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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악한 동맹 - 종교적 신념이 빚어 낸 현대 정치의 비극
존 그레이 지음, 추선영 옮김 / 이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많은 정치인들은 자신을 선택하면 나라가 살기 좋아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종교인들은 자신의 종교를 믿으면 유토피아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두 범주의 사람들이 만나 협의하여 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면?
“정치적 유토피아는 깨어나 보면 악몽임을 깨닫게 되는 집단 구원의 꿈이다.-32p(1장 유토피아의 최후)”
그렇다면 많은 정치인과 종교인이 주장하는 바는 유토피아를 지향한다라는 뜻?!
그런데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상상의 공간이므로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곳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망상으로 제시되는 유혹이라는 것.
그러나 정치를 하는 자들의 의무는 유토피아가 꿈이라고 해서,
“실현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테두리 안에서만 머문다면 (시민들은)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다.
그것은 억압에 공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동적인 태도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상적인 꿈을 제시하고
그 꿈을 실현 가능한 테두리 안으로 머물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그런 점을 이용하여 실현 가능함을 증명하기도 전에
또 다른 이상적 구호들만을 생산해낸다.
거리는 그런 구호들로 가득하다.
세상사를 이루는 여러 형태들을 하나씩 지워간다면 마지막 즈음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들간의 경계를 이루는 국가와 문화.
그러한 각각의 문화적 가치를 이룩한 공통사회를 이루는 것들의 여러 가지 요소들.
서로간의 제약을 만들어낸 제도나 법규, 문화, 예술, 노동, 이런 것들.
각 개인의 의식만이 남는 시기까지 거슬러 가는 것이 아닌
최소한의 사회적 형태,
아마 그 상태에서 처음으로 사회적 약속이 생기게 되었던 계기는 이념이 아니었을까?
최소단위의 인간모임이 구성되었을 때,
각자의 생각에 의한 견해를 나타내고 그 가치를 향한 행위를 위한 규범을 만들고자
구성원 다수의 생각의 바탕에 깔려 있는 공통적 이념.
그런 이념의 조직.
그것이 사회이고 국가를 이룬 근본 아닐까?
그런데 요즘 누군가는
이념 같은 것 보다는 민생이 우선이라고 하면서 이념을 집어치우자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말에는 민생이 우선이라는 이념이 있는 것 아닌가?
이념이라는 단어를 말하면 ‘빨갱이’만을 떠오르게 유도하는 것 같다.
공산주의가 이념이듯이 민주주의도 이념일 게다.
그런데 이념을 생각지 말자는 것은
시민을 노예로 만들고자 하는
서양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의 인종 차별적 바탕이 깔려있는 것 같다.
“돈은 내가 나눠 줄 테니 너희들은 부지런히 일만하면 된다.
그러니 이념 같은 것은 너희 같은 무지렁이들은 알 필요가 없다.”라는 의미는
중세 서양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인간은 선천적으로 평등하지 않다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그런 발언의 바탕에는 시민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려는 무의식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 무의식을 이루는 불안은
역사에서 길을 잃은,
우리의 민족정체성을 세우려는 의식의 목표 잃은 지향성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실패한 왕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는
먹이를 주는 새가 자신의 부모인줄 알고 자라다가 나는 것이 익숙한 시기가 지나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뻐꾸기처럼
우리도 갑작스레 닥친 현실에 自尊感을 잃은 채
그저 살기 위해 민생과 이념이라는 둥지 속의 알을 밀쳐 내기만 했던 것과
비슷한 불안감은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이제 그저 먹고 사는 시기를 지나 정체성을 찾고자
이념과 민생이라는 두 가지의 깃발 중에서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하는,
남의 둥지를 떠나야 하는 시기가 도래하자,
홀로서기가 두려워 입안에 계속 뭔가를 집어 넣어 씹게 함으로써,
간혹 정권을 향해 자유의 목소리를 내는 이념 따위는 잊게 하고,
간혹 달콤한 초콜릿 씹는 것이 해롭다는 것을 깨닫는 시민들을 적이라고 생각하여
무조건 빨간색을 입히는 것 같다.
