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다상담 2 - 일, 정치, 쫄지마 편 강신주의 다상담 2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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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주의 다상담 2권입니다. 이 책의 주제는 일, 정치, 쫄지 마군요. 1권의 주제가 비교적 사적이며 나의 결단으로 변화를 만들 수 있는 폭이 비교적 큰 관계들을 다뤘다면(사랑, 몸, 고독), 두 번째 책의 주제들은 좀 더 복잡하며 나의 결단을 통한 변화보단 결단 후의 후환을 더 고민해야 하는 ‘권력관계’ 속의 ‘나’를 다룹니다. 여기서 ‘나’는 당연히 그 관계 속의 약자들을 말하는 것이겠지요(강자면 그 속에서의 고민 때문에 상담 신청을 했을 리가 없으니).

 

 2권에서도 핵심 주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권리는 주체적인 관계 맺기를 통해서 온다. 이런 얘기입니다. 다만 여기서 덧붙여지는 얘기와, 약간 다른 분위기를 통한 강조가 있는 것인데요. 덧붙여지는 얘기는 프롤로그에 나오는 ‘’NO‘라고 말하며 살자!’입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얘기인데, 주체적인 관계 맺기는 다름아닌 관계를 선택하는 과정입니다. 선택이란 게 한자로 보면 ‘選擇’인데, 둘 다 ‘가려내다’로 번역이 됩니다. 선택이란 다른 게 아니라 ‘아닌 걸 버리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관계를 맺을 때 무엇보다 나한테 맞지 않는 것들을 거부할 수 있는 근성을 길러놓아야 나다운 인생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로 내 인생에 열렬한 'YES'들을 만들어가는 과정 또한 필수적이죠. 열렬한 YES를 지키기 위해 NO를 해내건, NO를 계속하는 부정의 과정을 통해 마침내 YES를 찾아내건, 중요한 건 그 선택의 권리가 항상 나한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직이나 기업, 정부, 부모님이 아니라 말이죠. 이 책에서는 바로 거대한 조직, 강한 권력 관계 속에서 나의 주체적인 관계 맺기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고민하기 때문에 조직과 권력에 NO를 할 수 있는 근성에 초점을 맞춰서 프롤로그를 짠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른 분위기를 통한 기존 주장의 강조는 첫 번째 주제인 ‘일’에서부터 드러납니다. 뼈대는 이렇습니다. 일이란 것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모든 일이 다 일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뭐 일은 ‘자아실현의 수단’이니까요. 나는 B(Birth)와 D(Death) 사이에서 한 C(Choice)로 만들어지는 것이고, 모든 C는 다 행동이 수반되는 것이니, 나의 C를 통해서 나온 모든 행동은 다 나를 만들어가는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나를 둘러싼 관계를 바탕으로 나온 것이고, 그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도 하지요. 내가 어떤 가수의 노래를 듣고 감명을 받아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그것은 나를 만들어가는 선택을 통해 ‘일’을 한 것이 되는데, 그 노래를 통해 남들이 다시 내게 영향을 받기 시작하는 그런 순환작용이 일어나는 걸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원에 꽃을 심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방 청소를 하는 것도 모두 내가 영향 받은 관계로 인해 한 행동으로 다시 내가 영향을 미치는 행위들인 것이죠. 책 안에서 나오는 일일부작 일일불식은, 이런 식의 논리 속에서 해석하자면 너는 오늘 하루 네가 원해서 하는 관계 맺기를 하나라도 했는가? 그렇게 주인으로서 조금이라도 살았는가? 그러지 않았다면 살았어도 산 것이 아니라는 말로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직장이 없더라도, 아니 오히려 직장이 없기 때문에 진짜 내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그 사람의 방청소를 해줬다면 그건 내 일을 한 것이고 오늘 하루를 살 자격이 있는 것이지만, 직장에서 하루 종일 야근을 해 정말 내가 잘해드리고 싶은 어머니에게 전화 한 통도 못했다면 그건 무엇과 관계 맺을지의 선택을 내가 아니라 회사가 한 것이니 내 일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원하는 관계를 맺기 위해 오늘 하루 얼마나 노력했나를 돌아보고, 그 노력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내 일을 한 것이 되고 아니면 아니라는 것. 그것이 일을 정의하는 저자의 중요한 전제입니다.

