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범우사상신서 3
에리히 프롬 지음. 방곤,최혁순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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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부동산시장이 엉망이라 개발행위를 위한 토지나 주택의 매입을 무지하게 망설이는 시기이지만

21세기가 막 시작되던 때 서울 시내 각 지역의 재건축과 재개발, 주상복합 신축, 노후 시장 재개발 등의 부동산 개발 붐이 10여 년 만에 다시 들썩이기 시작했었던 적이 있었다.

 

IMF의 지원을 받던 시절이었던 90년대 말.

경기침체로 인하여 부동산 개발과 분양시장이 엉망이었을 때

지방에서는 서울보다 체감 면에서 최고점 도달시기가 달라서였는지

그럭저럭 지방유지들의 토지를 중심으로 주상복합 건물의 개발사업이 시행되고는 하여서 두 군데 정도의 지방을 왔다갔다하면서 일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은 부동산 개발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80년말로부터 10년의 세월이 지난 시기였는데

그 80년대의 부동산 시장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잘나가던 시절이었었다.

분양시장은 신축상가만 지으면 분양이 되고, 아파트의 단지 내 상가는 계획단계부터 분양권리를 선점하기 위한 업자들의 로비도 치열했었고.

아파트는 땅도 사기 전에 과반수의 입주자를 확보하였던 시절이었다.

당시에 토지매입을 하던 인근지역의 아파트 평당 분양가는 30평형대의 경우 250만원대였고

1개 사업 대상지의 사업이 착공을 시작할 즈음에는 인근지역의 토지매입가격이 올라서 불과 1년에 만에 분양가가 평당 50만원정도가 올라도 분양권, 소위 딱지가 없던 시기였었다.

그럼에도 그 당시의 건축비는 평당 150만원 정도였었는데 10년이 지난 2000년을 전후하여 공사비가 200만원을 넘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평당 400만원 정도를 요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급등한 토지비용의 상승과 그로 인한 분양가 총액의 상승비율에 비하면 완만히 상승한 건축비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고 해도 맞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분양가의 상승구조는 왜곡된 과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맞을 것 같다.

 

그런데 사람들이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시하는 10년마다 반복된다는 부동산의 순환주기는 과연 현재에도 적용이 가능한 과정을 적용한 믿을만한 분석의 재료일까?

 

부동산 시장. 그 중에서도 아파트의 가격이 바닥이다 아니다 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내세우는 근거는 각기 놓고 보면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단어로 사람들의 정신을 미혹하게 만든다.

어느 문구도 이렇다라고 정의를 내리거나 자신의 주장이 무조건 옳다라고 하는 쪽은 없어 보인다,

이러한 경우에 저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건이 만족하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인데, 조건의 재료는 알 수 없는 통계와 정확하지 않은 추측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경제와 부동산학을 전문적으로 한 사람은 경제적 주기와 여러 가지 재료를 통해 근사한 단어로 치장된 자료를 들어가며 예상해보겠지만

나는 그런 투의 분석을 준비된 근거를 바탕으로 예측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겪은 경험을 토대로 그저 예전에 일을 준비할 때처럼 미루어 생각할 뿐이다.

 

가격이 지금이 바닥인가라고 할 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근거로 수년간 계속 떨어지기만 했다라고 제시하는 쪽의 입장은 누구를 대변하고 있을까?

그리고 아직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느 쪽인가?

부동산은 정치와도 관련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정책과 관련 있는 것이지 좌우의 색과는 관련이 없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부동산 기사가 예측하는 내용을 보면 정치적 색깔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것은 각 측의 희망사항이나 주의주장을 대변한 것일 뿐이므로 소비자는 그 분명치 않은, 추상화처럼 혼탁한 결과에 현혹당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권 장관은 또 최근 정부와 금융권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하우스푸어 대책과 관련해 "사회적 형평성 논란 등이 우려돼 정부차원에서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우스푸어 문제의 핵심은 주택시장 거래침체에 있다"며 "관계부처간 협의를 통해 과도한 규제를 철폐하고 세제·금융지원 등을 통한 거래활성화에 정책적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동산 경 착륙 가능성 적다”.. 파이낸셜 뉴스 2012.08.15>

 

지금이 바닥이라고 하는 측의 입장에서는 정책담당자가 내놓은 말의 주석수준이 아닐까 한다.

정책을 주도하는 관료는 위 기사에서 현재 집값수준이 적당한가라는 질문에 물가인상률과 소득수준을 볼 때 높지 않고 아직도 낮은 수준이라고 했다.

또 담보비율의 수준도 외국에 비해 낮은 수준이라 시장이 망가질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고 했다.

 

하우스푸어는 노동을 통하여 얻은 현금의 보유량이 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집값수준은 주택을 구입하려는 수요가 많음에도 공급이 모자랐기 때문에 부동산의 가격이 오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부동산의 가격이 오른 것은 사람들의 그런 시장 거래 때문이 아니라 나라의 정책이 수요와 공급의 재료와 시기를 어지럽혔기 때문이라고 본다.

 

20년 전 주택사업을 하기 위해 매입하던 토지는 평균적으로 평당 100만원이었는데 그때로부터 10년 후에는 500만원 정도가 되었고 지금은 평당 1,500만원 정도로 무려 열 배 이상이 상승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건축비는 20년 전 평당150만원 정도였고 지금은 그 세배인 450만원 정도에 그친다면 인건비나 자재비용 등의 다른 물가에 비해 뭔가 비정상적인 상승률을 보인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렇게 주택의 분양가에서만 가격의 구성요소가 비정상적인 이유는 첫째로 토지공급을 조절하지 못한 것 때문 아닐까 한다.

사업성이 있는 토지는 신도시가 아닌 서울시내의 토지였는데 20년 전에는 주변이 거의 같은 가치를 가진 대지였지만 시가 난 개발을 막고자 도시계획을 주도하여 지적에 종별을 달리한다는 선을 그어 사업성 있는 주택을 지을 수 있는 대지의 종별구분이 변하였고 그에 따라 신축 건축물의 용도와 규모가 달라지는 바람에 사업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땅 값은 치솟았었고 또 주택개발을 줄이겠다는 정책이 나오자 주택공급이 모자를 것이라는 예측을 쏟아낸 기사들 덕분에 그나마 좁은 서울의 주택건설가능대상지의 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올랐었다.

그와 같이 대지에 희소성을 부여한 탓에 강남주변의 아파트들은 토지의 가치에 시기적 요소를 덧붙여 절반이상의 가격상승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당연한 결과였다라고 하겠다.

 

두 번째로는 군비경쟁처럼 토지가격의 상승은 주택가격의 상승을 부추겼고,

동반 상승하지 않은 재료비와 인건비등을 고려한 사업계획은 사업시행자에게 막대한 이익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런 달콤한 계획은 사업성 있는 주택을 지을 수 있는 땅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건설해주겠다는 시공회사들을 불러들이게 했는데 전에는 주택건설은 하지 않던 튼실한 건설회사들까지도 저마다 주택건설사업을 지원해주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건축비는 올려 받지 못한 것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또 하나를 추가한다면 그렇게 개발 붐에 편승하려는 중소건설회사들이 자신들이 쌓아 올린 건설 신용도를 이용하여 한 몫 잡고자 자산이라고는 입뿐인 나와 같은 업자들에게 자신들의 거래은행으로부터 P.F.대출을 받도록 해주면서 토지의 가격상승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오는 악순환에도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오르막의 끝은 분명히 있기 마련이다.

그런 과잉투자의 결과는 요즘 나타나고 있는 100대 건설회사 중 20개 업체의 도산으로 보여주는……

 

그런데도 물가나 소득이 정상상승을 했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일까?

그럼에도 주택가격의 상승이 소득수준의 상승에 걸맞은 상승을 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인가?

부동산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말하는 10년의 주기가 물가 상승률과 소득의 상승률에 따라 순환하였다면

분양가의 각 요소인 토지와 건축비(인건비, 재료비, 기타 잡비)등의 구조는 부동산의 순환주기와 전혀 관련 없는 것일까?

 

집 값이나 땅 값이 오른 만큼 소득도 올랐다면 현금의 보유량이 많아야 하는데

늘어난 현금을 증명하려고 부동산을 팔아야만 한다면 그 자산이 실제 보유한 자산이라고 해도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기사에서 장관이 말했다는 “1992년부터 20년간 물가상승률은 112.6%에 달했다”는 것하고, “같은 기간 전국 주택가격상승률은 57.6%에 그쳤다 라고 비교하는 것이 맞는 비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통계를 적용하는 것은 무식하다고 깔보는 행위 아닐까?

물가가 112%올랐다는 것도(그 비율로만 말하자면 그 동안의 정부가 모두 실정했음을 인정하는 것은 그만 두고라도) 어느 범위의 물가라는 것일까? 그리고 농촌의 주택가격과 도심의 주택가격을 물타기 하여 57%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또, 집값이 올라야 돈을 만지는 것이 참된 재테크의 방법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정책의 방향에 따라 수천만 원에서부터 수억 원에 이르기까지 사라졌다 생겼다 하는데

그런 미지의 가치를 믿고 집을 팔지 않으면 현금이라고는 알량한 사람들이 와상으로 돈을 팍팍 쓰는 것을 소득 수준이 상승했다라고 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라고 할 수 있나?

 

20여년 전이 생각난다.

