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샤머니즘과 분석심리학 - 고통과 치유의 상징을 찾아서
이부영 지음 / 한길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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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 토템.

우리네 주변에 잊혀지지 않고 꾸준히 이어오는 점복(占卜)

“점복은 인류의 오랜 관습이다. 인간은 어려운 일에 부딪쳐서 의식의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끼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미지의 사실을 알고 싶어한다. -658p,

“그러나 인류역사에서 점복의 심리를 완전히 추방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미지의 세계가 많이 줄어들고 있지만 인간은 인간자신의 정신에서 무의식적인 것을 완전히 의식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점복의 심리는 의식 너머의 세계, 즉 무의식의 세계를 알고자 하는 것이기에 무의식이 존속하는 한 그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없어지지 않는다. -659p ((-12장 한국 민간신앙과 윤리의식)

 

요즘은 타로 점과 같은 서양 점복도 일부에서 유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네 민속 점복은 공중파나 케이블 같은 방송에 나오는 것을 못 보았으나

타로 점은 걸러지거나 모자이크 등의 방법으로 가려지지도 않는 채로 방송에 나오니,

우리네 민속 점복은 뭐가 흉물스러운 데가 있다고 보여지는가 보다. 

그러나 우리의 점복은 생활 속에 깊이 박혀있어 그것이 점복의 일종이라고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활의 행복(幸福), 불행(不幸)을 조상과 연결시키는 기복(祈福)문화.

유교적 문화로 조상을 기억하려는 형상 속에 내재된 조상으로부터 행복을 얻으려는 마음의 표현.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가 죽음에 대해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삶에 대해서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에 관하여 알겠는가(未知 知死)!” 아직 삶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어찌하여 죽음까지 알려 하느냐며 제자가 차근차근 공부하지 않고 덤벙대는 것을 꾸짖는 말일 수도 있고, 삶을 알게 되면 죽음은 저절로 알게 된다며 타이르는 말일 수도 있다.”

.

그런 의미가 수 천년 전의 원시문화와 어우러져 변화된 풍속

형이상학적인 의문에 대한 위안이 철학이나 신앙이라면 그런 것들과의 접촉이 뜸한 민중에게는 유교적 사상이나 도교적 방식이나 불교적 성찰 이런 것들은 먹고 사는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들이니 알 바 없는 시절에 자연 속에서 얻어지는 눈앞의 현실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 그런 대상으로의 접근이 당장 편하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으로의 발달이 이루어진 것 아니었을까?

나중의 산업화로 육체적으로 편안해지기 시작해졌을 때야 “칠정”이니” “소국과민”이니 “일일불작”이니 하는 맹자왈 공자왈이 귀에 들렸을 테이고……

그렇게 수천 년을 생활 속에 어우러진 채로 잠재되어 내려온 집단적 무의식은 유전적으로 DNA화 되어 현대인의 피에 흐르게 되었는가! 그런데 그런 DNA의 흐름은 왜 유독 여자들에게 많이 이어졌을까? 여성의 본성에는 예지력과 같은 감성이 남성보다 많기 때문일까? 남성보다 많다면 그 것은 마찬가지로 생존을 통해 잠재된 본능과 같은 것 아닐까? 가령 사냥 나간 남성을 기다리면서 스스로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능력의 발달 같은 것……

 

           “우리나라의 무당 중에 여성이 많은 이유에 대해서는 또 다른 재미있는 종교 인류학적인           해석이 있다. (김영숙/1979: 여섯 명의 한국 여성을 통해본 무당의 사회화 과정)-중략-         전통적으로 여성은 그저 쥐 죽은 듯이 모든 것을 참으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야           하는데 무당 후보생은 너무도 강한 자존심을 갖고 있어 전통 여성과 같이 벙어리,      귀머거리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이 인류학자는 이런 맥락에서 특히     빙의현상(possession)에 대해서 재미있는 해석을 내렸는데 그는 이 현상을 ‘사회적     박탈에 대한 여성의 망아적 보상(ecstatic compensation)’이라고 보았다. (–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무교 편 82p)

 

그렇지만 집단적 무의식으로 내재되어 이어져온 점복에 대한 기대심이나 독립심은 같은 심리는 집단과의 생활 속에서 각 개인의 성향은 내재된 환경에 따라 진화하는 방식이 달랐을 것이므로 각자에게 다양함으로 나타났을 것 같다. 그것이 증명된 자만이 샤먼으로 인정받았을 수도 있고……

“무의식을 명백한 구체적 사실로서 남김없이 이해하고 파악했다고 믿는 것은 자아팽창의 오만이며 착각이다. 점복의 이용도 실시하는 사람이나 묻는 사람의 의식 태도에 따라 윤리적 의미가 달라진다. 무의식의 불가능성에 대해 겸허한 자세로 대할 때 그 결과에 대한 이해가 맹신이나 맹종이 아닌 주의 깊은 고려, 즉 종교적 성격을 띤다. 660p  (-12장 한국 민간신앙과 윤리의식)   

 

오래 전에 서정범 교수의 무녀별곡을 읽었을 때,

그 때도 지금과 같은 의문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나 꿈의 해석과 같은 분석을 기대했었던가?

