을 세상에 마음껏 굴리면서 실현시켜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연애가 될 수도 있고, 무술이 될 수도 있고, 글이 될 수도 있지만, 항상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존재이며, 그 관계는 무조건 몸을 매개로 진행되기에, 항상 몸에 집중하고 몸을 아끼며 몸이 이끄는 일을 거부하지 말 것. 그것이 나를 나로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임을 명심할 것. 그게 저자가 강조하는 몸에 대한 대강의 요지입니다.
다만, 저자가 따로 강조하거나 언급하진 않았지만 제 나름으로 느낀 점을 첨언하자면, 저자가 말하는 몸이 이끄는 바를 정신으로 억누르지 말라는 말이 내가 공부하거나 운동하다가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은 거 배 터질 때까지 실컷 먹고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몸이 이끄는 바를 따르라는 건 순간의 욕망에 충실하라는 말만으로 좁혀서 생각할 정도의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몸은 관계하는 물질이기 때문에 그 관계를 최대한 풍부하고 예민하게 느낄 수 있으려면 악기를 관리하는 것과 같은 꾸준함과 섬세함이 필요합니다. 내가 정말 맛에 미쳐서 몸을 이용해 맛이란 관계를 한껏 느끼고 싶다면 자신의 몸이 가진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술, 담배, 맵고 짠 음식 등을 철저히 거부하는 절제와 금욕이 필요하고, 연극에 미쳐서 자신의 몸을 연극과 가장 잘 관계하는 몸으로 만들고 싶다면 적어도 요가 같은 거라도 꾸준히 하는 정성이 필요한 것처럼, 몸이 원하는 걸 따라간다는 건 때로 지금 당장 몸이 원하는 걸 누를 줄 아는 강한 정신력을 동원하는 역설을 허용하는 일입니다. 이 때 정신은 진정 몸이 원하는 걸 뒷받침하는 도구로서 순기능을 하는 셈이 되는 것이죠. 정신으로 몸을 억누르지 말라는 말은 맛이나 춤, 글에 미쳤을 때 그 열정을 내 경제력에 대한 불안, 나를 떠날지도 모르는 관계들에 대한 상실감 등 오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규정하는 짓거리 때문에 버리지 말라는 말이지, 꼴리면 창녀를 사도되고 밤에 야식을 미친 듯이 먹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고독입니다. 고독, 홀로 있음. 이 말이 저자가 가장 싫어하는 말일 것임을 우리는 이미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관계를 통해 본질을 만들어가야 하는 존재들이 그 관계가 싫다고 이미 만들어놓은 관계마저 무너뜨리거나 혹은 거기에 안주해버리는 것이니까요. 새로운 관계가 우리를 완전히 죽여 놓을 수도,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래서 그게 무서워 고독이란 방어막을 쳐놓는 것이 안전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를 통해 자신을 재정의해 나가는 것이 삶의 본질이고, 이를 거부하는 삶은 제대로 된 삶이라 부를 수 없는,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닌 상태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고독 속에서 내 안에 빠져드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자가 내내 강조하는 대로 우리는 ‘타자가 매개되지 않은 자기의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뭐 독일 관념론의 결론이라고 하네요.) 관계 맺을 권리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개인적인 상처의 경험뿐만 아니라 사회도 우리가 삶의 본질에 맞게 사는 것을 방해합니다. 사회의 생산성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통해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저자는 다른 말로 ‘몰입’이라고 부릅니다(어떤 관계로 자신을 재구성할 정도면 그 관계는 몰입이란 단어로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강도를 가진다고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는 모두가 몰입하고 싶은 것에 거침없이 몰입하게 됐을 때의 불규칙성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각 조직의 구성원들이 사진을 좋아하건 여행을 좋아하건 섹스를 좋아하건 모든 조직은 자기 구성원들이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자리에서 모두가 평균치 이상의 성과를 ‘무조건’ 내는 식의 규칙성, 예측가능성을 보여줄 것을 요구합니다(그게 근대사회의 특징이기도 하죠. 관리의 용이성의 추구.). 그러나 각자가 원하는 대로 여행에 꽂혀 휙 떠나버리고, 출사를 나가버리고, 내키는 대로 모텔에서 하루를 보내기 시작하면 조직이 추구하는 예측가능성은 완전히 무너져버리기 때문에 모든 조직은 우리에게 ‘사’와 ‘공’의 구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사’와 ‘공’의 구분이 우리는 고독하게 만드는 주범임을, 그 지침에 따르는 게 내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생존전략일 수는 있어도 정말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옳은 원칙이자 도덕이 될 수 없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대안을 택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지, 그런 조직의 수작질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내면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게 저자가 고독이란 주제를 통해 강조하는 점입니다. 결국 고독과 싸운다는 건 단순히 잠깐 우울한 기분을 툭툭 털어 전환시키는 간단한 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상처와 싸워 새로운 시도를 행하는 용기를 냄과 동시에 그 시도를 방해하는 외부의 압력 또한 물리쳐야 하는, 내 안과 밖을 모두 적으로 돌리는 엄청난 과제가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더럽게 힘든 일을 시도하는 과정을 진정한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겠죠.
결론적으로, 이 책에서 다루는 세 가지 주제를 종합해보면 이렇습니다. 고독은 우리 삶의 가능성의 실현을 방해하는 가장 나쁜 상태이기에, 관계를 통해 다른 대상들에 몰입하는 과정을 강한 의지로 계속 관철시켜 나가야 하고, 그 몰입의 능력을 높이기 위해선 우리가 가진 몸을 살피고 이를 항상 예민하게 열어놓아야 하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우리를 진정한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최고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것. 그 이유는 나와 똑같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그 가능성을 실현할 권리를 가진 귀중한 누군가가(현실사회에서 모두가 똑같이 귀한 대접을 받진 않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또 서로가 서로를 똑같이 귀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대우해주는 관계 속에서만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그처럼 무한히 귀한 존재라고 인정해 줄 때, 우리는 마침내 가장 신뢰도가 높은 공인을 받은 주인공으로 재탄생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러한 지극한 행복감을 느끼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관계 맺기를 시도하며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가다듬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남은 두 권을 책을 더 읽어보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만, 앞으로도 반복될 이 저자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1권에서 잡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존재만으로 개별적이고 특별하지만, 그 특별함은 관계를 통해서 유지되며 새롭게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본질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다. 그게 주체가 되는 과정이며,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타자가 매개되지 않는 자기의식’은 없기 때문에, 주체가 되는 과정은 곧 ‘주체적인 관계 맺기’의 과정이고, 어떤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돌아갈지언정 그 본질적인 과제를 결코 놓아서는 안 된다. 이게 저자의 핵심 주장인 듯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말은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 실존주의의 명제랑 통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짐작을 해봤다는 점도 말해두고 싶군요. 제 철학에 대한 이해가 짧아 뭐라 가치판단을 내리기는 뭐하지만, 어쨌든 저자의 주장이 제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셨나요? 뭐가 됐든, 저자의 선명성이 우리에게 더 복잡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를 어떤 행동으로 풀어갈지는 우리들의 몫이겠지요. 아무리 구체적이고 친절하게 다가온다고 해도 철학은 역시 철학인가 봅니다. 이 잔인해서 매력적인 책을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