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도서관에서 책 읽기 - 36차시 단계별 독서수업
백화현 외 지음 / 우리교육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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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이 나왔으면 좋겠다. 내용은 좋다. 변하한 매체의 성격을 반영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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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문법 한국의 탐구 33
이익섭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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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성분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었는데 

이 책에는 문장 성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내가 원하는 책은 아니었다.  

위의 평점은 무시하십시오. 선택을 하지 않으면 등록이 되지 않아서 

편의상 찍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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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경제학 2 - 서민 경제의 미래 위험한 경제학 2
선대인 지음 / 더난출판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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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선생들,,, 교장 교감들 좀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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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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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서점에서 직접 내용을 확인한 후 구입을 하는 경우가 적다보니 후회도 그만큼 많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저자를 만나본 후에 구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뵌 적은 없지만 내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인 그분을 먼저 만났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평범한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동네에서 가끔 만나는 할아버지 중의 한 분? 그러나 강의를 일단 시작하니 신명이 나시는지 중간 중간 말을 떠시는 듯한 어조로, 땀을 흘리시면서까지 열심히 강의를 하시는 모습에서 그분의 남다른 면을 보는 것 같았다. 평범한 삶은 아니지 않은가 그의 삶은...그리고 그의 생각은...

저자와의 만남은 “나의 생각은 어떻게 나의 생각이 되었는가?”라는 아주 원초적이면서도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질문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강의 주제도 모르고 일단 덥석 신청을 했었다. 그러나 강연장에 들어서면서 주제를 확인한 순간 전율을 느꼈다. 이런 질문을 해 본적도 없이, 나의 생각은 진짜 나의 생각이려니 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 갑자기 무서워진 것이다.
비어 있던 내 생각이 어떻게 채워졌을까? 그것은 바로 지배 세력에 의해 주조된 지식이 아무련 의심 없이 암기에 의해서 아니었던가. 그들은 국가 권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그들을 위한 지식을 세뇌, 주입을 시켰고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여 암기만 한 것이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생각을 바로 내 생각인양 착각하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무서운 말이었다.

모두 자기의 생각을 고집한다. 그러나 자기와는 다른 생각을 듣고 그것이 옳다고 여기면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데 바꾸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생각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화를 한다. 지식인은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합리화의 귀재라고도 할 수 있다. 주입되어 외운 지식이 나의 생각을 지배하여 고정시켜 버렸기 때문에 배치되는 다른 생각이 들어오면 기존 생각이 새로 들어오는 생각을 배척한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인간의 생각을 운전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직진만 하는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는 핸들만 주어졌는데 그것마저 고정되어 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그 핸들은 내가 고정시킨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고정시켜 놓은 것이다. 주체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고 주입된 지식대로 생각을 하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갖고 있는 지식에 물음을 던져서 주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변곡점을 형성할 때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바로 독서다. 남이 주입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내가 읽어낸 그것이 나를 변화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입력된 것을 굳게 믿고 그대로 생각하지 말고 실제로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연장선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계층 의식에 대한 말씀이 이어졌다.


현재 한국사회는 인간의 존업성을 기준으로 보면 콜럼버스의 깨진 달걀 모양 형태를 하고 있다. 깨어진 부분은 이 기준 아래에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X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하위 계층이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은 채 고통과 불행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나타낸다.

이 기준선 바로 윗부분에 있는 이른바 중산층이나 중산층에서 아래 쪽에 있는 사람들(중하위층)은 늘 불안하다. 왜냐하면 기준선 아래로 추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IMF를 겪어 보아 그 위험성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현 위치를 지키기 위해 오늘을 저당잡힌 채 경쟁의 세계로 내 몰려 있다. 경쟁하여 이겨야 자신의 위치를 지키든지 아니면 치고 올라가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유와 굴종 의식에 사로 잡혀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미리 챙겨야 한다는 강박 관념 속에 물질적 소유에 집착한다. (아마도 돈, 부동산일 것이다.) 또한 돈, 자본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간다. 이른바 치욕적인 굴종인 것이다. 돈에 대한 머리 조아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리를 저질러도 미리 확보하고자 하는 생각이 강하다 보니 비리도 용납한다. 결과적으로 경제 동물로 추락한다. 이른바 20(상위 계층) : 80(중위, 하위 계층) 사회가 바로 현대 사회인데 이 사회에서의 생각도 언론이나 미디어 등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제도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하여 환상을 주입하고 있다. 몸은 80에 속해 있으면서도 생각은 20에 속해있는 것처럼 한다. ‘내 자식은 현재는 80에 속해있지만 미래의 어느날에 서울대 에 갈 것이니까’라고 생각한다. 미디어는 성공신화를 계속 주입한다. 그러나 가능성은 로또에 당첨될 확률과 같다고나 할까. 미디어에 늘 나오는 것이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이다. 여기서 성공하였다는 것은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기 배반적 사고를 하면서 스스로 분열하고 있는 것이 80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아주 소극적이고 사회 현상에 무관심한 계층이다. 80이라는 숫자만 보아도 지배층인 20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만 바로 이러한 소극성과 무관심으로 인해 이 사회는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가는 것이다.

