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개념 / 죽음에 이르는 병 동서문화사 월드북 33
키에르케고르 지음, 강성위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 책을 읽는다는 것에 별로 훈련되지 않은 탓에 충분한 이해력을 갖지 못한 나는 최근의 독서를 통해 접하는 개념들을 번에 걸쳐 반복으로 읽어도 이해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을 중복해서 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는 한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 관한 것은 요약을 책을얼마 프랑스 고교 철학시리즈를 보았을 때와 요약한 ‘Sparknote” 보고 나서 느낀 점은 우리의 고교 철학 교과와 프랑스의 고교 철학에서 인문학을 대하는 수준(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주관식 문제를 내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인기 있다고 하나 그것을 우리 학생들의 논술 시험대비를 하고자 객관식 (답이라니) 나열하는 -) 결국에는 문화적 차이를 만드는 아닐까 하는 점이다 - 읽고 정본(?) 읽어서 인지 아니면 번을 연달아 읽어서인지 이해하기가 조금은 나아졌음을 느꼈었다. 책을 구하는 대부분의 방법이 중고 책을 사는 것인데 그것도 인터넷 사이트를 통하여 사다 보니 책의 내용을 미리 알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더러 있다. 바람에 읽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니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바람에 이해력이 순간 높아진 것이지만 책의 내용이 마음에 차지 않았거나 머리로 느껴지지 않았다면 번의 시도는커녕 읽다가 그만 두었을 일이었겠다.
  • 그렇게 요즘에는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책을 주로 읽고 있는데 본성이 움직이는 사회나 개인의 욕망과 좌절의 근원이 불안에서 시작되는 아닐까 하여 불안을 다루는 주제에 많은 주의가 가져있는 상태이다. 불안이라는 개념 프로이트의 불안 개념 –(로이트는 불안이 성적(性的)인 원인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성적 욕구가 지속적인 욕구로 간단하게 단념할 수 없는 반면에, 도덕이나 사회의 관습에 저촉되어 갈등의 원인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백과사전)은 예전에 읽어 보았고 정신분석이나 이상행동의 심리에 관하여도 한동안 몰두 하였기에 다른 측면을 보고 싶었었다. 세상의 한 면에서는 불안을 억제하거나 해소하는 기제로서 종교가 차지하는 부분을 자랑하고 있기도 하고 –(이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종교가 불안을 제거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불안의 근본을 변형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더 크다. 불안을 제거하는 방법에 있어서 폭력을 조장하거나 폭력적인 것을 목적에 대한 보상으로 제시하여 일시적인 일시적인은 시간개념에 있어서 개인에게는 영원이라는 대리 충족을 암시하는 회피를 주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 – ,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 인간에게 철학적, 윤리적, 이런 형이상항적인 의미로서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키르케고르불안의 개념을 읽고 있는데 읽다 보니 자꾸만 의견이 충돌되어 짜증이 난다. 이 책 역시 부족한 이해력을 돕기 위해 개인 Blog Review, 또는 요약 본을 읽거나 백과사전에서 먼저 도움을 받으려 했는데 백과사전에는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불안이란 죄()에 대응하는 심리적 기분이다. 불안은 자기에게 사로잡힌 자유이지만, 그것은 죄를 불러일으키고 죄는 또한 결과로서 불안을 가져온다. 그러나 인간은 이 불안의 교화(敎化)를 받아 신앙으로 귀의(歸依)할 수 있고, 화해(和解)에 의해 비로소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라고 안내하고 있는데 이 주제를 이해하고자 몇 번을 반복하여 읽어도 나의 견해와 충돌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어쩌면 그 책 이전에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읽어서 일 수도 있겠지만 불안은 죄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죄라는 개념이 어떻게 생긴다는 것을 밝히지 않고 그 개념이 그냥 함께 들어왔다고 한다. “ 아담의 최초의 죄로 인해 이렇게 죄는 이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36p”–“바야흐로 에서 , ‘에서 , 그리고 벌에 의해 계율을 깨뜨리는 파계가 생겨난다는, 점차로 솟구쳐 오르는 열광적인 점층법이 시작되는 것이다. 31p” – 그럼 죄는 무엇인가? (Augsburg의 신앙 고백 제 2죄의 원인은 나쁜 자들의 의지, 즉 악마와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의지이다. 그 의지는 신의 도움을 받는 일 없이 신을 등지기 때문이다” – 죄의 본질은 신에 대한 불복종이라고 생각한 개혁기의 교의학-295p)) 그러면 은 무엇인가? 불안에 의하여 이 생겨난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원죄는 어떠한 인간 지성에 의하여서도 알 길이 없으며, 단지 성서의 게시에 의해 인정되고 깊이 믿어지는 고약한 본성의 타락이다라는 Schmalkalden조항은 무엇일까?
