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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 일기
권남희 지음 / 다산책방 / 2026년 9월
평점 :
씩씩하고 다정한 일본 한 달 살기

『안식월 일기』를 읽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쩌면 이렇게 글이 술술 읽힐까’였다. 요즘 글을 쓰다 보니 책의 내용만큼이나 작가의 문장을 자꾸만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오랜 세월 번역을 해와서 그런 걸까. 어렵지 않고 담백한 말들인데도 참 재미있고, 어느새 홀린 듯 다음 장을 넘기게 만든다.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편안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품어본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글만 부러운 것이 아니었다.
작가는 안식월을 맞아 혼자 일본에서 한 달을 지낸다. 그 모습이 참 부러웠다. 내 아이들도 이제 다 컸고 둘은 결혼까지 했지만, 나는 혼자 어디론가 훌쩍 떠나 한 달을 살아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손녀를 돌보며 보내는 지금의 일상도 좋다. 아이와 함께 지내면서 얻는 기쁨도 많다. 그렇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혼자 가방을 들고 낯선 곳으로 떠나는 삶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마주한 작가의 모습은 참 씩씩해 보였다.
혼자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밥을 먹고, 길을 찾는다. 하지만 빈틈 없이 완벽하게 씩씩한 것만은 아니다. 길을 잘못 들어 한참을 헤매기도 한다. 그런 서툰 이야기를 읽다 보면 오히려 귀엽기도 하고 슬며시 미소가 번지며 마음이 놓인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척척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길을 잃으면 좀 헤매면 그만이고, 작은 실수는 훗날 돌아와 다정한 이야기로 남으면 될 일이다.
작가가 번역가라는 것도 이 한 달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일본 문학을 번역하면서 알게 된 작가와 편집자, 지인들을 만나고, 자신이 번역한 책과 관련된 장소를 찾아 나선다. 특히 마쓰다 미리의 『오늘의 간식은 뭐로 하지』에 실렸던 디저트 가게를 직접 찾아간 대목에서는 미소가 절로 지어질 만큼 인상 깊었다.



엄마는 혼자 TV를 보며 가족이 서로 안고 웃는 화목한 모습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렇게 말하는 엄마를 다들 한 번씩안아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스킨십 없이 자란 자식들은 목각 인형처럼 뻐덕했다. - 209p -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마음이 먹먹해져왔다.
그렇게 씩씩하게 한 달을 보내고 돌아온 사람이 북토크 자리에서 엄마 이야기를 하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았는데 한참이 지나 뜻밖의 자리에서 눈물이 났다는 이야기가 오래 남았다.
엄마라는 존재는 즐거운 여행 중이라고 해서 문득 찾아오는 그리움까지 막을 수는 없는 법인가 보다.
가슴에 돌 하나 얹어 놓은 듯, 치매이신 울 엄마가 생각났다. 멀리 있다는 이유로 동생에게 맡겨두고 자주 찾아 뵙지 못한 내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시렸다.
"나도 테레비에서처럼 너거 만나면 이래 안아줄라 했는데..... "
지금은 우리 얼굴을 겨우 기억하시는 엄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가끔은 억지 생떼를 쓰시며 자식들의 마음을 뒤집어 놓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늘 우리를 품에 안아주고 싶어 하셨던 엄마의 마음.
그 마음 앞에 나 역시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명절에는 먼저 다가가 엄마를 꼭, 힘껏 안아드리고 싶어졌다.


한 달 동안 낯선 곳을 걷고 사람을 만나고, 잘 먹고 길을 잃으며 즐겁게 지낸 이야기 끝에 이런 장면을 마주하니 무어라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차올랐다. 사람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슬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슬픔을 품고 있다고 해서 즐겁게 살지 못하는 것도 아닌가 보다. 마음속에는 여러 결의 감정이 얼마든지 함께 머물 수 있는 것 같다.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나는 작가가 참 부러웠다. 혼자 훌쩍 일본으로 떠나는 용기도, 혼자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씩씩함도, 무엇보다 이렇게 술술 읽히는 다정한 글을 쓰는 솜씨도 부러웠다. 책을 다 덮은 지금도 여전히 부럽다.

하지만, 부러움의 결이 조금 달라졌다.
오랫동안 제 길을 걸으며 자기 일을 해오고, 그 일이 또 다른 인연을 맺어주고, 책 속의 공간으로 이끌며, 끝내 그 하루를 오롯이 자신의 글로 남길 수 있다는 것.
나도 언젠가는 혼자 훌쩍 떠나보고 싶다. 꼭 일본이 아니어도 좋다. 낯선 곳을 거닐다 길도 좀 잃어보고, 혼자 밥도 먹으며, 처음 마주하는 풍경을 느긋하게 눈에 담고 싶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그 하루를 나의 온도로 내 글로 남겨보고 싶다.
지금은 이렇게 가끔 일상을 찬찬히 적어 내려가는 것부터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나 역시, 낯선 길을 씩씩하게 걸어간 하루를 돌아와 다정한 글로 남기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 따뜻하고도 조금은 서툰 여행길이, 나에게도 나만의 속도로 걸어갈 또 다른 길을 조용히 비춰주고 있었다.
*이 리뷰는 다산책방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