우리가 나아가야할 사회는 달걀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기준선 위에 자연스럽게 누워있는 형상이 되어야 한다. 중산층이 넉넉하면서 하위계층이 적고 극단적이고 이기적인 부자도 적은 사회가 바람직하지만 위에서 말한 자기 모순적이면서 자기 배반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그러한 사회로 발전하지 못한다.

오히려 현재는 아래 부분이 깨어진 아령형 또는 8자형 사회로 가고 있다. 여전히 달걀은 깨어진 채로 있다. 아령 또는 8자 모양에서 아래 부분이 깨어져 기준선 아래로 내려가 있는 사회 구조 모양으로 악회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기준 밑에서 고통을 받을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이다. 중산층을 양옆에서 지긋이 눌러 중산층이 몰락하고 상위 부유 계층이 많아지며 인간의 존엄성을 못 지키거나 위협받고 있는 하위 계층이 부풀어 오르는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이다. 상위 계층은 부의 대물림을 통하여 자신의 지위를 지켜나간다. 그라나 중하위층은 지킬 수가 없다. 추락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간단하게 보면 세금 증세와 상위 계층의 양보를 통하여 하위 계층을 지원하여 이들이 중산층으로 올라가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기득권층과 지배세력이 만들어내고 주입한 지식대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계층에 맞는 정상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내 생각을 내 생각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독서와 토론, 직접 견문, 성찰을 통하여 가능하다. 그러나 현대 한국은 제도권 교육과 미디어에 의해 이 길이 차단되어 있다. 제도권 교육에서 학생인 나는 주체가 아니라 객체의 대상일 뿐이다. 국가 권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지식이 주입되고 암기만이 횡행하고 있을 뿐이다. ‘왜’라는 질문은 용납되지 않는다. 미디어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거나 나는 상위 계층에 올라설 수 있다는 이미지나 욕망 체계를 주입하여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바로 자본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나를 말해 준다거나 어떻게 사냐고 하니 그랜저로 대답한다라는 이런 황당한 광고를 통하여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황당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하나는 국가주의 교육과 학교의 비민주성 해결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 서열화 폐지이다. 학생, 학부모, 교사가 주체이어야 할 학교는 교장과 이사장이 주체가 되어 마음대로 재단하고 있다. 이런 자리에서는 주체적인 사고 활동은 불가능하다. 명확하지 않은가 이사장과 교장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대학 서열화 문제도 심각하다. 대학 서열화는 인문사회과학 서열화까지 가져왔으며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외우게 만들어 놓았다.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하여 역사를 외무려 시인 이름 외우기나 시의 출전 위우기에 올인하고 있다. 글쓰기 교육도 뒷전이다. 이렇게 주입된 지식 가지고는 주체적인 인간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또한 앞에서 말한 독서와 열린 자세의 토론, 직접 견문, 이것들을 바탕으로한 성찰이 필요한다. 독서를 통한 지식과 사고력 함양은 주입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 것이다. 열린 자세의 토론은 나하고 달리 생각하는 사람을 주체적으로 만나는 자리가 될 것이요 직접 견문을 통하여 세계와 만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성찰을 통하여 진정한 자아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내가 내 생각의 주인인 주체적이면서 자유로운 인간으로 말이다.

