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악한 동맹 - 종교적 신념이 빚어 낸 현대 정치의 비극
존 그레이 지음, 추선영 옮김 / 이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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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많은 정치인들은 자신을 선택하면 나라가 살기 좋아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종교인들은 자신의 종교를 믿으면 유토피아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두 범주의 사람들이 만나 협의하여 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면?

정치적 유토피아는 깨어나 보면 악몽임을 깨닫게 되는 집단 구원의 꿈이다.-32p(1장 유토피아의 최후)”

그렇다면 많은 정치인과 종교인이 주장하는 바는 유토피아를 지향한다라는 뜻?!

그런데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상상의 공간이므로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곳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망상으로 제시되는 유혹이라는 것.

그러나 정치를 하는 자들의 의무는 유토피아가 꿈이라고 해서,

실현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테두리 안에서만 머문다면 (시민들은)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다.

그것은 억압에 공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동적인 태도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상적인 꿈을 제시하고

그 꿈을 실현 가능한 테두리 안으로 머물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그런 점을 이용하여 실현 가능함을 증명하기도 전에

또 다른 이상적 구호들만을 생산해낸다.

거리는 그런 구호들로 가득하다.  

 

세상사를 이루는 여러 형태들을 하나씩 지워간다면 마지막 즈음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들간의 경계를 이루는 국가와 문화.

그러한 각각의 문화적 가치를 이룩한 공통사회를 이루는 것들의 여러 가지 요소들.

서로간의 제약을 만들어낸 제도나 법규, 문화, 예술, 노동, 이런 것들.

각 개인의 의식만이 남는 시기까지 거슬러 가는 것이 아닌

최소한의 사회적 형태,

아마 그 상태에서 처음으로 사회적 약속이 생기게 되었던 계기는 이념이 아니었을까?

최소단위의 인간모임이 구성되었을 때,

각자의 생각에 의한 견해를 나타내고 그 가치를 향한 행위를 위한 규범을 만들고자

구성원 다수의 생각의 바탕에 깔려 있는 공통적 이념.

그런 이념의 조직.

그것이 사회이고 국가를 이룬 근본 아닐까?

 

그런데 요즘 누군가는

이념 같은 것 보다는 민생이 우선이라고 하면서 이념을 집어치우자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말에는 민생이 우선이라는 이념이 있는 것 아닌가?

이념이라는 단어를 말하면 빨갱이만을 떠오르게 유도하는 것 같다.

공산주의가 이념이듯이 민주주의도 이념일 게다.

그런데 이념을 생각지 말자는 것은

시민을 노예로 만들고자 하는

서양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의 인종 차별적 바탕이 깔려있는 것 같다.

돈은 내가 나눠 줄 테니 너희들은 부지런히 일만하면 된다.

그러니 이념 같은 것은 너희 같은 무지렁이들은 알 필요가 없다.”라는 의미는

중세 서양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인간은 선천적으로 평등하지 않다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그런 발언의 바탕에는 시민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려는 무의식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 무의식을 이루는 불안은

역사에서 길을 잃은,

우리의 민족정체성을 세우려는 의식의 목표 잃은 지향성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실패한 왕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는

먹이를 주는 새가 자신의 부모인줄 알고 자라다가 나는 것이 익숙한 시기가 지나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뻐꾸기처럼

우리도 갑작스레 닥친 현실에 自尊感을 잃은 채

그저 살기 위해 민생과 이념이라는 둥지 속의 알을 밀쳐 내기만 했던 것과

비슷한 불안감은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이제 그저 먹고 사는 시기를 지나 정체성을 찾고자

이념과 민생이라는 두 가지의 깃발 중에서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하는,

남의 둥지를 떠나야 하는 시기가 도래하자,

홀로서기가 두려워 입안에 계속 뭔가를 집어 넣어 씹게 함으로써,

간혹 정권을 향해 자유의 목소리를 내는 이념 따위는 잊게 하고,

간혹 달콤한 초콜릿 씹는 것이 해롭다는 것을 깨닫는 시민들을 적이라고 생각하여

무조건 빨간색을 입히는 것 같다.

그것도 이제는 빨간색에 대한 아픔을 세월의 흐름 속에서 기억하거나,

그 아픔을 형제나 친척에게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고통을 잊는 아편을 주듯이 말이다.

 

그렇게 그들이 내세우는 민생,

자신이 낳은 새끼가 아닌 뻐꾸기에게 먹이를 주는 가짜 어미의 민생.

인간 기본은 차별이라고 여기고,

우생학적으로 하등이라고 여겨지는 조건을 없애기 위하여는 폭력도 필요하다고 여기는

서양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정치, 종교사상이 들어있다고 본다.

 

그런 모방은 해방후의 정권 수립단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이승만은 해방 뒤 귀국해 1945 11월 한 연설에서 “지금 우리나라를 새로이 건설하는 데 있어서 튼튼한 반석 위에다 세우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물로 주신 이 성경말씀을 토대로 해서 세우려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반석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매진합시다”라고 했다. 이어 1946 3·1절 기념식에서는 “한민족이 하나님의 인도 하에 영원한 자유독립의 위대한 민족으로서 정의와 평화와 협조의 복을 누리도록 합시다”라고 했다.  

이런 종교적 신념의 역사는

근대의 세속적 폭력은 기독교 역사를 따라다녔던 폭력의 돌연변이다.

신이 종말을 성취할 것이라는 초기 기독교의 신념은 2백 년 이상 꾸준히 이어가다가 인간의 활동으로 유토피아를 성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변했고 종말이라는 초기 기독교의 신화는 과학이라는 옷을 입고 신념을 바탕으로 한 신종폭력을 등장시켰다. 12p(1장 유토피아의 최후)    

 

서양은 그들이 황금을 찾아 떠난 그 시절부터

자신들의 세계가 아닌 동양이나 아프리카 등의 세계는 침략과 약탈을 행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생각했었나 보다

. “그러나 서양은 폭력으로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지난 세기에 자행된 전체주의의 폭력은

역사를 단숨에 사로잡겠다는 서양 기획의 일부였다.

21세기는 우파가 좌에게서 변화의 도구를 넘겨받아 그 기획을 다시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109p

폭력과 서양의 전통 -20세기의 계몽과 폭력

 

그래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한 민족의 장구한 역사가 담긴

잉카나 마야문명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했고,

미국은 자신들이 핍박 받던 나라에서 도망치듯 떠나면서

신세계를 신의 나라를 실현 시킬 것이라고 믿으며 도착할 땅을 식민지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기원이전부터 존재했을 먼저 살고 있던 민족을 악마로 규정하여,

지금 향하는 기름진 땅에 머무는 동안

우리를 향한 그들의 기도는 저주로 바뀔 것(John Winthrop)”이라며

무차별로 살해하며 새로운 땅에서는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종말론을 신봉했단다.

