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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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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
초이스
(
) l 2012-02-20 11:18
https://blog.aladin.co.kr/752354156/5435222
불안의 개념 / 죽음에 이르는 병
ㅣ
동서문화사 월드북 33
키에르케고르 지음, 강성위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책을
읽는다는
것에
별로
훈련되지
않은
탓에
충분한
이해력을
갖지
못한
나는
최근의
독서를
통해
접하는
개념들을
몇
번에
걸쳐
반복으로
읽어도
이해
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
그래서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을
중복해서
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는
한다
.
그
중
니체의
“
도덕의
계보학
”
에
관한
것은
요약을
한
책을
–
얼마
전
“
프랑스
고교
철학
”
시리즈를
보았을
때와
그
요약한
책
‘Sparknote”
를
보고
나서
느낀
점은
우리의
고교
철학
교과와
프랑스의
고교
철학에서
인문학을
대하는
수준
(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주관식
문제를
내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인기
있다고
하나
그것을
우리
학생들의
논술
시험대비를
하고자
객관식
답
(
답이라니
)
을
나열하는
식
-)
이
결국에는
문화적
차이를
만드는
것
아닐까
하는
점이다
-
읽고
정본
(?)
을
읽어서
인지
아니면
두
번을
연달아
읽어서인지
이해하기가
조금은
나아졌음을
느꼈었다
.
책을
구하는
대부분의
방법이
중고
책을
사는
것인데
그것도
인터넷
사이트를
통하여
사다
보니
책의
내용을
미리
알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더러
있다
.
그
바람에
두
번
읽게
되는
경우도
몇
있었다
.
니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바람에
이해력이
순간
높아진
것이지만
책의
내용이
마음에
차지
않았거나
머리로
느껴지지
않았다면
두
번의
시도는커녕
읽다가
그만
두었을
일이었겠다
.
그렇게
요즘에는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책을
주로
읽고
있는데
본성이
움직이는
사회나
개인의
욕망과
좌절의
근원이
불안에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하여
불안을
다루는
주제에
많은
주의가
가져있는
상태이다
.
불안이라는
개념
중
프로이트의
불안
개념
–(
프
로이트
는 불안이 성적
(
性的
)
인 원인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는데
,
그것은 성적 욕구가 지속적인 욕구로 간단하게 단념할 수 없는 반면에
,
도덕이나 사회의 관습에 저촉되어 갈등의 원인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
백과사전
)
은 예전에 읽어 보았고 정신분석이나 이상행동의 심리에 관하여도 한동안 몰두 하였기에 다른 측면을 보고 싶었었다
.
세상의 한 면에서는 불안을 억제하거나 해소하는 기제로서 종교가 차지하는 부분을 자랑하고 있기도 하고
–(
이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종교가 불안을 제거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불안의 근본을 변형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더 크다
.
불안을 제거하는 방법에 있어서 폭력을 조장하거나 폭력적인 것을 목적에 대한 보상으로 제시하여 일시적인
–
이
“
일시적인
”
은 시간개념에 있어서 개인에게는 영원이라는 대리 충족을 암시하는
–
회피를 주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
) –
또
,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 인간에게 철학적
,
윤리적
,
이런 형이상항적인 의미로서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키르케고르
의
“
불안의 개념
”
을 읽고 있는데 읽다 보니 자꾸만 의견이 충돌되어 짜증이 난다
.
이 책 역시 부족한 이해력을 돕기 위해 개인
Blog
나
Review,
또는 요약 본을 읽거나 백과사전에서 먼저 도움을 받으려 했는데 백과사전에는
“
키르케고르
에 의하면 불안이란 죄
(
罪
)
에 대응하는
심리적
기분이다
.
불안은 자기에게 사로잡힌 자유이지만
,
그것은 죄를 불러일으키고 죄는 또한 결과로서 불안을 가져온다
.
