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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너머 한 시간
헤르만 헤세 지음, 신동화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평점 :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 데미안, 싯다르타를 읽은 후 그의 작품을 찾아 읽고 싶어졌습니다. 특히 그의 초기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하던 참에, 그가 20대 초반에 집필한 [자정 너머 한 시간]이라는 산문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출간 당시에는 무명의 작가였기에 겨우 몇 권 정도밖에 팔리지 않은 채 절판되었지만 그가 유명해진 이후 사람들이 그의 초기 작품까지 찾게 되면서 약 40여 년 만에 재간을 했다고 합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이후 그의 전 작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듯이, 과거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했구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정 너머 한 시간]에는 총 아홉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그중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와 '왕의 축제'였습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의 화자는 깊은 우울감 속에 침잠되었다가 불가해한 존재를 만나, 심연에서 벗어나며 새로운 자아를 찾고 삶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에서 고통이란 성장을 위한 필수 요소였는데요. 이 이야기 속의 화자 역시 심연 속에서 겪은 고통을 통해 인생을 이해하는 통찰을 얻으며, 영혼의 구원, 혹은 내면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었어요. 깨달음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자체가 값진 재산과 같은 것이기에 그는 스스로가 재산의 주인이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화자가 재산의 주인임에도 왜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며 글이 마무리된 것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간신히 깨달을 수 있었어요. 진정한 깨달음이란 단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견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요. 그러니 가장 값진 것은 아직 모르는 상태인 것이 맞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어요. 불과 3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산문임에도 이렇게 여러 번 곱씹으면서 계속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헤세의 필력에 계속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다음 '왕의 축제'는 20페이지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왕자는 형에 대해 "예술에 대한 조예는 그림 가격을 아는데 그치고, 캔버스 한 장을 사려면 금화를 몇 개 치러야 하는지를 아는 게 형한테는 모든 역사보다 중요해요"라고 묘사를 합니다. 이때 왕자의 숙부는 대답 없이 근심 어린 눈으로 그런 말을 하는 왕자를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왕자의 형과 숙부는 예술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의미에는 관심이 없고, 예술을 재산적 가치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도구로만 활용하는 속물적인 인물을 상징합니다. 왕자는 형의 이러한 태도를 비판하고, 진정한 예술적 감수성을 추구하는 방랑자 같은 인물로 나오고요.
이들의 대비를 통해, 세속적인 기준에 갇혀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는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어쩐지 그의 작품 싯다르타가 생각났습니다. 이렇게 초기작에서도 그의 후기 작품과의 연관성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옛날 사람들이 절판된 초기작을 찾으려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헤세가 스무 살 무렵에 쓴 글에서조차 이렇게 단단한 사유와 성찰이 느껴진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그의 내면이 얼마나 일찍부터 예민하게 깨어 있었는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초기 작품인 이 책을 꼭 읽어보실 것을 추천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