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위험한 생각들 - 당대 최고의 석학 110명에게 물었다
존 브록만 엮음, 이영기 옮김 / 갤리온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프랑스 철학자 "한국은 대체 왜… 기이하다"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마르크스의 저작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보다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인 사건을 만들어내는 인간 욕망을 특정한 규범에 구겨 넣는다. 정치 영역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특이성'이다. 인간이 곧장 정치적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정세(conjuncture)의 구조적 효과로서 사건이 생긴다. 마르크스주의의 문제는 혁명과 사건을 인간을 통해 설명한다는 것이다. 사회 변화는 이미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좋은 것을 고르는 게 아니라, 고정관념이나 기성체계를 파괴하고 해체할 때 이뤄진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수적인 질서를 허무는 해체의 운동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에 대한 뚜렷한 전망을 내놓지 못한다는 점에서 재고해야 한다."
글의 느낌을 이미지로 유추해본다면 이런 생각이라고 하겠다.
“六祖가 因(인) 風颺刹幡(풍양찰번)하여 有二僧對論(유이승대론)하되 一云幡動(일운번동)이라 하고 一云風動(일운풍동)이라 하여 往復曾未契理(왕복증미계리)어늘 祖云(조운)하되 不是風動(불시풍동)이요 不是幡動(불시번동)이요 仁者心動(인자심동)이라 한대 二僧(이승)이 悚然(송연)하다..”
–非風非幡(비풍비번): 무문관(無門關)29則
一云幡動(일운번동)이라 하는 것도 맞고 一云風動(일운풍동)이라 하는 것도 맞으며, 그렇다고 실상에서 둘의 논쟁에 대하여 仁者心動(인자심동)이라며 깨우치려 하는 것을 一場漏逗(일장루두)라고 관념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맞다.
내 생각엔 유물론도 아니며 유심론도 아니며 그렇다고 vitalism도 아니고
그냥 시공이 있기에 바람은 불고 기는 흔들리는 것이겠다.
그러면 시간이 흐르는 것은 무엇이 흐르게 하는가? 공간이 있기 때문에….
그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때로는 바람이,
때로는 깃발이 각자 때에 따라 움직일 뿐인데
사람만 스스로 그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주어진 의미로 해서 경계를 만들고 적을 만든다.
시공 속의 조건을 동일한 조건으로 보지 않고 각기 그 한 개체로 본다면 그 둘은 자기 일을 할 뿐이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관념을 지금 멈춘 것으로 본다면 바람이 불던 깃발이 흔들리던 할 것으로 보인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시공에 어쩔 수 없음이다.
인류의 시간이 언제부터인가를 생각한다면 바람의 흐름을 느낄 수 있을까?
그만큼 긴 시간의 역사를 두고 볼 때
보수적인 질서를 지키려는 쪽이던 사회변화를 이루려는 쪽이던
누가 옳은지를 놓고 다투는 것에 대한 느낌을 말한다면 깃발을 놓고 다투는 선자들의 모습이다.
왜 그럴까?
한쪽에서는 질타하고 한쪽은 두둔하고.
지금 당장 어느 쪽이던지 한쪽으로 판가름이 나야만 할 것 같이 사생결단으로 달려든다.
세월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이 이기적인 시간개념을 깨치지 못하고
역사를 지금 완성된 것으로 착각하고 멈추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역사는 지금도 이어갈 뿐이지 마침표를 찍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의 시간이 완성된 것이라면
남는 것은 내리막을 타고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일만 남은 것이라 하겠다.
보수의 관점이던 진보의 관점이던 그들 스스로 후대를 위한다고 말하지만
어느 쪽이 후대에 옳은 것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가?
하지만 굳이 세상은 어느 한쪽에 의하여 움직였다고 한다면 그 한쪽은 어느 쪽일까?
인류는 위험한 생각들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익숙하고 친밀한 것에 기대어 살아가고,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 젖어 있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이 생각들이 애초에는 충격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어제의 위험한 생각들이 오늘에는 정설이 되고, 내일은 진부한 것이 되어 버린다.” 누군가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421p <지식의 끝에서 발견한 위험한 생각들/Richard Dawkins>
이 책에서처럼 지동설도
처음에는 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로 당시의 보편적 개념보다는 진보적이었고
‘새 술은 새 부대에’라고 했던 것도 결국 당시의 점령국의 정책에 동화한 생각에 진보적이었으며
유명한 현자들의 명제도 당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은 진보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역사는
그렇게 생각을 바꾸게 한 진보적인 사람들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제 세상이 지금처럼,
변화하는 속도가 빨라져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으며
정보의 취합이 간편해지고 정보의 교환이 동 시간대에 이루어진다면,
그런 진보의 쾌속이 비록 6번째 대 멸종이 되는 계기가 될지라도
상상 속의 개념들이 현실화 되는 날이 점점 더 빨라지는 앞날을 가정한다면
보수가 진보의 속도를 조절하여
사람들이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진부한 생각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나온 역사는
그런 상상처럼 변화를 지향하는 쪽에 의해서만 움직여지지 않았던 것이었을 테이고,
앞으로의 역사가 물리적 시공간을 왜곡할 수 있는 시대가 된다 하여도
그렇게 속도만 내게 되지는 못 할 것이다.