그런 종교성은 미국을 세계의 나머지 나라와 다른 나라로 규정할 수 있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했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Alexis de Tocqueville이 인식한대로 미국 예외주의는 종교적 현상이다. 영국에서 온 최초의 식민지 정착민들이 이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미국은 종교라는 안경을 쓰고 자신을 이해했다. 인간의 활동으로 세계를 부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기대하는 후천년주의 사고와 대격변을 몰고 올 갈등을 고대하는 전천년주의 신념이 미국인들의 역사 해석 방식과 미국인들의 미래 관을 형성했다. 후천년주의와 전천년주의는 미국이 역사에서 독특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임을 미국인들에게 각인시켰고 그 결과 종말 신화가 미국화 되었다.  164p (4장 종말론의 미국화)

 

그런데 그들은 처음부터 종교적으로 스스로 선택 받은 인가들이라는 오만함이 있었기에 폭력을 수행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는가 보다. 그들이 그런 오만한 폭력을 행사하게 된 동기는  

인종이 서로 불평등하다는 신념을 지닌 사람들 대부분은

사회 개혁을 통해 열등한 종족의 선천적 불이익을 보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에는 모든 인류가 장차 도래될 보편문명에 참여할 수 있겠지만

그러려면 그들 고유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유럽의 생활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적 인종차별주의였다. 92p (2장 나치즘과 계몽) 

 

그런 폭력성을 여러 가지 철학적 이유로 덧칠한 채 자신들끼리 싸웠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그들의 이념인 것 같다.

그들의 신 자유주의 이념은 개인의 자유를 늘리고 국가의 통제를 줄이는 이념이라고 한다.

 

신 자유주의는 본원적인 자유주의 가치로 돌아가자는 사상인데

그러기 위해 신 자유주의자들은 엄격하게 제한된 정부와

구속되지 않는 자유 시장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신 자유주의는 과학적 합리성을 주장하지만

역사를 예정된 운명을 따라가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목적론적 역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114p 3장 주류로 부상한 유토피아 1.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와 보수주의의 종말)

 

이것은 얼핏 노자의 유토피아. 소국과민(小國過民)!을 생각하게 한다.

小國寡民 使有什佰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人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不相往來

(인구가 작은 나라 열 가지 백 가지 기계가 있으나 쓰이지 않도록 하라

백성의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이사 가는 일이 없게 하라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는 일이 없고 비록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내보일 일이 없다

사람들 다시 노끈을 매어 쓰도록 하고, 음식을 달게 여기며 먹도록 하고,

옷을 아름답게 생각하며 입도록 하고 거처를 편안하게 생각하여 살도록 하고,

풍속을 즐기도록 하라.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지만 사람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는 일이 없다. -노자 도덕경 80)

 

 

이 사상이 동남아의 어느 한 권력자에게는 어떻게 이해가 되었는지

(- 하긴 지금도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살인 도둑과 같은 범죄가 많아진다고 하지만 -) 소국과민을 실행하고자

같은 민족의 1/4이상을 Killing Field에서 살해했다고 한다.

노자가 살아 온다면 자신의 말을 저렇게 이해한 폴 포트를 보고 뭐라 하였을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분파와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향연을 즐길까?

공자의 후인들은?

예수는 유대교와 신구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을 어떻게 화해시킬까?

아니면 자신의 제자들이 만들어 낸 지옥으로 누구를 보내버릴까?

부처는 사원의 고양이에 대하여 어떻게 할까?

南泉화상처럼 죽였을까? 아니면 趙州선사처럼 신발을 머리에 이었을까?

 

정말로 위대했던 역사 속의 현자들은 그래서 스스로 글을 남기지 않았는가 보다.

 

권력을 잡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말에 따르면

현재의 나라사정은 엉망이고 가만 놓아두면 파멸할 것처럼 말한다.

종교인들의 말 역시 현실은 고통이고

곧 종말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에 유토피아로 가기 위한 신념의 복종을 말한다.

그런데 두 가치가 목표로 하는 것은 하나인 것 같아도

그 점에 도달하는 길은 민족들의 수만큼이나 많을 수 있다는 점을 말하지 않고

자신만이 유일하다고 하기 때문에 문제를 키우는 것 같다.

그 유일하다고 주장하는 그 모습은 신 역시 하나다라고 주장하는 종교의 모습과 같아 보인다.

서양의 역사는 그래서 하나일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려고 상대를 파괴하는 폭력의 역사였을까?  

 

그러나 인간의 욕구는 다양하기에 조화를 이룰 수 없고

보편적 가치들은 다른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다.

다양한 형태의 정부가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다면

그것은 인류가 특정 지역에 국한된 대서양 민주주의가 전세계에도 적용될 수 있을 만큼

유용한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 가치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해결할 올바른 방법이

단 한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80p(6장 종말론 이후)”

 

그런데 그들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동양의 우리는 왜 그들의 폭력적이면서도 오만한 문명을 따라 하려 하는가!

그들은 오래 동안 세상은 하나가 지배해야 한다며 오만한 폭력을 휘둘렀지만

동양은 화합하는 기가 우주를 구성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민생이 우선임을 내세워서

정권을 차지하려는 부류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서양의 모방성은,

특히나 미국과 동일시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부류들은  

그렇기에 자유주의적 인종차별주의전체주의의 폭력성을 안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그런 추악한 정치와 종교의 동맹이 표방하는 민생보다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 위험한 지정학적 여건을 가지고 있는 현실에서 자립하기 위하여는

우리에 의한 우리 만의 이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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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샤머니즘과 분석심리학 - 고통과 치유의 상징을 찾아서
이부영 지음 / 한길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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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 토템.

우리네 주변에 잊혀지지 않고 꾸준히 이어오는 점복(占卜)

“점복은 인류의 오랜 관습이다. 인간은 어려운 일에 부딪쳐서 의식의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끼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미지의 사실을 알고 싶어한다. -658p,

“그러나 인류역사에서 점복의 심리를 완전히 추방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미지의 세계가 많이 줄어들고 있지만 인간은 인간자신의 정신에서 무의식적인 것을 완전히 의식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점복의 심리는 의식 너머의 세계, 즉 무의식의 세계를 알고자 하는 것이기에 무의식이 존속하는 한 그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없어지지 않는다. -659p ((-12장 한국 민간신앙과 윤리의식)

 

요즘은 타로 점과 같은 서양 점복도 일부에서 유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네 민속 점복은 공중파나 케이블 같은 방송에 나오는 것을 못 보았으나

타로 점은 걸러지거나 모자이크 등의 방법으로 가려지지도 않는 채로 방송에 나오니,

우리네 민속 점복은 뭐가 흉물스러운 데가 있다고 보여지는가 보다. 