그 시절 토지매매의 붐이 일 때였는데 가진 재능이라고는 농사밖에 없는 사람이 주변의 개발로 인해 자신이 보유한 토지의 자산가치만 높아져 농사로 소득을 올릴 생각을 접어 버리고 땅 팔리기만 기다리며 미리 대출 받아 쓰던 사람들을 땅 거지라고 부른 것과 요즘의 하우스푸어와 별 차이 없어 보이는데 그렇게 본다면 지금에서야 하우스푸어라는 계층이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10년 전부터 존재했던 개념 아니었을까?

관료들이 집 거지(영어로 말한다고 그 사람의 재정능력이 좋아질 것은 아니므로……)를 보는 시선이 만약 집이 팔리지 않기 때문에 지금 잠시 힘들 뿐이라면 세금 내려 주고 대출 늘려주어 집 사고 팔라고 하는 것이 맞을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소득으로만 원리금의 상환을 감당할 수 있는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맞는 적용이고 원금은커녕 이자의 상환에도 한계에 달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어쩌면 그들은 그냥 자신이 관료일 동안 말썽 나는 일이 없기만을 바라는 것으로 뭔 소리인지 모르는 통계와 근사한 말들로 광고를 만들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 아닐까?

 

살아 있는 인간이 일단 하나의 숫자로 격하되면 관료주의자는 철저히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행동에 비례할 만큼 지독한 잔인성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상대방에 아무런 인간적인 연대감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료는 사디스트보다는 그 포악성이 덜하지만 훨씬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부에는 양심과 의무의 갈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양심이란 바로 그들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정과 공감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이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9장 새로운 사회의 특성>

 

이렇게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현실을 미혹하게 만드는 것이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하는 것일까?

외상과 자선적 도움으로 살아가면서 독촉에 시달리는 이면을 지속하게 하는 것이 나라의 체면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일까?

그렇게 해서 그들이 사는 동안 땅 거지이건 집 거지이건 모두 거지신세를 면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 시기가 그들이 남은 시간의 거의 모두가 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 사람들의 집을 정부가 매입하여 대신 전세로 살게 해주겠다는 것도 그런 의미의 생명연장 수단 아닌가?

그런 사람들로 포함되는 사람들 역시 아주 적은 숫자일 것이고,

 

결국 순환주기라는 것은 학자들이나 소비자의 요구에 무언가를 답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단어 아닐까? 우리나라가 툭하면 비교하는 미국은 경험이 우리보다 길어서 그럴듯한 이유로 보여지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이제 개발시대로부터 반세기정도 경험했을 뿐이며 현실적 측면으로도 과거 전문가들의 예측이 맞았었다고 증명할 근거는 희박해 보이기 때문에 순환주기라는 현상을 기대하거나 통계에 적용시켜 사람들에게 제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또한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이 몇 가지로 나누는 단기. 중기. 장기 의 구분도 내 생각에 우리의 실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의 이야기라고 보여진다.

책에서 나누는 예가 적용될만한 시기는 이때였다고 꼭 집어 구분할 수 있는가?

나는 굳이 우리의 과거를 구분하여 동기를 정의한다면 80~90년대의 정점은 새로운 상품에 대한 소유에 대한 욕구에 의해서이고 2000년의 정점은 정책의 변화와 과거에 있었던 호황에 대한 기대심리가 어우러진 왜곡된 그래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같은 양상이 반복된다고 하는 순환은 어울리지 않는 비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순환주기를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예측으로 사용할 때

그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To have”를 위한 소비자이지 To Be”를 위한 소비자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런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개인의 경제사정이 불안하기 때문에 현금을 은행에 보관하여도 성에 차는 도움이 되지 않아

부동산으로 자산을 변화시켜 보유하고 있다가 언제든 현금으로 바꿔 사용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부동산 성장에만 개인 경제의 전체를 기대하기 때문이거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탐욕의 이유가 아닐까 하는데

보유한 현금만으로 투자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통계를 기대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투자에 경험이 많지 않은 실 소유자들 개인으로서는 순환주기를 예측하지 못하는 단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어서 위험할 것 같아 보이고, 투자의 측면으로 보아도 투자대비 이득이 그간의 정신적 고통을 상쇄시켜줄 만큼 merit가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개발업을 해왔지만 일을 떠난 부동산 투자에는 투자할만한 자산도 보유하지 못했지만 별 관심이 없었고 부동산투자에는 자료나 통계보다 운이 큰 몫을 한다고 보고 있으며 주택을 미래를 위해 사야 한다면 아주 헌 집이거나 아주 새 집을 사는 것이 낫다고 보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부동산에 투자한다고 하면 아마 많은 사람들은 한번에 큰돈을 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겪은 사람들의 경우를 대비해 본다면 가지고 있는 것에서 더 갖게 되는 경우가 무에서 뭔가가 만들어지고 만들어졌다고 해서 지속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사람의 경우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것 같다. 또 어떤 사람이 투자에 성공하였다고 할 경우 그는 또 다시 부동산에 투자할 가능성이 많음으로 두고 봐야 한다는 의미로 그 것을 단기간으로 보아서도 안 될 것 같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성공의 기쁨보다도 과정의 고통이 더 크다 할 수 있는 꿈을 쫓는 한탕주의를 벗어나 진정한 부의 가치를 얻으려면 “To Have”에서 “To Be”로의 진보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오늘날 집 사치로 나타나고 있는 이 양(Quantity)의 시대를 어떻게 질(Quality)의 시대로 전환시키는가, 물질적인 하우스(House) 시대를 어떻게 정서적인 홈(Home)의 시대로 진입시키는가. 물질적으로 소유(To Have)하는 시대를 어떻게 정신적으로 존재하는(To Be) 시대로 발전시키는가가 우리가 겪어야 할 가장 큰 정신적 시련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집 이야기. 호화주택 고사. 이규태. 1991>

 이 글은 90년대 아파트로 돈을 번 사람들이 대형평수의 주택을 선호하는 현상을 비평하는 것이지만 70년대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의 경제적 성장으로 이끈 물질적인 변화가 21세기 들어 정신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그 변화는 앞으로 공공의 복리 등으로 이어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선진국가 형태의 변화라면 그 변화를 기왕의 선진국에서만 답습하려 하지 말고 아파트문화를 만들어 낸 나라답게 새로운 형태로 변화시키면 어떨까 한다.

 

요즘 그와 같은 현실에 대한 적응의 방법으로 사람들이 집을 사지 않고 전세나 임대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단지 집 값이 올라서만이 아니라 소유에 관한 의식이 변화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

앞으로 주택의 가격이 계속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결국은 오르는 현상이 지속된다면 부익부빈익빈의 현상(평생을 벌어도 대도시의 집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의 숫자가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고

그런 사람들의 표를 얻어야 하는 관료들은 그들을 위해 임대주택을 늘리겠다고 공약을 할 것이고

그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공간을 확보하려는 차원으로 기존의 공간에 정책을 투입하게 될 것이고……

그런 의미로 뉴-타운 정책이 시행된 것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라 기존 주택의 공간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저항을 받겠지만 그들의 저항보다는 공공의 실적에 대한 표의 유혹이 더 크다고 생각할……)에 따라 대도시의 주택을 보유한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드는 대신에 주택의 숫자는 줄지 않는 현상이 생기지 않을까?

 

             ”소유양식과 그 결과로서의 탐욕이 필연적으로 사람들간의 대립과 투쟁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은 개인과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들간에도 적용된다. 국가가 소유와 탐욕을 주된 행동요인으로 하는 국민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 그 국가들간에는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조심성 많고 무엇인가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안정감을 느끼지만, 그들은 필연적으로 매우 불안전하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돈. 명성. 자아. -자기 외부의 어떤 것 –에 의존하고 있다.”

(제6장 소유와 존재, 그 새로운 측면)

 

원인보다는 결과적인 측면으로 볼 때 20여 년 전에는 요즘의 시기와는 반대로 부동산 가격이 너무 올라 정부에서는 부동산 거래를 억제하려는 정책을 발표했었다. 그때 법의 제정이유로 “토지가 사유재인 동시에 공공적인 특성을 가지므로 공익을 우선으로 하여 토지소유를 제한하여”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10여 년이 지나 정권이 야당으로 바뀌어 정부나 시민단체가 “주택은 공공재이다”라고 했을 때는 “좌파”, 공산주의자”라고 반대를 했었다. 나는 좌파 우파를 떠나 공공재이므로 집값이 오르는 것을 막는답시고 재건축, 재개발등의 개발을 규제하고 난 개발을 막고 계획적인 도시를 만든다며 토지에 가치를 부여하는 바람에 편향적인 정치색을 가진 언론으로부터 수요에 대한 불안감을 키울 요지를 주어

결과적으로 집 값이며 토지 값이 오르게 한 그 사실에 분개했었다.

 

토지는 거의 불변이라 할 재료이고 단독주택은 있다 없다 할 수 있어도 아파트는 물건 하나를 여러 사람이 사용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철거하고자 하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공공재가 맞는다고 해도 시비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 당시의 토지공개념3법은 “토지소유를 적정화하고, 토지거래를 규제하려는” 취지보다는 어차피 나라가 자본주의를 벗어나기 어려우니 세금이나 더 걷으려는 측면이 더 강한 의도가 아니었나 라고 본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세수가 적으니 거래를 활성화하여 세금을 걷어들여야만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일까?

