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수 왜곡의 역사 - 성서비평학자 바트 어만이 추적한
바트 D. 에르만 지음, 강주헌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기독교 신학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와 같이 언급된 ‘하루’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1일’과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1일 개념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는 지구의 1회 자전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창세기의 ‘하루’는 태양과 지구가 아직 생기기 이전부터 언급하고 있으니 결코 같은 개념일 수 없다는 말이다. 고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미 1600년 전에 이 같은 논리적 사실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는 “우리가 아는 날들은 일몰이 없으면 저녁이 없고 일출이 없으면 아침이 없다. 그런데 최초의 사흘은 태양 없이 흘러갔고 태양은 넷째 날에 만들어졌다”라고 지적했다. 이어서 창세기의 하루를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구약성서에 언급된 창조 시기의 날짜 수는 단지 ‘창조의 순서’를 나타내는 어떤 신비로운 날짜 수로서 자연적 의미의 날짜 수와는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정통 기독교 신학은 창조를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신적 시간에 여섯 단계에 걸쳐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고 교훈해 왔다.
미국에서는, 비록 Dover학군이라는 일부 지역에서이긴 하지만
법원이 과학자들의 손을 들어 지적 설계정책을 유지하거나 진화론을 헐뜯지 말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펜실베니아 중부 미국연방 법원의 판결문의 효력이 미치지 못하는,
캔자스 주와 다른 몇몇 주에서
창조론(그게 왜 論(론)인지 모르겠다. 여러 의견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가지 說(설)만 믿어야 하는데..)을 가르치기도 한다고 한다.
미국인이 되지 못해 미국이 하면 우리도 한다라는 식으로 따라 하는 태도를 보이는 일부 기독교단체는
미국의 그들처럼 국내의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을 제거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학술을 내세우고 있는 종교단체라고 하는데
학교 교과서의 진화 이론의 일부가 틀렸으므로 교과과정에서 제거 되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교과 부에서는 그들의 주장을 들어주려 했다는 일부의 보도로 인하여 외국의 과학계에서 한국을 경멸하고 있다는 기사들을 보고 여러 생각이 들어
근래에 읽었던 책들의 내용들을 되새김해본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에는 진화론은 가설이며 실험으로 입증된 과학이 아니고, 증거가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창조설에도 같은 의문을 적용시키면 가설이 아니며 입증되는 증거 - 실제 데이터와 다르지 않은 것, 오래 전의 주장이 아닌 것, 여러 학계에서 인정되는 것, 일부의 주장뿐이 아닌 -
가 있다는 말인가?)
어제는 “신의 입자”라고 불리는 빅뱅의 입자를 발견한 것 같다는 TV뉴스를 보았는데
우주 탄생의 과정에서 물질에 질량을 부여한 입자를 Higgs입자라고 하는데
그 입자에게 “신의 입자”라는 별칭을 붙인 것은
힉스입자가 빅뱅으로 탄생한 모든 소립자에게 질량을 부여함으로 해서
face of the Deep과 Earth와 face of the Waters을 만들었지 않을까라는,……
그래서 창조설의 가면인 지적설계론을 이론적으로 보완해줄 것이라는 이유에서일까?
논증을 통한 과학적 이론을 부정하면서 증명하지 못하는 과학적 이유를 근거로 하는……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 라는 책에서 본 것으로 기억하는데
통일교 교주로부터 학비를 지원받아 과학자가 된 어느 학자가
자신이 아버지라 부르는 그 교주의 은혜를 갚고자 학계에서 일방적인 이론을 내놓고는 한다는데
그들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면서도
동료학자들에게 논증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그처럼 학자의 양심을 벗어난 사적인 동기를 가지고
진화론을 무너뜨리기 위해 증명된 과학의 일부를 고의로 틀어놓기 때문 아닐까?
그런데 나의 의문은 (- 끝나지 않을 최초의 의문은 제쳐두고) 과학자들이 수세기 동안
잔인한 종교적 탄압을 이겨내고 꾸준한 논증을 통해 밝혀낸 이론에,
“그래! 당신들의 발견한 그것의 동기는 신에 있다”라고 하는.