 

 다만, 이 뼈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시킬까라는 부분에 있어서 저자는 1권보다는 조금 더 조심스럽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래서 내가 원하는 관계 맺기를 위해 남들이 강제로 정해주는 일을 안 하겠다고 해버리면,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조차 사라져버리기 십상인 것이 현재 한국의 노동현실이니까요. 그 엄연한 현실을 아무리 철학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전제만 고집하며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이 정말 내가 원해서 선택한 일이고 그걸로 돈벌이까지 가능하다면 환상이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남이 시키는 일은 대충 해라’ ‘회사에서 인간관계를 바라지 말고 밖에서 찾아라.’ 등입니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에너지를 아껴두는 일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프롤로그를 참고하면 원칙상으로는 우리는 남이 멋대로 시키는 일에 대해 ‘NO’라고 말하며 'YES'의 공간을 확보해두어야 하지만, 그랬다간 오히려 더 힘든 상황에 처할 수 있으니 'YES인 듯 YES 아닌 YES 같은 상황들'을 의도적으로 만들며 밍기적대라는 겁니다. 결론은 어떤 식으로든 내가 스스로 관계 맺을 자유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원칙대로는 못하더라도)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한국 사회가 이런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얼마나 사람들이 고립되어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예전이었으면 이런 상황들을 이야기하며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서로 뭉쳐서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를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조직도, 활동도 보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연대를 통한 승리의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만 희생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앞서버리는 무력한 사회가 돼버린 거죠. 저자는 그런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렇다 해서 시도조차 안 하면 안 되니 땅이라도 파 피해있으라고 조언해주는 겁니다. 각개 전투로 각자 알아서 살아남자고 말해버리는 거죠. 가장 근본적인 철학자조차 이런 조언을 해줘야 하는 사회라...우린 어디까지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그렇지만 현실적인 조언이긴 합니다. 내 일로 돈을 벌 수 없다면 돈 버는 일은 따로 하되 내 일을 할 시간-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여유를 어떻게든 마련해 놓는 쪽으로 가보라는 조언이니까요. 그리고 좋아하는 일, 좋아하지 않는 일이 무엇인지를 그런 근무태만으로 한 번 확실히 정해보고 좋아하는 일에 진짜 열정을 쏟으라는 말도 괜찮습니다. 그렇게라도 우리는 살아나가야 하는 거겠죠. 사회학적인 개념으로 ‘노동소외(노동과 향유가 분리된)’라 불리는 이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아직 그 근본적인 해결책이란 게 실현된 적이 없으니).

 

 그렇다면 이제 두 번째 주제인 정치를 살펴봅시다. 진정한 자기 삶의 주체들이 모여 만드는 정치란 과연 어떤 걸까요? 모릅니다. 저자도 모르고 저도 모릅니다.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으니까요. 당연한 겁니다.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공인데, 남들도 다 자기 삶의 주인공이면서 그게 조화를 이루는 관계, 그 관계를 이루는 구조라는 게 가능하기나 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사랑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내가 주인공으로서 한 행동이 남들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관계라는 거, 기억하시나요? 그게 수천만 명에게 동시에 서로서로 가능한 관계라는 게 과연 가능한 것이겠습니까? 적어도 그런 상태가 '국가'라는 조직을 유지하면서 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국가는 저자가 인용한 가라타니 고진에 의하면 '수탈과 재분배의 기구'이니까요. 여기서 수탈과 재분배란 강제로 다른 사람의 소유를 뺏어(세금 같은 걸로) 재분배를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모든 국가가 이를 수행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럴 때, 국가의 차별이 일어납니다. 더 뺏을 게 많은 사람을 우대하게 되는 것이죠. 삼성이 정부 재정에 더 큰 영향을 미칠만한 세금을 내기 때문에 정부가 우대해주는 일 등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적 소유를 인정하는 국가 권력이 자본과 결탁하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사적 소유를 모두 없애고 모든 걸 국가 소유로 돌려야 하는 걸까요? 저자는 이는 사적 소유보다 나쁜 퇴행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의 발전은 莫非王土를 주장하던 왕정의 소유에서 사적소유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간 것이지, 모든 걸 국가가 소유하는 식의 왕정 복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진짜 주인공들의 정치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적 소유를 공동 소유로 만들어가는 방향입니다. 아무도 '영원히' 가지지 않아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영역이 극대화된 사회가 바로 진정한 정치가 기능하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뭐 토지 공개념, 임대 주택, 공유경제 등등이 이런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궁극적으론 수탈과 재분배의 기구, 국가가 해체되고 모든 영역이 이런 공유의 영역이 되는 과정이 정치의 과정이라고, 저자는 말하는 것 같군요.