빚을 더 내더라도 집을 사고 팔라 하고 아직 집값이 비싼 것이 아니라고 은연중에 가격상승을 부추기며 사람들에게 공익광고나 기업이미지라는 광고로 당신은 이미 충분히 부자이다라고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 뉴스에서는 기업의 부채가 1,000조에 달한다고 했는데 나라의 부채(공공부분 부채는 2011 3분기 말 한국은행이 파악한 것만 789 3600억 원)도 조 단위이고 가계부채도 1,000조에 육박한다고 하고 그럼 우리는 모두 돌려 막기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생각은 변화하는데 국가의 정책은 과거 떴다 방이 판을 치던 부동산시장에만 기대하는 것처럼 정책의 진보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하고 있다면

“To Have에서 To Be로”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당할까?

자본가들의 집합인 경제인 연맹은 아직 아니라고 하고 시민참여단체는 지금이 적당하다고 하고……

 

부동산 토지 공개념 부분 펼치기 ▼

 

특정지역을 확대 고시하고, 양도소득세를 강화하고, 공공주택을 개발하고 임대주택의 공급을 확대하고, 부동산 투기 근절을 위해 토지거래허가제의 확대 실시하고 관인계약서 추진하고 등기의무화를 추진하고, 과표현실화를 통해 부동산보유세를 강화하고 양도소득세를 누진 과세하고, 토지보유과다보유세를 개선하여 1990년부터 종합토지를 실시할 수 있도록 토지 전산화 작업을 완결하도록 하였다. 정부가 당시에 토지공개념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도시화, 산업화로 토지수요가 급증하는 것에 비해 토지공급이 제한되어 주택 등 건축 가능한 1인당 평균대지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둘째, 지가가 지나치게 상승하여 이로 인한 소득불균형이 심화되고, 공공사업비가 증가하고 물가불안도 커진다. 셋째, 토지개발에 따른 지각의 급격한 상승으로 개발이익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토지소유주 개인의 사익으로 변질되고 있다. 넷째, 법인이 과도하게 토지를 소유하여 개인의 토지가 적고, 그것도 소수에 집중되어 있다.    토지가 사유재인 동시에 공공적인 특성을 가지므로 공익을 우선으로 하여 토지소유를 제한하여 토지소유를 적정화하고, 토지거래를 규제하여 실수요자의 토지소유를 지원하고, 개발이익을 불로소득으로 환수하고, 기업의 과다토지 보유를 억제하여 토지이용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 토지공개념 도입의 취지이었다. 정부가 이러한 취지에 따라「택지소유상한에 관한 법률」,「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토지초과이득세」라는 토지공개법 3법을 제정하였고, 이 법들은 국회를 통과하여 1989년 12월 18일에 공포되었다. 이 법의 기초가 되는「지가공시 및 토지 등의 평가에 관한 법률」도 제정공포되었다.”< 재정/금융 > 조세체계 > 부동산세제 개혁 > 토지공개념 3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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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왜곡의 역사 - 성서비평학자 바트 어만이 추적한
바트 D. 에르만 지음, 강주헌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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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진화론과 창조론은 대립개념이 아니다 진화론이 맞다고 해서 창조론이 르지는 않다>

 기독교 신학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와 같이 언급된 ‘하루’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1일’과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1일 개념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는 지구의 1회 자전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창세기의 ‘하루’는 태양과 지구가 아직 생기기 이전부터 언급하고 있으니 결코 같은 개념일 수 없다는 말이다. 고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미 1600년 전에 이 같은 논리적 사실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는 “우리가 아는 날들은 일몰이 없으면 저녁이 없고 일출이 없으면 아침이 없다. 그런데 최초의 사흘은 태양 없이 흘러갔고 태양은 넷째 날에 만들어졌다”라고 지적했다. 이어서 창세기의 하루를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구약성서에 언급된 창조 시기의 날짜 수는 단지 ‘창조의 순서’를 나타내는 어떤 신비로운 날짜 수로서 자연적 의미의 날짜 수와는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정통 기독교 신학은 창조를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신적 시간에 여섯 단계에 걸쳐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고 교훈해 왔다.

 

미국에서는, 비록 Dover학군이라는 일부 지역에서이긴 하지만

법원이 과학자들의 손을 들어 지적 설계정책을 유지하거나 진화론을 헐뜯지 말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펜실베니아 중부 미국연방 법원의 판결문의 효력이 미치지 못하는,

캔자스 주와 다른 몇몇 주에서

창조론(그게 왜 論()인지 모르겠다. 여러 의견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가지 說()만 믿어야 하는데..)을 가르치기도 한다고 한다.

 

미국인이 되지 못해 미국이 하면 우리도 한다라는 식으로 따라 하는 태도를 보이는 일부 기독교단체는

미국의 그들처럼 국내의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을 제거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학술을 내세우고 있는 종교단체라고 하는데

학교 교과서의 진화 이론의 일부가 틀렸으므로 교과과정에서 제거 되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교과 부에서는 그들의 주장을 들어주려 했다는 일부의 보도로 인하여 외국의 과학계에서 한국을 경멸하고 있다는 기사들을 보고 여러 생각이 들어

근래에 읽었던 책들의 내용들을 되새김해본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에는 진화론은 가설이며 실험으로 입증된 과학이 아니고, 증거가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창조설에도 같은 의문을 적용시키면 가설이 아니며 입증되는 증거 - 실제 데이터와 다르지 않은 것, 오래 전의 주장이 아닌 것, 여러 학계에서 인정되는 것, 일부의 주장뿐이 아닌 -

가 있다는 말인가?)

 

 

어제는 신의 입자” 불리 빅뱅의 입자를 발견한 것 같다는 TV뉴스를 보았는데

우주 탄생의 과정에서 물질에 질량을 부여한 입자를 Higgs입자라고 하는데

그 입자에게 신의 입자라는 별칭을 붙인 것은

힉스입자가 빅뱅으로 탄생한 모든 소립자에게 질량을 부여함으로 해서

face of the DeepEarthface of the Waters을 만들었지 않을까라는,……

그래서 창조설의 가면인 지적설계론을 이론적으로 보완해줄 것이라는 이유에서일까?

 

논증을 통한 과학적 이론을 부정하면서 증명하지 못하는 과학적 이유를 근거로 하는……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 라는 책에서 본 것으로 기억하는데

통일교 교주로부터 학비를 지원받아 과학자가 된 어느 학자가

자신이 아버지라 부르는 그 교주의 은혜를 갚고자 학계에서 일방적인 이론을 내놓고는 한다는데

그들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면서도

동료학자들에게 논증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그처럼 학자의 양심을 벗어난 사적인 동기를 가지고

진화론을 무너뜨리기 위해 증명된 과학의 일부를 고의로 틀어놓기 때문 아닐까?

 

그런데 나의 의문은 (- 끝나지 않을 최초의 의문은 제쳐두고) 과학자들이 수세기 동안

잔인한 종교적 탄압을 이겨내고 꾸준한 논증을 통해 밝혀낸 이론에,

그래! 당신들의 발견한 그것의 동기는 신에 있다라고 하는.

마치 과학자들의 밥상에 슬쩍 숟가락 얹어놓는 비양심적 횡령 같은 그런 것에 있지 않다.

 

영어 성경에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Earth’라고 했는데

그럼 시간이 먼저라는 것일까?

그가 움직이므로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움직임은 시공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 아닌가?

존재의 나타남 이전에 시공이 있어야 한다.

 

어디가 먼저인가?

언제가 먼저인가?

아니면 시공을 빛 이전에 만들었다는 것일까?

만들었다면 어디에서 언제? 날자 이전에? 수면이전에?

빛 이전에 어둠이 있고 공간이 있었고 수면(upon the face of the waters.)이 있었다면 어디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아는 날들은 일몰이 없으면 저녁이 없고 일출이 없으면 아침이 없다.”했는데

여기서 “우리가 아는 날들”이라고 인간의 보편적 하루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분하지만,

태양과 달이 있고 없고 간에

첫째 날에 빛을 만들었으므로 낮과 밤이라 칭하고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태양생성 이전의 빛은 무엇이며 어디를 비추고 있었을까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미 낮과 밤은 있다고 했으므로 태양과는 관련 없는 것 아닐까?

 

, 넷째 날 이후에 ‘날”이라고 칭한 것이 다르게 쓰여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같은 의미라고 보고 싶은데,

신의 시간에 대한 속성과 인간의 개념은 다르므로 (-다르다는 것을 어찌 인간이 비교 판단했는지 모르지만)

그러면 안 되는 것이라면 !

기사와 같이 1~3일까지는 신의 날이고 4~7일은 인간의 일주일에 해당하는 날이라면

일주일이 7일이 아닌 4일이어야 하거나 3일간의 행적을 따로 만들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4일째 만든 태양과 달로 이미 있었던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여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었다고 했음은

태양이 생긴 날들 이후의 날은 그전의 날과 다르므로 4일째 뭘 만들고 5일째 뭘 하고

7일째 쉬었다는 식의 연속성으로 표현하면 안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약 아우구스티누스,

그의 말대로 “창조 시기의 날짜 수는 단지 ‘창조의 순서’를 나타내는 어떤 신비로운 날짜 수로서

자연적 의미의 날짜 수와는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주장을 따라야 한다면 그 사람의 해석을 믿어야만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 사람이 최초로 그 문제에 대하여 정의를 내렸기 때문에?

