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자서전 범우 사르비아 총서 107
안중근 지음 / 범우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2, 갑오농민전쟁의 소용돌이

 동학당의 폭행에 맞서다.

 

14 - 15족을 보면

 

동학당에 대한 평가 아주 부정적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동학당이 벌떼처럼 일어나 한국이 장차 위태롭게 된 기초가 만들어졌고 일본, 청국, 러시가가 전쟁하게 된 원인을 낳은 병균이 되었다고  (   ) 속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글이 안의사가 쓴 글이 맞다면

당시 역사 흐름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인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서전에 따르면 그대 나이 16세라고 되어 있다. 아무리 양반가 출신이고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므로 이것은 인정한다고 해도.

 

15쪽 '매국단체 일진회' 제하의 설명은 편집부 쪽에서 넣은 것 같은데. 그 당시 기술로 이렇게 까지 하지는 알았을테니까 말입니다. 범우사 편집부에서는 동학농민전챙은 전부 부정적인 면만 잇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설명을 첨가한 후 수정하는 것이 올바른 길인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사진 설명입니다.

 

동학당은 일진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으며 일진회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 송병준과 이용구를 주축으로 하여 고종 양위와 한일합병에 앞장섰다. 사진은 일본인과 뒤섞여 있는 일진회 자위단 원호대으 모습(1908년 이용구의 집)

 

 아무리 생각해도 이 동학당은 동학농민전쟁을 일으킨 그 동학당이 맞는 것 같은데

그럼 이 동학당이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었단 말입니까? 나중에 송병준과 이영구가 만든 단체 아닌가요? 조선 패망으로 가면서 변질된 것이라는 설명이 없다면 이 책을 읽을 학생들에게는 동학농민전쟁의 부정적인 면안 인식시켜 평생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루 빨리 수정하여 주기 바랍니다. 제가 구입한 이 책도 수정후 교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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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nard 2013-11-22 0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시 소년 안중근은 양반가의 자제로 동학혁명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동학군으로 일본에 쫓기고 있었던 김구선생을 안중근의 선친이 숨겨준 것이 계기가 되어 동학과 일본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눈뜨게 되었고, 대한제국시기 만주에서 실력양성운동에 힘쓰다가 일제의 마수에 나라가 병탄될 위기에 처하게되자 분연히 떨쳐 일어나 무장투쟁의 길로 나아가 마침내 1909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거사를 행하게 됩니다.동학당의 일원이었던 이용구 등이 동학을 일제의 수하로 만들어 자신들의 입신에 이용하고자 하였으나,손병희에 의해 제명 축출되었고 그 후 이용구 등은 일진회를 만들어 매국노 이완용일파와 매국경쟁을 하며 강제합병후의 출세와 영화를 꾀했으나 일제에 의해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는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그러한 변화를 다 겪기 전에 안중근 의사는 사형당하고 말았으니 그의 글에는 미완의 내용이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 2014-07-20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러내요

yilisha 2015-09-12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maynard님 말씀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네요.
이등박문을 처단할 당시 안중근 의사는 동북아의 판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이등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공영체를 만들 계략을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우리의 영웅인 동시에 중국의 은인이시기도 합니다.
이등이 계속 살았다면, 우리와 중국은 지금쯤 또다른 상황에 직면해 있겠지요.
이등이 죽은 다음, 일본은 계속 극단적인 군국주의로 치달아 패망의 길을 갔는데도,
지금도 그 길이 옳았다고 발악하고 있습니다(아베).
이등을 동아시아의 여우라고 불렀다는데, 기억이 정확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