 

 그렇지만 저자는 여기서 다른 의미로 근본적입니다. 수탈과 재분배의 기구가 저자가 바라보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는 아니지만, 그 기구를 구성하는 과정들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곧 정치적인 행동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선거는 여전히 중요하고, 최대한 덜 나쁜 사람이 뽑히는 건 대단히 중요합니다. 똑같이 수탈과 재분배를 한다고 해도, 그 오십보백보의 차이에서 실제 삶의 많은 중요한 부분들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4대강을 하는 거랑 국민 연금을 늘려주는 거랑은 똑같은 수탈과 재분배의 과정이지만 체감하는 결과가 천양지차인 것과 같은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현실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그 동안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유는 수탈당할 게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적극적인 정치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진 사람들인 이유 또한 정부의 성향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그들 재산의 규모가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정치는 이처럼 소유관계에 따라 움직이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직시하면서도 조금이라도 그 소유관계를 현실정치의 힘으로 약화시키려는 쪽-공유의 영역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는 쪽-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수탈당할 게 많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가져야 하는 정치의 기준이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근본적인 태도인 것이죠. 정치에 있어 근본적인 태도란 최선이 나타날 때까지 모든 걸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라, 최선에 아주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고 하고 이에 제일 가까운 사람을 뽑되, 그 약간의 성공이 곧 자신이 원하는 완전한 성공이 아님도 확실히 인지하는, 영원한 불만족의 태도입니다. 모든 것이 공유가 되어 더 이상 수탈의 과정도 필요 없어지고, 대표가 사라져 모두가 주인으로서 행동하면서도 모두와 조화를 이루는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말이죠. 당연히 거의 불가능한 것 같지만, 진짜 민주주의는 이런 걸 말하는 거고 나머지는 이를 향해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걸 확실히 해두는 건 꼭 필요한 과정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수천만 명을 단위로 해서 그렇지,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협력의 자세를 말하는 것일 텐데, 누군가를 도와주는 행동을 강압이나 돈이 아닌 순수한 기쁨에서 우러나와 하는 경우라든지, 아니면 도와준다는 생각도 없이 그들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라 생각해서 정말 내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로 적극적인 참여에 나선다든지 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 않나요? 그걸 어떻게 기르고 넓혀나갈까 하는 이야기이지 아주 씨알도 안 먹히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 씨알이 매우 작은 것이라고 해도요.

 

 이쯤까지 가면 쫄지 마가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는 좀 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프롤로그를 떠올리면 되는 거지요. 처음 프롤로그가 NO라고 말하며 살자!였던 걸 기억하시나요? 자기를 만들어가는 관계를 알아서 잘 맺기 위해서는 멋대로 내게 침입해 들어오는 이상한 관계들을 쳐내는 걸 쫄면 안 된다는 겁니다. 단, 내게 멋대로 침입해 들어오는 관계들이란 게 굉장히 강한 권력이거나, 우리 감정을 약하게 만드는 요사한 것들인 경우가 많고, 또 우리들이 그걸 그렇게 당당하게 NO라고 했다간 한 방에 훅 갈 수 있으니 일단 뻔뻔해지기부터 하라는 충고를 해주는 것이죠. 여기서 뻔뻔해진다는 건 그런 강자들을 속여먹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기. 그리고 남들이 그런 자기를 두고 어떤 욕을 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기입니다.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는 건 일 편에 나왔던 근무태만 하라는 충고랑 비슷한 맥락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막는 것들에 대해 NO라고 강하게 말할 수 없다면, YES라는 거짓말을 하면서 NO를 살살 비겁하게 행하라는 겁니다. 단 그 짓이 비겁한 짓이며, 언젠가는 당당한 NO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는 하라는 것이지요. 저는 여기서 김중배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80년대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시평을 맡으면서 굉장히 독재에 비판적인 글들을 썼지만, 그 비판을 직접적으로 행하지 않고 비유와 풍부한 인용으로 핵심 메시지를 돌려 말해 알아먹을 사람들은 충분히 알아먹으면서도 동시에 큰 영향과 감동을 줄만한 굉장한 글들을 쓰셨지요. 그게 독재 치하에서 납작 엎드린 척 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놓지 않으려 했던 그 분이 택한 방식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정권을 인정하는 척 거짓말을 하며 뒤로 호박씨를 까는 고난이도의 뻔뻔함을 행한 거지요. 그렇지만 동시에 이 분은 자신의 그런 행동을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꾸미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난 그 때 비겁했다. 부끄러운 짓이었다.'라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시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살아남으면서도 그 살아남음 때문에 자신의 품위를 전부 팔지는 않겠노라 이를 악문 자만이 해올 수 있었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그리고 그 줄타기를 해낸 자가 획득한 당당함을 봅니다. 꼭 독재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사소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들(가정, 직장, 쓸데없는 규범 등)에 있어서 우리는 뻔뻔함으로라도 저항해야 하며, 그러면서도 자신을 지키는 영리함을 길러놓아야 함을, 그렇게라도 자신만의 인생을 만들어가야 함을 알고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이 억지로 당당하려는 태도보다 더 오래, 여유롭게 생활 전반에 걸쳐서 싸울 수 있는 태도라고, 저자는 말하는군요.

