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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순례
헤르만 헤세 지음, 육혜원 옮김 / 이화북스 / 2026년 1월
평점 :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동방순례]를 읽으며 왜 이 이야기가 자서전이라 불리는지 내내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책을 덮고서야 예술적 창조의 숭고함과 그 이면의 고독을 담아낸, 헤세만이 쓸 수 있는 은유적인 자서전임을 깨달았습니다. 책날개에 기재된 그 표현이 이보다 더 적절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 초반, 하인 레오는 예술가와 그들의 창조물을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 비유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자신의 젖과 아름다움, 힘을 아이에게 다 내어주고 자신은 희미해지듯, 진정한 창조는 예술가 자신의 생명력을 작품으로 이전하는 희생적 행위임을 암시하는 것이었지요.
이 비유는 이야기 결말의 신비로운 조각상 앞에서 완벽하게 회수됩니다. 주인공 H.H.는 조각상 속 자신의 형체가 흐릿해지며 레오의 형상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는 예술가라는 한 개인의 자아가 사라지는 대가로, 그가 추구하던 절대적 진리이자 창조물인 레오가 비로소 생명력을 얻어 완성되는 과정을 시각화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레오는 단순한 하인이나 지도자가 아니라, H.H.가 자신의 고통과 방황을 깎아 만든 생생한 예술적 실체였던 것이었어요.
자신의 모든 연료를 태운 촛불이 꺼지듯, H.H.는 마지막 순간 깊은 잠을 갈망합니다. 이는 소명을 완수한 창조자가 누릴 수 있는 평온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헤세가 결국 창조의 끝에는 공허가 아니라 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는 것을 이 부분을 통해 추측해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일까요. 헤세는 [동방순례] 책을 쓰며 창작의 우울을 극복할 수 있었고 이후 [유리알 유희]를 출간하여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동방순례]를 집필하며 쏟은 시간과 노력을 통해, 그는 스스로를 비워내고 비로소 더 거대한 정신적 세계를 담아낼 그릇을 완성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참고로 [동방순례]는 헤세가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유리알 유희]로 넘어가기 전의 징검다리 같은 책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아직 [유리알 유희]를 읽기 전인데요. 자신을 태우면서 헤세가 도달한 그 다음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져 이제는 정말 [유리알 유희]를 읽어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싯다르타]를 모두 읽은 분들께, [유리알 유희]를 읽기 전에 [동방순례]를 읽어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