마치 과학자들의 밥상에 슬쩍 숟가락 얹어놓는 비양심적 횡령 같은 그런 것에 있지 않다.
영어 성경에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Earth’이’라고 했는데
그럼 시간이 먼저라는 것일까?
그가 움직이므로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움직임은 시공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 아닌가?
존재의 나타남 이전에 시공이 있어야 한다.
어디가 먼저인가?
언제가 먼저인가?
아니면 시공을 빛 이전에 만들었다는 것일까?
만들었다면 어디에서 언제? 날자 이전에? 수면이전에?
빛 이전에 어둠이 있고 공간이 있었고 수면(upon the face of the waters.)이 있었다면 어디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아는 날들은 일몰이 없으면 저녁이 없고 일출이 없으면 아침이 없다.”했는데
여기서 “우리가 아는 날들”이라고 인간의 보편적 하루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분하지만,
태양과 달이 있고 없고 간에
첫째 날에 빛을 만들었으므로 낮과 밤이라 칭하고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태양생성 이전의 빛은 무엇이며 어디를 비추고 있었을까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미 낮과 밤은 있다고 했으므로 태양과는 관련 없는 것 아닐까?
또, 넷째 날 이후에 ‘날”이라고 칭한 것이 다르게 쓰여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같은 의미라고 보고 싶은데,
신의 시간에 대한 속성과 인간의 개념은 다르므로 (-다르다는 것을 어찌 인간이 비교 판단했는지 모르지만)
그러면 안 되는 것이라면 !
기사와 같이 1~3일까지는 신의 날이고 4~7일은 인간의 일주일에 해당하는 날이라면
일주일이 7일이 아닌 4일이어야 하거나 3일간의 행적을 따로 만들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4일째 만든 태양과 달로 이미 있었던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여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었다고 했음은
태양이 생긴 날들 이후의 날은 그전의 날과 다르므로 4일째 뭘 만들고 5일째 뭘 하고
7일째 쉬었다는 식의 연속성으로 표현하면 안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약 아우구스티누스,
그의 말대로 “창조 시기의 날짜 수는 단지 ‘창조의 순서’를 나타내는 어떤 신비로운 날짜 수로서
자연적 의미의 날짜 수와는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주장을 따라야 한다면 그 사람의 해석을 믿어야만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 사람이 최초로 그 문제에 대하여 정의를 내렸기 때문에?
아니면 그 사람이 자신의 주장대로 자신은 하나님과 친분이 있어서 따로 설명해준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 성경 속의 의미를 비유로 알아야 한다면
사람은 각자의 개성과 기질과 역사적 환경과 정치적 환경에 따라 각자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본인의 해석이 맞는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설명하여 대중에게 공감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중에게 공감을 얻은 주장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해석을
학술적으로 정리하여 교리를 만든다면
시간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해석도 달라질 수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빛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억지로 다음 장으로 넘어가다 보면
어떤 하나님이 만든 창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1장에서 바쁘게 일을 하며 사람보다 식물을 먼저 만든 하나님(God, Deus)일까
2장에서 1장의 하느님과 별개로 동방의 어디에선가 따로 남자를 만들고 식물을 만든 (Lord God, Dominus Deus)일까?
신의 명칭에 Lord, Dominus같은 단어가 추가된 것은 우주와 동식물,
그리고 남자사람을 만들어서 인류가 지상을 정복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라는 칭송의 의미라면
1장에서 만들어 놓은 것을 없애고 2장에서 다시 만들었다는 것인지
1장에서 우주의 어느 곳에 만들어 놓고 2장에 지구에 와서 만들었다는 것인지,
휴식하느라 순서를 까먹은 것인지,
나중에 모세에게 “다른 신들(other god, deos alienos)”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
여러 신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인지 모르겠다.