아니면 그 사람이 자신의 주장대로 자신은 하나님과 친분이 있어서 따로 설명해준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 성경 속의 의미를 비유로 알아야 한다면

사람은 각자의 개성과 기질과 역사적 환경과 정치적 환경에 따라 각자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본인의 해석이 맞는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설명하여 대중에게 공감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중에게 공감을 얻은 주장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해석을

학술적으로 정리하여 교리를 만든다면

시간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해석도 달라질 수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빛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억지로 다음 장으로 넘어가다 보면

어떤 하나님이 만든 창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1장에서 바쁘게 일을 하며 사람보다 식물을 먼저 만든 하나님(God, Deus)일까

2장에서 1장의 하느님과 별개로 동방의 어디에선가 따로 남자를 만들고 식물을 만든 (Lord God, Dominus Deus)일까?

신의 명칭에 Lord, Dominus같은 단어가 추가된 것은 우주와 동식물,

그리고 남자사람을 만들어서 인류가 지상을 정복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라는 칭송의 의미라면

1장에서 만들어 놓은 것을 없애고 2장에서 다시 만들었다는 것인지

1장에서 우주의 어느 곳에 만들어 놓고 2장에 지구에 와서 만들었다는 것인지,

휴식하느라 순서를 까먹은 것인지,

나중에 모세에게 다른 신들(other god, deos alienos)”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

여러 신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인지 모르겠다.

 

             에비온파는 철저한 유일신논자였으므로 예수를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예수는 하나님이 메시아로 지명한 인간이었고,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으며 부모는 요셉과 마리아였다.

             <6: 성경은 어떻게 완성됐을까? 261p

             마르키온은 (대조표; antitheseis)를 써서,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예수의 하나님이 완전히 다르   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화내고 복수하는 심판의 하나님이지만, 예수의 하              나님은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구원의 하나님이었다. 마르키온은 이런 논리를 근거로 완전히   다른 두 하나님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263p)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이 유일한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늘나라에는 신적    인 존재들이 많았고, 그 존재들을 만들어낸 최고신은 따로 있었다. 이 세상은 열등하고 무지한               신들이 만들어낸 골칫거리였다. 이 세상은 신의 세계에서 일어난 재앙의 결과, 즉 신 가운데     말썽꾼을 가둬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땅에서 벗어나 고향인 하늘나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진실, 우리의 정체에 대해 배워야 한다.(265p)

             < 예수 왜곡의 역사(Jesus Interrupt): Bart D. Ehrman / 청림 출판 2010 >

            

창세기의 처음 부분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교리와는 별개의,

아무런 논점도 되지 못하는 조그만 표현상의 오류 정도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원문의 차이가 중요한 교리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 자체가

내 귀에는 이상하게 들린다”(254p)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데 마르키온처럼 해석할 수 있다면

에비온파, 콥트, 그노시스파등등의 초기 교파의 교리 같은

다른 어떤 해석도 옳을 수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288p/ 발터 바우어의 폭탄선언)

 

             신약성경 전체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명시적으로 가르치는 곳은 한 구절 밖에 없다.

             흠정역성서(king James Version) 요한일서 5 7~8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신약성경의 그  리스어 필사본 대부분에는 나오지 않는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교리가 아니냐   고 반박하면, 그들은 요한일서 5 7~8절이 아니더라도 성경 전반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찾아  낼 수 있다고 재 반박한다. 하기야 기독교의 모든 교리가 그렇다. 성경을 열심히 들여다 보면   어떤 구절이든 떼어내 기독교 교리에 맞출 수 있다. (254p)

 

이와 같은 해결하지 못한 의문의 많은 부분에 대해서

찬양일색인 책을 제외한 여러 책들의 의견들을 봐도 이처럼 첫 장에서부터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명백하게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사람들의 지식 수준을 계급으로 나눈다면 최하위 계급인

나와 같은 무식한 사람을 상대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답을 책으로 남기기에는

흥행성을 보장할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래도 Ehrman의 책에서는 내가 그 동안 가졌던 의문가운데 몇 가지에 대해서는

내 나름의 유추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왜 우리나라에서 서양의 종교가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흥행에 성공한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상상하는 바로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영향을 주지 않았나 한다..

 

아프리카에서 유럽과 동양으로 이어지는 육상 통로의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자리잡은 민족.

그들의 역사는 주변 민족과는 다른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주변민족과는 달리 정착하여 살만한 땅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거나

어느 시기에 땅을 잃어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309p)

그래서 그 후손들은 주변 민족에 대한 적개심으로 500여 년을 살아오면서 자유를 억압당해왔다.

 

그러다 한 사람이 자신의 민족 독립을 위해 세상에 나왔는데

이전의 메시아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보수적 태도로는

민족의 숭고한 율법과 행복으로의 희망을 이룩할 수 없다는 점을

동방으로부터 수입되었을지도 모르는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을 바탕으로 주장하였으며

독립을 하고자 하는 수단도 잔인한 복수(311p /솔로몬의 시편 17:21~32) 가 아닌 자비와 용서의 화합을 내세워 동조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진보세력이 항상 그렇듯이 기존의 보수적 단체로부터 외면당했고

예수의 그런 부드럽고 인간적인 수단에 대하여 불만을 품은 동료에게 배신당해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 일주일 동안에 보여주었던 과감하고 의젓한 행동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몇 십 년 동안 지속되어 갔다.

그가 죽고 30여 년 후에 그가 독립을 외쳤던 시가 시민의 봉기를 탄압한 로마에 의하여 파괴되자

아마도 그것은 "시대의 종말에 대학살이 있을 것이고, 그때 성전도 파괴될 것이라는 예언을" 기억나게 했으며

예수의 행동에 소극적이었던 보수적 단체의 행위들이 지탄받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잊혀질 뻔 했던 그의 철학은 개심한 바울에 의하여 새로운 사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잊혀질 뻔 했던 그의 철학은 개심한 바울에 의하여 새로운 사상으로(322p-바울과 예수는 똑 같은 종교를 주장했을까? 이는 역사적으로 무척 중요한 문제이며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이다.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반면에 바울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이라고 가르쳤다.)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즈음 지배국 로마의 정치상황은 네로황제의 폭정으로 퇴락하기 시작했고

나빠진 시민의 민심을 잠재우기 위하여 정치적 변혁의 필요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동안 로마제국의 식민지 정책과, 그리스의 느슨하고 나약하며 지루한 철학으로는

지상에서의 불안한 생에 대하여 보상 받을 수 없던 시민이 불안과 공포는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결단으로 로마 권력의 보호아래 지상으로 나온 바울의 철학을 따르면서,

신분의 평등과 영생과 같은 당근을 제시한, 미래의 보상으로 완화되었다.

그 후 권력에 편입된 종교는 자신들의 부족한 논리를 채우기 위하여

그간 여러 지파에 전해지던 원전을 모아 첨삭을 거치면서 지금의 베스트셀러가 완성되었다.

 

그런 서양의 종교적 철학은 세월이 흐르면서 중세기를 지나 철학과 신학으로 복제되고 확산되어 진화하지만 과학의 발전에 따라 공간의 제약이 사라져가면서 왜곡의 양과 질이 증가하며 변해버려 초기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 우스워져 버린 것 같다.

그리고 내 생각도 변했는데

서양철학과 동양의 철학은 왜 다를까 에서 시작된 의문은

근대의 정치상황을 알게 되면서 그럴 수도 있었을 것 같다라는 생각으로……

그런데 왜 다를까라는 의문은 아직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의 서양종교 흥행성공의 이유는

지리적, 정치적 이유가 비슷했고 진행과정에서 권력, 금력과의 타협이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순수성의 변질과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이민족의 피해망상이

어떠한 이유로 유입되어 이유 없는 배타성으로 표현되는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편협의 근원: 기독교의 출현과 더불어 세상에 퍼지게 된 편협심은 기독교의 가장 기이한 특징의 하나로서, 유태인의 정의관과 유태인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그들의 신념에서 생겨난 것으로 본다.

나는 왜 유태인들이 이러한 특이성을 갖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하기야 이러한 것은 그들이 예속되어 있는 동안 유태 민족을 외방인 에게 합병시키려는 계략에 대한 반발로써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는, 로마 제정 때 자기들의 민족국가는 파괴되어 정치력을 전혀 갖지 못하고 개성을 잃은 광대한 집합체에 병합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79p)

어쨌든 그것은 유태인, 특히 그 예언자들로 하여금 개인의 정의관과 한 종교 이외에 다른 종교를 관용하는 것은 사악한 일이라는 관념을 강조하게 하였던 것이다.” 45p

<2장 종교는 문명에 유익한 공헌을 했는가>

 

그런데 왜 아직도 그와 같이 초지를 잃어 변해버린 신념에 매달려 있는가!

범위가 커진 사회에서 윤리와 도덕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곪아버린 상처를 흉터로서 안고 있어야 하는가!

심리학자를 비롯한 많은 성현들이 제시한 여러 근거들을 보더라도 인간은 태생적으로 스스로 윤리적이고 도덕률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서양의 신념이 없어도 동양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인간 상호간의 도덕성을 유지하고 있었지 않은가!

Bart Ehrman의 책의 결말에서도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서양 철학자들이 쓴 책을 읽다 보면 깔끔하지 못하고 모호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라는 의문은

그들이 그 시기에 자신의 사상을 솔직히 밝히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에 이해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학자라고 하더라도 생존은 중요했을 테니까……

 

그렇게 흉터로 자란 상처는 스스로 생명을 얻어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비평하는 상대를 공격한다. 초지가 어떻든 상관없이 미래에 대한 보상만이 중요하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생각은 단순해 보인다. 곪았는지 씨 투성인지 상관하지 않고 줄무늬만 보고 수박을 고르는 것처럼 영생이라는 단어에만 매달린다.

