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동 만행 박물관 - 한일 역사의 진실을 알려 주는 동화 다릿돌읽기
고정욱 지음, 최현묵 그림 / 크레용하우스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 :진실동 만행 박물관 /  한일 역사의 진실을 알려 주는 동화

 

 

 

지은이:

저자 고정욱은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문학 박사이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은 그는 1급 지체 장애인으로 휠체어를 타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지만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아주 특별한 우리 형』『안내견 탄실이』『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희아의 일기』『스마트폰이 사라졌어요』『친일파가 싫어요』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특히 『가방 들어주는 아이』는 MBC 느낌표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코너에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까칠한 재석이가 사라졌다』를 발간해 청소년들의 열화와 같은 인기를 얻었다.

 

 

그린이 최현묵은 대학에서 시각 디자인을, 한국 일러스트레이션 학교에서 일러스트를 공부했다. 옛이야기나 인물 이야기 등 다양한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린 책으로는 『우장춘, 씨앗의 힘 씨앗의 희망』『나무 도령 밤손이』『우리들의 숨겨진 여행』『코끼리 아줌마의 햇살 도서관』『세종대왕 가출 실록』『이선비, 암행어사 되다』등이 있다.

 

출처: 교보문고

http://book.naver.com/product/go.nhn?bid=9428040&cpName=kyobo&url=http%3A%2F%2Fwww.kyobobook.co.kr%2Fcooper%2Fredirect_over.jsp%3FLINK%3DNVB%26next_url%3Dhttp%3A%2F%2Fwww.kyobobook.co.kr%2Fproduct%2FdetailViewKor.laf%3FmallGb%3DKOR%26ejkGb%3DKOR%26linkClass%3D%26barcode%3D9791185903125

 
 
 
내용:
이야기의 주인공 용균이와 민지는 만행 박물관이 있는 진실동에 살고 있습니다. 박물관은 일본이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든 곳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수상한 일본인이 만행 박물관에 불을 냅니다. 그 화재로 인해 만행 박물관은 보수 공사를 위해 문을 닫고 말지요.  용균이와 민지는  방학 숙제를 위해 박물관에 몰래 들어가게 되고 주인공들의 모험이 시작됩니다. 을미사변관 , 3?1운동관, 독도관,중일 전쟁관, 한국혼 말살관, 일본군 위안부관을 거치면서 못된 폭탄이랑 싸우기도 하고 우리 조상들의 아픈 이야기에 슬퍼하기도 합니다.
 
 
p13
대일본 제국은 과거에 동양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과거에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억지를 쓰다니
이런 식의 엉터리 박물관을 만든 너희 조센징들은 깊이
반성하라!
우리는 이 박물관을 불태워 버릴 것이다!
결코 대일본 제국은 역사의 왜곡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응징만이 있을 뿐이다.
 - 몇년전에도 위안부상에 말뚝을 갖다놓은 일본 사람이 최근에 아래 기사와 같은 짓을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가능하게 용인하는 일본내의 분위기가 우려스럽니다. 원래 일본의 속주로 삼아 영구히 일본땅으로 삼으려고 공들이다가  40년도 안되서 쫗겨나갔으니 많이 섭섭한 마음이 들겠다 생각은 들지만 일본국인들은  과거에 너무 매달리면  안됩니다. 그러다가 세계최초 원자탄 실험장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도 과거에 얽메여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단, 절대 어떤 역사적 사실이 있었는지 망각하거나 왜곡해서 기억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말뚝 테러 일본인, 이번엔 다리 없는 소녀상 보내 '파문']


위안부상 말뚝 테러 일본인이 이번엔 다리가 없는 소녀상을 보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20일 SBS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 19일 오후 4시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경기도 광주 소재 나눔의 집에 '유신정당·신풍 스즈키 노부유키'(鈴木信行)가 보낸 소포 한 통이 도착했다.

해당 소포에는 '제5종 보급품'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5종 보급품은 군인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 여성을 뜻하는 말이다.

상자 안에는 일그러진 얼굴 표정으로 무릎 아래가 없는 소녀상 모형이 들어 있었고,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적힌 말뚝도 함께 있었다. 이 우편물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도 배달됐다.