에비온파는 철저한 유일신논자였으므로 예수를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예수는 하나님이 메시아로 지명한 인간이었고,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으며 부모는 요셉과 마리아였다.
<6장: 성경은 어떻게 완성됐을까? 261p
마르키온은 (대조표; antitheseis)를 써서,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예수의 하나님이 완전히 다르 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화내고 복수하는 심판의 하나님이지만, 예수의 하 나님은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구원의 하나님이었다. 마르키온은 이런 논리를 근거로 “완전히 다른 두 하나님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263p)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이 유일한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늘나라에는 신적 인 존재들이 많았고, 그 존재들을 만들어낸 최고신은 따로 있었다. 이 세상은 열등하고 무지한 신들이 만들어낸 골칫거리였다. 이 세상은 신의 세계에서 일어난 재앙의 결과, 즉 신 가운데 말썽꾼을 가둬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땅에서 벗어나 고향인 하늘나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진실, 우리의 정체에 대해 배워야 한다.(265p)
< 예수 왜곡의 역사(Jesus Interrupt): Bart D. Ehrman / 청림 출판 2010 >
창세기의 처음 부분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교리와는 별개의,
아무런 논점도 되지 못하는 조그만 표현상의 오류 정도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원문의 차이가 중요한 교리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 자체가
내 귀에는 이상하게 들린다”(254p)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데 마르키온처럼 해석할 수 있다면
에비온파, 콥트, 그노시스파등등의 초기 교파의 교리 같은
다른 어떤 해석도 옳을 수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288p/ 발터 바우어의 폭탄선언)
“신약성경 전체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명시적으로 가르치는 곳은 한 구절 밖에 없다.
흠정역성서(king James Version) 요한일서 5장 7~8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신약성경의 그 리스어 필사본 대부분에는 나오지 않는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교리가 아니냐 고 반박하면, 그들은 요한일서 5장 7~8절이 아니더라도 성경 전반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찾아 낼 수 있다고 재 반박한다. 하기야 기독교의 모든 교리가 그렇다. 성경을 열심히 들여다 보면 어떤 구절이든 떼어내 기독교 교리에 맞출 수 있다. (254p)
이와 같은 해결하지 못한 의문의 많은 부분에 대해서
찬양일색인 책을 제외한 여러 책들의 의견들을 봐도 이처럼 첫 장에서부터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명백하게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사람들의 지식 수준을 계급으로 나눈다면 최하위 계급인
나와 같은 무식한 사람을 상대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답을 책으로 남기기에는
흥행성을 보장할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래도 Ehrman의 책에서는 내가 그 동안 가졌던 의문가운데 몇 가지에 대해서는
내 나름의 유추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왜 우리나라에서 서양의 종교가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흥행에 성공한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상상하는 바로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영향을 주지 않았나 한다..
아프리카에서 유럽과 동양으로 이어지는 육상 통로의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자리잡은 민족.
그들의 역사는 주변 민족과는 다른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주변민족과는 달리 정착하여 살만한 땅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거나
어느 시기에 땅을 잃어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309p)
그래서 그 후손들은 주변 민족에 대한 적개심으로 500여 년을 살아오면서 자유를 억압당해왔다.
그러다 한 사람이 자신의 민족 독립을 위해 세상에 나왔는데
이전의 메시아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보수적 태도로는
민족의 숭고한 율법과 행복으로의 희망을 이룩할 수 없다는 점을
동방으로부터 수입되었을지도 모르는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을 바탕으로 주장하였으며
독립을 하고자 하는 수단도 잔인한 복수(311p /솔로몬의 시편 17:21~32) 가 아닌 자비와 용서의 화합을 내세워 동조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진보세력이 항상 그렇듯이 기존의 보수적 단체로부터 외면당했고
예수의 그런 부드럽고 인간적인 수단에 대하여 불만을 품은 동료에게 배신당해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 일주일 동안에 보여주었던 과감하고 의젓한 행동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몇 십 년 동안 지속되어 갔다.