그러나 인간은 이 불안의 교화
(
敎化
)
를 받아 신앙으로 귀의
(
歸依
)
할 수 있고
,
화해
(
和解
)
에 의해 비로소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
라고 안내하고 있는데 이 주제를 이해하고자 몇 번을 반복하여 읽어도 나의 견해와 충돌하는 것이다
,
그 이유가 어쩌면 그 책 이전에 니체의
‘
도덕의 계보학
’
을 읽어서 일 수도 있겠지만 불안은 죄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죄라는 개념이 어떻게 생긴다는 것을 밝히지 않고 그 개념이 그냥 함께 들어왔다고 한다
. “
아담의 최초의 죄로 인해 이렇게 죄는 이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36p”–“
바야흐로
‘
악
’
에서
‘
죄
’
가
, ‘
죄
’
에서
‘
벌
’
이
,
그리고 벌에 의해 계율을 깨뜨리는 파계가 생겨난다는
,
점차로 솟구쳐 오르는 열광적인 점층법이 시작되는 것이다
. 31p” –
그럼 죄는 무엇인가
? (Augsburg
의 신앙 고백 제
2
조
“
죄의 원인은 나쁜 자들의 의지
,
즉 악마와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의지이다
.
그 의지는 신의 도움을 받는 일 없이 신을 등지기 때문이다
” –
죄의 본질은 신에 대한 불복종이라고 생각한 개혁기의 교의학
-295p))
그러면
“
악
”
은 무엇인가
?
불안에 의하여
‘
악
’
이 생겨난다는 것 아닌가
?
그런데
“
원죄는 어떠한 인간 지성에 의하여서도 알 길이 없으며
,
단지 성서의 게시에 의해 인정되고 깊이 믿어지는 고약한 본성의 타락이다
”
라는
Schmalkalden
조항은 무엇일까
?
Wikipedia
에는
“
Schmalkalden
동맹
이란
, 1531
년
독일지방의
개신교
제후들과
도시들이
Augsburg
제국
의회의
Wilms
칙령
시행
결의에
반대하여
자기
방위를
위해
Thuringen
지방의
Schmalkalden
이라는
곳에서
결성한
동맹을
말한다
.
신교
제후들이
트리엔트
공의회
참가를
거부하자
,
신성
로마제국황제
Karl V
가
Schmalkalden
동맹의
토벌을
결의했고
,
이듬해에
Schmalkalden
전쟁이
발발하였다
.
한때는
Schmalkalden
동맹
내의
의견
불일치와
Sachsen
공의
배신
등으로
동맹은
패하고
해체되었다
.
그러나
, Sachsen
공이
다시
태도를
바꾸어
동맹에
가담하는
한편
,
프랑스의
원조에
힘입어
신교도가
세력을
회복해
1555
年
Augsburg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
Council of Trient
“
1545
년
개회되어
1548
년
정회될
때까지
약
3
년간의
기간으로
이
동안
공의회는
성서만이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고
한
곧
믿음의
원천은
전통이나
교의가
아니라
성서라는
개신교의
오직
성서로만
(Sola Scriptura)
사상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성서와
전통
모두가
신앙의
원천임을
재확인하였다
.
아울러
Vulgata
역
성서
(382
년
교황
다마소의
명으로
성
히에로니무스가
편찬하였다
.
복음서는
384
년에
마쳤고
,
신약
전체는
386
년경에
끝난
것으로
보인다
(Chapman
의
설
).
그리고
구약까지
포함해서
완성한
것은
404
년이다
.
근본
목적은
재래의
라틴어역
성서의
원본에
차질이
심하여
이것을
통일하고
개정하자는
데
있었다
.
구약
원본을
라틴어로
개역함에
있어서
,
그는
《시편》부터
착수하였다
.
초기
교정본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고
주로
70
인역
(LXX)
에
의존했다
.
그러다
제
2
교정본
(Gallican Psalter)
에서는
전적인
개역을
시도하였다
.
그의
헤브라이어
연구가
성장하면서
종래의
70
인역에
의존하던
것을
지양하고
헤브라이
원전에서
직접
개역하기
시작한
것이다
.