그것도 이제는 빨간색에 대한 아픔을 세월의 흐름 속에서 기억하거나,
그 아픔을 형제나 친척에게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고통을 잊는 아편을 주듯이 말이다.
그렇게 그들이 내세우는 ‘민생’은,
자신이 낳은 새끼가 아닌 뻐꾸기에게 먹이를 주는 가짜 어미의 ‘민생’이.
인간 기본은 차별이라고 여기고,
우생학적으로 하등이라고 여겨지는 조건을 없애기 위하여는 폭력도 필요하다고 여기는
서양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정치, 종교사상이 들어있다고 본다.
그런 모방은 해방후의 정권 수립단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이승만은 해방 뒤 귀국해 1945년 11월 한 연설에서 “지금 우리나라를 새로이 건설하는 데 있어서 튼튼한 반석 위에다 세우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물로 주신 이 성경말씀을 토대로 해서 세우려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반석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매진합시다”라고 했다. 이어 1946년 3·1절 기념식에서는 “한민족이 하나님의 인도 하에 영원한 자유독립의 위대한 민족으로서 정의와 평화와 협조의 복을 누리도록 합시다”라고 했다. “
이런 종교적 신념의 역사는
“근대의 세속적 폭력은 기독교 역사를 따라다녔던 폭력의 돌연변이다.
신이 종말을 성취할 것이라는 초기 기독교의 신념은 2백 년 이상 꾸준히 이어가다가 인간의 활동으로 유토피아를 성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변했고 종말이라는 초기 기독교의 신화는 과학이라는 옷을 입고 신념을 바탕으로 한 신종폭력을 등장시켰다. 12p(1장 유토피아의 최후)
서양은 그들이 황금을 찾아 떠난 그 시절부터
자신들의 세계가 아닌 동양이나 아프리카 등의 세계는 침략과 약탈을 행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생각했었나 보다
. “그러나 서양은 폭력으로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지난 세기에 자행된 전체주의의 폭력은
역사를 단숨에 사로잡겠다는 서양 기획의 일부였다.
21세기는 우파가 좌에게서 변화의 도구를 넘겨받아 그 기획을 다시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109p
폭력과 서양의 전통 -20세기의 계몽과 폭력
그래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한 민족의 장구한 역사가 담긴
잉카나 마야문명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했고,
미국은 자신들이 핍박 받던 나라에서 도망치듯 떠나면서
신세계를 신의 나라를 실현 시킬 것이라고 믿으며 도착할 땅을 식민지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기원이전부터 존재했을 먼저 살고 있던 민족을 악마로 규정하여,
“지금 향하는 기름진 땅에 머무는 동안
우리를 향한 그들의 기도는 저주로 바뀔 것(John Winthrop)”이라며
무차별로 살해하며 새로운 땅에서는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종말론을 신봉했단다.
그런 “종교성은 미국을 세계의 나머지 나라와 다른 나라로 규정할 수 있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했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Alexis de Tocqueville이 인식한대로 미국 예외주의는 종교적 현상이다. 영국에서 온 최초의 식민지 정착민들이 이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미국은 종교라는 안경을 쓰고 자신을 이해했다. 인간의 활동으로 세계를 부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기대하는 후천년주의 사고와 대격변을 몰고 올 갈등을 고대하는 전천년주의 신념이 미국인들의 역사 해석 방식과 미국인들의 미래 관을 형성했다. 후천년주의와 전천년주의는 미국이 역사에서 독특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임을 미국인들에게 각인시켰고 그 결과 종말 신화가 미국화 되었다. 164p (4장 종말론의 미국화)
그런데 그들은 처음부터 종교적으로 스스로 선택 받은 인가들이라는 오만함이 있었기에 폭력을 수행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는가 보다. 그들이 그런 오만한 폭력을 행사하게 된 동기는
“인종이 서로 불평등하다는 신념을 지닌 사람들 대부분은
사회 개혁을 통해 열등한 종족의 선천적 불이익을 보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에는 모든 인류가 장차 도래될 보편문명에 참여할 수 있겠지만
그러려면 그들 고유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유럽의 생활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적 인종차별주의”였다. 92p (2장 나치즘과 계몽)
그런 폭력성을 여러 가지 철학적 이유로 덧칠한 채 자신들끼리 싸웠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그들의 이념인 것 같다.