그러나 우리의 점복은 생활 속에 깊이 박혀있어 그것이 점복의 일종이라고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활의 행복(幸福), 불행(不幸)을 조상과 연결시키는 기복(祈福)문화.

유교적 문화로 조상을 기억하려는 형상 속에 내재된 조상으로부터 행복을 얻으려는 마음의 표현.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가 죽음에 대해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삶에 대해서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에 관하여 알겠는가(未知 知死)!” 아직 삶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어찌하여 죽음까지 알려 하느냐며 제자가 차근차근 공부하지 않고 덤벙대는 것을 꾸짖는 말일 수도 있고, 삶을 알게 되면 죽음은 저절로 알게 된다며 타이르는 말일 수도 있다.”

.

그런 의미가 수 천년 전의 원시문화와 어우러져 변화된 풍속

형이상학적인 의문에 대한 위안이 철학이나 신앙이라면 그런 것들과의 접촉이 뜸한 민중에게는 유교적 사상이나 도교적 방식이나 불교적 성찰 이런 것들은 먹고 사는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들이니 알 바 없는 시절에 자연 속에서 얻어지는 눈앞의 현실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 그런 대상으로의 접근이 당장 편하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으로의 발달이 이루어진 것 아니었을까?

나중의 산업화로 육체적으로 편안해지기 시작해졌을 때야 “칠정”이니” “소국과민”이니 “일일불작”이니 하는 맹자왈 공자왈이 귀에 들렸을 테이고……

그렇게 수천 년을 생활 속에 어우러진 채로 잠재되어 내려온 집단적 무의식은 유전적으로 DNA화 되어 현대인의 피에 흐르게 되었는가! 그런데 그런 DNA의 흐름은 왜 유독 여자들에게 많이 이어졌을까? 여성의 본성에는 예지력과 같은 감성이 남성보다 많기 때문일까? 남성보다 많다면 그 것은 마찬가지로 생존을 통해 잠재된 본능과 같은 것 아닐까? 가령 사냥 나간 남성을 기다리면서 스스로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능력의 발달 같은 것……

 

           “우리나라의 무당 중에 여성이 많은 이유에 대해서는 또 다른 재미있는 종교 인류학적인           해석이 있다. (김영숙/1979: 여섯 명의 한국 여성을 통해본 무당의 사회화 과정)-중략-         전통적으로 여성은 그저 쥐 죽은 듯이 모든 것을 참으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야           하는데 무당 후보생은 너무도 강한 자존심을 갖고 있어 전통 여성과 같이 벙어리,      귀머거리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이 인류학자는 이런 맥락에서 특히     빙의현상(possession)에 대해서 재미있는 해석을 내렸는데 그는 이 현상을 ‘사회적     박탈에 대한 여성의 망아적 보상(ecstatic compensation)’이라고 보았다. (–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무교 편 82p)

 

그렇지만 집단적 무의식으로 내재되어 이어져온 점복에 대한 기대심이나 독립심은 같은 심리는 집단과의 생활 속에서 각 개인의 성향은 내재된 환경에 따라 진화하는 방식이 달랐을 것이므로 각자에게 다양함으로 나타났을 것 같다. 그것이 증명된 자만이 샤먼으로 인정받았을 수도 있고……

“무의식을 명백한 구체적 사실로서 남김없이 이해하고 파악했다고 믿는 것은 자아팽창의 오만이며 착각이다. 점복의 이용도 실시하는 사람이나 묻는 사람의 의식 태도에 따라 윤리적 의미가 달라진다. 무의식의 불가능성에 대해 겸허한 자세로 대할 때 그 결과에 대한 이해가 맹신이나 맹종이 아닌 주의 깊은 고려, 즉 종교적 성격을 띤다. 660p  (-12장 한국 민간신앙과 윤리의식)   

 

오래 전에 서정범 교수의 무녀별곡을 읽었을 때,

그 때도 지금과 같은 의문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나 꿈의 해석과 같은 분석을 기대했었던가?

5권을 모두 읽고 난 후 ()는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으며 다만 현대의 의료적 해석으로 뇌의 일부가 일반적이지 않는 현상을 보인다는 점이 다른데 그런 점은 그들이 무()가 되기 이전의 특이한 환경으로 인하였을 뿐이므로 어쩌면 누구나 무()가 될 수 있는 변환 점은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 두통이 심해 부친의 손에 이끌려 침 시술을 받으러 갔던 곳이 무가(巫家)였는데, 기대와는 다르게 빙의현상에 의한 치료 효과를 볼 수 없어서 엉터리였다는 실소만 남았었다.

 

한국의 샤머니즘 사회는 문화적으로 빙의현상을 일으키기 쉬운 사고 형태를 가졌다.

죽은 사람의 넋에 의한 빙의는 이미 우리문화에 뿌리 깊이 박힌 의사소통의 지배적인 유형이다.

죽은 자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더 알고 초능력을 가진다는 관념은 인류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우리 문화는 굿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와의 의사소통을 이어주는 풍습을 오래 전부터 키워왔다.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지는 빙의문화(Possession culture)를 가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알래스카가 ‘실혼문화’(soul loss culture)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 추정되는 바는 우리나라 빙의환자 가운데 어떤 경우는 순수하게 무의식적 현상이라기보다 반의식적인 행동일 것이라는 점이다. 331p(7장 빙의현상과 증후.)

 

이런 빙의는 요즘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 명예, 예술, 분노, 지위 등 사회가 복잡해져서 그 양상만 다를 뿐 내용은 같다고 표현될 수 있다는 뜻의 철학적인 의미의 빙의를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도 그들이 내걸은 기만 다를 뿐 수많은 무()가 우리 주변에 있다고 하겠다. 특히 100년 전 이 땅의 민중에게는 새로운 종교였을 그 종교는 전도과정에서 뿌리 깊이 박혀있는 우리의 무속신앙을 부정하는 것보다는 수용하고 타협하는 쪽을 택하여 지금과 같이 왜곡 변형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그 종교에서 주장하는 죽음이란 두려움에 대한 인간 본성을 감성으로 자극하여 영원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집단망상이라는 점이 우리네 무속과 다른 점 같다.

