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악어이야기
조경란 지음, 준코 야마쿠사 그림 / 마음산책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조경란의 문장은 과도로 살점을 건드리지 않고 껍질만 깨끗하게 깎아놓은 사과 같다.
 
생각보다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많이 털어놓아 깜짝 놀랐다. 그녀가 <가족의 기원>이라는 소설을 쓴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언젠가 그녀를 만났을 때, 조금은 알은 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로 어떤 콘도를 이용하고, 왜 콘도를 좋아하는지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식탐이 많다는 것도, 사람 사귀는 데 힘들어하는 것도, 우울증을 자주 앓는다는 것도,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것도, 그 아버지의 어머니가 당신의 생일날 복어국을 먹고 자살했다는 것도.

어떤 작가는 '가족을 이해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했다고 한다. 어떤 수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관계가 가족이니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녀가 아주 작은 방에서 글을 쓰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 방에는 분명 제이크 한 마리가 살고 있을 것이다.

제이크는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녀가 '터닝 포인트'라고 말하는 제이크는
우리가 삶에서 문득, 홀연히 만나는
어떤 빛이며 다짐이며 운명이며 어떤 힘이다.
악어처럼 조금쯤 단단하고 강한 힘.

그러나 악어는 꼬리를 잡히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강한 상대를 만난 것처럼 유순해진다고 한다.

이 책은 다양한 사람들이 제이크를 만났을 때 느낌과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 야마쿠사의 악어 그림, 그리고 거기에 덧붙인 조경란의 글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결코 제이크의 꼬리를 잡지 않았다.
물론 조경란도 꼬리를 잡지 않았다.

작가의 이면을 염탐할 수 있다는 것에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지만 그와 함께 평범한 사람들의 제이크를 만날 수 있어서도 좋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대단한 감동이 아닌 것 같은데도 책이라는 형태로 묶여서 그런지 어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훌륭한 미쟝센으로 보였던 것 같다. 일러스트를 보는 재미도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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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노는 모습은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 지금도 가끔 자신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며 산다. 그랬으면 좋겠다.
-p31

나는 첫째 동생이 이쪽 방을 차지하고 있으면 밥상을 들고 저쪽 막내 방으로 갔다. 막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다시 팔을 시옷자로 벌려 엉거주춤 밥상을 들고 첫째 동생 방으로 갔다. 둘 다 집에 있을 때면 비좁은 마루로 나가 밥상을 펼쳤다. 밥상이 니 집이냐, 지나다닐 때마다 찰싹찰싹 어머니가 내 등짝을 때렸다.
-p41 (이 부분에서 약간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일의 40퍼센트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미래의 일들, 즉 하늘이 무너질까 하는 것이며 걱정의 30퍼센트는 이미 일어난 일에 관한 것이고 22퍼센트는 아주 사소한 일들에 관한 걱정이며 남은 8퍼센트의 걱정거리에도 4퍼센트는 우리가 전혀 변화시킬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들에 관한 것이며 결국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들 중에서 오직 4퍼센트만이 걱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p76

참, 내가 알고 있는 '우정을 위한 충고'를 살짝 알려준다. 첫번째, 친구가 먼저 말하지 않는 것이나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려는 일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서 알아내려 하지 마라.
-p128

내가 지금 이 나이가 되기 전, 지금의 내 나이였던 한 선배가 부지런히 혼자 여행을 다니던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얼마쯤 더 지나면 여행이란 것도 혼자 다니는 게 재미가 없어질 거야. 가끔 그 말이 생각날 때가 있다. 내가 그때의 선배 나이가 되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선배의 그 말은 마치 '결혼에는 많은 고통이 있지만 그러나 독신 생활에는 즐거움이 없다'라는 말처럼 해석되기도 한다.
-p132

<아비뇽 처녀들>을 선보인 직후 시인 아폴리네르와의 인터뷰에서 피카소는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영향을 피한 적은 없다. 그건 오히려 소심하고 비열하며 불성실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예술가의 개성은 다른 예술가들의 개성과 맞서고 부딪치면서 감수해야 하는 투쟁을 통해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동안 개발된다. 그 투쟁이 치명적이거나 개성이 그 앞에 넘어진다면 그건 운명일 뿐이다."
-p159
 
밀란 쿤데라는 아름다움이란 서로 다른 두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장구한 세월을 뛰어넘어 갑자기 마주쳤을 때 튀는 '불꽃'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아름다움이란 연대의 소멸이며 시간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라고.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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