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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해 말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조르바도 저자도 아닌 그리스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대해 어떤 것도 아는 것이 없는 저조차 친숙함을 느끼고 만들 정도로 이 책은 시종일관 그리스, 그 중에서도 크레타 섬이 가진 풍경, 풍속, 그리고 음식에 대한 육감적이고 생생한 묘사로 넘쳐납니다. 아나그노스티 영감네 집에서 먹는 돼지 불알, 크레타 여인들의 부풀어 오른 가슴, 사람들이 달려들어 목을 따버린 과부의 붉은 피와 그 피처럼 붉은 포도주, 축제의 격렬한 춤 등등, 그리스인 조르바의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크레타 섬이며, 그 중에서도 크레타 섬에 대한 단순한 감상이 아닌 내가 먹을 것, 마실 것, 몸을 움직여 성교하거나 춤추고 싶은 아주 체험적이고 본능적인 것들에 대한 묘사들이 책의 이야기와 절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이는 크레타 섬이 저자의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인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며, 이곳이 가진 풍요가 조르바와 어울려 가질 수 있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조금만 더 크레타 얘기를 해보면, 왜 저자는 크레타라는 섬을 자신이 쓸 소설의 무대로 택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섬이란 곳이 가진 특징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섬은 고립이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접촉을 통제할 수 있는 독립이기도 하며, 뭍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기도 합니다. 또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에 대해 자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달리 말하면 자신들의 본성을 드러내는 데 있어 법의 강력함보다 유지나 마을 관례라는, 더 폐쇄적이지만 더 잔인할 수도 있는 장치들의 통제를 받는 공간이기도 하지요. 뜬금없는 비교일 수도 있지만 크레타를 비슷한 시기 우리의 제주도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물산이 풍부하여 스스로도 자급자족에 큰 무리가 없던, 뭍의 지배를 싫어하던 섬. 뭍의 이념 논쟁 때문에 4.3을 겪어야 했으며 이것에 처절히 저항하던 제주도와 터키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독립투쟁을 벌여야 했던 크레타의 역사는 어딘지 닮은 데가 있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섬으로 간다는 것은 귀양이라는 고립의 의미이기도 했지만, 흑산도에 갔던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썼듯이 자신의 문제에 천착할 수 있는 수양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기도 하며, 윌리엄 골딩이 파리 대왕이라는 소설에서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듯, 법의 지배가 상대적으로 약해지는(과거에) 섬이란 곳은 문학에서 인간이 본성에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초입부에서 저자는 친구를 떠나보내고 자신의 고향 크레타에서 갈탄광을 운영할 계획을 세우고 탈 배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나오죠. 저자 실제의 경험이 반영된 소설임을 감안할 때, 카잔차키스가 자신의 고향, 섬으로 돌아가려 했다는 것은 스스로의 처음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려 했다는 것인 동시에, 이것에 있어서 다른 부당한 개입을 차단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가능한 섬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 섬이 풍요로운 크레타가 아니었다면 조르바를 만날 수 있었을까. 만났다고 한들 조르바와 그처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고립되지 않았다면 저자도 조르바도 자신들의 문제에 그렇게 깊이 빠져들지 못했을 것이며, 풍요롭지 않았다면 조르바는 자신의 기를 펼치지 못했을 것이고, 법의 강력함에서 한 발짝 떨어져 아직 문화적 관례와 사람들의 본성이 느슨하게 엮여있는 곳이 아니었다면 그 사람들과 조르바, 저자가 맺는 관계는 사뭇 달랐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따지고 보면 섬이라는 공간은 조르바가 말하는 자유란 것의 의미를 더욱 간명하고 단순하게 보여줄 수 있었던 장치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문학 속에서 표현하면 장치이겠지만, 현실 속에서 벌어졌던 이 같은 일은 운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의 처음에 언급했던 느낌을 좀 더 파고들면, 크레타의 풍요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조르바가 가지는 관련성은 무엇일까요. 