그런 관점으로 나는 신약 중 마태복음30~32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라는 구절은 문자주의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아니 해석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신의 주장을 인간의 뜻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어긋난다는 주장대로.) 그대로 인식한다면 너무 여러 가지 모순과 의문이 발생하기 때문에.  영지주의적인 입장이라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무가(舞歌)와 같은 뿌리를 가진 의미로 보여진다.

 

 

죽음은 여기서 생의 종말이 아니라 산 자에서 죽은 자로의 전환이다.

죽은 자의 모습은 어떤가? 그는 이승의 사람처럼 보고 느끼나 형자(形姿)가 없고 이승의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 죽은 자는 혼신이 되어 자기의 시체와 그것을 애도하는 가족을 보지만 그들과 대화를 할 수는 없다. ‘신령으로서 자취 없이 오는 줄을 모르거든 / 가는 줄을 뉘 알 소냐/ 아마도 허사로다’ 하는 노래가사처럼 실체는 없다. 초앞말에서 말한다.

어야 영가(靈 駕)시여     

사람이 죽어지면 이름 달라지고 성도 달라지네

이름은 영가 시요 성은 귀부(鬼簿)더라

세상사람과는 전혀 다른 계보의 존재가 된다.

381p (9장 죽음. 저승. 사령과 살())

 

책은 나에게는 이미 오래 전의 무녀별곡탓에 무의 입무 과정이나 굿의 내용 같은 것은 흥미를 주지 않는 대신에 무의 무의식에 대한 분석은 집중하게 만드는 점이 있었다. “의 무의식 대한 책은 읽어보았으나 내 능력으로 한번의 독서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것이 분명했으므로 이 책의 내용이 다시 한번 읽게 될 때 잠재의식 속에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원형은 모든 인간 공유의 집단적 무의식의 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일단 자극되면 한 사회 전체가 감염되어 강력한 정동(情動)을 수반한 집단현상으로 번지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인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사건 속에서 원형에 의한 집단적 빙의현상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긍정적 또는 부정적 경과를 나타낼 수 있다. 원형의 배정과 활성화는 창조를 매개할 수도 있으나 파괴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원형에는 반드시 밝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두운 면까지 내포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자기원형은 치료자 또는 구원자형이며 전일을 지향하는 심적 조건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심성의 내부에 살아 있는 것이지 자아가 바로 이 원형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라 마음속에 신의 속성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의식의 자기원형과 동일시되면 자아는 초인적인 힘에 의하여 팽창되어 한계를 보지 못하게 된다. 이때 자아는 그 또한 그림자(파괴적 측면)를 지닌 자기원형과 동일시되어 자기원형의 그림자가 지닌 파괴력도 함께 행사한다. 585p(11장 한국 샤머니즘과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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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월드북 88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소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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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자기와 함께 자기 본질에 대한 판단 이전의 양해를 늘 가지고 있는데,

바로 이 사실로 인해 인간은 무를 통해 본질에서 분리되어 있다.

본질은 인간존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있었던 것'으로서 파악하는 모든 것이다.

여기서 불안은 있는 것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이탈이라는 방식으로 자기가 존재하는 한, 그보다는 차라리 이런 자로서 자기가 자기를 존재하게 하는 한,자기의 파악으로서 나타난다

1부 무의 문제 93p

 

 주체는 다른 자들에게도, 또 나 자신에게도 하나의 '표상'이다.

그 의미는 나는 오직 '표상으로서'만 주체로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 주체를 표상하는 바로 그것 때문에 나는 결코 이런 주체는 아니다. 나는 객체가 주체에서 분리된 것처럼 이런 주체에서 분리되어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나를 주체로부터 고립시킨다. 나는 주체로 있을 수 없다.

나는 이 '주체로 있음을 연기할'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내가 그 주체로 있음을  상상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이런 주체에 무를 띠게 한다.

1부 무의 문제 133p

 

 무는 존재의 무이므로 존재 그 자체를 통해서만 존재에 올 수 있다.

무론 무는 인간존재라는 특이한 존재로 말미암아 존재에 온다.

그러나 이 특이한 존재는 그것아 그 자신의 무의 근원적 기도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 한, 자기를 인간존재로 구성한다.

인간 존재는 그 존재안에서,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해 존재의 핵심속에서

무의 유일한 근거라는 한에서 존재한다.

 

다만 자기 자신의 무의 근거일 뿐인 존재는 자기 자신의 존재의 근거인 존재를 향해 자기를 뛰어 넘는다. 그러나 인간존재가 그것을  향해 자기를 뛰어 넘는 존재는 하나의 초월적인 ''이 아니다. 이 존재는 인간존재의 핵심에 있다.

그것은 전체로서의 인간존재 자체일 뿐이다.

2부 대자존재 163p,179p

 

 그러나 현재는 다만 단순히 '대자;를 현재화하는 비존재로 있는 것은 아니다.

대자인 한에 있어서 현재는 자기 밖에, 즉 자기의 전방과 배후에 자신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 배후에 있어서는 현재는 자신의 과거로 있었으나,

전방에 있어서 현재는 자신의 미래로 있을 것이다.

현재는 공통현전적인 존재 밖으로의 도망이며, 자신이 그것으로 있었던 존재로부터 자신이 그것으로 있을 존재를 향한 도망이다.

현재로서의 한에서는, 현재는 자신이 그것으로 있는 것(과거)으로 있지 않고, 자신이 그것으로 있지 않은 것(미래)으로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미래'로 향하게 된다.

2부 대자존재 제 2장 시간성 232p

반성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적 대자이다.

272p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모순된 결론에 이른다.

"대타존재"는 그것이 하나의 전체에 의해 "존재되는"한에서만,

또 이 전체가 대타존재의 나타남을 위해 자기를 잃어버리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정신'의 존재와 그 수난을 요청하도록 우리를 이끌게 될 것이다.

3부 대타존재 507p

 

모든 인간존재는 그가 존재에 근거를 부여하기 위해,

그리고 동시에 그 자신의 근거로 있음으로써 우연성에서 벗어난"즉자",

즉 종교에서는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자기원인자"를 구성하기 위해,

굳이 자기를 잃어버리기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수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난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역()이다

인간은 신을 탄생시키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한에서는 자기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관념은 모순되어 있다.

우리는 헛되이 자기를 잃어버린다.

인간은 하나의 이로울 것이 없는 수난이다.

4 "가짐","","있음" 993p

 

무진장 두꺼운 책을 읽어내느라 한참 걸렸다.

그런데 이렇게 길게 읽은 바에 대하여 연상되는 구절은 반대로 몇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꽤나 길 수도 있는,

그러나 이 책의 연상에서는 따로 떼놓고 생각하기 보다는 같이 보여지는 것 같다.