  • Wikipedia에는  Schmalkalden 동맹이란, 1531 독일지방의 개신교 제후들과 도시들이 Augsburg 제국 의회의 Wilms 칙령 시행 결의에 반대하여 자기 방위를 위해 Thuringen 지방의 Schmalkalden이라는 곳에서 결성한 동맹을 말한다.
  • 신교 제후들이 트리엔트 공의회 참가를 거부하자, 신성 로마제국황제 Karl V Schmalkalden 동맹의 토벌을 결의했고, 이듬해에 Schmalkalden 전쟁이 발발하였다. 한때는 Schmalkalden동맹 내의 의견 불일치와 Sachsen공의 배신 등으로 동맹은 패하고 해체되었다. 그러나, Sachsen 공이 다시 태도를 바꾸어 동맹에 가담하는 한편, 프랑스의 원조에 힘입어 신교도가 세력을 회복해 1555Augsburg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 Council of Trient
  •  1545 개회되어 1548 정회될 때까지 3년간의 기간으로 동안 공의회는 성서만이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고 믿음의 원천은 전통이나 교의가 아니라 성서라는 개신교의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사상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성서와 전통 모두가 신앙의 원천임을 재확인하였다. 아울러 Vulgata 성서
  • (382 교황 다마소의 명으로 히에로니무스가 편찬하였다. 복음서는 384년에 마쳤고, 신약 전체는 386년경에 끝난 것으로 보인다(Chapman ). 그리고 구약까지 포함해서 완성한 것은 404년이다. 근본 목적은 재래의 라틴어역 성서의 원본에 차질이 심하여 이것을 통일하고 개정하자는 있었다. 구약 원본을 라틴어로 개역함에 있어서, 그는 《시편》부터 착수하였다.
  • 초기 교정본에서는 변화가 없었고 주로 70인역(LXX) 의존했다. 그러다 2교정본(Gallican Psalter)에서는 전적인 개역을 시도하였다. 그의 헤브라이어 연구가 성장하면서 종래의 70인역에 의존하던 것을 지양하고 헤브라이 원전에서 직접 개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15년간의 노력으로 구약 전체를 개역했는데, 이것은 헤브라이 원전에서 직접 옮긴 것으로, 여기에 수록된 《시편》도 3교정본(Hebrew Psalter) 포함되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그의 성서개역사업을 과소 평가하였으나, 중세에 이르러서는 서방교회 전체가 이것을 표준적인 성서로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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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의 인쇄판이 1456년에 나왔는데, 이것을 《마자랭 성서 Mazarin Bible》라고 불렀다.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개정을 제의한 있었으나, 학자들은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1590 교황 식스토 5세의 주관 하에 개정본이 나왔고, 1592 클레멘스 8세에 의하여 다시 개정본이 나오면서 로마가톨릭교회의 표준성서로 공인되었다. 1908 비오 10세는 새로운 개역을 지시하였다. )
  • 권위를 인정하였고, 성서의 解釋 權 교회만이 갖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또한 개신교의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길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배척하고 원죄와 의회에 대한 정의를 명백하게 규정하였다. 성사에 대한 교리도 1기에 규정되었다. 황제 Karl V 교황 사이의 관계 악화로 중단되었다.