그들의 신 자유주의 이념은 개인의 자유를 늘리고 국가의 통제를 줄이는 이념이라고 한다.
“신 자유주의는 본원적인 자유주의 가치로 돌아가자는 사상인데
그러기 위해 신 자유주의자들은 엄격하게 제한된 정부와
구속되지 않는 자유 시장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신 자유주의는 과학적 합리성을 주장하지만
역사를 예정된 운명을 따라가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목적론적 역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114p 제3장 주류로 부상한 유토피아 1.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와 보수주의의 종말)
이것은 얼핏 노자의 유토피아. 소국과민(小國過民)!을 생각하게 한다.
小國寡民 使有什佰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人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不相往來
(인구가 작은 나라 열 가지 백 가지 기계가 있으나 쓰이지 않도록 하라
백성의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이사 가는 일이 없게 하라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는 일이 없고 비록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내보일 일이 없다
사람들 다시 노끈을 매어 쓰도록 하고, 음식을 달게 여기며 먹도록 하고,
옷을 아름답게 생각하며 입도록 하고 거처를 편안하게 생각하여 살도록 하고,
풍속을 즐기도록 하라.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지만 사람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는 일이 없다. -노자 도덕경 80)
이 사상이 동남아의 어느 한 권력자에게는 어떻게 이해가 되었는지
(- 하긴 지금도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살인 도둑과 같은 범죄가 많아진다고 하지만 -) 소국과민을 실행하고자
같은 민족의 1/4이상을 Killing Field에서 살해했다고 한다.
노자가 살아 온다면 자신의 말을 저렇게 이해한 폴 포트를 보고 뭐라 하였을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분파와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향연을 즐길까?
공자의 후인들은?
예수는 유대교와 신구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을 어떻게 화해시킬까?
아니면 자신의 제자들이 만들어 낸 지옥으로 누구를 보내버릴까?
부처는 사원의 고양이에 대하여 어떻게 할까?
南泉화상처럼 죽였을까? 아니면 趙州선사처럼 신발을 머리에 이었을까?
정말로 위대했던 역사 속의 현자들은 그래서 스스로 글을 남기지 않았는가 보다.
권력을 잡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말에 따르면
현재의 나라사정은 엉망이고 가만 놓아두면 파멸할 것처럼 말한다.
종교인들의 말 역시 현실은 고통이고
곧 종말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에 유토피아로 가기 위한 신념의 복종을 말한다.
그런데 두 가치가 목표로 하는 것은 하나인 것 같아도
그 점에 도달하는 길은 민족들의 수만큼이나 많을 수 있다는 점을 말하지 않고
자신만이 유일하다고 하기 때문에 문제를 키우는 것 같다.
그 유일하다고 주장하는 그 모습은 신 역시 하나다라고 주장하는 종교의 모습과 같아 보인다.
서양의 역사는 그래서 하나일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려고 상대를 파괴하는 폭력의 역사였을까?
“그러나 인간의 욕구는 다양하기에 조화를 이룰 수 없고
보편적 가치들은 다른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다.
다양한 형태의 정부가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다면
그것은 인류가 특정 지역에 국한된 대서양 민주주의가 전세계에도 적용될 수 있을 만큼
유용한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 가치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해결할 올바른 방법이
단 한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80p(6장 종말론 이후)”
그런데 그들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동양의 우리는 왜 그들의 폭력적이면서도 오만한 문명을 따라 하려 하는가!
그들은 오래 동안 세상은 하나가 지배해야 한다며 오만한 폭력을 휘둘렀지만
동양은 화합하는 기가 우주를 구성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민생이 우선임을 내세워서
정권을 차지하려는 부류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서양의 모방성은,
특히나 미국과 동일시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부류들은
그렇기에 ‘자유주의적 인종차별주의’와 ‘전체주의의 폭력성’을 안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그런 추악한 정치와 종교의 동맹이 표방하는 민생보다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 위험한 지정학적 여건을 가지고 있는 현실에서 자립하기 위하여는
우리에 의한 우리 만의 이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