다만 아직, 오늘에 한해서일지도...모르지만 떠오른 것은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動拂拭, 勿使惹塵埃

그리고

菩提本無樹, 明鏡亦非台.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이다. 

 

왜 이 구가 생각난 것이지는 모르고 오류일 수도 있으나 그냥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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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악한 동맹 - 종교적 신념이 빚어 낸 현대 정치의 비극
존 그레이 지음, 추선영 옮김 / 이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많은 정치인들은 자신을 선택하면 나라가 살기 좋아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종교인들은 자신의 종교를 믿으면 유토피아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두 범주의 사람들이 만나 협의하여 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면?

정치적 유토피아는 깨어나 보면 악몽임을 깨닫게 되는 집단 구원의 꿈이다.-32p(1장 유토피아의 최후)”

그렇다면 많은 정치인과 종교인이 주장하는 바는 유토피아를 지향한다라는 뜻?!

그런데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상상의 공간이므로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곳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망상으로 제시되는 유혹이라는 것.

그러나 정치를 하는 자들의 의무는 유토피아가 꿈이라고 해서,

실현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테두리 안에서만 머문다면 (시민들은)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다.

그것은 억압에 공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동적인 태도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상적인 꿈을 제시하고

그 꿈을 실현 가능한 테두리 안으로 머물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그런 점을 이용하여 실현 가능함을 증명하기도 전에

또 다른 이상적 구호들만을 생산해낸다.

거리는 그런 구호들로 가득하다.  

 

세상사를 이루는 여러 형태들을 하나씩 지워간다면 마지막 즈음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들간의 경계를 이루는 국가와 문화.

그러한 각각의 문화적 가치를 이룩한 공통사회를 이루는 것들의 여러 가지 요소들.

서로간의 제약을 만들어낸 제도나 법규, 문화, 예술, 노동, 이런 것들.

각 개인의 의식만이 남는 시기까지 거슬러 가는 것이 아닌

최소한의 사회적 형태,

아마 그 상태에서 처음으로 사회적 약속이 생기게 되었던 계기는 이념이 아니었을까?

최소단위의 인간모임이 구성되었을 때,

각자의 생각에 의한 견해를 나타내고 그 가치를 향한 행위를 위한 규범을 만들고자

구성원 다수의 생각의 바탕에 깔려 있는 공통적 이념.

그런 이념의 조직.

그것이 사회이고 국가를 이룬 근본 아닐까?

 

그런데 요즘 누군가는

이념 같은 것 보다는 민생이 우선이라고 하면서 이념을 집어치우자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말에는 민생이 우선이라는 이념이 있는 것 아닌가?

이념이라는 단어를 말하면 빨갱이만을 떠오르게 유도하는 것 같다.

공산주의가 이념이듯이 민주주의도 이념일 게다.

그런데 이념을 생각지 말자는 것은

시민을 노예로 만들고자 하는

서양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의 인종 차별적 바탕이 깔려있는 것 같다.

돈은 내가 나눠 줄 테니 너희들은 부지런히 일만하면 된다.

그러니 이념 같은 것은 너희 같은 무지렁이들은 알 필요가 없다.”라는 의미는

중세 서양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인간은 선천적으로 평등하지 않다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그런 발언의 바탕에는 시민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려는 무의식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 무의식을 이루는 불안은

역사에서 길을 잃은,

우리의 민족정체성을 세우려는 의식의 목표 잃은 지향성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실패한 왕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는

먹이를 주는 새가 자신의 부모인줄 알고 자라다가 나는 것이 익숙한 시기가 지나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뻐꾸기처럼

우리도 갑작스레 닥친 현실에 自尊感을 잃은 채

그저 살기 위해 민생과 이념이라는 둥지 속의 알을 밀쳐 내기만 했던 것과

비슷한 불안감은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이제 그저 먹고 사는 시기를 지나 정체성을 찾고자

이념과 민생이라는 두 가지의 깃발 중에서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하는,

남의 둥지를 떠나야 하는 시기가 도래하자,

홀로서기가 두려워 입안에 계속 뭔가를 집어 넣어 씹게 함으로써,

간혹 정권을 향해 자유의 목소리를 내는 이념 따위는 잊게 하고,

간혹 달콤한 초콜릿 씹는 것이 해롭다는 것을 깨닫는 시민들을 적이라고 생각하여

무조건 빨간색을 입히는 것 같다.

그것도 이제는 빨간색에 대한 아픔을 세월의 흐름 속에서 기억하거나,

그 아픔을 형제나 친척에게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고통을 잊는 아편을 주듯이 말이다.

 

그렇게 그들이 내세우는 민생,

자신이 낳은 새끼가 아닌 뻐꾸기에게 먹이를 주는 가짜 어미의 민생.

인간 기본은 차별이라고 여기고,

우생학적으로 하등이라고 여겨지는 조건을 없애기 위하여는 폭력도 필요하다고 여기는

서양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정치, 종교사상이 들어있다고 본다.

 

그런 모방은 해방후의 정권 수립단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이승만은 해방 뒤 귀국해 1945 11월 한 연설에서 “지금 우리나라를 새로이 건설하는 데 있어서 튼튼한 반석 위에다 세우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물로 주신 이 성경말씀을 토대로 해서 세우려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반석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매진합시다”라고 했다. 이어 1946 3·1절 기념식에서는 “한민족이 하나님의 인도 하에 영원한 자유독립의 위대한 민족으로서 정의와 평화와 협조의 복을 누리도록 합시다”라고 했다.  

이런 종교적 신념의 역사는

근대의 세속적 폭력은 기독교 역사를 따라다녔던 폭력의 돌연변이다.

신이 종말을 성취할 것이라는 초기 기독교의 신념은 2백 년 이상 꾸준히 이어가다가 인간의 활동으로 유토피아를 성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변했고 종말이라는 초기 기독교의 신화는 과학이라는 옷을 입고 신념을 바탕으로 한 신종폭력을 등장시켰다. 12p(1장 유토피아의 최후)    

 

서양은 그들이 황금을 찾아 떠난 그 시절부터

자신들의 세계가 아닌 동양이나 아프리카 등의 세계는 침략과 약탈을 행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생각했었나 보다

. “그러나 서양은 폭력으로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지난 세기에 자행된 전체주의의 폭력은

역사를 단숨에 사로잡겠다는 서양 기획의 일부였다.

