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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테드창의 신작이다.
전작 '당신인생의 이야기'를 감탄하며 읽었던 때가 생각난다.
SF라면 유치하고 순문학보다 깊이가 얕고 어린이나 청소년을 주 독자층으로 재미만
추구하는 장르소설의 한 종류라는 통념(doxa)이 있다.
그 통념을 한방에 날려준 작품이 바로 '당신인생의 이야기' 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이,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내용, 고도의 외삽, 충격적인 세계관 등
SF 뿐만 아니라 모든 문학장르를 넘어선 깊이와 문학성을 갖춘 작품들로 채워진 단편집이었다.
오랜만의 후속작인 '숨'은 전체적인 구성은 전작과 거의 비슷하다.
9편의 중단편들은 전작보다 더 세련되고 더 미래적이고 소설적재미를 더 많이 갖추었다.
그의 단편 하나하나가 모두 현대와 미래 혹은 다른 개연성있는 평행세계를 배경으로
한 신화라고 생각된다.
환상적이고 사색적인 깊이를 갖춘 매혹적인 이야기들인 동시에 과학적 사고실험을 바탕으로
치밀하고 극사실적인 묘사가 다른 SF작품들과 차별화된다.
읽는 동안에는 약간 지루하고 어려울 수 있다.
장르소설이면 의례히 등장하는 반전과 서스펜스,스릴등 자극적인 요소는 별로 없다.
하지만 힘들게 다 읽고 난 후에는 깊은 여운과 더불어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두번세번 다시 읽고 싶어지게 만든다.
첫 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당신인생의 이야기'의 첫 편이었던 '바빌론의 탑'을 연상시키고
천일야화의 한편이라고 여겨도 될만큼 이국적인 이슬람세계의 매혹적인 이야기이다.
중세의 바그다드와 카이로를 배경으로 시간여행과 결정론을 교묘하게 두 축으로 삼아 전개되는
매우 기발한 작품이다.
기존 시간여행을 주제로 한 작품들의 통념을 버리고 시간여행조차도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결정론적 한계를 가진다라는 주제가 인상적이다.
또 다른 인상적인 작품은 책의 제목인 '숨'으로써 호흡기를 배터리처럼 교체할 수 있는 사이보그들이 사는 세계에서 미묘한 시간지연의 차이를 느낀 한 해부학자가 그들 문명의 멸망이 멀지
않았음을 밝혀내는 과정이 흥미롭다.
자기 자신을 해부하는 사이보그 해부학자의 묘사는 매우 그로테스크하지만,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그 묘사를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표현하면 기괴하지만 멋지고 오묘한 작품이 될 것 같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는 테드창의 작품들 중 가장 길이가 긴 작품이다.
전에도 출간된 적이 있지만 솔직히 제목이 맘에 안들어 읽지 않았었다.
결과적으로 다른 더 많은 작품들과 함께 지금 읽은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되었다.
약간의 지능을 가진 AI에 불과하지만 자신들이 만들고 훈련시킨 가상애완동물 '디지언트' 들에게 애정을 느끼는 주인공들에게 따뜻함과 감동을 받았다.
앞으로 펼쳐질 인공지능의 시대에서 인간이외의 존재들과 같이 공존하게 될 미래를 따뜻하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사실적 진실, 감성적 진실' 은 인간이 과거에 행했던 모든 언행들을 다른 매체에 기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발명된다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억과 비교되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이 과연 마냥 긍정적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던진다.
과거 식민지시대의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문자를 새로 익히는 한 소년의 이야기와 교차편집되면서 문자언어의 도래와 라이프로그(인간의 모든 언행을 기록)가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을 인정하고 미래에 똑같은 실수를 방지할 수 있을까? 라는 묵직한 문제를 던진다.
그 밖에 '거대한 침묵', '옴팔로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우리가 해야 할 일',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보모' 등 하나하나가 걸작인 소중한 단편들이 실려있다.
모든 작품들을 여기서 소개하는 것은 스포일러라고 생각된다.
그저 무조건 사서 읽고 생각한 후에 깊은 여운을 느끼는 것이 그의 작품들을 즐기는 최선의 방법이리라.
테드창의 다음 작품집은 언제 출간될까?
10년, 20년이 걸려도 좋다.
두 작품집의 완성도만큼만 유지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