사실 저는 이것을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육체가 가진 질펀한 욕망이 정신의 고귀함, 강건, 더 높다고 일컬어지는 쾌락과 분리된 것이 아니며 사실 이 모든 것들의 전제조건이라는 것, 영혼의 영원함이란 것이 육체라는 한시적인 그릇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며, 이것이 바로 크레타와 조르바가 서로 끈끈하게 엮인 키워드로 등장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조르바는 결코 배고픈 상태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돼지 불알이건 양고기건 스튜건 일단 입에 집어넣고서야 입을 떼는데, 그 때 그의 입에서는 가장 간단한 말로 철학적인 이야기들을 해내죠. 육체적인 욕망을 금기시하지 말 것, 자신이 가진 가장 원초적이고 질척한 욕망이, 추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근본임을 알 것. 조르바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간이란 참 묘한 기계지요. 속에다 빵, 포도주, 물고기, 홍당무 같은 걸 채워 주면 그게 한숨이니 웃음이니 꿈이 되어 나오거든요. 무슨 공장 같지 않소. 우리 대가리 속에 발성 영화기 같은 거라도 들어 있나 봐요.” p.366
그렇지만 여기서 유념해두어야 할 것은, 육체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행위들이 단순한 전제조건만은 아니며, 오히려 육체적인 욕망과 영혼적인 갈망은 인과관계가 아닌 일종의 합일 관계라는 것을 아는 일입니다. 조르바는 먹고자 하는 것, 섹스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거침이 없지만, 동시에 자신이 해내고자 하는 것, 즐겁고자 하며 새로워지고자 하는 욕망에 이것을 대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갈탄광에서 일할 때는 갈탄광이 되는” 사람이며,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그 순간에 모든 걸 던질 줄 아는 용기와 강인함과 몰입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단순히 동물적인 욕망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는 살고자 먹었을 것이며, (조르바 식 표현대로 한다면) 새끼를 까기 위해 섹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맛있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서 먹고, 여자가 좋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서 섹스를 하는 것이죠. 여기에 그가 가진 질펀한 품위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동물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릇을 빚는데 방해가 되므로 왼쪽 새끼손가락을 쳐버리는데 거침이 없을 만큼 동물적인 열정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합일점의 가장 극적인 부분에 춤이 있습니다. 조르바는 먹을 만큼 먹고, 자신이 어떤 기쁨에 다다랐을 때 춤을 춥니다. 이 때 첫 부분에서 그가 추는 춤은 “갑자기 자연의 법칙을 정복하고 날아가려는 듯이 공중으로 펄쩍”(p.104) 뛰는데, 이 같은 춤은 뒤에 조르바가 러시아인 친구를 만난 얘기를 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갈탄광이 완전히 망해버린 뒤 마지막 만찬을 하는 장면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여기서 춤은 무엇일까요? 신체가 가진 즐거움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수단이자, 의식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것까지 표현할 수 있는 동물적인 몸짓이며, 모든 것이 망한 후에도 망가질 수 없는 자신의 신성한 내면을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육체라는 그릇과의 가장 극적인 합일점이 아닐까요. 그렇기에 처음에 금욕적이었던 저자는 마침내 자신이 갈망하던 과부와 잠자리를 하고 끝부분에선 조르바에게 춤을 배웁니다. 그리고 조르바와 함께 춤을 추죠. 순간의 충동을 끝 간 데까지 즐길 수 있는 사람. “식료품 상인처럼 항상 여분을 남겨두려고 하는 이성”의 걱정을 뒤로하고 끝까지 가 볼 수 있는 강한 사람. 조르바는 동물적인 사람도, 이기적인 사람도, 옳은 사람이나 착한 사람도 아닌 바로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자는 그를 그렇게 닮고자 했으며 그것이 훗날 미국 사람들이 이 책에 굳이 ‘그리스인’이라고 원제와 다른 이름을 짓게 만든 이유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욕망을 발산하면서도 거침없이 당당하고 자유로웠던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신의 원형을 조르바에게서 보았기 때문이었겠지요. 