그리하여
15
년간의
노력으로
구약
전체를
개역했는데
,
이것은
헤브라이
원전에서
직접
옮긴
것으로
,
여기에
수록된
《시편》도
제
3
교정본
(Hebrew Psalter)
이
포함되었다
.
당시에는
사람들이
그의
성서개역사업을
과소
평가하였으나
,
중세에
이르러서는
서방교회
전체가
이것을
표준적인
성서로
사용하게
되었다
.
최초의
인쇄판이
1456
년에
나왔는데
,
이것을
《마자랭
성서
Mazarin Bible
》라고
불렀다
.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개정을
제의한
바
있었으나
,
학자들은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
그
후
1590
년
교황
식스토
5
세의
주관
하에
개정본이
나왔고
, 1592
년
클레멘스
8
세에
의하여
다시
개정본이
나오면서
로마가톨릭교회의
표준성서로
공인되었다
. 1908
년
비오
10
세는
새로운
개역을
지시하였다
. )
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
성서의
解釋 權
은
교회만이
갖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
또한
개신교의
오직
은혜로만
(Sola Gratia)
곧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길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배척하고
원죄와
의회에
대한
정의를
명백하게
규정하였다
.
성사에
대한
교리도
제
1
기에
규정되었다
.
황제
Karl V
와
교황
사이의
관계
악화로
중단되었다
.
이렇게
보면
나에게
있어서
이
책의
내용은
불안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죄
,
원죄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나는
죄의
근원이
불안이라는
것에
동조하지
않고
있는
것이며
심리학적으로
어느
정도의
근원이라
하여도
다
밝혀지지
않은
나머지
어느
부분에
있을
다른
개념들의
역할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
그
부분이
사실은
불안의
기초에
더
근거한다고도
주장할
수
있겠다
.
그
나머지는
프로이트의
몫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이지
.
물론
지금까지는
말이야
.
책이
죄의
기원은
원죄라고
-
인간의
기원은
아담이므로
-
하며
기독교적인
사유와
해석의
강화를
위함이었는지
,
아니면
그의
생애에서
목사가
되기
위한
자신의
열성을
알리고자
하였는지는
몰라도
,
나는
어떤
생각에
머물러
있는가
하면
이
사람
Kierkegaard
를
포함한
여타
다른
사람들
,
신약
및
구약에서
등장하는
인간
이상이라고
하는
대상을
인간이
그
것도
신이라는
개념과
연관
지어
볼
때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데
있다
. (-
이리하여
또
사람들은
抽象物
을
신에게
짊어지게
한
것인데
,
이
抽象物
이
抽象物
인
주제에
감히
신과
친근한
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
죽음에
이르는
병
제
2
편
절망은
없다
편
원주
333p)
또
Wikipedia
에
있는
저
내용이나
원죄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도
Jansen
이나
Pelagius
처럼
상반된
의견을
주장하여
그의
추종자들이
한
계보를
이루게
되는
것처럼
하는
것
,
그것도
모순
아닐까
?
현재의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진다는
어쩌면
착각이
그런
자만을
만드는
것
아닐까
?
또한
이들은
개념의
동기가
없이
만들어진
의미를
개념으로
사용한다
.
그래서
이들에게는
의문이
통하지
않는다
.
이
것은
“
불안의
개념
”53p “
내
소망은
독자들께서
, ‘
만일
아담이
그
때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
이런
심원한
질문을
아무도
해주지
말았으면
하는
일이다
.””
누군가가
어리석은
질문을
끌어
낸다면
그
사람에게는
대답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
.
그러지
않으면
자기마저
그
사람과
마찬가지로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
.”
에
쓰여
있는데
시간이라는
시각으로
볼
때
과거에
대한
결과를
지금
알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미래에
대하여
현재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다른
점이
있을까
?
모두
현재라는
시간개념에
대하여
착각하는
것
아닐까
?
내게는
둘
다
알
수
없는
의미이다
.