우편물을 발송한 사람은 일본인 스즈키 노부유키다. 스즈키씨는 2012년 6월 당시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 소녀상에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고 적힌 말뚝을 세운 극우 정치인이다. 그는 지난 16일 자신의 블로그에 소포로 보낸 것과 같은 형태의 위안부 모형 4개를 촬영한 사진과 함께 '5월16일, 한국 위안부박물관에 관련 물품을 증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은 "위안부 피해자를 모욕하는 테러행위여서 경찰에 수사를 의뢰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검찰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스즈키를 기소했고, 지난해 법원은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스즈키가 입국하지 않아 영장을 집행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뚝 테러 일본인' '말뚝 테러 일본인' '말뚝 테러 일본인' '말뚝 테러 일본인'

온라인 뉴스팀

출처:  http://news.zum.com/articles/22140953


 
 
 
p27
"지금이야! 가자! "
용균이와 민지는 소리 나지 않게 달렸습니다. 가슴이 콩콩 뛰었습니다,
아저씨들이 들어간 쪽문을 열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 캄캄한 어둠이 용균이와 민지를 맞았습니다.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흥미진진해지는데요.
 


 
p33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일본 공사 미우라는 일본군 수비대 및 담당 경찰관까지 동원했습니다. 일본인 아다치가 경영하는 한성신보라는 신문사에서 일본 칼잡이들도 하수인으로 고용하고 조선 훈련대 간부 우범선, 이두황,이진호 등 친일파들도 끌어 들였습니다.
마음이 급한 미우라는 말했습니다.
"하루라도 지체할 수 없다. 일정을 앞당겨라."
예정일었던 음력 8월22일이 아니 8월 20일 새벽에 바로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명성 황후를 시해한 것입니다.
-미우라 일본 공사야 자기네 나라의 국익을 위해 상부의 지시를 받으면 얼쩔수 없다지만 도대체 우리 나라 고위관리들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싶어 찾아보았습니다.우범선처럼 대한제국의 처벌을 받지만 않으면 본인의 일신은 물론 아주 오래 오래 부귀와 영달을 누렸더군요.
 


우범선(禹範善, 1857년 5월 24일 ~ 1903년 11월 24일)은 조선대한제국의 무신, 군인, 정치인으로, 을미사변 당시 조선인 협력자이자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한 조선 말기의 고위 인사의 한사람이었다.

일본 망명 후에 대한제국 정부의 지시를 받은 자객인 고영근에 의해 암살됐다. 대한민국의 생물학자인 우장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B%B2%94%EC%84%A0





 

이두황(李斗璜, 1858년 1월 11일 ~ 1916년 3월 9일)은 조선대한제국의 무신, 군인이자 을미사변 관련자이며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을미사변 당시 도성 훈련대 제1대대장으로 있었으며, 조선인 고위 협력자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본관은 인천(仁川)으로 자는 공칠(公七), 설악(雪嶽)이다.

을미사변 관련자 가운데 이주회박선 등은 사형당했고, 이두황, 우범선, 구연수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 가운데 우범선은 자객에게 암살당했으며, 이두황과 구연수는 14년 동안의 망명 생활 동안 살아남아 1907년 대한제국 순종 즉위 후 귀국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 아래 대한제국 중추원 부찬의와 전라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1910년부터 1915년경까지 전라북도 장관 직에 있었다. 그밖에 각종 사회단체에도 참여하여 제국재향후원회 조선지회 전라북도부회장(帝國在鄕後援會朝鮮支會全羅北道部會長) 등을 맡아보기도 했다. 1916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도 서훈 받았다. 일본 체류 때부터 일본 불교를 믿게 되어 자기의 장례도 화장으로 치르게 하였으며, 장례식은 간소하게 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동학농민운동 진압 중인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작성한 진중일기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가 발굴된 바 있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91%90%ED%99%A9






이진호(李軫鎬, 일본어: 李家軫鎬, 1867년 8월 30일(음력 8월 2일) ~ 1946년 9월 3일)는 조선 후기의 개화파 무관이며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아호는 성재(星齋)이다. 본관은 전의. 3.1 만세 운동 당시 시위를 진압하는 자제단 창립에 참여하였고, 전북 자성회, 전남 자성회의 출범을 주도하였다.

그는 10년 동안 일본에 머물러 있다가 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한 뒤 돌아와서 중추원 부찬의, 평안남도 관찰에 임명되었다. 관서 지방에 민족 의식을 고양하는 사립 학교가 많이 세워지는 분위기를 견제하고자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되었을 때는 교장을 역임했다.