옳고 그름 속에 숨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당당히 하고 그 뒤의 결과를 후회 없이 감내해 낼 수 있는 그 모습이 바로 저자가 꿈꿨던 ‘초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제 이를 모두 살펴보고 기록으로 남긴 저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저자는 금욕적인 태도와 지식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이를 달리 살펴보면 금욕적이고 지식만을 추구할 뿐 세상에 대해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을 겁내하는 인물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열등감은 저자의 친구들에 대한 언급을 통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스타브리다키라는 친구는 그리스 민족의 수호를 위해 카프카스의 전쟁터로 떠나고, 카라얀니스라는 친구는 그리스 민족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아프리카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신의 야성을 과시하려 하지만, 저자는 양 극단에 선 두 친구 사이에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방황할 뿐이죠. 사실 따지고 보면 두 친구 사이에는 차라리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을 것입니다. 각자 자신이 믿는 것을 향해서 자신을 거침없이 돌진시키는 행동력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저자는 어떤 것에도 명확한 확신을 가지지도 못하고 쉽사리 행동하지도 못하는 나약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크레타에서 자신만의 사회주의 공동체를 만들어보려고 했던 야심은 이렇게 보면 친구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열등감에서 나온 퇴행적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여기에서 조르바를 만나면서 저자는 두 친구와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조르바 또한 터키와의 독립전쟁, 불가리아와의 독립 전쟁에서 병사로 참여했을 만큼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저자를 만났을 때의 그는 그리스를 사랑하지도, 그리스를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것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이 그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하는 저자보다 더 큰 행동력을 가지고 갈탄광의 인부들의 목숨을 구하고, 죽을 위기에 처한 과부를 위해 나서기도 하며, 누군가의 정부가 되어주기도 하지요. 스스로의 내면적인 욕망에 거침없는 사람이 이것이 가진 악행의 가능성을 꺼려 숨기는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낸다는(물론 악행까지 합쳐서, 조르바는 많은 악행- 전쟁터에서의 살인, 강간 등 - 이후에 지금의 모습에 다다른 것으로 나옵니다.) 사실은 저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까요. 저자가 이후에 무엇을 하였는지는 구체적이지 않고 조르바가 권한 녹암을 보러 달려가지 않은 걸 보아 조르바처럼 살지는 않은 것 같지만 적어도 앞서 말한 춤과 섹스를 통해 무언가 변화를 겪긴 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재미있는 건 조르바 또한 저자를 두목이라고 부르며 그 책을 경멸하는 것 같다가도 오르탕스 부인이 죽은 날처럼 견딜 수 없는 의문이 드는 밤이면 저자의 책을 들먹이며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육체적인 삶 속에서 그것의 의미를 독특한 종교관으로(초자연적인 것도 완벽히 현실적인 것도 아닌 신 앞에서도 저항 할 수 있는 인간관으로) 풀어내고 있는 조르바와, 금욕을 통해 영혼의 갈망을 해소하려는 저자가 점차 그것을 위한 길에 육체를 배제할 수가 없음을 깨달아가는 저자 간에는 겹치는 부분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겁니다. 버찌를 잔뜩 먹어 배부른 뒤에야 버찌를 멀리할 수 있었다는 조르바나, 붓다의 철저한 부정을 배워 붓다조차 부정하기 위해 붓다에 대한 원고에 빠져드는 저자 간에 가진 공통점이 보여주듯이 말이죠. 이 둘은 다른 출발점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관계인 동시에, 서로에게서 배우는 관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았을 때 비로소 왜 조르바가 자신과 비슷한 많은 악행(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직접 행하기는 꺼려하는)을 행한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지 않고 자신의 품위를 찾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르바는 자신을 둘러싼 많은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놀라워하며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 이전에는 자신의 몸을 던져 행하고 얻은 경험이 놓여있지요. 다른 이들은 그것으로 '알았다'고 생각하고 말고 그저 똑같은 일만을 할 뿐이지만, 조르바는 왜 세상에 노새가 있는지를 궁금해하고, 바다의 색깔에 놀라며, 몇십번도 넘게 보았을 봄 꽃의 자태에 놀라 환장하며 뒹굴어댑니다. 