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세계 (합본)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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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선배의 권유로 언젠가는 읽을 것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다가 겨울에서야 <소피의 세계>를 펼쳐 들게 되었다. 펼쳐든 순간 소설 속 소피처럼 나는 책 속에 빠져들었다. 때로는 책 바깥에서 소피를 지켜보며, 때로는 소설 속 소피의 입장이 되어 크녹스 선생이 보낸 문제를 함께 풀어보기도 하며 나는 소피와 함께 철학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소피의 세계>는 나에게 서양철학사에 대한 초급자용 혹은 중급자용 교과서도 아니었고, 서양철학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지침서도 아니었다. <소피의 세계>는 나에게 '철학하기'의 즐거움을 보여주었다. '철학하기'가 단순히 철학의 상아탑 안에서 가르쳐지는 진리찾기의 문제가 아니라, 변화하는 삶을 이해하고 변화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에게 필요한 하나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한 소녀에게서 새삼 깨달았다.

분명 철학은 어려운 말들을 주고받으며 노는 말장난에 그치지 않는다. 또한 절대적인 삶의 진리를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철학의 수수께끼는 우리 존재가 겪는 정신적 혹은 신체적 혼란과 불안, 고통, 욕망을 비롯한 다양한 삶의 수수께끼들을 풀어가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이 수수께끼는 크녹스 선생과 소피가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는 '철학하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소피가 자신의 존재가 마주해야 하는 소설 속 결말의 운명을 찾아 용감히 나서듯이 <소피의 세계>의 '철학하기'는 운명에 대한 사랑을 가르친다. 주어진 운명에 체념하자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것은 자신이 찾아 나서는 여정에서 부딪히고, 감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생각하는 과정들이 엮어내는 아름다운 선물과 같다는 것을 소피는 보여준다.

올 겨울은 그래서 마음이 넉넉해지는 기분으로 주변세계를, 그리고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작년 겨울 선배의 책장 한 켠을 채우던 세 권의 <소피의 세계>를 빌려 볼 수도 있었는데, 굳이 내가 읽고 싶을 때 찾아보겠다며 하루 하루 미루었던 기다림이 마침내 채워져 행복하다. 그리고 이제 내 책장 한 켠을 채우고 있는 한 권으로 만들어진 <소피의 세계>가 또 어떤 이의 책장에서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가리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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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1
김세영 글, 허영만 그림 / 채널21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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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연히 든 만화책에서 시를 보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낭만적인 터치로 그려진 허영만의 그림에 김세영의 입담이 강하게 새겨져 사랑하는 사람들의 작은이야기들이 펼쳐지면서 나는 만화에서 비록 온전하지는 않지만 잠간동안씩 시를 읽는 즐거움에 빠졌다. 그리고 1권을 다 읽은 때 쯤 되었을 때 어느덧 나의 손에는 2권이 들려져 있게 되었다. 시와 아름다운 글들이 엮어지며 전개되는 이야기들은 짧지만 강한 메세지를 던지며 낭만적인 사랑이야기에서 인생이야기로, 고통스런 현실의 단상으로, 그리고 희극적인 주변 인물들의 작은이야기로 옮겨간다.

시를 쓸 줄 아는 남자와 시에 감동받는 여자라는 설정이 썩 맘에 들진 않지만, 남자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를 보고 싶은 사람에게 꼭 한 번 이 책을 권하고 싶어진다. 잠시 지루한 일상의 반복을 접어두고, 김세영의 '말빨'에 빠져보는 것도 나 자신의 삶과 사랑을 위한 여유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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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란쏘 프라도 지음, 이재형 옮김 / 현실문화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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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쏘 프라도의 <섬>을 보다보면,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는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뒤로 한 채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는 하나의 긴 사랑의 고리안에 존재하지는 않은가하는 까뮈의 말이 생각난다.

어쩌면 자신의 뒤로 움츠려 멀어져가는 과거의 기억과 자신의 현재로 조금씩 펼쳐지며 다가오는 불확실한 미래 사이에서 현재의 삶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있어 사랑은 하나의 고통스런 물음의 연속일 수 밖에 없다.

<섬>에서 라울과 안나는 각자의 사랑의 기억에 매여있다. 그러나 그 기억은 완전한 형태를 갖춘 것이 아니다. 섬에서 기억은 현재를 경험하고 미래를 밝혀주는 믿음직한 안내자가 아니다. 오히려 안나처럼 자신의 라울과 이름이 같은 한 남자를 멀리서 지켜보다 떠나보내는 수동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들은 자신의 기억에만 매달려 상대방을 훔쳐보다 결국 서로 마주보는 그들만의 사랑을 완성할 기회를 놓친다. 뒤늦게 사랑을 확신한 라울이 섬으로 돌아와 방파제 벽에 약속의 메세지를 적어놓지만 그것은 독백에 그치고 만다.

서로를 그리움의 시선으로 뒤쫓는 수레바퀴를 닮은 <섬>은 사랑을 그리움과 욕망, 고독의 폐허위에서 망각되어지도록 내버려둔다. 등대가 죽은 <섬>은 사랑의 격정에 포효하는 바다로부터 방랑하는 배들을 인도하지 못한 체 먼 바다로 다시 배를 내보낸다. 그 배들 중에 라울과 안나의 배도 자신의 우유부단한 사랑의 기억을 더듬듯이 그리움에 지쳐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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