21세기는 우파가 좌에게서 변화의 도구를 넘겨받아 그 기획을 다시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109p

폭력과 서양의 전통 -20세기의 계몽과 폭력

 

그래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한 민족의 장구한 역사가 담긴

잉카나 마야문명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했고,

미국은 자신들이 핍박 받던 나라에서 도망치듯 떠나면서

신세계를 신의 나라를 실현 시킬 것이라고 믿으며 도착할 땅을 식민지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기원이전부터 존재했을 먼저 살고 있던 민족을 악마로 규정하여,

지금 향하는 기름진 땅에 머무는 동안

우리를 향한 그들의 기도는 저주로 바뀔 것(John Winthrop)”이라며

무차별로 살해하며 새로운 땅에서는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종말론을 신봉했단다.

그런 종교성은 미국을 세계의 나머지 나라와 다른 나라로 규정할 수 있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했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Alexis de Tocqueville이 인식한대로 미국 예외주의는 종교적 현상이다. 영국에서 온 최초의 식민지 정착민들이 이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미국은 종교라는 안경을 쓰고 자신을 이해했다. 인간의 활동으로 세계를 부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기대하는 후천년주의 사고와 대격변을 몰고 올 갈등을 고대하는 전천년주의 신념이 미국인들의 역사 해석 방식과 미국인들의 미래 관을 형성했다. 후천년주의와 전천년주의는 미국이 역사에서 독특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임을 미국인들에게 각인시켰고 그 결과 종말 신화가 미국화 되었다.  164p (4장 종말론의 미국화)

 

그런데 그들은 처음부터 종교적으로 스스로 선택 받은 인가들이라는 오만함이 있었기에 폭력을 수행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는가 보다. 그들이 그런 오만한 폭력을 행사하게 된 동기는  

인종이 서로 불평등하다는 신념을 지닌 사람들 대부분은

사회 개혁을 통해 열등한 종족의 선천적 불이익을 보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에는 모든 인류가 장차 도래될 보편문명에 참여할 수 있겠지만

그러려면 그들 고유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유럽의 생활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적 인종차별주의였다. 92p (2장 나치즘과 계몽) 

 

그런 폭력성을 여러 가지 철학적 이유로 덧칠한 채 자신들끼리 싸웠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그들의 이념인 것 같다.

그들의 신 자유주의 이념은 개인의 자유를 늘리고 국가의 통제를 줄이는 이념이라고 한다.

 

신 자유주의는 본원적인 자유주의 가치로 돌아가자는 사상인데

그러기 위해 신 자유주의자들은 엄격하게 제한된 정부와

구속되지 않는 자유 시장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신 자유주의는 과학적 합리성을 주장하지만

역사를 예정된 운명을 따라가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목적론적 역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114p 3장 주류로 부상한 유토피아 1.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와 보수주의의 종말)

 

이것은 얼핏 노자의 유토피아. 소국과민(小國過民)!을 생각하게 한다.

小國寡民 使有什佰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人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不相往來

(인구가 작은 나라 열 가지 백 가지 기계가 있으나 쓰이지 않도록 하라

백성의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이사 가는 일이 없게 하라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는 일이 없고 비록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내보일 일이 없다

사람들 다시 노끈을 매어 쓰도록 하고, 음식을 달게 여기며 먹도록 하고,

옷을 아름답게 생각하며 입도록 하고 거처를 편안하게 생각하여 살도록 하고,

풍속을 즐기도록 하라.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지만 사람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는 일이 없다. -노자 도덕경 80)

 

 

이 사상이 동남아의 어느 한 권력자에게는 어떻게 이해가 되었는지

(- 하긴 지금도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살인 도둑과 같은 범죄가 많아진다고 하지만 -) 소국과민을 실행하고자

같은 민족의 1/4이상을 Killing Field에서 살해했다고 한다.

노자가 살아 온다면 자신의 말을 저렇게 이해한 폴 포트를 보고 뭐라 하였을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분파와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향연을 즐길까?

공자의 후인들은?

예수는 유대교와 신구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을 어떻게 화해시킬까?

아니면 자신의 제자들이 만들어 낸 지옥으로 누구를 보내버릴까?

부처는 사원의 고양이에 대하여 어떻게 할까?

南泉화상처럼 죽였을까? 아니면 趙州선사처럼 신발을 머리에 이었을까?

 

정말로 위대했던 역사 속의 현자들은 그래서 스스로 글을 남기지 않았는가 보다.

 

권력을 잡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말에 따르면

현재의 나라사정은 엉망이고 가만 놓아두면 파멸할 것처럼 말한다.

종교인들의 말 역시 현실은 고통이고

곧 종말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에 유토피아로 가기 위한 신념의 복종을 말한다.

그런데 두 가치가 목표로 하는 것은 하나인 것 같아도

그 점에 도달하는 길은 민족들의 수만큼이나 많을 수 있다는 점을 말하지 않고

자신만이 유일하다고 하기 때문에 문제를 키우는 것 같다.

그 유일하다고 주장하는 그 모습은 신 역시 하나다라고 주장하는 종교의 모습과 같아 보인다.

서양의 역사는 그래서 하나일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려고 상대를 파괴하는 폭력의 역사였을까?  

 

그러나 인간의 욕구는 다양하기에 조화를 이룰 수 없고

보편적 가치들은 다른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다.

다양한 형태의 정부가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다면

그것은 인류가 특정 지역에 국한된 대서양 민주주의가 전세계에도 적용될 수 있을 만큼

유용한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 가치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해결할 올바른 방법이

단 한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80p(6장 종말론 이후)”

 

그런데 그들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동양의 우리는 왜 그들의 폭력적이면서도 오만한 문명을 따라 하려 하는가!

그들은 오래 동안 세상은 하나가 지배해야 한다며 오만한 폭력을 휘둘렀지만

동양은 화합하는 기가 우주를 구성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민생이 우선임을 내세워서

정권을 차지하려는 부류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서양의 모방성은,

특히나 미국과 동일시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부류들은  

그렇기에 자유주의적 인종차별주의전체주의의 폭력성을 안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그런 추악한 정치와 종교의 동맹이 표방하는 민생보다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 위험한 지정학적 여건을 가지고 있는 현실에서 자립하기 위하여는