저자는 생각했을 뿐 생각한 것을 행하지 않았기에 그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었다면, 조르바는 일단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행한 후에 그 행한 결과를 놓고 이것의 의미에 대해 솔직하게 놀라워하며 모르는 것을 간절히 알고 싶어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는 다른 것 같지만 어쨌든 의미를 알고자 하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만날 수 있었고, 조르바 또한 저자에게 무언가를 질문하며 가까워졌던 것이겠지요. 진정으로 알고자 한다면, 자신이 가진 가장 내밀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질문이어야 하고, 그 질문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스스로가 하고자 하는 것을 일단 해보고 보는(just do it!) 강인함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육체에 한껏 파고들면서 육체에 갇히지 않고 자신을 끊임없이 젊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조르바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을 표본으로 내세우는 듯합니다.
반대로 금기와 금욕 안에 숨은 이들의 이중성에서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수도승과 마을 사람들을 통해 구체화되는데요. 먼저 수도승들을 살펴보죠. 수도원이 가진 임야를 사기 위해 조르바와 저자는 수도원에 방문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들은 금욕이란 이름 아래서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기는커녕 더 추해지거나, 더 무력해진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공공연히 남색을 행하고 치정에 싸여 살인을 행한 수도승, 아래 사람보다 아래 소식에 더 관심이 많으며 성욕을 어쩔 줄 몰라 흙으로 여인상을 빚거나 평생에 걸쳐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글을 베껴 썼지만 조금의 지혜도 얻지 못하고 무력하게 늙어버린 주교 등등의 모습을 보며, 인간성을 억누르는 것들이 어떤 아름다운 말로 치장되어 있다고 한들 그것은 인간을 더욱 추하게 만들 뿐임을, 거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의 디테일한 모습을 통해 알려줍니다. 이것은 꼭 종교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금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을 경계하고, 특히 외지에서 온 과부에 대해 경멸어린 시선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갈망합니다. 단지 선뜻 나서서 이를 행하지 못할 뿐이죠. 그러다 그 과부가 공공의 적이 되었을 순간, 품위 있는 척 하며 있던 마을 사람들은 그 과부를 일제히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오히려 결정적인 순간 이들을 막으려고 들었던 사람은 그 과부에 대한 욕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던 조르바였지요. 또 다른 과부인 오르탕스 부인이 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을 안에서는 이 부인을 천박하다고 멸시하지만, 그가 죽는 순간에 누구보다 천박해지는 것은 마을 사람들입니다. 죽은 사람의 재산을 가져가기 위해서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곡을 해버리려는 노파들이나, 아예 창문과 문짝까지 뜯어가기 위해서 서로 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책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천박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에도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 죽음 그 자체를 슬퍼하고 여기에 가장 원초적인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오르탕스 부인이 가진 평가가 어쨌건 말건 그녀와의 관계에 최선을 다했던 조르바였죠. 여기서 묻게 됩니다. 그가 자신의 욕망을 금기에 맞추려 들지 않는 것이 그렇게 천박한 일인지, 오히려 우리가 가진 비겁함을 적절하게 포장하려고 하는 것이 금기가 아닌지 말입니다. 이는 자신의 선택에 당당해지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비겁함을 사회의 시선으로 책임을 돌리려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완벽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는 모를 수 있지만, 어떻게 산 사람이 제일 부럽고 매력적인지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조르바에 대해 누군가 쓴 평이 있더군요. “현대문학이 만들어낸 가장 원기 왕성한 보통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원기 왕성함이, 강인함이 우리에게 묻는 듯하군요. 너희들은 얼마나 나약한지, 그 나약함을 가리는 금기와 금욕을 깨고 홀로 설 수 있을지를 말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살아있다는 그 사실에만 충실했던, 나 같은 사람은 천년을 살아야 하는데...라는 유언으로 삶의 진정한 기쁨을 만끽했음을 증명했던 조르바를 품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