또한
둘
다
가능성
있는
추론으로
생각된다
. ‘
만약
하지
않았다면
?’
이라는
의문은
지금
현재에도
계속
이어진다는
의견이라는
의미이다
.
많은
다른
의견들이
내게
있어서
그
의문을
풀고자
언제
또
다시
읽을
지
모르지만
이
책은
한번으로
그만
두어야겠다
.
만족과
비슷한
개념의
말도
어울리지
않는
심정이지만
책
값과
책의
두께에
대한
미련으로
더
읽자면
그나마
안정되었던
이들에
대한
감정이
더
질적으로
낮게
되어갈
것
같다
.
이
책처럼
어느
기원에서
풀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진행하여
기원을
만드는
이런
류의
의견은
앞서
읽었던
다른
책들
(
책
제목을
이으면
하나의
명제가
되는
..)
에
대한
인식이
너무
커서
뒤바뀔
것
같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
이렇게
신학자도
아닌데
공부를
하게
.
만드는
원인은
모든
것이
나의
이해력이
짧은
탓이고
,
망가진
前頭葉
과
해마의
기능으로
인해
기억력까지
희미해져
금방
읽은
것도
잊어
버리는
것
때문이며
그로
인하여
내가
후회하는
것은
왜
진작에
책
읽는
훈련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
오래
전
,
아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선물인
Herman Hess
의
전집으로부터
시작한
사상의
접촉은
그맘때쯤이면
누구나
읽었을
서양고전이었는데
열
예닐곱
이었던
그
나이에는
이해하기
힘들었을
책들로부터이었을
것이다
.
그
후
사는
것에
매달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술에
,
색에
흔들리며
살면서도
늘
의문이
떠나지
않았던
것은
그
고전들이
준
숙제였다고
할
수
있다
.
그래서
틈틈이
책을
사면서도
읽지
않고
보관만
해
두었던
이유는
언젠가는
,
아마
나이가
많아지면
읽으리라는
것이었는데
그게
아주
오래
된
것은
세로읽기로
돼있는
것이라서
지금
읽자니
너무
곤란한
것이
단점이
되어
버렸다
.
그래서
같은
책을
다시
사자니
아깝기도
하고
해서
중고
책을
사서
읽는
것이
간혹
후회를
일깨우는
요즘의
책
읽기이다
.
요즘
읽는
그런
서양고전들을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도
잘
읽지
않는지
원가보다
싸게
파는
것이
대부분인
것을
보면
말이지
.
그래서
한편으로
우리나라의
철학이나
인문학의
현실이
철학의
부재를
심각하게
사회에서
반영하는
것을
인문학자들이
개탄하는
이유
아닐까
?
그렇게
본성에
관한
철학이나
문화에
대한
교육과
관심이
사라진
탓에
비열함과
졸렬함의
정치와
타인과
타
문화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사라진
험한
사회를
보게
되는
것
아닐까
?
밤마다
밝혀지는
휘황찬란한
강한
색의
자극에
둔감해진
사람들은
고전의
책들이
다룬
인간
본성에
대한
불안에
대하여도
둔감해졌을까
? Kierkegaard
의
논리로
죄를
만드는
악을
행하지
않아서
불안을
잠재우려면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프로이트의
시각으로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와의
마찰로
인한
갈등으로
야기되는
불안의
요소를
적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
그런데
요즘은
남을
알고
나를
알면
성공할
수
있다는
개발
만능이라서
그런지
나를
아는
것은
관심
없고
남을
알아
,-
이것도
남을
아는
질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
그를
넘는
것이
생존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
아닐까
?
요즘에는
겸손은
미덕이
아니다라고
가르치니
말이다
.
그래서
미디어에서도
지나친
자신감과
자만
,
오만
,
무례
,
건방
,
허세
등이
시대적
추세인
것처럼
다루나
보다
.
겸손함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라고 할 텐데 자아를 숨김이 아니고 드러내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뒤로하고 남을 존중하는 것이 손해 보는 짓이라고 이 사회는 은연중에 가르치고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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