그토록 고통에 시달리던 생을 왜 연장하려 들까? 어떨 것이라는 구체적 상상도 하지 않고 말이다.

예수가 재림하여 지상의 악인을 모조리 불구덩이에 집어넣어 그 동안의 복수를 끝낸 후의 세상은 악과 고통이 사라진 세상일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 그런 그들의 생각대로 신이 도와줬다면 육신이 없는 것처럼 악의 개념이 사라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술이나 약물에 취한자의 범죄에 대하여 벌을 가하지 않는 것은 그 행위의 자아가 맨 정신의 자아와 다르다고 해서인 것처럼 그 세계의 나는 이승에서의 나와 같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나는 이처럼 모순된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 몸은 무덤 속에 있기 때문에 내세는 육신을 갖지 않는 세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세에도 육체적인 고통이나 즐거움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심지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려면 육신이 있어야 할 텐데도 말이다. 예수와 함께한 초기 기독교인은 이런 식의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았다. 이런 믿음도 훗날의 기독교인이 만들어 낸 것이다. <349p /7장 천국과 지옥>

그래서 그런 생각을 밖으로 표현하면 그들의 그 동안의 친절은 사라진다.

 

바로 이것입니다. 즉 우리가 기독교를 지키지 않으면 모두 다 악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를 지켜 온 사람들이 대게 매우 악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상한 사실, 즉 어느 시기에 종교가 강하면 강할수록,

독단적인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잔인성은 더했고, 사태는 더 나빴습니다.

이른바 신앙의 시대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정말 철저히 기독교를 믿었는데도 종교재판에의 고문은 극에 달했습니다. 불행한 여성이 수없이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해지고,

종교란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갖가지 잔인성이 가해졌습니다.

세상을 돌이켜 볼 때 여러분은 인간 감정의 조그마한 발전도, 형법상의 모든 개정도, 전쟁을 적게 하는 모든 방안도, 유색 인종의 대우 개선을 위한 모든 대책도, 또는 노예제도의 완화나 이 세상의 모든 도덕적 진보도 세계의 조직화된 교회에 의하여 철저히 반대되어 왔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많은 교회로 조직된 기독교도의 종교가 세계의 도덕적 진보의 으뜸가는 적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을 신중히 말씀 드리고자 하는 바입니다.

<1장 나는 왜 기독교도가 아닌가>

 

이런 이들의 특징은

 

공산주의의 가장 위험한 특징들은 중세 교회를 회상케 해준다.

그 특징들은 성경에 구현된 교리에의 열광적인 신봉과, 이러한 교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를 싫어함과,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로 구성되어 있다. 188p

<13장 종교는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이에 공감하게 된다.

인간의 도덕성은 종교가 없다고 해서 같이 사라진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행복이란 반드시 종말이 있다고 해서 행복의 진실성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며 사상이나 애정이 영속적이 아니라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의젓하게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바로 이 의젓한 태도에서 우리는 이 세계 속의 인간의 위치를 바로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63p

자본가와 군국주의자와 성직자들이 교육에 협력하는 것은, 이들은 모두 그 권력 유지를 위하여 감정주의의 치중과 비판력의 부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75p

<3장 나는 무엇을 믿는가>

무엇을 해야 할까?

신념이 아닌 신념이라는 단어를 고급 액세서리화하여 애지중지하며 보관하는 것처럼

각자의 마음속에 새로운 솟대를 세워야 할까?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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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사기 -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지음 |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인류가 글을 사용하여 기록을 남긴지 수천 년!

그 동안 대중들에게 인정받아 널리 지금까지 읽혀지는 글들.  

그 글을 작성한 저자들.

지금도 후세에 남기고자 자신만의 주장을 담은 글을 쓰고 있을 사람들.  

그 저자들의 개인적인 역사의식과 정치성향, 문화적 가치관등은 각자 다 다르겠지만

어떤 분야에서 진실을 알리려고 글을 쓰는 목적은 모두 같을 것이다.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작품은

사실만을 다루어야 한다는 제약이 없으니 형식상 아무런 거리낌이 없겠지만

경험적 진실을 다루거나 실험적 사실을 다루어야 하는 저술들은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상태에 따라서 상당히 조심스러운 주장을 펼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글 한번 잘못 썼다가 인생 망쳐버린 사람들도 꽤 많으니 말이다.

 

일부의 사람은 다른 사람의 저작을 향하여 반박하거나 다른 의견을 내기 위하여

대상저자와 직접 만나서 해결하지 않고 글로써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때도 역시 개인의 성향이 좌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수많은 글을 자기만의 색채로 남기다 보니

누구의 글을 따라 한다거나 인용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 다반사일 것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자기만의 개성이 담긴 글을 써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겠다.

 

언젠가 어디선 듣거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누군가 논문을 쓰려하는데 논문의 성격이나 나중의 효과 등은 관계없이 새로운 주장이어야 하고,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하며,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학설을 인용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풍토가 싫어 학교를 떠나 다른 직업을 가지려 한다.”

확실히 조합되지 않은 누더기 기억이 있다.

예술, 특히 미술은 누군가가 이전에 이미 발표한 형태의 작품은

음악에서의 표절과 같이 미술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듯한 풍토가 있다는……

그런 이유 때문일까?

그래서 특이한 기법과 표현이 주목을 받으며 진부함은 도태될 밖에 없다는 잔인함이 판친다는……

바람에 인상파니 입체파니 하는 신조어만 생겨나고……

세월이 진화해가는 인간에게 주는 어쩌면 당연한 조류일 것이다.

 

스트

                 

                  포스트모더니즘은 지난 20세기에 걸쳐 서구의 문화와 예술, 삶과 사고를 지배해 온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서 19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의 통일된 사조나 운동은 아니지만, 그 중심적 동기는 모더니즘을 통해 수립된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엄격한 구분, 예술 각 장르 간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이다. (네이버 지식사전)

 

그런 예술분야에서의 시대적 흐름이 문학과 과학에도 영향이 있다고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주장을 표현하는데

남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기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관련학계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그런 풍토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최대한 어렵게 하려는 것은

자신들이 하고자 했던 주장이 대중들에게는 정작 도움이 되지 않는 저들만의 잔치 아닐까?

더군다나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닌 부분까지 자신의 생각을 옮기려는 도구로 사용하며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은 지적 허영심이 아닐까 한다.

 

 

그런 저자의 지적 허영심으로 오만을 휘두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꼬집은 학자가 있다.

 

지적 사기(Fashionable Nonsense):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 했는가.

 

사기라고 표현한 것은 약간 과장된 것이라고 보여지므로

다른 단어로 대체한다면 사치나 허영 같은 단어가 어울릴 같다.

 

글의 저자인 ‘Alan Sokal Jean Bricmont” 물리학자로서

일부의 프랑스 철학자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표현하는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과학과 수학을 인용하는 것에 학계에 경각심을 주고자

미국<<Social Text>>라는 학술지에 [경계의 침범: 양자중력의 변형 해석학을 위하여]라는 논문을 보냈다.” 한다. 그런데 논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헛소리로 일관하고있다고 한다.

 

그리고 <악마의 사도>에는 그런 식의 태도를 꼬집는 프로그램이 있음을 소개해준다.

 

사이트의 프로그램은 결함 없는 문법 원리들을 이용해 이전에 번도 보지 못했던 기막힌 포스트모던 담론을 당신 앞에 자발적으로 생성해 내놓을 (106p)”이란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프로그램이 만들어 내놓은 논문의 부분을 인용한다. 아주 어려워 보이는 말들이 조합된……

그리고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논문이 하나씩 만들어 준다는……

 

그런 사이트가 논문을 작성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현실 속에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지식에 대한 주체 못할 욕구와

이해 못할 난해함이 지식의 정점이라고 착각하는 현실의 유혹이 결합하면

얼마나 많은 지식의 왜곡과 방향을 잃은 지식들이 난무하게 될까

 

                  다루는 문제 자체가 까다롭기 때문에 어려운 담론과 의도적으로 난해하게 꾸민 뒤에 공허하고 진부한 내용을 조심스럽게 숨기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담론은 천지차이다.(이것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만 국한된 문제가 절대로 아니다, 물리학과 수학에도 필요 이상으로 복잡한 언어로 씌어진 논문이 수두룩하다.) 물론 눈앞에 보이는 어려움의 종류를 항상 척척 구별할 있는 것은 아니다.” -< 239 p 에필로그>

 

 

학자들이라고 다 글을 잘 쓰거나 말을 잘하지는 않을 것이다.

헤겔을 말투가 어눌하였다 하고 쇼펜하우어는 달변이었다지만 (그래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아직도 서문에 멈춰서 있지만……)학교에서의 인기는 의외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들의 표현력과는 관계없이 이해되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들에게도 파벌은 생겼지만 말이다.

