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에게 보기 좋게 낚였다. '평균모멘텀스코어'에 대해 추가적으로 조사하고 있는데, 눈치 빠른 AI 녀석이 관련 도서라며 이 책을 슬그머니 추천해 주었다. "오호, 대가의 꿀팁이 숨겨져 있나?" 싶어 도서관에 달려가 빌렸건만, 웬걸. 책을 아무리 뒤져도 평균모멘텀스코어의 '평' 자도 안 보였다. 완벽한 AI의 배신이었다. 두고보자 제미니...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으로, 기대치도 않았던 괜찮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저자인 문병로 교수는 여의도 출신 타짜가 아니라, 무려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라고 한다. 즉, 이 책은 촉이나 감이 아니라 수학적 통계와 알고리즘 최적화로 주식시장을 분석한 너드의 연구 결과물이다. 저자는 투자를 철저한 '수학적 확률 게임'으로 정의하며, 화끈한 대박 대신 "크게 잃지 않는 장기 복리 마법"을 주창한다.
방대한 한국 주식시장 데이터를 통해 저PBR, 저PCR 같은 가치 지표가 실제로 써먹을 만 한지 숫자로 증명하는 반면, "골든크로스면 풀매수 가즈아!"를 외치던 차트 분석가에겐 팩트폭력을 날린다. 복잡한 거시경제 예측이나 인문학적 직관이 부족한 나로서는, 숫자로 명쾌하게 이야기하는 이 책의 까칠한 스타일이 훨씬 마음에 든다. 1장 제목부터가 자그만치 "확률의 게임, 수치로 계량해 보지 않고는 가지 말라"이다. 화끈한데?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남의 나라 미국 시장이 아닌,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국산 주식(K-증시)' 데이터로 백테스트를 했다는 점이다. 저PBR, 저PER 같은 전통 가치투자가 한국 땅에서 과연 통하는지 검증하기 위해 엄청난 페이지를 할애한다. "국장에 삼전 말고 살 게 있나?"를 외치던 동학개미들이라면 정신이 번쩍 들 데이터들이다.
다만, 내 개인 투자 스타일과는 거리가 좀 있어서 가치지표 분석 후반부는 흐린 눈으로 대충 넘겼다. 저자는 분석 과정에서 데이터 업데이트 때문에 수많은 재작업이 있었다고 담담히 회고하는데, 문득 그 과정에서 영혼까지 갈려 나갔을 대학원생들의 슬픈 실루엣이 보여 잠시 눈물을 훔쳤다. 아마 연구실에선 이런 대화가 일상이었으리라.
대학원생: 교수님! 시키신 30년 치 PBR 10분위별 수익률 패턴 분석 코딩 끝냈습니다! 퇴근해도 되겠습니까?
교수: 어, 수고했네. 그런데 주말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PBR 0.2 이하인 애들은 노이즈 같아. 걔들만 싹 빼고 월요일 아침까지 다시 돌려놓게나. 오늘이 금요일이니 시간은 충분하겠지?
대학원생: (내 주말)...
4장 차트 패턴 분석 파트의 결론도 아주 심플하고 뼈 때린다. "차트 분석은 지나치게 주관적인 영역이니, 거기 목숨 걸고 전 재산 태우지 마라."
내 기준으로 이 책의 진주는 1장과 5장이다. 저자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하는 단어는 '기하평균'이다. 주린이들은 흔히 단리 개념인 '산술평균'으로 주식 계좌를 굴리다 깡통을 차지만, 진짜 자산이 복리로 늘어나는 마법을 부리려면 '기하평균'을 뇌에 박아넣어야 한다는 것. 이 개념은 뒤이어 나오는 섀넌의 도깨비나 켈리의 공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 책을 덮으며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두 가지다. 첫째, 그 유명한 '켈리 베팅'을 복잡한 수식 없이 룰렛 게임으로 이해시켜 준 저자의 미친 설명력. 둘째, 이건 아마 저자가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샤프지수의 분자엔 기하평균이 아닌 산술평균이 들어간다는 깨달음이다. 조금만 머리를 굴려보면 당연한 거였다. 분자에 기하평균을 넣어버리면 변동성 드래그(Volatility Drag) 때문에 분자에서 한 번 까이고, 분모에서 표준편차로 나누며 또 한 번 까이니 위험을 이중으로 독박 씌우는 꼴이다. 어쩐지 내가 직접 백테스트 돌릴 때마다 샤프지수가 바닥을 기어 다니더라니, 범인은 내 수식 오류였다.
저자가 강조하는 내용을 나름대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 투자는 직관이나 운빨이 아니다. 계량 가능한 확률 게임이다.
- 변동성 시궁창인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안 잃는 것'이 대박 치는 것보다 100배 중요하다.
- 안 잃으려면 자금 관리와 분산투자로 내 계좌의 널뛰기(변동성)를 묶어놔야 한다.
- 네 안의 탐욕과 공포를 믿지 말고, 검증된 원칙대로 매매하는 로봇(시스템)이 되자.
솔직히 침대 머리맡에 두고 가볍게 읽을 만한 만화책 수준은 아니다. 수식이 쏟아지진 않지만 확률통계 까막눈이라면 읽다가 뇌 정지가 오거나 책을 던져버릴 수도 있다. "3개월 만에 10억 버는 차트 기법" 같은 자극적인 비법 약장수를 기대했다면 아주 크게 실망할 책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제 값을 한다. 주식시장에 가득 낀 환상을 처참하게 부수고, 자산운용이라는 냉혹한 전장의 본질을 직시하게 해주는 진짜 '맵고 칼칼한' 주식 교과서다.
제미니야, 비록 낚았지만 좋은 책 추천해 줘서 고맙다. 이런 실수는 봐줄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