우리에 의한 우리 만의 이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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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개념 / 죽음에 이르는 병 동서문화사 월드북 33
키에르케고르 지음, 강성위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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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책을 읽는다는 것에 별로 훈련되지 않은 탓에 충분한 이해력을 갖지 못한 나는 최근의 독서를 통해 접하는 개념들을 번에 걸쳐 반복으로 읽어도 이해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을 중복해서 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는 한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 관한 것은 요약을 책을얼마 프랑스 고교 철학시리즈를 보았을 때와 요약한 ‘Sparknote” 보고 나서 느낀 점은 우리의 고교 철학 교과와 프랑스의 고교 철학에서 인문학을 대하는 수준(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주관식 문제를 내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인기 있다고 하나 그것을 우리 학생들의 논술 시험대비를 하고자 객관식 (답이라니) 나열하는 -) 결국에는 문화적 차이를 만드는 아닐까 하는 점이다 - 읽고 정본(?) 읽어서 인지 아니면 번을 연달아 읽어서인지 이해하기가 조금은 나아졌음을 느꼈었다. 책을 구하는 대부분의 방법이 중고 책을 사는 것인데 그것도 인터넷 사이트를 통하여 사다 보니 책의 내용을 미리 알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더러 있다. 바람에 읽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니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바람에 이해력이 순간 높아진 것이지만 책의 내용이 마음에 차지 않았거나 머리로 느껴지지 않았다면 번의 시도는커녕 읽다가 그만 두었을 일이었겠다.
  • 그렇게 요즘에는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책을 주로 읽고 있는데 본성이 움직이는 사회나 개인의 욕망과 좌절의 근원이 불안에서 시작되는 아닐까 하여 불안을 다루는 주제에 많은 주의가 가져있는 상태이다. 불안이라는 개념 프로이트의 불안 개념 –(로이트는 불안이 성적(性的)인 원인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성적 욕구가 지속적인 욕구로 간단하게 단념할 수 없는 반면에, 도덕이나 사회의 관습에 저촉되어 갈등의 원인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백과사전)은 예전에 읽어 보았고 정신분석이나 이상행동의 심리에 관하여도 한동안 몰두 하였기에 다른 측면을 보고 싶었었다. 세상의 한 면에서는 불안을 억제하거나 해소하는 기제로서 종교가 차지하는 부분을 자랑하고 있기도 하고 –(이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종교가 불안을 제거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불안의 근본을 변형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더 크다. 불안을 제거하는 방법에 있어서 폭력을 조장하거나 폭력적인 것을 목적에 대한 보상으로 제시하여 일시적인 일시적인은 시간개념에 있어서 개인에게는 영원이라는 대리 충족을 암시하는 회피를 주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 – ,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 인간에게 철학적, 윤리적, 이런 형이상항적인 의미로서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키르케고르불안의 개념을 읽고 있는데 읽다 보니 자꾸만 의견이 충돌되어 짜증이 난다. 이 책 역시 부족한 이해력을 돕기 위해 개인 Blog Review, 또는 요약 본을 읽거나 백과사전에서 먼저 도움을 받으려 했는데 백과사전에는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불안이란 죄()에 대응하는 심리적 기분이다. 불안은 자기에게 사로잡힌 자유이지만, 그것은 죄를 불러일으키고 죄는 또한 결과로서 불안을 가져온다. 그러나 인간은 이 불안의 교화(敎化)를 받아 신앙으로 귀의(歸依)할 수 있고, 화해(和解)에 의해 비로소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라고 안내하고 있는데 이 주제를 이해하고자 몇 번을 반복하여 읽어도 나의 견해와 충돌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어쩌면 그 책 이전에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읽어서 일 수도 있겠지만 불안은 죄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죄라는 개념이 어떻게 생긴다는 것을 밝히지 않고 그 개념이 그냥 함께 들어왔다고 한다. “ 아담의 최초의 죄로 인해 이렇게 죄는 이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36p”–“바야흐로 에서 , ‘에서 , 그리고 벌에 의해 계율을 깨뜨리는 파계가 생겨난다는, 점차로 솟구쳐 오르는 열광적인 점층법이 시작되는 것이다. 31p” – 그럼 죄는 무엇인가? (Augsburg의 신앙 고백 제 2죄의 원인은 나쁜 자들의 의지, 즉 악마와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의지이다. 그 의지는 신의 도움을 받는 일 없이 신을 등지기 때문이다” – 죄의 본질은 신에 대한 불복종이라고 생각한 개혁기의 교의학-295p)) 그러면 은 무엇인가? 불안에 의하여 이 생겨난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원죄는 어떠한 인간 지성에 의하여서도 알 길이 없으며, 단지 성서의 게시에 의해 인정되고 깊이 믿어지는 고약한 본성의 타락이다라는 Schmalkalden조항은 무엇일까?
  • Wikipedia에는  Schmalkalden 동맹이란, 1531 독일지방의 개신교 제후들과 도시들이 Augsburg 제국 의회의 Wilms 칙령 시행 결의에 반대하여 자기 방위를 위해 Thuringen 지방의 Schmalkalden이라는 곳에서 결성한 동맹을 말한다.
  • 신교 제후들이 트리엔트 공의회 참가를 거부하자, 신성 로마제국황제 Karl V Schmalkalden 동맹의 토벌을 결의했고, 이듬해에 Schmalkalden 전쟁이 발발하였다. 한때는 Schmalkalden동맹 내의 의견 불일치와 Sachsen공의 배신 등으로 동맹은 패하고 해체되었다. 그러나, Sachsen 공이 다시 태도를 바꾸어 동맹에 가담하는 한편, 프랑스의 원조에 힘입어 신교도가 세력을 회복해 1555Augsburg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 Council of Trient
  •  1545 개회되어 1548 정회될 때까지 3년간의 기간으로 동안 공의회는 성서만이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고 믿음의 원천은 전통이나 교의가 아니라 성서라는 개신교의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사상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성서와 전통 모두가 신앙의 원천임을 재확인하였다. 아울러 Vulgata 성서
  • (382 교황 다마소의 명으로 히에로니무스가 편찬하였다. 복음서는 384년에 마쳤고, 신약 전체는 386년경에 끝난 것으로 보인다(Chapman ). 그리고 구약까지 포함해서 완성한 것은 404년이다. 근본 목적은 재래의 라틴어역 성서의 원본에 차질이 심하여 이것을 통일하고 개정하자는 있었다. 구약 원본을 라틴어로 개역함에 있어서, 그는 《시편》부터 착수하였다.