아니면 정말로 지식이 많고 경험적 사실을 증명할 있는 학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용을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 자신이 보유한 지식의 양만큼 풍부하지 못한 언어구사력으로 하여

글로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에서 우리가 무수히 많은 애매모호한 글들은 가지 유형으로 집약된다. 하나는 맞지만 뻔한 주장이고, 하나는 과격하지만 뻔히 틀린 주장이다. 많은 경우 모호성은 의도된 결과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실제로 지적 전투에서는 모호성을 앞세우는 것이 대단히 유리하다. 과격한 해석은 경험이 부족한 청중이나 독자를 사로잡는데 안성맞춤이다. 이런 해석의 허무맹랑함이 폭로된다 해도 저자는 오해 받았다는 주장으로 자신을 변호하면서 말썽의 소지가 없는 해석으로 언제든지 물러설 있다.” (245p. 에필로그)

 

특히 이런 애매모호함은 인간정신을 다룬 어려운 주제라고 생각되면서도

시대의 흐름과 상관없이 읽혀지는 시나 소설 같은 문학작품이 아닌

형이상학이나 종교 관련 고전들을 읽다 보면

말이 같고 뜻이랑 뜻이 같은 주장인듯하고,

그러다 보니 같은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비하 섞인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 모호함은 직접 만나서 저자와 같은 의미임을 확인 받지 못한 채로

옮기는 이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기도 하는 같다.

그런 모호한 성격으로 해서 오해와 왜곡, 자의적 해석 등이 많은 곳은 종교가 아닐까 한다.

 

                  이것은 상당수의 종교 텍스트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라캉을 따르는 제자들은 텍스트를 우러러 받들면서 주해를 달았다. 그러니 우리 앞에 새로운 종교가 나타난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겠는가.” -< 61p 자크 라캉>

 

 

그러니 성현들은 자신의 말이 후세에 글로써 오류를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서

자신의 손으로 글을 남기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염화미소의 뜻을 마하가섭만이 알았다고 부처는 말했다지만

회의 대중들 속에서 또한 알아 들었노라라고 사람들이 없었다고 있을까?

그렇게 직접 모인 자리에서 말을 것도 해석여하에 따라 남종, 북종으로,

수많은 지파로 나누어진 것처럼 서로간의 이해가 다른데

책으로 쓰여진 것은 얼마나 다른 해석을 만들어낼까!

해석이 여러 가지로 달라서 이견이 발전되고 진보되어 나아가는 것이지만

오해와 오류로 역사가 바뀌기도 하니까 남에게 단순히 이야깃거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만도 하겠다.

 

 

                  하지만 사회 현실에 대해서 발언하기 위해서는 그럴 듯한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특히 주류의 견해와는 동떨어진 입바른 소리를 하려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대체로, 지적으로 탄탄한 내실을 갖추고 있는 분야일수록 자격증보다는 알맹이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할 있을 것이다.(촘스키, 1979 : 6~7).” -<29p 서론>

 

책에서 지적당하는 학자들의 글을 읽어 본적이 없으므로,

논박에 대하여 옳은지 그른지, 한쪽의 편견에 의함인지도 없고,

너무 나라이야기 같은 전문분야의 지적이라

스스로 이해하려면 세상을 다시 살기 전에는 없을 것이나,

책을 알게 계기가

악마의 사도라는 (<악마의 사도> 95p 벌거벗겨진 포스트모더니즘: 대한 서평)이었는데

저자인 Richard Dawkins 서평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래 봤자 장님 코끼리 만지는 (群盲評象(군맹평상) 불과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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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 창조론이 과학이 될 수 없는 16가지 이유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김명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CBS 방송의 여론조사에서는 미국인의 55%,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투표한 사람들의 67%가 진화론을 전혀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또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미국인의 3분의 1이 성경이 글자 그대로 진실이라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합뉴스 2005년 1월 25일자 <초점> 美 언론 `지적 설계론' 부상 경고)

 

왜 미국의 정치. 종교인들은 21세기가 되도록 신국(神國)이 되려는 꿈을 갖고 있을까?

다른 민족이 신국(神國)이 되려고 하는 것은 악의 축으로 표현하고, 인권과 테러방지라는 이유를 들어 수천 년이나 된 그들의 문화를 파괴하려고 전쟁을 일으키면서까지 말이다. 

             “이 사태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한결같이 무기감찰관 한스 블릭스와 모하메드 엘바라데이의 주의 깊은 분석을 무시한 결과로 발생했고, 육군참모총장 에릭 K. 신세키 같은 군 전문가들의 말을 무시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43p (반 과학에 대처하는 과학자들의 자세 / / Leonard Susskind)”

 

다윈의 <종의 기원>이 1859년에 발표되기 근 100년 전인

1755년에 Jean Jacques Rousseau는 <인간불평등기원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루소는 책 1부에서 인간의 발전을 추적하면서

동물적인 해부 구조를 통해 탐구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비교해부학은 아직 그다지 발달되어 있지 않고 생물학자의 관찰은 너무나 불확실하므로,

 우리가 갖고 있는 종교적인 학설에 의지하지 않으며, 아울러 인간이 점차 손발을 새로운 용도에 적응시키고 새로운 음식을 먹게 됨에 따라 인간의 외적. 내적 구조에 일어났을 변화 또한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책의 대부분을 통해 인간의 의식이 미개인에서 현대인으로 발달하는 동안

어떻게 사회를 구성하게 되고, 존재간의 계급이 발생하는지에 관한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주장하는데 그런 설명 중에

           인간은 동포의 괴로움을 보고 싶지 않다는 선천적인 감정에서 자기 행복에 대한 욕구를 완화하게 된다. (1부 80P)는 대목이 있다.

나에게 이 부분은 역사 속의 여러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인간 본성에 관한 탐구중의 한가지 이론으로 도덕성을 말하는 맹자(孟子)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중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생각나게 한다.

             “성서에 인가된 가나안에서의 대학살에서부터 오늘날 이슬람교도들의 자살폭탄 테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신이 인간에게 분명한 악행을 하라고 명한 예를 숱하게 볼 수 있다. 191p”

             “반면, 인간조건에 대한 진화론적 이해는 도덕 감각과 양립 불가능하기는커녕, 우리가 왜 도덕감각을 갖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자연선택은 친척과 교역 파트너들에 대한 도덕적 배려를, 단지 자기 이익을 위한 냉소적인 전략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신념으로서 선호할 수 있다. 수천 년에 걸친 도덕적 진보는 사람들이 타인의 삶에 자신을 투영하여 공감의 범위를 넓히도록 장려하는 상황들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도덕성은 진화한 도덕 감각의 분비물에 지나지 않는다기보다는, (이성의 상호교환성에 뿌리를 둔) 내재적인 논리를 갖고 있을 것이고, 도덕 감각은 그것과 맞물려 진화했다. - 200p (우리의 도덕감각 역시 진화한다. Steven Pinker)

 

루소는 다윈처럼 종의 해부학적 기원을 밝혀내지는 않았지만 해부학적, 신체 구조적, 진화에 따른 의식의 변화를 통하여 인간이 적어도 동물에서 진화했으며, 창조에 의하여 변화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이거나, 설계에 의하여 진화한 모습을 갖게 된 것은 아니고, 인간의 의식 또한 외부환경에 반응하도록 되어 있으며 도덕적 본성은 선천적으로 작용하는 의식의 표현 방법 중에 하나임을 말하는 것 같다.    

인류 역사 속에서 철학과 심리학 분야의 많은 학자들이 밝히려 했던 의식은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철학적인 의미에서 존재에 앞선 의식이란 증명될 수 있는가?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심리학자들에게 의하여 증명되고 있지만 그것이 보편적으로 같은 의미를 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의식은 환영이라는 설명으로 둘러대면 안 된다는 것이 의식이 환영이 아니라고 가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물리적 세계에 있는 그 무엇도 의식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면,

의식은 물리적 세계의 뭔가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의식의 주체인 우리가 물리적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들이 적용되지 않는 뭔가가

우리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경험한다고 인정하는 한,

의식은 딱 그만큼 마음속에 있는 뭔가에 대한 경험 으로 존재해야 할 것이다.

<의식은 다윈주의의 아킬레스건인가?. Nicholas Humphrey>

 

그런데 의식은 경험하지 않은 것을 만들어 낸다.

사람이 꿈을 꾸면서 보인다고 표현하는 그 형상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에 대한 해석.

 

해몽이라는 방법에 있어서,

꿈을 꾼 자와 해몽을 하려는 각자의 의식 발전 상태와 의식의 발달단계에서 얻게 된

언어의 의미와 외부 환경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서로 다른 만큼,

다양한 내용을 표현할 것이지만.

그래도 그 해석의 중심에는 인간의 보편적 경험의 한계에서 벗어난 이해를 요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꿈은 무의식적인 표현을 무한한 개념으로 상상할 수는 있을지라도, 이해하는 방법에는 경험이상의 것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관점이라면 ‘Paley의 시계

그것이 시계라는 경험적 관점을 적용할 때 설계자라는 개념을 대입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황망한 사막이던 울창한 밀림이던 그런 곳에서 당시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뭔가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이 시계라는 환원 복잡한성질의 것임을 안다면

이미 그 관찰자는 환원을 생각한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그 존재에 대한 개념이 이미 그 관찰자의 의식에 환영으로라도 존재한다는 것 아닐까?

현대에서 U.F.O와 같은 형상은 우리의 경험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해를 줄 수 는 없다.

그래서 빛의 반사다, 풍선과 같은 기구다. 외계에서 온 물체다. 지구의 바다에서 사는 또 다른 지구인의 이동 물체이다 와 같은 추측을 하는 것 아닐까?

무엇인지 모르는 물체가 환영으로라도 보였다고 해서 그 무엇을 만든 설계자가 있어야 한다면

우리의 환영을 만드는 의식은 누가 설계한 것일까?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당장 증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종교적인 표상이 되어야 하는가?

