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의 마음 - 도망친 곳에서 발견한 기쁨
정고요 지음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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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번에 읽은 정고요의 에세이 [산책자의 마음]에는 '도망친 곳에서 발견한 기쁨'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도망친 곳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다니, 참 생소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과연 저자는 그곳에서 어떤 기쁨을 발견한 것일까 궁금해졌습니다. 


저자는 책의 첫 글인 '실직을 해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을 통해 웃음과 깨달음을 동시에 전합니다. 평소 오후 7시에 산책을 하던 저자는 실직 후 오후 5시에 산책을 나서며, 늘 우리에 갇혀 지내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개 '흰둥이'가 사실은 주인과 즐겁게 산책하는 '난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주인과 개의 이름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 벌어진 뜻밖의 언어유희가 매우 인상적이었는데요. 저자가 개에게 "나니(일본어로 '뭐야?')?"라고 묻자, 개가 "뭐! 뭐!"라고 짖은 것이었어요. 


저자는 질문과 대답이 소리도 뜻도 일치하는 이 기막힌 동어반복의 대화를 두고 진짜 세계의 화법이라 부릅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선입견의 세계에 금이 가고, 비로소 살아 있는 진짜 세계와 마주하는 순간을 포착한 것입니다. 실직이라는 사건은 삶을 위축시키기 쉽지만, 저자는 그 공백의 시간을 산책으로 채우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풍경과 생각을 발견합니다. 첫 에피소드부터 이렇게 소소한 웃음 뒤에 화두를 던지니, 이후의 산책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책장을 넘길수록 마치 저자와 함께 강릉의 바다, 공원을 함께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중 특히 인상 깊었던 글은 '나무들' 이었습니다. 저자는 강릉의 대도호부관아의 잔디밭을 거닐고 나무들 사이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한 그루의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어디인지 찾아보니 산책하기에 참 좋은 강릉의 명소라고 하네요. 


저자는 이 곳을 산책하며 나무라는 식물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나무가 견뎌온 시간의 총합을 보았습니다.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그저 하루를 살아낸 나무가 커다란 한 그루가 되는 것처럼, 우리 삶의 어떤 순간도 헛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령 내일 나를 기다리는 것이 실패일지라도, 그 실패를 포함한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요.


하루를 허투루 살지 않겠다는 저자의 다짐은 거창한 무언가를 이루어내겠다는 계획이 아니라, 당장 눈에 보이는 성취가 없더라도 묵묵히 하루의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겠다는 하나의 약속처럼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저자가 산책을 하며 나무로부터 배운 단단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생각은 '산책의 미분과 적분'이란 글에서 더욱 확장되어, 생각대로 되지 않는 삶일지라도 정말 멋지다고, 그래서 기대가 된다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동안 산책을 하며 사유하는 글은 종종 접해왔지만, 강릉의 남대천이나 안목해변처럼 익숙한 장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유하는 내용의 글은 처음이었는데요. 매년 여름이면 강릉을 찾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내년 여름 강릉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사뭇 달라질 것만 같습니다. 저자가 아끼는 강릉의 여러 장소들을 마치 답사하듯 천천히 거닐며, 저만의 생각을 남겨보고 싶어졌습니다. 


내 앞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건 나무의 모든 나날이 내 앞에 있다는 뜻이다.바람과 햇빛과 빗물과 흙에 소실된 나날까지 합쳐 나무는 지금 내 앞에 있다. 나무 한 그루는 나무의 모든 나날.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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