  • 이렇게 보면 나에게 있어서 책의 내용은 불안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 원죄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죄의 근원이 불안이라는 것에 동조하지 않고 있는 것이며 심리학적으로 어느 정도의 근원이라 하여도 밝혀지지 않은 나머지 어느 부분에 있을 다른 개념들의 역할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부분이 사실은 불안의 기초에 근거한다고도 주장할 있겠다. 나머지는 프로이트의 몫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이지. 물론 지금까지는 말이야. 책이 죄의 기원은 원죄라고-인간의 기원은 아담이므로-하며 기독교적인 사유와 해석의 강화를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생애에서 목사가 되기 위한 자신의 열성을 알리고자 하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어떤 생각에 머물러 있는가 하면 사람 Kierkegaard 포함한 여타 다른 사람들, 신약 구약에서 등장하는 인간 이상이라고 하는 대상을 인간이 것도 신이라는 개념과 연관 지어 어떻게 정의할 있는가라는 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抽象物 신에게 짊어지게 것인데, 抽象物 抽象物 주제에 감히 신과 친근한 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2 절망은 없다 원주 333p) Wikipedia 있는 내용이나 원죄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도 Jansen 이나 Pelagius처럼 상반된 의견을 주장하여 그의 추종자들이 계보를 이루게 되는 것처럼 하는 , 그것도 모순 아닐까? 현재의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진다는 어쩌면 착각이 그런 자만을 만드는 아닐까? 또한 이들은 개념의 동기가 없이 만들어진 의미를 개념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의문이 통하지 않는다. 것은 불안의 개념”53p “ 소망은 독자들께서, ‘만일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이런 심원한 질문을 아무도 해주지 말았으면 하는 일이다.””누군가가 어리석은 질문을 끌어 낸다면 사람에게는 대답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마저 사람과 마찬가지로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 쓰여 있는데 시간이라는 시각으로 과거에 대한 결과를 지금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미래에 대하여 현재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다른 점이 있을까? 모두 현재라는 시간개념에 대하여 착각하는 아닐까? 내게는 없는 의미이다. 또한 가능성 있는 추론으로 생각된다. ‘만약 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의문은 지금 현재에도 계속 이어진다는 의견이라는 의미이다. 많은 다른 의견들이 내게 있어서 의문을 풀고자 언제 다시 읽을 모르지만 책은 한번으로 그만 두어야겠다. 만족과 비슷한 개념의 말도 어울리지 않는 심정이지만 값과 책의 두께에 대한 미련으로 읽자면 그나마 안정되었던 이들에 대한 감정이 질적으로 낮게 되어갈 같다. 책처럼 어느 기원에서 풀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진행하여 기원을 만드는 이런 류의 의견은 앞서 읽었던 다른 책들( 제목을 이으면 하나의 명제가 되는..) 대한 인식이 너무 커서 뒤바뀔 같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 이렇게 신학자도 아닌데 공부를 하게 .만드는 원인은 모든 것이 나의 이해력이 짧은 탓이고, 망가진 前頭葉 해마의 기능으로 인해 기억력까지 희미해져 금방 읽은 것도 잊어 버리는 때문이며 그로 인하여 내가 후회하는 것은 진작에 읽는 훈련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 오래 , 아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선물인 Herman Hess 전집으로부터 시작한 사상의 접촉은 그맘때쯤이면 누구나 읽었을 서양고전이었는데 예닐곱 이었던 나이에는 이해하기 힘들었을 책들로부터이었을 것이다. 사는 것에 매달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술에, 색에 흔들리며 살면서도 의문이 떠나지 않았던 것은 고전들이 숙제였다고 있다. 그래서 틈틈이 책을 사면서도 읽지 않고 보관만 두었던 이유는 언젠가는, 아마 나이가 많아지면 읽으리라는 것이었는데 그게 아주 오래 것은 세로읽기로 돼있는 것이라서 지금 읽자니 너무 곤란한 것이 단점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같은 책을 다시 사자니 아깝기도 하고 해서 중고 책을 사서 읽는 것이 간혹 후회를 일깨우는 요즘의 읽기이다.  요즘 읽는 그런 서양고전들을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도 읽지 않는지 원가보다 싸게 파는 것이 대부분인 것을 보면 말이지. 그래서 한편으로 우리나라의 철학이나 인문학의 현실이 철학의 부재를 심각하게 사회에서 반영하는 것을 인문학자들이 개탄하는 이유 아닐까? 그렇게 본성에 관한 철학이나 문화에 대한 교육과 관심이 사라진 탓에 비열함과 졸렬함의 정치와 타인과 문화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사라진 험한 사회를 보게 되는 아닐까? 밤마다 밝혀지는 휘황찬란한 강한 색의 자극에 둔감해진 사람들은 고전의 책들이 다룬 인간 본성에 대한 불안에 대하여도 둔감해졌을까? Kierkegaard 논리로 죄를 만드는 악을 행하지 않아서 불안을 잠재우려면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프로이트의 시각으로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와의 마찰로 인한 갈등으로 야기되는 불안의 요소를 적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요즘은 남을 알고 나를 알면 성공할 있다는 개발 만능이라서 그런지 나를 아는 것은 관심 없고 남을 알아,-  이것도 남을 아는 질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그를 넘는 것이 생존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아닐까? 요즘에는 겸손은 미덕이 아니다라고 가르치니 말이다. 그래서 미디어에서도 지나친 자신감과 자만, 오만, 무례, 건방, 허세 등이 시대적 추세인 것처럼 다루나 보다. 겸손함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라고 할 텐데 자아를 숨김이 아니고 드러내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뒤로하고 남을 존중하는 것이 손해 보는 짓이라고 이 사회는 은연중에 가르치고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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