5권을 모두 읽고 난 후 ()는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으며 다만 현대의 의료적 해석으로 뇌의 일부가 일반적이지 않는 현상을 보인다는 점이 다른데 그런 점은 그들이 무()가 되기 이전의 특이한 환경으로 인하였을 뿐이므로 어쩌면 누구나 무()가 될 수 있는 변환 점은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 두통이 심해 부친의 손에 이끌려 침 시술을 받으러 갔던 곳이 무가(巫家)였는데, 기대와는 다르게 빙의현상에 의한 치료 효과를 볼 수 없어서 엉터리였다는 실소만 남았었다.

 

한국의 샤머니즘 사회는 문화적으로 빙의현상을 일으키기 쉬운 사고 형태를 가졌다.

죽은 사람의 넋에 의한 빙의는 이미 우리문화에 뿌리 깊이 박힌 의사소통의 지배적인 유형이다.

죽은 자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더 알고 초능력을 가진다는 관념은 인류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우리 문화는 굿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와의 의사소통을 이어주는 풍습을 오래 전부터 키워왔다.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지는 빙의문화(Possession culture)를 가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알래스카가 ‘실혼문화’(soul loss culture)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 추정되는 바는 우리나라 빙의환자 가운데 어떤 경우는 순수하게 무의식적 현상이라기보다 반의식적인 행동일 것이라는 점이다. 331p(7장 빙의현상과 증후.)

 

이런 빙의는 요즘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 명예, 예술, 분노, 지위 등 사회가 복잡해져서 그 양상만 다를 뿐 내용은 같다고 표현될 수 있다는 뜻의 철학적인 의미의 빙의를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도 그들이 내걸은 기만 다를 뿐 수많은 무()가 우리 주변에 있다고 하겠다. 특히 100년 전 이 땅의 민중에게는 새로운 종교였을 그 종교는 전도과정에서 뿌리 깊이 박혀있는 우리의 무속신앙을 부정하는 것보다는 수용하고 타협하는 쪽을 택하여 지금과 같이 왜곡 변형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그 종교에서 주장하는 죽음이란 두려움에 대한 인간 본성을 감성으로 자극하여 영원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집단망상이라는 점이 우리네 무속과 다른 점 같다.

그런 관점으로 나는 신약 중 마태복음30~32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라는 구절은 문자주의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아니 해석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신의 주장을 인간의 뜻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어긋난다는 주장대로.) 그대로 인식한다면 너무 여러 가지 모순과 의문이 발생하기 때문에.  영지주의적인 입장이라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무가(舞歌)와 같은 뿌리를 가진 의미로 보여진다.

 

 

죽음은 여기서 생의 종말이 아니라 산 자에서 죽은 자로의 전환이다.

죽은 자의 모습은 어떤가? 그는 이승의 사람처럼 보고 느끼나 형자(形姿)가 없고 이승의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 죽은 자는 혼신이 되어 자기의 시체와 그것을 애도하는 가족을 보지만 그들과 대화를 할 수는 없다. ‘신령으로서 자취 없이 오는 줄을 모르거든 / 가는 줄을 뉘 알 소냐/ 아마도 허사로다’ 하는 노래가사처럼 실체는 없다. 초앞말에서 말한다.

어야 영가(靈 駕)시여     

사람이 죽어지면 이름 달라지고 성도 달라지네

이름은 영가 시요 성은 귀부(鬼簿)더라

세상사람과는 전혀 다른 계보의 존재가 된다.

381p (9장 죽음. 저승. 사령과 살())

 

책은 나에게는 이미 오래 전의 무녀별곡탓에 무의 입무 과정이나 굿의 내용 같은 것은 흥미를 주지 않는 대신에 무의 무의식에 대한 분석은 집중하게 만드는 점이 있었다. “의 무의식 대한 책은 읽어보았으나 내 능력으로 한번의 독서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것이 분명했으므로 이 책의 내용이 다시 한번 읽게 될 때 잠재의식 속에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원형은 모든 인간 공유의 집단적 무의식의 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일단 자극되면 한 사회 전체가 감염되어 강력한 정동(情動)을 수반한 집단현상으로 번지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인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사건 속에서 원형에 의한 집단적 빙의현상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긍정적 또는 부정적 경과를 나타낼 수 있다. 원형의 배정과 활성화는 창조를 매개할 수도 있으나 파괴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원형에는 반드시 밝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두운 면까지 내포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자기원형은 치료자 또는 구원자형이며 전일을 지향하는 심적 조건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심성의 내부에 살아 있는 것이지 자아가 바로 이 원형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라 마음속에 신의 속성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의식의 자기원형과 동일시되면 자아는 초인적인 힘에 의하여 팽창되어 한계를 보지 못하게 된다. 이때 자아는 그 또한 그림자(파괴적 측면)를 지닌 자기원형과 동일시되어 자기원형의 그림자가 지닌 파괴력도 함께 행사한다. 585p(11장 한국 샤머니즘과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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