지나온 시간처럼 앞으로도 세상에는 꾸준히 往復曾未契理(왕복증미계리)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변해야 한다는 쪽과 지켜야 한다는 쪽이,
또 그 논쟁에 편승하는 기회적인 종교 지도자들이 툭하면 하는 말.
세상이 망하려고 한다! 세상이 망할 징조다.
“연구진은 지구에선 이미 6번째 대규모 멸종이 시작된 징후가 보인다고 주장했다. 조사 결과 지구에 존재했던 5500종이 넘는 포유류 가운데 5억년에 걸쳐 80종이 멸종됐으며, 그나마 남아있는 적지 않은 종이 멸종 위기에 놓였다고 말했다. 바르노스키 교수는 “비판적으로 현상을 바라봤을 때 이 속도로 멸종이 진행될 경우 300~2200년 안에 지구에 대 멸종이 올 수 있다.”면서 “지구 온난화와 서식지붕괴, 생물체 감염 등 환경오염은 시기를 더 앞당길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서울신문 2011.03.04)
5억년에 걸쳐 80/5500종이 멸종해왔기에 6번째 대규모 멸종이 그보다 훨씬 짧을 것이라는 것은
생물학자의 입장일 테고
“핵 겨울”이라는 책의 내용처럼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Carl Sagan같은 과학자의 입장은
그보다 더 빠르게 올 수도 있다고 하는 종말을 늦추기 위해
환경과 자연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사회운동.
어쩌면 그런 우려도 風颺刹幡(풍양찰번)아닐까?
멸종이니 환경파괴니 하는 것은 인간들의 걱정이지 시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저 이전의 5번에 걸친 사고와 양상만 다를 뿐
별 관심 없는 지구의 시공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끔 지구는 몸을 흔들어 대지를 바꿔 놓는 것 아닐까? 먼지 털어내듯이 말이다.
종말의 양상에 있어서도 만약 과학자들의 주장이 맞지 않고
종교인들의 주장대로 종말이 온다고 해도 지구의 입장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과 다를 게 무엇일까? 세상의 변화를 어떤 다른 관점으로 생각한다면
동물의 멸종 숫자나 환경의 변화 역시 진화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숫자가 늘어나고 인간들의 서식환경이 반 자연적인 개발로 인해 동물과 식물의 서식지를 침범한다고 해도
인간만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고 동식물도 인간이 파괴한 환경에 적응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고 환경보호가 변화에 완충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만큼,
그런 운동이 의미 없는 일은 아니지만
인간은 인간중심으로 세상을 판단하려 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시간적 변화에 대하여 민감해하는 것 아닐까?.
지나온 역사는 과학의 시대 이후로 계속 점진적인 변화를 해왔음 인데
이제 100년 동안 이룬 것을 10년 만에 이루어낸다고 해서 꼭 파괴적인 결과를 예상하는 일이라고 막아서야 하겠는가라는 생각이다.
이제까지 걱정과 우려의 생각들이 결국은 세상을 지금처럼 변화시켰던 것이라 할 때
“사회 변화는 이미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좋은 것을 고르는 게 아니라, 고정관념이나 기성체계를 파괴하고 해체할 때 이뤄진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수적인 질서를 허무는 해체의 운동이다.”
는 것은 흐름을 거스르려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순응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유의 생각이던 간에 경계를 만드는 것이겠지만,
그래서 생기는 적대감도 어쩔 수 없는 변화의 한 분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萬事皆有定(만사개유정)의 관점으로 본다고 해도
굳이 서로간에 죽일 듯이 싸워대는 것은 – 보여지는 바로는 한쪽이 죽일 듯이고, 한쪽은 반은 무시하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 시간의 흐름에 발버둥치며 멈추고자 하는 몸짓 같아 보인다.
하지만 변화를 늦추려 하거나 받아 들이지 않으려 해도
진보해 나아가려는 욕구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주축이라고 할 것이고
세상은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니만큼 앞서 갈 수 밖에 없는 선구자 역할의 주체들은
사회전체가 수용할 수 있는 시간을 남겨주는 것으로 할 만큼 했다고 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와 흡수하는 용량은 비례하여 변화하는 것 같아 보이고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쪽은 기우에 불과하지 않을까?
바람이네 깃발이네 하고 떠들어 대는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을 깨우쳐주는 현자가 아닐까?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념만을 제시할 수 밖에 없는 현자라면
그래도 복수와 저주로 협박하는 현자는 아니었으면 좋겠고..