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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언젠가 아기의 몸 중에서 '혀'가 제일 귀엽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직 맵고, 짜고, 뜨겁고, 차갑고, 단 것을 맛보지 않은 혀.
그래서 더 아기 혀들이 선홍색처럼 보이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까, 나는 그 아기의 혀가
마치 비무장지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조경란이 '혀'에 대해서 소설을, 그것도 장편 소설을 썼다고 해서 기대하고 읽었다.
해설의 평론가가 말한 것처럼
이 소설은 한 편의 연극 같았다.
꼭 필요한 인물들이, 홀과 주방, 주인공의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서있기 때문이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주인공 지원은 젊은 건축가인 한석주와 이탈리아에서 잠시 만났다가
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한석주가 지원이 일하는 레스토랑 '노베'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둘의 사이는 발전하고 한석주가 설계해준 'WON'S KICHEN'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지원의 쿠킹 클래스에 전직 모델 출신인 이세연이 등장하면서 둘은 파국을 맏는다.
이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세연이라며 단호하게 떠나버리는 한석주.
지원은 계속 돌아오라고 말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길들이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던 개 폴리마저 이세연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남기고 떠나버린다.
지원은 다시 '노베'로 돌아가 일을 시작하고, 어떻게든 실연의 아픔을 견디며
그가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결국 그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그녀는 이세연을 납치해 '혀'를 잘라내고 그 혀로
한석주에게 마지막 요리를 해준다.
마지막에 지원이 세연을 납치해 혼자 독백하는 대사는
나중에 연극으로 올린다면 그대로 써도 좋을 만큼 사람을 쭈뼛 서게 했다.
아주 천천히, 촘촘하게
실연의 아픔이 분노로 뒤바뀌는 게 보이는 소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겼다고 살인을 저지르는 게
게다가 혀로 요리까지 한다는 게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이 '소설'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지원의 분노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는다.
죽을 만큼 아프다는 말이 단지 죽일 만큼 아프다는 말로 전이되었을 뿐이다.
그러다 다시 의문을 가져서
주방장이 싱가폴에서 알몸으로 그녀 곁에 누울 때,
그 오랜 시간의 우정을 깨고 싶지 않아 그대로 있었던 그녀가,
주방장의 상처를 알기 때문에 이해했던 그녀가
왜 사랑이 변하고, 식을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남았다.
사랑과 맛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어서 그럴까.
아마도 지원이 요리사가 아니었다면 이 소설은 다르게 끝나지 않았을까 싶다.
세연은 요리사에게 다양하고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처음부터 거세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초식주의자에 소량만 섭취하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지원의 '키친'에서 석주와 섹스를 나누었다.
한석주의 애인이라는 정체성과 요리사라는 정체성이 시너지를 발휘하게 한 것이다.
손톱처럼 겉으로 드러난 폭력성이 거세된 혀.
이빨 뒤에 숨어서 더욱 온순해 보이는 혀.
식요과 성욕의 표상인 혀. 그래서 지원은 석주와 헤어지고(섹스할 수 없게 되고) 먹는 것을 멈춘다.
그런데 그 혀 맛이라는 게
정말 석주가 감탄한 만큼
그토록 맛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