 

 욕먹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건 사실 이전에도 주변에서 들었을지 모를 생활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모든 관계에 들어맞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특징은 다른 누구에겐 결점일 수도 있는 겁니다. 문제는 결점이라 생각하는 사람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특징을 결점이라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감추고 싶어 하고, 그렇게 한 사람의 개성이 살아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이지요. 허스키 보이스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주변의 한 사람이 자기에게 듣기 싫은 목소리를 가졌다고 말했다 해서 그걸 결점이라 생각하고 노래를 안 불러버린다면, 제니스 조플린 같은 목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올 기회마저 차단시켜 버리는 일이 아닐까요? 욕먹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건 나의 어떤 부분 때문에 떠나가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나를 지나치게 학대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 부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때, 그로 인해 다가올 다른 관계들에 더욱 최선을 다하면 될 일이며, 그것이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임을 알라고, 그러니 쫄지 말라고, 저자는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모험을 하는 것에 대해 쫄지 말라는 것하고도 연결됩니다. 추신에서 저자가 밝혔듯이, 우리는 타자를 통해서 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타자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하고 살 수 있습니다. 라캉이 <에크리>에서 주장하는 것처럼요(저자가 그렇게 인용하는 듯합니다.). 이 때, 타자를 통해서 자기를 만든다는 그 공식을 바꿀 수는 없지만, 어떤 타자를 만날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가지는 주체성인 것이지요. 그러나 그 만남 또한 과거 우리의 경험들을 통해 굳어진 성향, 사회적 관례, 조직적 억압 등을 통해 규정되어 버리고 패턴 화되기 쉽기 때문에, 어쩌면 새로운 관계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질 나의 욕망, 하고 싶어 할지도 모를 일들이 있는지도 모른 채 사라져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기존 관계가 끊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관계가 다가오는 걸 쳐내지 말라는 것이지요. 내가 착하게 웃는 모습이 좋다고 사람들이 모인 거였으면, 나는 내 기분이 별로여도 사람들이 떠날까봐 착하게 웃는 모습을 가짜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정색해버리라는 식입니다. 그렇게 정색한다고 떠나 버리는 사람들이면 보내버리고, 내가 정색하면 정색한대로 나와 어울릴 수 있는 관계를 기다리거나 찾아 나서라고 조언하는 것이지요. 그런 끊임없는 탐색의 과정-싫은 걸 확실히 싫어한다고 표현하고, 좋은 건 확고히 좋다고 표현하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의 리스트를 계속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내 주변에 나와 어울리는 진정한 관계들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어떤 도덕보다 우선하는 것이기에(실존은 본질에 우선하는 것이지요.), 그런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도 상관없고, 그 과정을 지키기 위해 때로 이기적이라고 욕을 먹을 만큼 폐를 끼치는 행동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뭐? 라고 말하며 계속 그 탐색을 계속하는 뻔뻔함(저자는 이혼하고 부모 집에 얹혀살며 연애만 한다 해도 그게 정말 자기 행복을 만들어가는 데 중요하다면 부모 눈치 절대 보지 말라는 식으로 조언해주죠.). 그게 저자가 말하는 진짜 중요한 쫄지 마! 의 주제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이 과정은 고독할 수 있고 쓸쓸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마지막에 인용한 '달나라의 장난'을 쓴 김수영처럼요. 그러나 우리는 내 마음이 끌리는 것들을 해보고 알아가려는 노력,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 무엇과 관계 맺으려는 노력을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관계들마저 나를 버릴지라도, 그리고 기존의 관계들마저 떠나갈지라도 그런 끊임 없는 시도들이 우리를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렇게 나를 만들어 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나와 진정으로 어울리는 진정한 관계가 다가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지는 것일 테니까요. 각자의 주인된 행동이 자연스레 상대방도 주인으로 만들어주는 사랑의 관계 말입니다.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해 모두의 고유한 리듬을 획일화시키려는 모든 것들에 저항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거창한 정치권력일 수도 있지만, 사실 훨씬 더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부터 저항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진정한 변화도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자가 일에 대해서, 그리고 쫄지 않는 자세에 대해서 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철저히 주체로 모두가 설 때, 우리의 정치는 마침내 가능해질 것입니다. 모두를 어떤 집단으로 묶지 않고 개별자로 남아 마침내 서로의 리듬을 존중하며 어우러지는 이상적인 정치 말입니다. 집단을 나누지 않기를 바라는 노래인 존 레논의 Imagine을 인용하며 책을 끝납니다. 그 노래를 오늘 다시 한 번 들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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