  • 초기 교정본에서는 변화가 없었고 주로 70인역(LXX) 의존했다. 그러다 2교정본(Gallican Psalter)에서는 전적인 개역을 시도하였다. 그의 헤브라이어 연구가 성장하면서 종래의 70인역에 의존하던 것을 지양하고 헤브라이 원전에서 직접 개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15년간의 노력으로 구약 전체를 개역했는데, 이것은 헤브라이 원전에서 직접 옮긴 것으로, 여기에 수록된 《시편》도 3교정본(Hebrew Psalter) 포함되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그의 성서개역사업을 과소 평가하였으나, 중세에 이르러서는 서방교회 전체가 이것을 표준적인 성서로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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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의 인쇄판이 1456년에 나왔는데, 이것을 《마자랭 성서 Mazarin Bible》라고 불렀다.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개정을 제의한 있었으나, 학자들은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1590 교황 식스토 5세의 주관 하에 개정본이 나왔고, 1592 클레멘스 8세에 의하여 다시 개정본이 나오면서 로마가톨릭교회의 표준성서로 공인되었다. 1908 비오 10세는 새로운 개역을 지시하였다. )
  • 권위를 인정하였고, 성서의 解釋 權 교회만이 갖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또한 개신교의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길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배척하고 원죄와 의회에 대한 정의를 명백하게 규정하였다. 성사에 대한 교리도 1기에 규정되었다. 황제 Karl V 교황 사이의 관계 악화로 중단되었다.
  • 이렇게 보면 나에게 있어서 책의 내용은 불안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 원죄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죄의 근원이 불안이라는 것에 동조하지 않고 있는 것이며 심리학적으로 어느 정도의 근원이라 하여도 밝혀지지 않은 나머지 어느 부분에 있을 다른 개념들의 역할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부분이 사실은 불안의 기초에 근거한다고도 주장할 있겠다. 나머지는 프로이트의 몫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이지. 물론 지금까지는 말이야. 책이 죄의 기원은 원죄라고-인간의 기원은 아담이므로-하며 기독교적인 사유와 해석의 강화를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생애에서 목사가 되기 위한 자신의 열성을 알리고자 하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어떤 생각에 머물러 있는가 하면 사람 Kierkegaard 포함한 여타 다른 사람들, 신약 구약에서 등장하는 인간 이상이라고 하는 대상을 인간이 것도 신이라는 개념과 연관 지어 어떻게 정의할 있는가라는 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抽象物 신에게 짊어지게 것인데, 抽象物 抽象物 주제에 감히 신과 친근한 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2 절망은 없다 원주 333p) Wikipedia 있는 내용이나 원죄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도 Jansen 이나 Pelagius처럼 상반된 의견을 주장하여 그의 추종자들이 계보를 이루게 되는 것처럼 하는 , 그것도 모순 아닐까? 현재의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진다는 어쩌면 착각이 그런 자만을 만드는 아닐까? 또한 이들은 개념의 동기가 없이 만들어진 의미를 개념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의문이 통하지 않는다. 것은 불안의 개념”53p “ 소망은 독자들께서, ‘만일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이런 심원한 질문을 아무도 해주지 말았으면 하는 일이다.””누군가가 어리석은 질문을 끌어 낸다면 사람에게는 대답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마저 사람과 마찬가지로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 쓰여 있는데 시간이라는 시각으로 과거에 대한 결과를 지금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미래에 대하여 현재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다른 점이 있을까? 모두 현재라는 시간개념에 대하여 착각하는 아닐까? 내게는 없는 의미이다. 또한 가능성 있는 추론으로 생각된다. ‘만약 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의문은 지금 현재에도 계속 이어진다는 의견이라는 의미이다. 많은 다른 의견들이 내게 있어서 의문을 풀고자 언제 다시 읽을 모르지만 책은 한번으로 그만 두어야겠다. 만족과 비슷한 개념의 말도 어울리지 않는 심정이지만 값과 책의 두께에 대한 미련으로 읽자면 그나마 안정되었던 이들에 대한 감정이 질적으로 낮게 되어갈 같다. 책처럼 어느 기원에서 풀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진행하여 기원을 만드는 이런 류의 의견은 앞서 읽었던 다른 책들( 제목을 이으면 하나의 명제가 되는..) 대한 인식이 너무 커서 뒤바뀔 같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 이렇게 신학자도 아닌데 공부를 하게 .만드는 원인은 모든 것이 나의 이해력이 짧은 탓이고, 망가진 前頭葉 해마의 기능으로 인해 기억력까지 희미해져 금방 읽은 것도 잊어 버리는 때문이며 그로 인하여 내가 후회하는 것은 진작에 읽는 훈련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 오래 , 아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선물인 Herman Hess 전집으로부터 시작한 사상의 접촉은 그맘때쯤이면 누구나 읽었을 서양고전이었는데 예닐곱 이었던 나이에는 이해하기 힘들었을 책들로부터이었을 것이다. 사는 것에 매달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술에, 색에 흔들리며 살면서도 의문이 떠나지 않았던 것은 고전들이 숙제였다고 있다. 그래서 틈틈이 책을 사면서도 읽지 않고 보관만 두었던 이유는 언젠가는, 아마 나이가 많아지면 읽으리라는 것이었는데 그게 아주 오래 것은 세로읽기로 돼있는 것이라서 지금 읽자니 너무 곤란한 것이 단점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같은 책을 다시 사자니 아깝기도 하고 해서 중고 책을 사서 읽는 것이 간혹 후회를 일깨우는 요즘의 읽기이다.  요즘 읽는 그런 서양고전들을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도 읽지 않는지 원가보다 싸게 파는 것이 대부분인 것을 보면 말이지. 그래서 한편으로 우리나라의 철학이나 인문학의 현실이 철학의 부재를 심각하게 사회에서 반영하는 것을 인문학자들이 개탄하는 이유 아닐까? 그렇게 본성에 관한 철학이나 문화에 대한 교육과 관심이 사라진 탓에 비열함과 졸렬함의 정치와 타인과 문화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사라진 험한 사회를 보게 되는 아닐까? 밤마다 밝혀지는 휘황찬란한 강한 색의 자극에 둔감해진 사람들은 고전의 책들이 다룬 인간 본성에 대한 불안에 대하여도 둔감해졌을까? Kierkegaard 논리로 죄를 만드는 악을 행하지 않아서 불안을 잠재우려면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프로이트의 시각으로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와의 마찰로 인한 갈등으로 야기되는 불안의 요소를 적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요즘은 남을 알고 나를 알면 성공할 있다는 개발 만능이라서 그런지 나를 아는 것은 관심 없고 남을 알아,-  이것도 남을 아는 질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그를 넘는 것이 생존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아닐까? 요즘에는 겸손은 미덕이 아니다라고 가르치니 말이다. 그래서 미디어에서도 지나친 자신감과 자만, 오만, 무례, 건방, 허세 등이 시대적 추세인 것처럼 다루나 보다. 겸손함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라고 할 텐데 자아를 숨김이 아니고 드러내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뒤로하고 남을 존중하는 것이 손해 보는 짓이라고 이 사회는 은연중에 가르치고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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