             과학이 종교를 대신하지 못한다 해도, 과학은 종교가 개개인의 마음()과 각 사회(문화)에서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 또 엄격한 물질적 견지에서 왜 종교적 믿음(지적 설계자들의 믿음을 포함하여)이 사라지지 않는지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진화생물학에 기초를 둔 심리학의 한 분과인 인지과학의 최신 연구들은 종교와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의식을, 일상적인 일들을 해내기 위해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한 여러 가지 인지. 감정 메커니즘들이 한 곳으로 모인 결과 생긴 부산물로 본다. 175p 종교적 믿음은 어떻게 진화하는가? Scott Atran)

 

그런데 시계론 에서는 한 사물에 대하여 현재라는 시간에 미래의 존재를 알 수 없이 복잡한 것이라는 전제하에,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누군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정하고 그 존재를 신이라고 한다면 말의 순서를 바꿔놓은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 거기에 어떤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떤 것의 원인을 검증 불가능한 초자연적 힘으로 돌리는 반증 불가능한 주장을 하게 되면 자연적 설명들을 계속 찾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우리는 항상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299p<펜실베이니아 중부 미국연방 지방법원 판결문 발췌>

 

             불가능하다고 할 만한 수준을 만들어내는 것에서 우연을 배제한다면, 우리가 알기로 특정 불가능성을 일어나게 할 수 있는 과정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그것은 지적 설계와 자연선택이며, 후자만이 궁극적으로 설명으로 쓰일 수 있다. 자연선택은 지극히 단순한 것에서 시작하여 특정 불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지적 설계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설계자 자신이 특정 불가능성 수준이 매우 높은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지적 설계는 어떤 것에 대한 궁극적 설명도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138p (만약 지적 설계자가 외계인이라면/ Richard Dawkins)

 

그렇게 지적 설계라는 주장은 책의 내용들처럼 상호간의 토론과 검증을 통한 일단의 결론이 없는 주장을 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창조론이라는 주장도 ()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이론(異論)을 수용하지 않는 일단의 주장을

자아의식이 확립되지 않은 미성년들을 대상으로 이런 이론도 있으니 비교 토론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학 과정에 개입시키려 한다는 것은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오만이 American Proud라는 자만에 가려져 신()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미국이 현대라는 개념을 대입시킬 수 있는 가장 오래되는 국가라는 것과

세계전쟁의 승리와 자본주의의 승리를 누리고 있는 중이라는 점 때문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식이 유일한 세계인의 종교관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런 사람들은 미국이 지금껏 해온 과학의 성과를 바래게 하는 것 같다.

 

그렇다 해도 지금 이 시대에는

인류가 수 천년, 아니 수천만 년 전부터 이루어 온 과학적 결과물에 의존하여 살아 왔고,

전쟁에 승리하였으면서도, 그런 수천만 년의 경험이 증명해온 경험을 무시하는 행위를 하려는 것일까?

그들의 종교적 교과서에 쓰여있는 주장에 대한 의문도 아직 증명해 보인 적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말이다. 

 

          

지적 설계를 옹호하는 사람이 적절한 실험이나 계산에 의해,

생물학적 시스템의 지적 설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자세하고 엄밀한 설명을 제공하는,

동료 검토를 거친 논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적 설계는 동료 검토를 요구하는 학술지에 논문을 싣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과학적 연구나 검증을 한적도 없다."

위 판결문 중에서

 

나의 의문은 책의 내용에 비하여 현저히 유치하기 그지 없는 의문일지라도 아직 사라지지 않는다.

창조설에 의하면

우리의 형상대로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그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면

지적 설계론의 입장으로는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형상은 입자를 말하는 것일까?

 

그래서 문자대로 이해하지 말고 그들의 말대로 성령의 힘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부처가 보여준 염화미소를 이해하여 전법을 했다는 가섭(迦葉)의 미소와 뭐가 다를까?

가섭(迦葉)만이 참뜻을 알았던 것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제자들의 이해는 몰이해인 것일까?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종파의 의견은 그들 나름대로의 설()로 자기들끼리 인정하던지 하면 그만 아닌가?

과학의 능력에 무임승차하여 지구상에서 신을 찾지 않고

외계에서 증명하려는 신흥종교단체와 같이 몰염치한 양심을 퍼뜨리려 하지 말고 말이다.

 

종교와 정치 어느 것이 먼저였을까?

루소의 가설에 의한 인간의 발달사를 생각한다면

정치가 먼저이고 종교가 나중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가정에서의 불안감이

정치적 위안보다 종교의 위안으로서 해결된다고 권력자가 불안해 했을 때 협잡이 이루어 졌다고 본다.

서양사에서 종교로 자리잡은 배경은 동양에서의 수용과는 달리 자연스럽지 않았다고 생각해서이다.

                           

종교가 정치와 협잡한 것이 서양의 종교사라면

역사적으로 국가간의 전쟁으로 희생된 사상자의 수는

종교라기보다는 유, , 선이 민속문화적인 인습과 협잡한 동양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지 않을까?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는 그 이기심이,

네가 들어가는 땅의 ~ 주상을 깨뜨리고라는 파괴 성에 대한 의문은 나중으로 돌리더라도

다른 신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의 질투는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의식의 환영을 향한 질투인가?

만약 존재하지 않는 환영이 맞는다면 무엇이 두려워 환영을 깨뜨려야 하는 것일까?

과학적으로 논쟁을 거쳐 증명하지 않는 철학적인 질문을 하지 않고 그런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 책으로는 궁금증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런데 실은 그런 이유들이 이제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내게 시간은 아주 먼 언제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고,

그 끝과 시작을 알려 함은 내가 현재의 시간 위에 있어 뭔가를 지금 확인해야 하는 강박적 개념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려 함에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저들이 아이들에게 어떤 설을 주입시키려 하고 우주의 개념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기에

신국이 되려 하는 이유는 시간에 대한 조급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들의 추앙하는 존재가 무엇이던 간에 인간의 의식밖에 존재함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면

그들이 지금 확인하려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현존에 대한 불안감을 잊고 보상받고자 하는 이기심의 가면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이 신이 아닌 한

여러분은 그 안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큰 개념을 떠올리는 마음을 설계할 수 없다.

 

의식은 무한을 상상할 수 있지만 상상이 모두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시간의 의식대로

- 우주가 의식이 있다고 할 때 시간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는 가정으로라도 

놓아 두는 것이 내가 무위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궁금해할 다름 마음은 없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만들어 놓은 결론에 빙빙 돌아가면서 가정을 진실화하려는 답답함은 없이 읽어 내려간 책이었다.

 

 책의 차례

1.      지적 설계는 왜 과학이론이 아닌가? - 제리 A. 코인

2.      반 과학에 대처하는 과학자들의 자세 - 레너드 서스킨드

3.      지적 설계논자들은 어떻게 대중을 속이는가? - 대니얼 데닛

4.      의식은 다윈주의의 아킬레스건인가? - 니콜라스 험프리

5.      나는 어떻게 인류의 진화 증거를 발견하는가? - 팀 D. 화이트

6.      물에서 뭍으로의 ‘위대한’ 이행 - 닐 슈빈

7.      만약 지적 설계자가 외계인이라면…… - 리처드 도킨스

8.      다윈은 어떻게 창조론자에서 진화론 자로 변신했는가? - 프랭크 J. 설로웨이

9.      종교적 믿음은 어떻게 진화하는가? - 스콧 애트런

10.   우리의 도덕 감각 역시 진화한다 - 스티븐 핑커

11.   우주의 자연법칙도 진화의 결과다 - 리 스몰린

12.   지적 설계에 대한 강력한 반증 - 생물의 자기 조직화 - 스튜어트 A. 카우프만

13.   아무 도움 없이 생명을 진화시키는 우주 컴퓨터 - 세스 로이드

14.   논쟁의 뿌리 - 오해를 낳는 용어들 - 리사 랜들

15.   학교에서 지적 설계론을 가르친다면 어떻게 될까? - 마크 D. 하우저

16.   생태-진화 중심의 대안 교육을 고민하자 - 스콧 D. 샘슨

 

17.   부록_펜실베이니아 중부 미국 연방 지방법원 판결문 발췌

 

1836년에 출판된 어린이 과학책<자연철학에 대한 첫 수업>에 나와 있는 다음의 대화에는 과학적 질문과 종교적 질문이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다

             공을 공기 중으로 던지면 어떻게 되죠?

던진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무엇이 그 공을 움직이게 합니까?

내 팔의 힘입니다.

여러분이 이 힘을 만듭니까?

아닙니다. 신이 만들었습니다.”

-      263p (논쟁의 뿌리 오해를 낳는 용어들/ Lisa Randall)

 

 이 책의 글들은 남의 나라 일이지만

미국인이 되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이는 일부의 사람들이,

미국을 어느 한 분야에서라도 앞서는 것이 그 대상과의 동질성을 갖고자 하는 심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그런 것들 모두가 어쩌면 노예근성 때문이라고 생각되는,

이 땅의 사람들이 지금 이 나라에서 꾸미고자 하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나라를 판 것만이 매국적 행위는 아닐 것이라는 한숨을 만든다.