1910년 경상북도 장관, 1916년 전라북도 장관, 1919년부터 1921년까지는 전라북도 지사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박중양 등이 이를 반대하고, 그해 4월 유학파 지식인, 관료와 지방의 지주들을 규합하여 곳곳에 자제단을 구성하자, 이진호 역시 4월 중순, 자신이 지사로 있던 전라북도에 전북자성회를 조직하고 전남자성회 조직에도 참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거나 집에 돌아갈 것을 권고하여, 만세 시위와 독립 운동 확산을 막았다.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 촉탁(1921), 조선중앙위생회 위원(1921), 조선구락부 발기인(1921)를 거쳐 1924년에는 총독부 학무부 국장에 임명되었다. 총독부 부서의 국장은 일본인이 맡는 것이 관례였으며, 조선인 학무국장 역시 유일하게 이진호와 엄창섭만이 역임했을 정도로 희귀한 일이었다. 3·1 운동 이후의 회유책인 문화통치 전략의 일환이었다.

공적을 인정받아 1934년에는 중추원 참의, 1941년에는 부의장, 1943년에는 고문이 되었고, 귀족원 의원에까지 올랐다. 말년에도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각종 친일 단체에도 적극 참여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1940),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에 가담한 기록이 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출처: 위키백과



법원 "국가는 친일파 이진호 후손에게 귀속 재산 돌려줘라"
       

[쿠키 사회] 조선총독부 학무국장까지 역임했던 친일파 이진호의 후손이 국가에 귀속된 토지를 법원 판결을 통해 돌려받게 됐다. 친일 대가로 땅을 얻었다는 사실을 국가가 입증해야 한다는 취지다. 
 
서울고법 행정11부(부장판사 최규홍)는 이모(52)씨 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친일재산국가귀속결정취소 소송의 파기환송심에서 “고양시 땅을 후손에게 돌려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20일 밝혔다. 
 
이진호는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식민사관을 전파하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다. 정부는 2008년 그의 후손이 소유한 경기 고양시 땅 2만3000여㎡을 친일재산환수법에 따라 국가로 귀속했다. 

이진호의 손자 이모(52)씨 등은 이에 불복해 소송을 냈지만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이후 대법원은 “일제 강점기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나 후손들이 소유권을 입증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며 “친일 대가로 땅을 얻었는지 여부는 국가가 증명해야 한다”고 원심을 파기하고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1853년 작성된 이씨 일가의 족보를 보면 그때부터 고양시 땅에 이씨 일가의 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진호가 친일 대가로 땅을 얻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친일 후손들의 ‘땅 찾기’ 소송이 이어지는 가운데 청주지법은 지난 5일 친일파 민영은의 후손들이 제기한 토지반환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 했다. 반면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이해승의 후손은 2010년 대법원에서 ‘친일 대가로 받은 작위로 볼 수 없다’며 승소 판결을 받았다. 법무부 관계자는 “2010년 7월 이후 확정된 67건의 친일 재산 환수 행정소송에서 국가가 64건 승소한 상태”라고 밝혔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


출처:쿠키뉴스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soc&arcid=0007771457&cp=nv










 
p47
"그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부르짖었어. 전 세계 민족이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이었지. 그레서 우리는 튼 희망을 갖게 되었단다. 우리 민족이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게다가 이 무렵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을 했고 , 인도는 자신들이 스스로 정치 할 수 있는 자치권을 얻었단다. 그 소식을 들으니 더더욱 우리도 독립해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거야."
- 하지만 전승국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의 외침에 귀기울여 주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망국의 국민은 천덕꾸러기 일뿐이니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힘을 키워야 겠다는 것이 과도한 민족주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p68
그뿐만이 아니라 조선에 돌아와서는 나라의 허락 없이 다른 나라에 갔다고 호된 벌까지 받았습니다.
 - 역사는 반복됩니다.
 
  
p109
"그뿐만이 아니야. 일본은 젋고 꽃다운 우리 여인들을 위안소로 끌고 갔단다. 끌고 간 여인들을 일본군의 성노예로 만들었어."
 - 행동의 자유가 박탈된 노예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위안부를 성노예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른 것인데 정신대라고 속여서 데려가서는 위안부를 시키거나 강제로 노예사냥하듯이 끌고 같으니  범죄인것 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전시라지만 엄연히 일본은  법치국가인데 이런 짓을 직접  저질렀거나 자행되도록 방치한 것은 관리로써 일본국의  헌법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한 일본 관리들도 일본법에 따라 처벌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선진 법치주의 국가의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p128
용군이와 민지는 서둘러 집으로 향하며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천하면서 우리나라에 힘을 보태면 예전 같은 일을 다시는 당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당당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서는 역사를 공부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 신일을 지향하시는 분들이 만든 국정교과서 말고 다른 교과서로 공부해서 말입니다.
 
  
 
 
 
감상:
역사는 반복된다 하더군요.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와 소름 돋게도  전쟁이 가능한 신일본을 만드려는 아베 신조 총리의 이름이 비슷합니다.
거창한 일을 할수는 없지만 각자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조국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좋은 쪽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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