덧붙여

질의 응답 시간에 나온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신문의 생존 수단과 존재 이유와의 모순 관계에 대한 언급이다. 자본과 정치 견제라는 언론의 존재 이유를 지키려면 언론 자체의 생존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신문의 생존은 광고에서 온다는 무서운 이야기가 나온다. 한겨레신문의 경우 운영비 중 독자에게서 나오는 돈은 약 20% 정도이고 나머지는 광고 수익에서 온다고 한다. 재작년부터 한겨레신문에 삼성이 광고를 중단했는데 그 해 손실은 70억여원, 그런데 삼성 광고비도 70억여원. 이 손실을 만회하기 위히여 ‘초록 마을’을 팔았다는 것이다. 신문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한데 그 주된 수입원은 광고고, 광고의 주된 수입원이 대기업이라는 것이다. 자본에 대한 예속을 피하려면 광고 수입을 줄이고 독자들에게서 오는 돈이 더 많아져야 하는데. 그 방법은 신문 구록료 인상 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도 함부로 하기가 어렵다는 것. 가뜩이나 시장 점유율도 낮은데 구독료를 인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생존을 하여야 자아 실현도 가능하다. 그러나 생존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면 경제 동물로 떨어진다. 인간답게 살면서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긴장을 해야 한다. 그런데 緊(긴)을 유지하려면 張(장)도 필요하다. 아마도 이때 긴은 자아 실현이고 장은 생존인 듯하다. 생존(장)을 최저점으로 낮추어 잡고 자아 실현(긴)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긴을 유지하려면 최소한의 장을 유지하는 양보가 필요하다. 생존을 위하여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감아 버리면 안 된다. 생존은 최소한의 조건으로 하면서 자아 실현을 통하여 이 사회를 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프랑스는 소득 5000불 정도에서 이미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 제도를 이루었다. 우리는 2만불이 넘는다. 이미 물적 토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못 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한데 그 재원은 세금을 통해서 마련해야 한다. 국민부담률을 보면 우리는 25% 수준이지만 북유럽은 50% 수준이다. 세금 폭탄이 아니라 세금 핵폭탄이 필요하다. 우리는 반대로 가고 있다.



여기서 잠깐 ‘무상 교육, 무상 의료’를 언급하면 바로 좌파, 빨갱이가 바로 튀어나오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공화국, 즉 REPUBLIC이라는 말 속에는 공(公) 개념이 들어가 있다. 나라가 인민의(껄적지근하면 민중, 국민)의 공적인 면인 공공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라는 것이다. 우리는 교육자본이 사회화되어 있는 것이 니라 철저하게 사유화 되어 있어서 사회에 환원한다는 개념이 없다. ‘내가 내 돈 들여 공부해서 의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뿌리를 뽑아야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의사가 되는 비용을 사회가 부담한다면 달라질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사회에 돌려준다는 공개념이 살아날 것이다. 유럽에서는 이미 이것이 실현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 나라는 빨갱이 나라인가? 아 참! 우리나라 헌번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되어 있다.

질의 응답 시간에 이루어진 답변 내용도 물론 대부분 책에 있는 내용이다.


중요하지 않는 내용이 없다. 우리 모두 곱씹으면서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한다. 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 아니라 누군가가 주입한 것이라면 나는 헛 살아온 것이 된다. 이제부터라도 진짜 나의 생각을 갖기 위해서, 진짜 주체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겠다. 교과서만 달달 외우는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독서하면서 의문점을 갖고, 열린 마음으로 토론 하면서 잘못된 점을 수정하고, 직접 견문을 통하여 세상을 몸으로 받아 들이고 성찰을 통하여 진정 올바른 인식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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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 개정2판
모티머 J.애들러 외 지음 / 멘토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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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쪽 
'제14장 문학 서적 읽는 법'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종류로 따지면 소설(nonfiction) 분야를 비소설(fiction) 분야보다 더 많이 읽고, 비소설 분야에서는 신문이나 잡지와 같이 당장의 관심 거리를 다루는 내용들이 인기가 있다.> 

소설이 fiction 이고 
비소설이 nonfiction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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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2009-12-21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34쪽
'소설 읽는 법' 중에 다음 구절이 있다. 어떤 의미일까?

<소설을 정말 좋아하는 독자들은 잠깐 멈추고, 음미하면서,가능한 한 아주 오래 질질 끌면서 읽는 경우도 있다. 하디만 이렇게 읽는 것은 사건이나 인물을 무의식적으로 느끼면서 바람직하게 읽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 사건이나 인물을 무의식적으로 느끼면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인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