한국 교과서에서 진화론 내용 삭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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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생각들 - 당대 최고의 석학 110명에게 물었다
존 브록만 엮음, 이영기 옮김 / 갤리온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프랑스 철학자 "한국은 대체 왜… 기이다"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
마르크스의 저작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보다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인 사건을 만들어내는 인간 욕망을 특정한 규범에 구겨 넣는다. 정치 영역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특이성'이다. 인간이 곧장 정치적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정세(conjuncture)의 구조적 효과로서 사건이 생긴다. 마르크스주의의 문제는 혁명과 사건을 인간을 통해 설명한다는 것이다. 사회 변화는 이미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좋은 것을 고르는 게 아니라, 고정관념이나 기성체계를 파괴하고 해체할 때 이뤄진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수적인 질서를 허무는 해체의 운동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에 대한 뚜렷한 전망을 내놓지 못한다는 점에서 재고해야 한다."

 

 

글의 느낌을 이미지로 유추해본다면 이런 생각이라고 하겠다.

 

六祖가 因() 刹幡(풍양찰번)하여 有二僧對論(유이승대론)하되 一云幡動(일운번동)이라 하고 一云風動(일운풍동)이라 하여 往復曾未契理(왕복증미계리)어늘 祖云(조운)하되 不是風動(불시풍동)이요 不是幡動(불시번동)이요 仁者心動(인자심동)이라 한대 二僧(이승)이 悚然(송연)하다..”

非風非幡(비풍비번): 무문관(無門關)29

 

一云幡動(일운번동)이라 하는 것도 맞고 一云風動(일운풍동)이라 하는 것도 맞으며, 그렇다고 실상에서 둘의 논쟁에 대하여 仁者心動(인자심동)이라며 깨우치려 하는 것을 一場漏逗(일장루두)라고 관념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맞다.

내 생각엔 유물론도 아니며 유심론도 아니며 그렇다고 vitalism도 아니고

그냥 시공이 있기에 바람은 불고 기는 흔들리는 것이겠다.

그러면 시간이 흐르는 것은 무엇이 흐르게 하는가? 공간이 있기 때문에….

 

그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때로는 바람이,

때로는 깃발이 각자 때에 따라 움직일 뿐인데

사람만 스스로 그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주어진 의미로 해서 경계를 만들고 적을 만든다.

시공 속의 조건을 동일한 조건으로 보지 않고 각기 그 한 개체로 본다면 그 둘은 자기 일을 할 뿐이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관념을 지금 멈춘 것으로 본다면 바람이 불던 깃발이 흔들리던 할 것으로 보인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시공에 어쩔 수 없음이다.

 

인류의 시간이 언제부터인가를 생각한다면 바람의 흐름을 느낄 수 있을까?

그만큼 긴 시간의 역사를 두고 볼 때

보수적인 질서를 지키려는 쪽이던 사회변화를 이루려는 쪽이던

누가 옳은지를 놓고 다투는 것에 대한 느낌을 말한다면 깃발을 놓고 다투는 선자들의 모습이다.

 

왜 그럴까?

한쪽에서는 질타하고 한쪽은 두둔하고.

지금 당장 어느 쪽이던지 한쪽으로 판가름이 나야만 할 것 같이 사생결단으로 달려든다.

세월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이 이기적인 시간개념을 깨치지 못하고

역사를 지금 완성된 것으로 착각하고 멈추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역사는 지금도 이어갈 뿐이지 마침표를 찍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의 시간이 완성된 것이라면

남는 것은 내리막을 타고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일만 남은 것이라 하겠다.

보수의 관점이던 진보의 관점이던 그들 스스로 후대를 위한다고 말하지만

어느 쪽이 후대에 옳은 것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가?

하지만 굳이 세상은 어느 한쪽에 의하여 움직였다고 한다면 그 한쪽은 어느 쪽일까?

 

             인류는 위험한 생각들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익숙하고 친밀한 것에 기대어 살아가고,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 젖어 있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이 생각들이 애초에는 충격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어제의 위험한 생각들이 오늘에는 정설이 되고, 내일은 진부한 것이 되어 버린다.” 누군가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421p <지식의 끝에서 발견한 위험한 생각들/Richard Dawkins>

 

이 책에서처럼 지동설도

처음에는 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로 당시의 보편적 개념보다는 진보적이었고

새 술은 새 부대에라고 했던 것도 결국 당시의 점령국의 정책에 동화한 생각에 진보적이었으며

유명한 현자들의 명제도 당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은 진보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역사는

그렇게 생각을 바꾸게 한 진보적인 사람들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제 세상이 지금처럼,

변화하는 속도가 빨라져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으며

정보의 취합이 간편해지고 정보의 교환이 동 시간대에 이루어진다면,

그런 진보의 쾌속이 비록 6번째 대 멸종이 되는 계기가 될지라도

상상 속의 개념들이 현실화 되는 날이 점점 더 빨라지는 앞날을 가정한다면

보수가 진보의 속도를 조절하여

사람들이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진부한 생각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나온 역사는

그런 상상처럼 변화를 지향하는 쪽에 의해서만 움직여지지 않았던 것이었을 테이고,

앞으로의 역사가 물리적 시공간을 왜곡할 수 있는 시대가 된다 하여도

그렇게 속도만 내게 되지는 못 할 것이다.

지나온 시간처럼 앞으로도 세상에는 꾸준히 往復曾未契理(왕복증미계리)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변해야 한다는 쪽과 지켜야 한다는 쪽이,

또 그 논쟁에 편승하는 기회적인 종교 지도자들이 툭하면 하는 말.

세상이 망하려고 한다! 세상이 망할 징조다.

 

             연구진은 지구에선 이미 6번째 대규모 멸종이 시작된 징후가 보인다고 주장했다. 조사 결과 지구에 존재했던 5500종이 넘는 포유류 가운데 5억년에 걸쳐 80종이 멸종됐으며, 그나마 남아있는 적지 않은 종이 멸종 위기에 놓였다고 말했다. 바르노스키 교수는비판적으로 현상을 바라봤을 때 이 속도로 멸종이 진행될 경우 300~2200년 안에 지구에 대 멸종이 올 수 있다.”면서지구 온난화와 서식지붕괴, 생물체 감염 등 환경오염은 시기를 더 앞당길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서울신문 2011.03.04)

 

5억년에 걸쳐 80/5500종이 멸종해왔기에 6번째 대규모 멸종이 그보다 훨씬 짧을 것이라는 것은

생물학자의 입장일 테고

핵 겨울이라는 책의 내용처럼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Carl Sagan같은 과학자의 입장은

그보다 더 빠르게 올 수도 있다고 하는 종말을 늦추기 위해

환경과 자연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사회운동.

어쩌면 그런 우려도 刹幡(풍양찰번)아닐까?

멸종이니 환경파괴니 하는 것은 인간들의 걱정이지 시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저 이전의 5번에 걸친 사고와 양상만 다를 뿐

별 관심 없는 지구의 시공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끔 지구는 몸을 흔들어 대지를 바꿔 놓는 것 아닐까? 먼지 털어내듯이 말이다.

종말의 양상에 있어서도 만약 과학자들의 주장이 맞지 않고

종교인들의 주장대로 종말이 온다고 해도 지구의 입장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과 다를 게 무엇일까? 세상의 변화를 어떤 다른 관점으로 생각한다면

동물의 멸종 숫자나 환경의 변화 역시 진화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숫자가 늘어나고 인간들의 서식환경이 반 자연적인 개발로 인해 동물과 식물의 서식지를 침범한다고 해도

인간만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고 동식물도 인간이 파괴한 환경에 적응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고 환경보호가 변화에 완충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만큼,

그런 운동이 의미 없는 일은 아니지만

인간은 인간중심으로 세상을 판단하려 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시간적 변화에 대하여 민감해하는 것 아닐까?.

지나온 역사는 과학의 시대 이후로 계속 점진적인 변화를 해왔음 인데

이제 100년 동안 이룬 것을 10년 만에 이루어낸다고 해서 꼭 파괴적인 결과를 예상하는 일이라고 막아서야 하겠는가라는 생각이다.

이제까지 걱정과 우려의 생각들이 결국은 세상을 지금처럼 변화시켰던 것이라 할 때

사회 변화는 이미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좋은 것을 고르는 게 아니라, 고정관념이나 기성체계를 파괴하고 해체할 때 이뤄진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수적인 질서를 허무는 해체의 운동이다.”

는 것은 흐름을 거스르려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순응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유의 생각이던 간에 경계를 만드는 것이겠지만,

그래서 생기는 적대감도 어쩔 수 없는 변화의 한 분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萬事皆有定(만사개유정)의 관점으로 본다고 해도

굳이 서로간에 죽일 듯이 싸워대는 것은 보여지는 바로는 한쪽이 죽일 듯이고, 한쪽은 반은 무시하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 시간의 흐름에 발버둥치며 멈추고자 하는 몸짓 같아 보인다.

 

하지만 변화를 늦추려 하거나 받아 들이지 않으려 해도

진보해 나아가려는 욕구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주축이라고 할 것이고

세상은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니만큼 앞서 갈 수 밖에 없는 선구자 역할의 주체들은

사회전체가 수용할 수 있는 시간을 남겨주는 것으로 할 만큼 했다고 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와 흡수하는 용량은 비례하여 변화하는 것 같아 보이고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쪽은 기우에 불과하지 않을까?

 

바람이네 깃발이네 하고 떠들어 대는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을 깨우쳐주는 현자가 아닐까?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념만을 제시할 수 밖에 없는 현자라면

그래도 복수와 저주로 협박하는 현자는 아니었으면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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