그가 죽고 30여 년 후에 그가 독립을 외쳤던 시가 시민의 봉기를 탄압한 로마에 의하여 파괴되자
아마도 그것은 "시대의 종말에 대학살이 있을 것이고, 그때 성전도 파괴될 것이라는 예언을" 기억나게 했으며
예수의 행동에 소극적이었던 보수적 단체의 행위들이 지탄받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잊혀질 뻔 했던 그의 철학은 개심한 바울에 의하여 새로운 사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잊혀질 뻔 했던 그의 철학은 개심한 바울에 의하여 새로운 사상으로(322p-바울과 예수는 똑 같은 종교를 주장했을까? 이는 역사적으로 무척 중요한 문제이며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이다.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반면에 바울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이라고 가르쳤다.)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즈음 지배국 로마의 정치상황은 네로황제의 폭정으로 퇴락하기 시작했고
나빠진 시민의 민심을 잠재우기 위하여 정치적 변혁의 필요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동안 로마제국의 식민지 정책과, 그리스의 느슨하고 나약하며 지루한 철학으로는
지상에서의 불안한 생에 대하여 보상 받을 수 없던 시민이 불안과 공포는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결단으로 로마 권력의 보호아래 지상으로 나온 바울의 철학을 따르면서,
신분의 평등과 영생과 같은 당근을 제시한, 미래의 보상으로 완화되었다.
그 후 권력에 편입된 종교는 자신들의 부족한 논리를 채우기 위하여
그간 여러 지파에 전해지던 원전을 모아 첨삭을 거치면서 지금의 베스트셀러가 완성되었다.
그런 서양의 종교적 철학은 세월이 흐르면서 중세기를 지나 철학과 신학으로 복제되고 확산되어 진화하지만 과학의 발전에 따라 공간의 제약이 사라져가면서 왜곡의 양과 질이 증가하며 변해버려 초기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 우스워져 버린 것 같다.
그리고 내 생각도 변했는데
서양철학과 동양의 철학은 왜 다를까 에서 시작된 의문은
근대의 정치상황을 알게 되면서 그럴 수도 있었을 것 같다라는 생각으로……
그런데 왜 다를까라는 의문은 아직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의 서양종교 흥행성공의 이유는
지리적, 정치적 이유가 비슷했고 진행과정에서 권력, 금력과의 타협이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순수성의 변질과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이민족의 피해망상이
어떠한 이유로 유입되어 이유 없는 배타성으로 표현되는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편협의 근원: 기독교의 출현과 더불어 세상에 퍼지게 된 편협심은 기독교의 가장 기이한 특징의 하나로서, 유태인의 정의관과 유태인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그들의 신념에서 생겨난 것으로 본다.
나는 왜 유태인들이 이러한 특이성을 갖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하기야 이러한 것은 그들이 예속되어 있는 동안 유태 민족을 외방인 에게 합병시키려는 계략에 대한 반발로써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는, 로마 제정 때 자기들의 민족국가는 파괴되어 정치력을 전혀 갖지 못하고 개성을 잃은 광대한 집합체에 병합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79p)
어쨌든 그것은 유태인, 특히 그 예언자들로 하여금 개인의 정의관과 한 종교 이외에 다른 종교를 관용하는 것은 사악한 일이라는 관념을 강조하게 하였던 것이다.” 45p
<제2장 종교는 문명에 유익한 공헌을 했는가>
그런데 왜 아직도 그와 같이 초지를 잃어 변해버린 신념에 매달려 있는가!
범위가 커진 사회에서 윤리와 도덕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곪아버린 상처를 흉터로서 안고 있어야 하는가!
심리학자를 비롯한 많은 성현들이 제시한 여러 근거들을 보더라도 인간은 태생적으로 스스로 윤리적이고 도덕률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서양의 신념이 없어도 동양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인간 상호간의 도덕성을 유지하고 있었지 않은가!
Bart Ehrman의 책의 결말에서도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서양 철학자들이 쓴 책을 읽다 보면 깔끔하지 못하고 모호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라는 의문은
그들이 그 시기에 자신의 사상을 솔직히 밝히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에 이해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학자라고 하더라도 생존은 중요했을 테니까……
그렇게 흉터로 자란 상처는 스스로 생명을 얻어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비평하는 상대를 공격한다. 초지가 어떻든 상관없이 미래에 대한 보상만이 중요하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생각은 단순해 보인다. 곪았는지 씨 투성인지 상관하지 않고 줄무늬만 보고 수박을 고르는 것처럼 “영생”이라는 단어에만 매달린다.
그토록 고통에 시달리던 생을 왜 연장하려 들까? 어떨 것이라는 구체적 상상도 하지 않고 말이다.
예수가 재림하여 지상의 악인을 모조리 불구덩이에 집어넣어 그 동안의 복수를 끝낸 후의 세상은 악과 고통이 사라진 세상일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 그런 그들의 생각대로 신이 도와줬다면 육신이 없는 것처럼 악의 개념이 사라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술이나 약물에 취한자의 범죄에 대하여 벌을 가하지 않는 것은 그 행위의 자아가 맨 정신의 자아와 다르다고 해서인 것처럼 그 세계의 나는 이승에서의 나와 같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나는 이처럼 모순된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 몸은 무덤 속에 있기 때문에 내세는 육신을 갖지 않는 세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세에도 육체적인 고통이나 즐거움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심지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려면 육신이 있어야 할 텐데도 말이다. 예수와 함께한 초기 기독교인은 이런 식의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았다. 이런 믿음도 훗날의 기독교인이 만들어 낸 것이다. <349p /제7장 천국과 지옥>
그래서 그런 생각을 밖으로 표현하면 그들의 그 동안의 친절은 사라진다.
바로 이것입니다. 즉 우리가 기독교를 지키지 않으면 모두 다 악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를 지켜 온 사람들이 대게 매우 악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상한 사실, 즉 어느 시기에 종교가 강하면 강할수록,
독단적인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잔인성은 더했고, 사태는 더 나빴습니다.
이른바 신앙의 시대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정말 철저히 기독교를 믿었는데도 종교재판에의 고문은 극에 달했습니다. 불행한 여성이 수없이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해지고,
종교란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갖가지 잔인성이 가해졌습니다.
세상을 돌이켜 볼 때 여러분은 인간 감정의 조그마한 발전도, 형법상의 모든 개정도, 전쟁을 적게 하는 모든 방안도, 유색 인종의 대우 개선을 위한 모든 대책도, 또는 노예제도의 완화나 이 세상의 모든 도덕적 진보도 세계의 조직화된 교회에 의하여 철저히 반대되어 왔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많은 교회로 조직된 기독교도의 종교가 세계의 도덕적 진보의 으뜸가는 적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을 신중히 말씀 드리고자 하는 바입니다.
<제1장 나는 왜 기독교도가 아닌가>
이런 이들의 특징은
공산주의의 가장 위험한 특징들은 중세 교회를 회상케 해준다.
그 특징들은 성경에 구현된 교리에의 열광적인 신봉과, 이러한 교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를 싫어함과,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로 구성되어 있다. 188p
<제13장 종교는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이에 공감하게 된다.
인간의 도덕성은 종교가 없다고 해서 같이 사라진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행복이란 반드시 종말이 있다고 해서 행복의 진실성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며 사상이나 애정이 영속적이 아니라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의젓하게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바로 이 의젓한 태도에서 우리는 이 세계 속의 인간의 위치를 바로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63p
자본가와 군국주의자와 성직자들이 교육에 협력하는 것은, 이들은 모두 그 권력 유지를 위하여 감정주의의 치중과 비판력의 부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75p
<제3장 나는 무엇을 믿는가>
무엇을 해야 할까?
신념이 아닌 신념이라는 단어를 고급 액세서리화하여 애지중지하며 보관하는 것처럼
각자의 마음속에 새로운 솟대를 세워야 할까?
아니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